어제 여고동창을 만났습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 무지 잘 하고(나는 날라리였지만 내 친구들은 모두 착실한 공부파였음),
착하고 어진 천사표 친구였습니다. 의대를 들어갔다가 도중에 자퇴하고 영문과 편입하여 영어선생 하다가 수녀가 되려 했으나
부모님 반대로 혼자 살던 중 이혼한 남성의 재취로 들어갔지요. 나이 어린 전실 딸이 둘이나 딸린 남자였습니다.(도대채 왜 그런 선택을?)
그 남편의 집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안이지만 친구의 남편은 서열상으로도 막내이고 지위도 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범했지요.
내 친구는 그 집안에 들어가 딸과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1남3녀를 키운 셈이죠. 거기에 시엄니까지 모시고.
한데 남편은 무지 사치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가 하면 이 친구는 거의 노예처럼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게다가 시엄니와 남편에게 대우도 못받으면서요.
나같았으면 벌써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내 새끼 델꼬 나와 영어 과외라도 하면서 살아갔겠지요.
그 친구는 묵묵히 순한 양처럼 살면서 내 속을 미어터지게 했습니다. 외출의 자유도 없이 오직 집안 일만 묵묵히 하면서요.
친구의 아들은 서울대 건축과 5학년(건축과는 1년 더 많다고 함)으로 , 장학생입니다. 군대도 나왔고 인물도 아주 준수해요.
문제는 그 잘난 아들이 자꾸 죽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서울 집을 세주고 멀리 태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며칠 전 아들 문제로 서울에 왔습니다. 그리곤 어제 저에게 전화를 했던 거지요. 아들이 자살할까 걱정된다고. 서울대가서 아들 문제를 상담해야겠다고. 친구의 목소리는 땅에 꺼질 듯이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얘, 너 밥은 먹었니?" 물었더니 전날부터 어제까지 거의 먹은 게 없다는 거였습니다.
나도 방화동에서 돌아와 몸이 파김치였지만, 무조건 친구를 만나자고 하엿습니다.
약속장소에서 친구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더워지며 콧마루가 시큰하더군요. 자글자글 늙은 얼굴, 거뭇거뭇한 기미...
친구의 짐가방을 내가 지고 인근 국밥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밥이 나오는 동안 친구의 형제들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의 친정아버지는 의사였는데, 환자들 치료만 해줄줄 알지 돈은 받을 줄 모르는 분이었지요.
환자가 쌀을 퍼주면 쌀을 받고 채소를 주면 채소를 받아오면서.
시골에서 의사를 하셨거든요. 윈래는 엣날에 국비장학생으로 외국유학까지 한 분이었는데,
아버지가 치료해준 환자 중에 간첩이 있엇던 게 들어나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의 지경을 헤매다가 겨우 몸을 회복한 뒤 시골로 내려가
평생을 시골 의사로 사셨습니다. 아버지가 수재여서 그런가 친구의 형제들은 모두 공부도 잘하고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당연히 학벌도 좋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형제들과 그의 자식들이 하나같이 불우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대체 왜?)
내 친구야 너무 바보같이 착해서그렇다치고라도, 다른 형제들은 야무진 데도 있고 모두 똘똘한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하나같이
불행할까요? 친구 남동생 하나는 서울고 서울대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하다가 한겨레 기자로 옮겨 갔는데, 퇴직하고 언론사에 근무하다가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모두 날렸다고 하더군요.
친구는 밥이 들어가자 비로소 허기가 느껴지는지, 나는 반이나 남긴 국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스님의 공양 그릇처럼 비웠더라구요.
그 친구의 남편은 연금 백여만원으로 살아가는 주제에 재벌행세를 하며 산답니다. 물론 돈이 없으니 아파트 저당 잡혀 그 돈으로
사치를 하는 거지요. 남편은 죽을 때까지 재산을 한 푼 안남기도 다 쓰고 죽겠다고 한다나요. 그러면서 한마디 말리면 백마디로 찍어 누르고, 다시 말하면 폭력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하루는 그 친구가 일하다가 넘어져 "뼈가 부서지는 것 같다"했더니, 그 망할넘의 남편이,
"그깟 뼈좀 부러지면 어때서?"하며 야유를 하더라나요.
나는 어제 너무 분통이 터져 , 밥을 먹고 있는 친구에게 그예 한 마디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얘, 나는 전엔 네 남편을 미워했는데, 이제 나는 네 남편에겐 관심없고, 네가 원망스럽다. 왜 그러고 살아? 대체 왜? 왜? 왜?"
그래놓곤 찬물만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아들은 엄마가 온 것을 알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친구는 아들의 빈방에서 끼니도 거른채
있을 것이 뻔하여,
"너 집에 들어갈 때 '본죽' 같은 거 사들고 가서 죽이라도 먹어라. 지금 너는 소화도 잘 안되니 죽을 먹는 게 좋을 거야.
절대 굶지 말고 기운 내야 네 아들 살린다."며 한마디 잔소리를 하고는 지갑을 털어 잡히는대로 쥐어주었습니다. 친구는 펄쩍을 뛰는데, 나는 또 그 모습이 애처러워 벌컥 화를 내면서
"나도 지금 아파죽겠어. 나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받아둬."하고는 곁을 떠나왔습니다.
너무 속이 아파 눈물만 나오더군요.
고등학교 시절, 내가 정음사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 못사는 걸 알고는,
그 친구가 나 몰래 그 책 上下권을 사다가 내 책상에 놓어주었던 일이 있었답니다. 자기도 어려우면서 그런 일을 한 겁니다.
서가 정리를 하며 엣날 책은 오래 전에 다 버렸지만, 그 책만은 지금도 내 책장에 꽂혀있지요. 활자가 작아 이젠 읽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도대체 그 친구는 왜 그러고 사는지? 왜 친구의 집안엔 불행만 덮치는지? 왜?~~~~~
첫댓글 참 안타깝네요...
그렇게 착한 분이 수도자가 되었다면 어둠 속을 헤매는 많은 영혼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삶을 살으셨을텐데요...
이따금 그 친구가 수도자가 되지 않아 시련을 주시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글쎄 하느님이 그렇게 복수나 하는 쪼다는 아니실 것 같아 삶의 미스테리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 미스테리를 세밀히 분석하면 뭔가가 나오긴 하겠지요.
한데 그 집안 형제들과 그의 자녀들이 거의 다 불행한 건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시골 의사로 슈바이처처럼 살다 간 분인데, 대체 왜 그런 일이?
@민혜 그 친구의 딸에게 친구의 둘째 시아주버니(전 삼성**회장)가 2억을 물려주며 나중에 재산 정리하면 더 주겠다 하셨대요. 근데 그 딸은 몇 년 전 시집을 가며 그 돈을 자기 아버지 빚갚으라고 몽땅 주고 갔어요. 자기 아버지가 극반대하는 평범한 은행원과 결혼한 그 딸은 지 엄마를 닮아 그런지 자기는 1억 대출받아 빌라 세들어 살고 있죠. 나는 넘 속상해서 1억만 아버지 줘도 효성이 하늘에 닿을 일인데, 왜 밑빠진 독같은 아버지에게 2억을 다주었나 모르겠다며 땅을 쳤어요.착한 것도 유전인지 이쯤 되면 기가 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