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 「 대학과 선교 」 | 제38집 / KCI등재 2018. 12
성서와 종교개혁들 *
소형근 (서울신학대학교, 구약학)
【국문초록】
본 논문은 구약성서의 포로 이전 신명기 개혁운동과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의 개혁이 ‘토라’에 근거를 두고 진행되었으며, 또한 중세 말 체코의 얀 후스와 독일의 마틴 루터의 개혁이 모두 ‘성서’에 근거를 두고 개혁이 진행되 었음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신명기 개혁운동을 주도했던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제의중앙화’와 이방신상들을 제거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종 교적 총화를 이루고자 했으며, 포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오경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정화작업을 통해 유대교의 초기 기틀을 마련했다. 얀 후스와 마틴 루터는 성서를 기초로 한 개혁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왜곡된 전통을 바로잡고, 성서를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구약성서의 개혁들과 중세 말의 종교개혁들은 ‘본질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이 ‘본질’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였다.
주제어: 토라, 성서, 제의중앙화, 신명기 개혁운동, 종교개혁
----------------------------각 주-------------------------
* 이 연구는 2018년도 서울신학대학교의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한 연구임.
I. 서 론
‘개혁’(reform)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사회상의 구(舊)체제를 합법 적·점진적 절차를 밟아 고쳐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1) 그러나 ‘개혁’은 기존체제의 붕괴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사회의 모순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혁명’과 다르다. ‘개혁’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첫째는 개혁에 대한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시대적 아픔에 대 한 개혁자의 ‘저항의식’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개혁자의 흔들리지 않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개혁’은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개혁’을 시도했던 구약성서의 신명기 개혁운동과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 개혁운동, 그리고 중세 말에 있었던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을 다루고자 한다. 신명기 개혁운동은 유다왕 히스기야 시대로부터 요시야 시대까지 진행되었던 유다 왕국의 개혁 운동이었으며, 또한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 개혁운동은 본래 페르시아의 관리였던 에스라 2) 와 느헤미야 3) 가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의 야웨신앙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끌 었던 운동이었다. 또한 중세 말에 등장한 체코의 얀 후스(Jan Hus)와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중세 가톨릭의 부패상을 폭로하면서 성서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전통을 폐기하고 성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 는 개혁을 단행했다. 본 논문에서는 개혁운동의 핵심이 되는 종교개혁을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며, 이 종교개혁들은 어떤 명분과 어떤 근거로 이루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각 주-------------------------
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8037&cid=40942&categoryId=31611
(2018년 10월 23일 검색).
2) 우리말 개역개정에서 에스라의 직책을 ‘제사장’ 겸 ‘학자’로 번역하고 있다(스 7:6, 11, 12, 21). 그러나 ‘학자’에 해당하는 아람어(saper)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라는 의미 외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왕의 수신과 발신의 모든 서신들을 관장하는 왕의 비서와도 같은 높은 지위의 관리였다. 참고. H. Niehr, “ רפס ” (ThWAT V) (Stuttgart: W. Kohlhammer, 1986), 921-929.
3) 페르시아에서 느헤미야의 직책은 ‘술관원’, 즉 히브리어 ‘마쉬케’(mashkeh)였다(느 1:11). 윌리암슨은 ‘마쉬케’를 왕과 비공식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참고. H. G. M. 윌리암슨/조호진 옮김, 에스라-느헤미야 (WBC 16) (서울: 솔로몬, 2008), 349.
II. 신명기 개혁운동
‘신명기 개혁운동’(Die deuteronomische Reformbewegung)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던 사람은 독일학자 로타 페어리트(L. Perlitt)였다. 페어리트는 그 동안 신명기 개혁운동을 ‘요시야의 개혁’이라는 틀 안 에서만 이해하던 것을 요시야의 증조부인 히스기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 가 기원전 8세기 히스기야 시대부터 ‘신명기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이해했다. 4) ‘신명기 개혁운동’은 반아시리아 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이 개혁운동은 힘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고,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 에 근거한 사회통합을 추구했으며, 양극화 된 이스라엘 사회를 극복하고 형제애로 하나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5)
1. 히스기야 개혁
북 왕국 사마리아가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에게 함락되는 시점(기원전 722/1년)에 남 왕국 유다 왕 아하스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은 아시리아와 유다 사이의 불평등 조약인 종주권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아하스는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시리아 왕들 과 이런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값비싼 비용을 지불했었다(왕하 16:8).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랐던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아시리아 제국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어떻게 하든지 아시리아의 굴레로부터 벗어 나고자 노력했었다. 반아시리아 개혁의 일환으로 히스기야 왕은 군사력을 증대시키고(왕하 20:13), 말과 마차로 무장한 엘리트 부대로 왕실 근위대를 창설하여(왕하 18:23) 군대 지휘관을 세웠으며, 성문 앞 광장에 서 유다 백성들을 격려했다(대하 32:6-8). 또한 히스기야는 무너진 성벽 을 보수하기 시작했고(대하 32:5), 기혼의 윗샘물을 막고, 그 물이 다윗 성 안으로 흘러가도록 터널을 만들었다(왕하 20:20; 대하 32:30). 그러나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를 점령하던 아시리아 의 공격력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강화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히스기야는 모든 유다 백성의 결속을 이끌어내기 위해 종교의 영역에서도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6)
----------------------------각 주-------------------------
4) L. Perlitt, “Israel und V ö lker”, G. Liedke (Hg.), Frieden-Bibel-Kirche (Studien zur Friedensforschung 9) (Stuttgart: Klett Verlag, 1972), 17-64; ders., “Motive und Schichten der Landtheologie im Deuteronomium”, G. Strecker (Hg.), Das Land Israel in biblischer Zeit , Jerusalem-Symposium 1981 (G ö 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3), 46-58.
5) 한동구, 신명기 개혁운동의 역사: 열왕기하 16-23장 주석 (서울: 도서출판 B&A,2007), 13.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을 위해 지역 성소에서 드리던 예배를 중단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을 인정했다(왕하 18:22). 즉, 유다 각 성읍의 지역 제사장들이 드리던 예배 장소들을 폐쇄하고, 오로지 예 루살렘 성전 예배만을 인정하는 제의중앙화(Kultzentralisation)를 통해 예배를 통일시켰던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예배장소의 단일화 시도는 히스기야 왕이 처음이었다. 지역 예배처소 폐쇄는 지역 제사장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지역 제사장들의 극렬한 반발이 예상되었던 사항 이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의 이러한 개혁 의지는 어떤 명분과 근거로부터 시발된 것일까? 구약성서의 법전에서 제의중앙화를 다루고 있는 본문은 신명기 법전(12-26장)이며, 신명기 법전의 첫 번째 주제가 바로 제 의중앙화이다.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신 12:5, 11, 14, 18, 21, 26)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 히스기야가 신명기 법전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많은 지역 제사장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개혁을 단행했던 것은 히스기야에게 타당한 법적 근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명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torah)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히스기야는 신실한 야웨 신앙자였다. 지역 성소 제거를 명령한 히스기야는 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없앴다.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 없애는 것’ 또한 신명기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이다(신 7:5; 12:3; 16:21-22). 따라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신명기 법전’에 근거한 개혁이 었음을 알 수 있다.
----------------------------각 주-------------------------
6)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 구약성서 열왕기하 18장 4절에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4).
2. 요시야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은 아시리아의 강력한 군주 산헤립의 침공으로 무산 되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 14년(기원전 701년) 7) 에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 전 지역을 점령했다(왕하 18:13). 산헤립은 자신 의 승전기념비에 유다의 46개 성벽이 있는 성읍들과 수많은 마을들을 점령했고, 젊고, 늙은 남녀 포로 200,150명을 앗수르 지역으로 끌고 갔으며, 히스기야 왕을 죄수로 선포하고,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 처럼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8) 이 전쟁으로 인해 히스기야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을 지불해야만 했고(왕하 18:14), 그 외에도 엄청난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낫세 왕은 아시리아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충성스런 봉신왕이 되었다. 9) 므낫세는 아시리아에 대한 전쟁 포기와 더불어 아버지 히스기야 시대에 헐어버린 지역 예배 처소들을 다시 세웠으며, 바알 을 위한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한 가 증한 일들을 다시 시작했다(왕하 21:2-3). 므낫세의 아들 아몬 또한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므낫세가 섬기던 우상을 섬기므로(왕 하 21:21) 아몬의 신복이 아몬을 궁중에서 암살했다(왕하 21:23). 아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다. 요시야 왕은 아버지 아몬 과 할아버지 므낫세의 통치방식과 달리 증조부 히스기야의 개혁방식을 이어가게 되었다. 요시야가 반아시리아 개혁을 추진했던 선대의 히스기야 정책을 이어갔다는 증거는 몰락해 가는 아시리아를 돕고자 북진(北 進)했던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 대항했던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왕하 23:29-30). 10) 파라오 느고는 신흥강대국 바빌론을 견제하기 위해서 쇠락 해가는 아시리아를 지원하려고 유다 지역을 관통하는 북진을 계획했다. 그러나 요시야는 반아시리아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 파라오 느고의 행렬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이를 저지하던 요시야는 므깃도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왕하 23:29).
----------------------------각 주-------------------------
7) 구약성서 열왕기하 18:13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은 절대연대로 기원전 701년 에 해당한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책을 참고하라. 에드윈 R. 딜레/한정건 옮김, 히브리 왕들의 연대기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89-106.
8) W. W. Hallo, “Sennacherib’s Siege of Jerusalem” in: The Context of Scripture II (Leiden:
Brill, 2000), 302-303.
9) 한동구, 신명기 , 90.
10) 열왕기하 23:29이 우리말 성서 개역개정에서는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이집트 파라오 느고가 아시리아 왕을 도와 신흥 갈대아 왕 나보폴라사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성서에는 요시야 왕의 반아시리아적 개혁운동이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고고학에서는 예루살렘 옛도시의 남서쪽 언덕에 쌓았던 성벽들이 요시야가 아시리아를 견제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축했다고 보고 있다. 11) 그러나 요시야 또한 히스기야 왕과 마찬가지로 신명기 개혁운동을 정치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단행했다. 요시야 통치 18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는 중에 ‘율법책’이 발견된다(왕하 22:8). 이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이 가져와 낭독하자 요시야는 자신의 옷을 찢는다. 그러나 여예언자 훌다는 이 율법책에 기록된 재앙이 요시야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다(왕하 22:20). 이에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유다 모든 사람을 모으고,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대로 따를 것을 명령하면서(왕하 23:2-3) 이 ‘율법책’을 토대로 개혁에 착수한다. 요시야의 첫 번째 개혁은 ‘혼합종교의 타파’였다. 요시야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해 만든 모든 그릇들을 내어다가 불사르게 했다(왕하 23:4). 이스라엘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던 사사시대부터였으며(삿 3:7; 6:25 등), 신명기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아세라 숭배 및 제의 대상물로써 아세라 상 (像)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12) 요시야는 이 런 혼합종교의 관행을 깨뜨리고 야웨종교의 정화작업에 착수했다. 요시야의 두 번째 개혁은 ‘제사장에 대한 개혁’이었다. 요시야는 유다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고(왕하 23:5), 일부 산당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불러 무교병만 먹게 하고 제단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했으며(왕하 23:9), 또 일부 산당 제사장들을 제단 위에서 죽이도록 명령했다(왕하 23:20). 히브리어 성서는 이들을 ‘케마림’(kemarim)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아시리아 종교에도 관여했던 자들로 본다. 13)
----------------------------각 주-------------------------
11) E. Otto, Jerusalem - Die Geschichte der Heiligen Stadt: Von den Anfängen bis zur
Kreuzfahrerzeit (UT 308) (Stuttgart: Kohlhammer, 1980), 78.
12) S. M. Olyan, Asherah and the Cult of Yahweh in Israel (SBLMS 34), (Atlanta: Scholars Press, 1988), 73. 쿤틸레트 아주르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명문에는 ‘야웨와 그 의 아세라’를 통해 축복하는 내용이 나온다. 참고. 강승일, “야훼 하나님의 아내?,” 「 구 약논단 」 40(2011), 123-144; 김 준, “주전 8세기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적 실체가 없는 여신 아세라와 쿤틸렛 아주르드의 ‘야웨와 그의 아세라’,” 「 구약논단 」 69(2018), 354-386.
요시야의 세 번째 개혁은 ‘제의중앙화’이다. 요시야가 지역 산당들을 헐고, 지역 산당에서 분향하던 제사장들을 추방하거나, 죽였던 이유는 이후로 제의는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요시야는 개혁을 모두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유월 절을 지켰다(왕하 23:20-23). 이런 요시야를 신명기 사가는 최고의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즉, 요시야와 같이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야웨께 돌이킨(shub)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요시야 후에도 없었다고 말한 다(왕하 23:25). 그렇다면 요시야가 추진했던 개혁의 내용들은 어떤 명 분과 근거에서 나온 것일까? 요시야 개혁의 주제들은 모두 다 구약성서 신명기에 근거하고 있다. 혼합종교를 용납하지 말아야 하고(신 7:5; 12:3; 16:21; 17:3), 혼합종교를 추종하거나,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쫓아내거나 멀리해야 하며(신 18:9-14),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들을 헐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만 예배드려야 한다(신 7:5; 12:2-3)는 내용은 모두 신명기를 기초로 한 개혁이었다. 결국 신명기 개혁운동을 이끌었던 유다의 두 왕,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에 근거한 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각 주-------------------------
13) 한동구, 신명기 , 159; 참고. H. Spieckermann, Juda unter Assur in der Sargonidenzeit
(FRLANT 129), (G ö 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2), 85.
3. 소결
기원전 8세기 히스기야의 개혁과 기원전 7세기 요시야의 개혁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들은 신명기 개혁운동에 앞장선 유다의 왕들이었으며, 이들은 정치적 개혁운동 뿐만 아니라, 제의적인 개혁을 통해 온 백성의 총화(總和)를 꾀하려 했다. 예를 들면,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공통적으로 ‘제의중앙화’를 통해 지역 산당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에 서만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으며, 이러한 개혁의 일환으로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과 같은 이방 신상들을 찍어 없애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 런데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이런 개혁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토라’를 통해 자신들의 통치철학을 펼쳤고, 반 아시리아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종교개혁에 활용한 토라는 신명기 법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III. 포로 이후 공동체 개혁운동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2세(기원전 605-562년)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왕하 25:8-12).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빌론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하고,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2세가 바빌론을 정복 할 때까지 바빌론 여러 지역에 흩어져 포로생활을 이어갔다. 14)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바빌론을 점령한 후 기원전 538년에 칙령을 내려 바빌론에 끌려왔던 포로민들을 자국 영토로 되돌아가도록 허락했다. 15) 이 칙령에 근거하여 구약성서에는 네 차례에 걸친 귀환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 구약성서의 보도에 따라 시대적으로 나열하면 세스바살 그룹, 스룹바벨 그룹, 에스라 그룹, 느헤미야 그룹 순서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그룹은 바빌론에서 돌아온 자들을 대상으로 유다 공동체의 개혁을 단행 했던 두 지도자 에스라와 느헤미야이다. 이 두 사람은 돌아온 귀환 공동 체를 대상으로 공동체 정화작업을 착수하게 되었고, ‘토라’에서 벗어나 있는 그릇된 관행들을 정비해나갔다. 이들의 개혁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각 주-------------------------
14) 바빌론에 강제이주 당한 유다 사람들은 바빌론, 니푸르, 델아빕,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앗단, 임멜, 가시뱌 등지에서 흩어져 살았다. 참고. 조셉 블렌킨소프/소형근 옮김, 유대교의 기원: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6), 169, 각 주 1번.
1. 에스라 개혁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시대에 제사장이자 서기관의 신분이었던 에스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방문한다(스 7:7-8). 에스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크게 네 가지였다. 16) 첫째는 야웨의 율법 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 고(스 7:10), 둘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펴 페르시아 왕실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스 7:14). 셋째는 에스라와 그의 동료들이 바빌론에서 가져온 예물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전달하기 위함이었으며(스 7:15-20), 넷째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으로 삼기 위함이었다(스 7:25).
----------------------------각 주-------------------------
15) 구약성서에는 고레스 칙령과 관련하여 간략하지만 에스라 1장 2-4절(히브리어 기록)과 에스라 6장 3-5절(아람어 기록)에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J. Hamatta, “The Literary Pattern of the Babylonian Edict of Cyrus”, Acta Antiqua Academiae Scientiarum Hungaricae 19 (1971), 217-231; P. Briant,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 trans. P. T. Daniels (Winona Lake: Eisenbrauns, 2002), 32-33; 이종근, “고레스 신탁과 고레스 실린더”, 「 구약논단 」 48(2013), 128-166; 박종수, “고레스 찬가(이사야 44:24-55:8)”, 「 구약논단 」 2(1996), 80-104.
16) 노세영 엮음, 성서·이스라엘 그리고 경건 (권혁승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부천: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7), 182-183.
이런 미션을 부여받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와서 자신의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기가 막혀 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유다 공동체의 골라(golah) 17) 중에 이 방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손들을 섞이게 한 일 때문이었다(스 9:2). 엄밀하게 말하면, 바빌론 포로로 인해 이스라 엘 백성들은 원치 않게도 세계 문화와 세계 문명의 중심지인 바빌론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들은 바빌론의 거대한 건축물들에 압도당했고, 마르 둑(Marduk) 신전의 웅장함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또한 이들은 과거 유 다 땅에서는 땅을 소유했던 지주의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포로민의 신분으로 바빌론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소작농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론에 온 이스라엘인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방인들과 결혼도, 이방인들과 협력하는 경제활동도 불사할 수밖에 없 었다. 18)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인들은 단순 노동에 참여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이후 높은 지위에 올라 정치에도 참여했다. 19) 그러나 이들이 바빌론에서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이방인과 결탁은 바빌론에서 생활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을 마친 후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면서 이방인과 결혼문제가 골라 공동체 내부에서 개혁의 핵심주제가 되어 버렸다.
----------------------------각 주-------------------------
17) 히브리어 ‘골라’는 우리말 ‘포로’, ‘포로민’이라는 뜻이지만 바빌론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의 후손으로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을 의미하는 ‘귀환자’라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18) 바빌론 지역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황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E. Ephal, “The Western Minorities in Babylonia in the 6th-5th Centuries B.C.: Maintenance and Cohesion”, Or 47(1978) 74-90; M. A. Dandamaev, “Babylonia in the Persian Age”, CHJ 1 (1984), 326-342.
19) 라이너 알베르츠/강성열 옮김, 이스라엘 종교사 II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2004), 15-17.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는 그의 지지그룹인 ‘하레딤’( ḥ aredim) 20) 과 함께 혼합결혼한 자들 111명을 색출했고, 이들에게 이방여인과 결혼관계 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스 10:10-11). 에스라는 지금 아무런 후속대책 없이 가정해체라는 강력한 개혁요청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에스라가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에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시행할 수 있었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신명기 7장에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의 아들들이나 딸들과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나온다(1-4절). 그런데 바 빌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유다 공동체에 유행처럼 번졌던 것들 중에 하나는 이방인들과 결혼이었다. 이방인들 중에는 이스라엘화 된 이방인 ‘게르’(ger)가 있었는데, 이 ‘게르’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 법을 지키며, 율 법을 준수하는 이스라엘화 된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노크리’(nokri)는 비이스라엘화 된 이방인으로, 이들은 거룩한 골라 공동체를 위협하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에스라는 개혁을 통해 ‘거룩한 씨’(스 9:2)를 보존하기 위해 이방인 ‘노크리’를 색출하여 이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21) 물론 이방인과 결혼한 가정에 대해 결혼파기를 요구하는 규정이 신명기에는 없지만, 에스라는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에 돌아온 골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신명기 규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적용시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에스라는 ‘엄격하고, 과격한 율법주의자’인 셈이다. 에스라와 그의 지지그룹인 ‘하레딤’은 신명기의 가르침과 에스겔 40-48장 의 성전법 사상을 잘 알던 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열성분자들이었고, 또한 이들은 세상과 구별된 그룹이었으며, 특히 제의적으로는 외부 유대인 그룹이나, 이방인 그룹과 구별되기를 원했던 자들이었다. 22)
----------------------------각 주-------------------------
20) ‘하레딤’은 우리말로 ‘떠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종교적 감정이 이들 그룹의 이름이 된 경우이다. 윌리암슨은 이 ‘하레딤’이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 내에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자들로 이해했고, 블레킨소프는 ‘하레딤’을 제의적으로 자기 정결을 목적으로 하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이해했다. ‘하레딤’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소형근, “역사적 에스라와 그의 지지 그룹 ‘하레딤’,” 「 성경원문연구 」 35(2014), 70-86; 윌리암슨 /조호진 옮김, 에스라-느헤미야 (WBC 16) (서울: 솔로몬, 2008), 287; 조셉 블렌킨소 프/소형근 옮김, 유대교, 128-129.
21)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소형근, “역대기 역사서에 나타난 이방인 이
해,” 「 구약논단 」 44(2012), 158-177.
2. 느헤미야 개혁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의 총독직을 수행했던(느 6:14) 느헤미야는 두 가지 사명을 가 지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왔다. 첫째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기 위함이었고(느 2:5),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 과 자신이 들어가 살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느 2:8). 이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하게 되었다(느 6:15). 23)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공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적들이 성벽공사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먼저 외부의 적들로는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 산발랏과 암몬 지역의 총독 도비야와 아라비야 지역의 총독 게셈이 있었으며, 그 밖에 아스돗 지역 사람들이 대적으로 등장한다(느 2:19; 4:7). 이에 비해 내부 의 적들 중에는 제사장들과 귀족들과 민장들(느 6:10-12, 17-19)이 있었고, 유다 공동체의 환경 또한 성벽공사에 방해요소가 되었다. 성벽을 건축하는 동안 유다의 민초들은 가난과 싸워야 했고, 굶주림을 이겨내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하여 자녀를 위해 양식을 얻어먹어야만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혔으며, 또 어떤 이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었고, 또 어떤 이들은 땅이 이미 저당 잡혔기 때문에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만 했다(느 5:1-5).
----------------------------각 주-------------------------
22) 조셉 블렌킨소프/소형근 옮김, 유대교 , 129.
23) 요세푸스의 글에 따르면 느헤미야 시대 성벽공사가 2년 4개월 만에 끝났다고 일러준다. 구약성서 보도가 정확하다면 성벽의 파괴 정도가 미미한 수준이었을 것이고, 요세푸스의 자료가 신빙성이 있다면 성벽파괴 정도가 심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총독 느헤미야는 귀족들과 민장들이 형제들로부터 “높은 이자”를 받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 꾸짖었다(느 5:7). 히브리어 ‘마샤’(ma- sha)는 ‘고리대금업’을 의미한다. 24) 구약성서 오경에서는 이스라엘 동족 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레 25:35-37; 신 23:19-20). 그런데 이런 이자금지법을 어기고 이들은 가난한 동족 이스라엘인들에게 이자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개혁을 단행했다. 총독 느헤미야는 구약성서의 레위기와 신명기의 법대로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되며,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주라고 촉구했다(느 5:10). 총독의 이러한 명령대로 귀족들과 민장들은 받았던 이자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었고(느 5:12), 느헤미야는 이 개혁이 지속되도록 제사장들 앞에서 이들로부터 맹세를 받아냈다(느 5:13).
느헤미야 5장이 총독 느헤미야의 경제 분야에 대한 첫 번째 개혁이었다고 한다면, 25) 느헤미야 13장은 느헤미야의 두 번째 개혁으로 유다 공동체의 정화작업을 목적으로 하는 개혁이었다.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13장에서 전체 다섯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다. 하나님의 총회에서 이방인(암몬과 모압 사람)을 축출했으며(1-3절), 느헤미야의 정적 도비 야를 성전 숙소에서 쫓아냈고(4-9절), 레위 사람의 처우개선을 위해 십일조 징수명령을 내렸으며(10-14절), 안식일에 각양 물건을 파는 자들을 경계하여 안식일 준수를 강화시켰고(15-22절), 마지막으로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스라엘 기혼자들을 꾸짖어 가정을 해체시키도록 명령했다 (23-31절).
----------------------------각 주-------------------------
24) 소형근, 느헤미야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서주석 14)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4), 83; 참고. 이사야, “미가 6장 6-8절에 담긴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예배 비판과 사회윤 리,” 「 대학과 선교 」 35 (2017), 103-130;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나는 선교사상 - 선교적 눈으로 요나서 읽기,” 「 대학과 선교 」 30(2015), 43-71; 김한성, “예레미야서의 거짓 제의 규정에 관한 연구,” 「 대학과 선교 」 22(2012), 9-40.
25) 장춘식, 성서주석: 에스라/느헤미야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388.
느헤미야 개혁의 주제들은 일부 변형된 것들도 있긴 하지만 이 개혁들은 모두 오경에 근거한 것들이었다. 느헤미야의 첫 번째 개혁 은 야웨의 총회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신명기 규정(신 23:3)에 근거하고 있다. 느헤미야의 두 번째 개혁은 성전의 전신(前身)인 성막에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이라는 규정(민 1:51)에 근거하지만 암몬의 총독 출신이었던 도비야를 죽일 수 없기에 느헤미야는 도비야를 성전 숙소에서 추방하고, 그가 차지했던 성전 방을 정결케 했다. 느헤미야의 세 번째 개혁은 레위 사람들에게 기업으로 드리는 십일조 규정에 대한 민수기 본문(민 18:21, 24, 26)을 근거로 삼고 있다. 느헤미야의 네 번째 개혁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 근거한 개혁이었다(출 20:10; 레 23:3; 신 5:14-15). 느헤미 야의 마지막 다섯 번째 개혁은 이방인들과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신명기 규정(신 7:1-4)에 근거한다.
3. 소결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는 유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오경의 규정들에 대해 친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 에스라 의 개혁과 느헤미야의 개혁에 대해 유다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가 크게 반발하지 않고,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는 에스라를 유다와 예루살렘에 파송하면서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 의 율법을 따라”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다고 말한다(스 7:14). 여기서 말하는 “네 하나님의 율법”이 정확히 오늘날의 오경인지 알 수 없 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경에 준하는 율법 규정들을 포함한 내용임 에 분명하다.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경의 율법을 아는것과 그 율법대로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러한 불신앙으로 인해 공동체 정화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다시 ‘토라로 돌아가자’(ad verba)는 공동체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IV. 중세의 종교개혁
중세를 끝내고 근세를 열었던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년)의 종교개혁이었다. 루터의 이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에 반발하는 신자들이 모여 개신교회(protestant)를 세 우게 되었고, 이 개신교회는 유럽 전역에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에 앞서 체코에서 교황권에 반발하며 교회의 부패 를 정면으로 도전하고 비판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얀 후스(Jan Hus, 1371-1415년)이다. 혹자는 얀 후스의 종교개혁을 가리켜 ‘제1차 종 교개혁’ 혹은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얀 후스의 개혁은 당시 유럽 사회와 가톨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6) 다음으로 15세기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얀 후스와 16세기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개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얀 후스의 종교개혁
얀 후스는 1371년 마부(馬夫)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7)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프라하 카를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학업을 마친 후 프라하 카를 대학에서 교수직과 총장직을 수행했던 가톨 릭 신부였다. 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성 마가엘 성당과 베들레헴 성당에 서 설교자로서 활동하면서 어려운 라틴어를 버리고 자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하고, 체코어로 된 설교집을 출판하면서 대중적인 인기와 명성을 쌓 아갔으며, 체코어로 된 찬송가를 만들어 보급했던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자국어로 설교하고, 자국어로 설교집과 찬송가를 제작했던 후스의 개혁자적인 모습은 최초의 영어성서 번역을 주도했던 영국의 존 위클리프(J. Wycliffe, 1320[?]-1384년)의 영향으로 보인다. 28)
----------------------------각 주-------------------------
26) 장윤재, “얀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 - 그의 화형 600주년을 맞이하며,” 「 기독교사상 」679(2015), 227.
27) 마키렉(F. Machilek)은 후스의 아버지 미하엘(Michael)이 ‘마부’(Fuhrmann)였다고 말 한다. 참고. F. Machilek, “Hus/Hussiten” (TRE 15) (Berlin: Walter de Gruyter, 1986), 712.
후스는 교회에 재산이 많아지면 부패하기 때문에 교회는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후스는 1412년에 교황청에서 발부한 면죄부를 공개적으로 비난 하면서 면죄부 폐기를 촉구했다. 그러자 체코 보헤미야의 국왕이었던 바 츨라프 4세(V á clav IV, 1361-1419년)가 후스를 가톨릭교회에서 추방시켰고, 이후 후스는 체코 남부지역 코지흐라데크(Koz í Hr á dek)에서 2년 동안 지역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 고난의 시기는 오히려 후스에게 기회가 되었다. 후스는 이 시기에 농민계몽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념비적 대표작이 되었던 ‘교회에 대하 여’(De Ecclesia)를 저술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으로 인해 후스는 콘 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옥에 갇힌 후 1415년 7월 6일에 화형에 처해졌다. 29) 그러나 후스의 종교개혁정신은 600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체코 개신교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후스가 남긴 당대 기념비적 저술인 ‘교회에 대하여’는 기존 가톨릭교 회와 다른 ‘교회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에게도 강력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책이었다. 후스의 ‘교회론’의 근저에는 ‘성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후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하면서(엡 1:22, 5:23; 골 1:18),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유기된 자들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신실한 자들은 교회에서 지극히 큰 자이며, 명령하는 자리에 앉아 계명을 행하지 않는 고위직 성직자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라고 말했다. 30)
----------------------------각 주-------------------------
28) Ibid., 712-721.
29) 박경수, “얀 후스의 「 교회 」 (De Ecclesia)에 나타난 교회개혁 사상,” 「 장신논단 」 47/4 (2015), 41-67.
후스의 이런 생각은 중세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되고, 고위직 성직자들이 교회의 몸을 이룬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31) 후스의 이런 과격한 언급은 비록 성서에 근거한 것이지만 당시 가톨릭 제도권을 뒤흔드는 위협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서 본문보다 교회 전통이 우위에 있었기에 당시 교회는 교리를 단순히 받아들이고,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맹목적 신앙’을 가르쳤던 반면, 후스는 요한서신의 글(요한1서 5:4)처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믿음으로 가능한데 이 믿음은 신자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 을 좇아 행할 줄 아는 ‘명시적 신앙’이라고 보았다. 32) 즉,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믿음’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교서에서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또한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6:19절(“내가 천국 열 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에 나오 는 매고 푸는 문제를, 사제들이 먼저 이 땅에서 매고 풀면, 이것에 대해 하나님이 이후에 추인하시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후스는 매고 푸는 문제가 사제들의 권세일지라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대한 이차 적인 추인에 불과한 것이며, 아무리 사제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제라면 그 어떤 효력도 발생할 수 없다면서 사제의 삶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33) 이처럼 후스는 철저히 성서에 근거한 교회론을 주장하고 있다. 즉, 교리적인 문제로 성서와 전통이 서로 충돌할 때 후스는 성서가 우선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각 주-------------------------
30) 앞의 논문; 참고. J. Hus, De Ecclesia , D. S. Schaff, The Church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5), 43.
31) 박경수, 앞의 논문, 53.
32) Ibid., 55.
2.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는 1483년 독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으며 초기 학창시절을 만스펠트(Mansfeld)에서 보냈다. 이후 그는 에어푸르트 (Erfurt) 대학에서 문학사와 문학석사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512년). 그때 루터의 나이는 29세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Bibelauslegung) 가 되어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신명기, 소예언서, 전도서, 요한1서, 디도서, 빌레몬서, 디모데전서, 이사야서, 아가서, 창세기를 강 의했다. 34)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 문 35) 을 붙이며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제기했다. 이후 루터는 로마 교황청으로부 터 파문당하는 시점에서도, 그리고 이단시비로 논쟁 중에 있을 때에도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성서학 강의였다. 36) 루터는 신구약을 구분하지 않고 강의했던 전천후 성서 신학자였으며, 루터의 이런 성서 신학적 연구업적들이 어쩌면 그의 개혁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주-------------------------
33) Ibid.
34) 정병식,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찾아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198-202.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후에도 그의 성서신학 강의 들은 계속되었다.
35)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압축된다. 첫째는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둘째는 교황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셋째는 면죄부는 구원의 효용성을 가지고 있는가? 넷째는 면죄부와 연옥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이다. 참고. 정병식, 루터, 97.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소개한 얀 후스의 개혁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우선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와 는 차별화된 신학적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루터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를 통해 성서가 모든 신앙과 모든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피력했다. 루터의 성서적 입장에 근거한 교육관은 1524 년에 독일 각 도시의 시장들과 시의원들에게 보냈던 기독교 학교의 설립 및 유지에 관한 의견이라는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서 중심의 종교교육을 강조하는데, 예를 들면 초중등학교에서 가장 중요하 고 보편적인 주제는 ‘성서’이어야 하고, 대학에서도 이단에 대응할 수 있을만한 ‘성서전문가’를 배출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고전어 없이는 복음도 없다’라고 할 만큼 성서연구에 있어서 고전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37) 이처럼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독일어 성서번역에 착수했다. 루터는 그동안 성서가 신부들의 전유물이 되어 온 것에 반감을 갖고, 성서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원전으 로부터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부르크(Wartburg)에 서 은둔하던 시절 루터는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1521년), 1534년에 독일어 신구약 완역본이 출판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은 당시 다양한 독일어 방언들을 하나로 표준화하는데 기여했을 뿐더러, 독일 사회에서 표준 독일어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8)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성서의 전체 권수에도 변화가 있었다.
----------------------------각 주-------------------------
36) 앞의 책, 198-202.
37) 박영희, “종교개혁시기에 제시된 루터(M. Luther)의 교육사상,” 「 서양 역사와 문화 연구 」
31(2014), 73-98.
본래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약성서의 경전으로 54권을 채택했었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이 70인역(LXX)의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 었다. 70인역은 기원전 3-1세기에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서로 히브리어 구약성서 39권외에 당시 정경으로써 손색이 없는 15권의 헬라어 본문들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70인역은 전체 54권(39권+15권)의 구약성서 정경으로 구성되었다. 39) 70인역 의 이런 정경전승을 초기 기독교가 수용했고, 초기 기독교의 전통을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가 계승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학자였던 루터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중세의 전통들 가운데 성서에서 기원되지 않은 교회 전 통들을 파기했고(교황권, 고해성사, 성인숭배 등), 또한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았던 15권의 헬라어 구약성서 책들을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루터의 이러한 정경관이 오늘날 개신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신교는 히 브리어로 기록된 39권의 구약성서만을 정경으로써 사용하게 되었던 것 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철저히 성서에 입각한 개혁이었고, 개신교는 특별히 히브리어 구약성서와 헬라어 신약성서 의 전통 가운데 서 있는 종교인 것이다.
3. 소결
15세기 초 체코에서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16세기 초 독일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사점들이 많다. 그 동안 라틴어 위주의 미사진행과 라틴어 위주의 종교서적들(교리집, 설교집, 찬송가)을 이해하기 막막한
38) 이규영, “루터의 성경번역과 표준독일어: 사회언어학 관점을 중심으로,” 「 서양 역사와 문화 연구 」 45(2017), 39-63. 유럽에서는 명사의 첫 번째 알파벳을 대문자로 사용하던 문자체계가 17세기에 거의 사라지게 되는데 독일에서는 루터 성서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각 주-------------------------
39) 박준서 외, 성서와 기독교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9), 42.
자국민 평신도를 위해 후스는 자국의 언어로 미사를 드리고, 자국의 언 어로 신앙서적들과 설교집을 출판하여 성서를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했던 개혁자였다. 루터 또한 성서가 제한된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자국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성서원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후스와 루터가 약 100년의 시간적 간극을 두고 있었지만, 이들의 개혁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후스와 루터는 가톨릭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 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면죄부 폐기를 주장했고, 성서 위에 군림하던 교회의 왜곡된 전통들을 바로 잡는데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던 개혁자들이었다.
V. 결 론
앞서 구약성서의 신명기 개혁운동과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의 개혁 운동, 그리고 중세 말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을 살펴보았다. 신명기 개혁 운동에서 유다 왕 히스기야와 그의 증손자 요시야는 ‘토라’에 근거하여 ‘제의중앙화’를 주창하며 지역 예배처소들을 파괴했고, 주상을 깨뜨리며, 이방의 신상들을 제거하는 개혁을 단행했다(왕하 18:4; 23:4-9). 포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또한 구약성서 ‘토라’에 근거하여 개혁을 추진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혼합결혼에 반대했던 개혁은 신명기에 근거한 것이었고(신 7:1-4), 이자 받기를 금지하는 개혁 또한 오경의 이자금지법에 근거한 것이었다(레 25:35-37; 신 23:19-20). 또한 느헤미야 13장에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야웨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개혁은 신명기 규정(신 23:3)에 근거하고 있다. 두 번째 개혁은 성전의 전신(前身)인 성막에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이라는 민수기 규정 (민 1:51)에 근거하여 도비야를 추방하고, 성전 방을 정결케 했던 것이 다. 세 번째 개혁은 십일조 규정에 대한 민수기 본문(민 18:21, 24, 26)을 근거로 삼고 있다. 네 번째 개혁은 안식일 노동금지에 해당하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 근거한 개혁이었다(출 20:10; 레 23:3; 신 5:14-15). 후 스와 루터는 가톨릭교회에서 성서에 입각하지 않은 면죄부 판매 폐지를 촉구했던 자들이었다.
16세기 에라스무스(Erasmus)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한결같이 ‘본 질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슬로건을 주창해 왔다. 구약성서의 개혁자 들과 후스와 루터 또한 인문학자들의 외침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렇 다면 구약성서의 개혁자들과 후스와 루터에게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신명기 개혁운동과 포로 이후 유다 공동체 개혁운동과 후스와 루터의 개 혁은 ‘토라’와 ‘성서’에 기초를 두었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잘못된 해석들을 바로잡자는 개혁이 이들의 운동이었으며, 왜곡된 전통교리의 올무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성서 되게 하자는 개혁이 이들의 운동이었다.
참고문헌
강승일 . “ 야훼 하나님의 아내 ?,” 「 구약논단 」 40(2011), 123-144.
김 준 . “ 주전 8 세기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적 실체가 없는 여신 아세라와 쿤틸렛 아주르드의 ‘ 야웨와 그의 아세라 ’,” 「 구약논단 」 69(2018), 354-386.
김한성 . “ 예레미야서의 거짓 제의 규정에 관한 연구 ,” 「 대학과 선교 」 22(2012), 9-40. 노세영 엮음 . 성서 · 이스라엘 그리고 경건 . ( 권혁승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 부천 :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 2017.
알베르츠 , 라이너 / 강성열 옮김 . 이스라엘 종교사 II . 서울 :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4.
박경수 . “ 얀 후스의 「 교회 」 (De Ecclesia) 에 나타난 교회개혁 사상 ,” 「 장신논단 」 47/4(2015), 41-67.
박영희 . “ 종교개혁시기에 제시된 루터 (M. Luther) 의 교육사상 ,” 「 서양 역사와 문화 연구 」 31(2014), 73-98.
박종수 . “ 고레스 찬가 ( 이사야 44:24-55:8),” 「 구약논단 」 2(1996), 80-104. 박준서 외 . 성서와 기독교 . 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 1989.
소형근 . “ 역사적 에스라와 그의 지지 그룹 ‘ 하레딤 ’,” 「 성경원문연구 」 35(2014), 70-86. ______. 느헤미야 . (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서주석 14).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 2014. ______. “ 역대기 역사서에 나타난 이방인 이해 ,” 「 구약논단 」 44(2012), 158-177. 딜레 , 에드윈 / 한정건 옮김 . 히브리 왕들의 연대기 . 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 1990. 윌리암슨 / 조호진 옮김 . 에스라 - 느헤미야 . (WBC 16). 서울 : 솔로몬 , 2008.
이규영 . “ 루터의 성경번역과 표준독일어 : 사회언어학 관점을 중심으로 ,” 「 서양 역사와문화 연구 」 45(2017), 39-63.
이사야 . “ 미가 6 장 6-8 절에 담긴 주전 8 세기 예언자들의 예배 비판과 사회윤리 ,” 「 대학과 선교 」 35(2017), 103-130.
______. “ 예언서에 나타나는 선교사상 - 선교적 눈으로 요나서 읽기 ,” 「 대학과 선교 」30(2015), 43-71.
이종근 . “ 고레스 신탁과 고레스 실린더 ,” 「 구약논단 」 48(2013), 128-166.
장윤재 . “ 얀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 - 그의 화형 600 주년을 맞이하며 ,” 「 기독교사상 」679(2015), 226-239.
장춘식 . 성서주석 : 에스라 / 느헤미야 .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 2007.
정병식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찾아서 .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 2017. 블렌킨소프 , 조셉 / 소형근 옮김 . 유대교의 기원 :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 2016.
한동구 . 신명기 개혁운동의 역사 : 열왕기하 16-23 장 주석 . 서울 : 도서출판 B&A, 2007. Briant, P. From Cyrus to Alexander: A History of the Persian Empire , trans. P. T. Daniels, Winona Lake: Eisenbrauns, 2002.
Dandamaev, M. A. “Babylonia in the Persian Age,” CHJ 1(1984), 326-342.
Ephal, E. “The Western Minorities in Babylonia in the 6th-5th Centuries B.C.: Maintenance and Cohesion,” Or 47(1978), 74-90.
Hallo, W. W. “Sennacherib’s Siege of Jerusalem” in: The Context of Scripture II, Leiden:Brill, 2000, 302-303.
Hamatta, J. “The Literary Pattern of the Babylonian Edict of Cyrus,” Acta Antiqua
Academiae Scientiarum Hungaricae 19(1971), 217-231.
Hus, J. De Ecclesia , trans. Schaff, D. S. The Church,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5. Machilek, F. “Hus/Hussiten,” (TRE 15). Berlin: Walter de Gruyter, 1986, 712.
Niehr, H. “ רפס ” (ThWAT V). Stuttgart: W. Kohlhammer, 1986.
Olyan, S. M. Asherah and the Cult of Yahweh in Israel (SBLMS 34), Atlanta: Scholars Press,1988.
Otto, E. Jerusalem - Die Geschichte der Heiligen Stadt: Von den Anfängen bis zur
Kreuzfahrerzeit (UT 308), Stuttgart: Kohlhammer, 1980.
Perlitt, L. “Israel und V ö lker,” Liedke, G. (Hg.), Frieden-Bibel-Kirche (Studien zur Friedensforschung 9), Stuttgart: Klett Verlag, 1972, 17-64.
______. “Motive und Schichten der Landtheologie im Deuteronomium,” Strecker, G. (Hg.),
Das Land Israel in biblischer Zeit , Jerusalem-Symposium 1981, G ö 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3, 46-58.
Spieckermann, H. Juda unter Assur in der Sargonidenzeit (FRLANT 129), G ö ttingen:Vandenhoeck & Ruprecht, 198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8037&cid=40942&categoryId=31611(2018 년 10 월 23 일 검색 ).
【 ABSTRACT 】
The Bible and Reformations
Hyeong Geun SO(Professo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This study examines that the deuteronomic reform movement in the pre-exilic Period and the reformation of Jewish community in the postexilic Period in the Old Testament were based on the Torah, and reformations of J. Hus and M. Luther of the late Middle Ages were founded upon the Bible. The Judah kings Hezekiah and Josiah who took the lead in the deuteronomic reform movement tried to achieve the religious unification of the Israelite through the centralization of cult and the removal of foreign gods. The Reforms of Ezra and Nehemiah paved the path for the early Judaism by the purification movement of the Jewish community. J. Hus and M. Luther rec- tified the distorted traditions of the Catholic Church through the reformations that were based on the Bible, and they turned back the Bible in statu quo . The Reforms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Reformations of the late Middle Ages were the movements of ‘ ad fontes ’, and the ‘ fons ’ was the word of God, the Bible.
Key Words: Torah, Bible, Centralization of cult, Deuteronomic Reform Movement, Re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