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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참된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며, 굶주린 이들과 양식을 나누고, 헐벗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제자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인 이사야서는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겉으로는 단식하며 의인인 체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며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정의와 공정을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단식은 자신의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곧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단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고자” 정의와 공정에 헌신하는 희생적 삶이며,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들과 내 것을 나누는 사랑의 삶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빛이 되고, 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는 치유자가 됩니다. 정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받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합니다. 불의와 불공정, 이기주의적 사고, 다른 이에게 무관심한 개인주의로 서로에게 준 상처는 이 의인들의 단식으로 낫게 됩니다. 단식이 고통스럽듯이, 헌신과 나눔이라는 단식도 고통이 따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으로 우리의 상처는 낫게 됩니다.
또한 헌신과 사랑이라는 단식의 실천에서, 주님의 부재 곧 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듯 느껴지는 두려움도 극복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헌신 속에서 주님을 부르면 대답하여 주시고,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여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정의와 공정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잔치에 초대한 주인 입장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아무래도 초대받은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겠지요.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칭찬하고 정말 잘 먹었노라고 감사를 표할 때일 것입니다.
잔뜩 차려진 음식 앞에 손님들이 눈이 휘둥그래 지면서 정신줄놓고 폭풍 흡입할 때, 초대한 주인도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신이 날 것입니다.
숱한 고민과 갖은 정성 끝에 이런저런 음식을 잔뜩 차려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깨작깨작 먹는다든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며 한 젓가락만 먹고 딴청 피운다든지, 요즘 금식기도 중이라며 아무리 음식을 권해도 고개를 흔든다면 초대한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어쩌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해 준비한 풍성한 천상잔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구약시대는 종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신약시대는 한 마디로 잔치의 순간입니다. 축제와 환희의 기간입니다.
이토록 흥겨운 순간, 보속과 단식, 눈물과 통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흥겹게 춤추며 잔치를 즐길 일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우리 각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면서 즐기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단식은 지금이 아니라 다른 때 하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잔치를 즐기고 축제를 만끽하라는데 즐길 구석이라고는 쥐뿔도 없는데 뭘 즐기라는 거냐는 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많은 즐길 거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하수(下手)에게는 인생 자체가 고해(苦海)겠지만 고수(高手)에게는 삶이 온통 호기심 천국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 포도주이자 새로움 중의 새로움이신 예수님, 너무나 ‘특별하신’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한다면 가급적 많이 비워내야만 합니다.
기존의 인생관, 과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 절대적이라고 여겼던 인간적 가치들, 변화무쌍한, 그래서 세월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빛을 바래가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를 이탈시키면 시킬수록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 더 많이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결국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더 크게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자세를 훨씬 더 많이 낮춰야만 합니다. 겸손의 덕으로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좌 신부 때입니다. 1994년이니까 어느덧 30년 전입니다. 지구 초등부 교사 모임을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는데 현관문이 안에서 잠겨있었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 신부님이 문을 열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몇 시냐?” 이 말의 텍스트는 시간을 묻는 것이지만 이 말의 콘텍스트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가?’는 질책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의도를 잘 모르고 ‘지금 10시 30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텍스트는 맞지만 콘텍스트는 파악하지 못한 50점 자리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나중에는 좀 더 일찍 다니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가 ‘나 머리가 아파!’라고 말하면 남편이 ‘약 먹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텍스트는 맞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관심’과 ‘사랑’일 수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친정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새로 구입한 청소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정말 두통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맥락의 콘텍스트를 잘 파악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듯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집단 간에도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콘텍스트를 잘 선점하고, 프레임을 잡는 곳이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고, 선거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야당에서는 정권심판, 중간평가라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발목 잡기가 지나쳐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중간평가를 다루는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견제를 선택하기도 하고,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수준 높은 정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콘텍스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한 국민들은 텍스트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식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정치 테러,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두고도 야당과 여당의 콘텍스트는 첨예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규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고 우려를 발표합니다. 야당은 신상공개, 테러를 벌인 동기, 공범여부, 정당 활동에 대한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당은 경미한 사고, 우발적인 사고, 정치적인 동기는 없는 사소한 사건이라는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국민들은 이 사건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단식’에 대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단식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단식에도 몇 가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곤 합니다. 야당의 대표가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양심수 석방을 위해서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때에는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아버지가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께서는 세월호의 유족들을 만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식의 진정한 콘텍스트는 단식의 행위와 날수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예수님께서도 단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십자나무에 생명 달렸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지난해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성지수난주일‘ 생명가지 축복해, 행렬지으며 ‘생명의 주님께서 오신다. 모두 마중 나가자.’ 축복한 성지를 집에 가져와 십자가가 생명임을 알리고 고백하며 실천하기 위해 성지를 십자가에 걸어 놓았었다.
어린시절 걸어 놓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집을 드나들며 십자성호와 목례를 드렸다. 오늘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승리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드렸나? 생명나무가지는 재의 수요일에 불에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사람아 먼지다.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사제는 이마에 생명이 될 십자가를 그으며 축복한 재를 발라준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왜, 신앙이냐? 편하게 지내자!‘ 이 물음이 있었지만 편하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이가 답은 찾는 것을 접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다.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하느님을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그 십자가 위해 생명이 걸릴 것이다.
왜 신앙이냐? 매우 실존적 답을 발견하기 위해 세속과 마귀와 육신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할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녀 아델라이드 (Adelaide)
활동년도 : 931-999년
신분 : 황후
지역 :
같은 이름 : 아델라이다
950년 이탈리아 왕 로타르(Lothair)의 아내였던 성녀 아델라이드는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오토 대제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962년 교황 요한 11세(Joannes XI)에 의하여 황녀로 대관하고, 973년에 오토 대제가 사망하자 거의 20여 년 동안 가계와 정치 분쟁에 휘말렸다. 그녀의 아들 오토 2세조차 그의 그리스인 아내 테오파누스의 조작에 따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게 되자 잠시 궁중을 떠나 부르고뉴(Bourgogne)에서 지냈다. 비슷한 일이 그의 손자 때에도 발발하여, 995년부터 그녀는 평화스런 생활을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6월 20일), 마인츠(Mainz)의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 같은 사람들의 우정과 권고로부터 영웅적인 힘을 얻었다. 그녀는 알자스(Alsace)에 셀츠(Seltz)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곳에서 영면하였다. 성녀 아델라이드는 1097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율리아나 (Juliana)
활동년도 : +305년
신분 : 동정, 순교자
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같은 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 출신인 성녀 율리아나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Campania)의 쿠마에(Cumae)에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처음에는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모진 매를 맞았고, 그 다음에는 그녀와 결혼을 간절히 바라던 집정관 에빌라시우스(Evilasius)로부터 또 다른 고문을 받았다.
그 후 감옥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으로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그녀의 수난기는 중세 시대에 널리 알려졌다.
성 오네시모 (Onesimus)
활동년도 : +1세기경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순 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오네시무스
필레몬에게 보낸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 의하면(10절~18절), 오네시모는 프리지아의 골로사이에서 살던 필레몬의 노예였다.
그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당시에 바오로를 만났고, 세례를 받았으며, 사도 바오로의 영적 아들이 되었다.
또한 바오로는 그를 필레몬에게 되돌려 보내면서,오네시모는 이제 노예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주도록 요청한다.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말한 그대로 자신도 행동했고, 또 "성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서" 인정하였다(골로사이 4:7~9).
성 예로니모에 의하면, 그후 오네시모는 말씀의 설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교까지 되었으며, 로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여 로마 순교록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복녀 필립바 마레리아(Phillippa Mareria)
활동년도 : +1236년
신분 : 동정녀
지역
같은 이름 : 마레리, 필리바, 필리빠, 필리파, 필립빠, 필립파
성녀 필립바는 리에띠의 지꼴리 태생인데, 그녀의 집안은 아브루찌의 주요 지주 가문이다.
그의 부모는 신심이 깊은 부부인지라, 인근 지방에 설교하러 오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으로 모신 적이 있다.
이때부터 필립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전히 본받으려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들이 그녀의 결혼을 서두르자, 필립바는 삭발을 한 후 보기 흉한 옷을 입고는 몸을 숨겨버렸다.
이윽고 그녀는 집을 나와서 마레리오산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거룩한 어느 프란치스칸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저 유명한 또디의 로제르 수사이다.
그녀는 성녀 클라라의 규칙을 채택하였고, 필립비가 원장이 되어 많은 동료들을 지도하였다.
철저한 가난생활이 그들의 특징이었다.
1236년, 그녀는 중병에 걸린 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복자 그레고리오 10세(Gregory X)
활동년도 : 1210-1276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테오발두스 비스콘티(Theobaldus Visconti)는 피아첸차(Piacenza)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Paris)와 리에주(Liege)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리에주에서 부제가 되었다. 그는 오토보니(Ottoboni) 추기경을 수행하여 영국 선교 길에 오른 적도 있고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6명의 추기경 위원회에 의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어 약간의 물의가 일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Roma)로 와서 1272년 3월 19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3월 27일에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또는 그레고리오) 교황으로 착좌하였다.
그는 1274년에 리옹(Lyon)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간의 화합을 꾀했으나 십자군으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공의회가 끝난 후 그는 스위스의 로잔(Lausanne), 이탈리아의 밀라노(Milano), 피렌체(Firenze), 아레초(Arezzo)까지 여행했으나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로마 순교록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