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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의 묵상글 중 '신앙여정' 과 공유한, 할 글들
( 241010 - 계속 )
=== 1 ========================
매형을 떠나보내며 (회상의 편지)
http://www.ofmkorea.org/ofmkfb/562312
이마르첼리노M 2024.10.10 17:13
=== 2 ========================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려면
http://www.ofmkorea.org/ofmkfb/562358
이마르첼리노M 2024.10.12 06:43
=== 3 ========================
감정 (마음의 정서적 자유를 찾아서)
http://www.ofmkorea.org/ofmkfb/562478
이마르첼리노M 2024.10.16 04:18
=== 4 ========================
가을밤에 쓰는 달빛 소야곡 제 1부 1/2
http://www.ofmkorea.org/ofmkfb/562630
이마르첼리노M 2024.10.21 15:51
=== 5 =========================
가을 밤에 쓰는 달빛 소야곡 제2부 2/2
http://www.ofmkorea.org/ofmkfb/562632
이마르첼리노M 2024.10.21 15:55
=== 6 =========================
자연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선
http://www.ofmkorea.org/ofmkfb/562671
이마르첼리노M 2024.10.22 19:15
=== 7 ========================
하느님께서 그려놓은 큰 그림
http://www.ofmkorea.org/ofmkfb/562703
이마르첼리노M 2024.10.24. 04:39
=== 8 ========================
연결
http://www.ofmkorea.org/ofmkfb/562734
이마르첼리노M 2024.10.25. 02:53
=== 9 ========================
성 프란치스코의 갈망에 비춰본 나의 갈망
http://www.ofmkorea.org/ofmkfb/563229
이마르첼리노M 2024.11.07 03:59
=== 10 =======================
도구로써 존재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63502
이마르첼리노M 2024.11.14 09:07
=== 11 =======================
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나의 자유
http://www.ofmkorea.org/ofmkfb/563540
이마르첼리노M 2024.11.16 03:06
=== 12 =======================
평화의 혁명가 성 프란치스코
http://www.ofmkorea.org/ofmkfb/563785
이마르첼리노M 2024.11.25 03:48
=== 13 =======================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성찬례
http://www.ofmkorea.org/ofmkfb/563863
이마르첼리노M 2024.11.27 09:16
=== 14 =======================
잔을 닦는 죽음
http://www.ofmkorea.org/ofmkfb/563899
이마르첼리노M 2024.11.28 22:39
=== 15 =======================
비상계엄령의 결과
http://www.ofmkorea.org/ofmkfb/564141
이마르첼리노M 2024.12.05 22:38
=== 16 =======================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 (성탄절 묵상)
http://www.ofmkorea.org/ofmkfb/564668
이마르첼리노M 2024.12.24 00:21
=== 17 =======================
송년의 시간에 (미래에 꽃피게 될 희망 안에서 위대한 만족이 겪는 고난들)
http://www.ofmkorea.org/ofmkfb/564874
이마르첼리노M 2024.12.31. 03:17
=== 1 ===============================================
매형을 떠나보내며 (회상의 편지)
http://www.ofmkorea.org/ofmkfb/562312
이마르첼리노M 2024.10.10 17:13
가을이 깊어 가는 날 먼 길을 떠난 매형을 회상하며
매형의 영정 앞에 이 편지를 드립니다.
가을바람에 실려 오는 그리움,
여름날의 불볕더위를 견딘 초록들이 저녁노을처럼 물들어 가고
들판은 이미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사과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코스모스들이 다투어 창조주께 제 몫의 찬미를 드리던 날
매형의 선종 소식은 나를 회상의 언덕으로 오르게 하였습니다.
감나무의 낙엽이 질 때 떠오르는 얼굴 하나.
먼 길을 떠난 매형과의 기억,
황금벌판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차창에 스치는 풍경처럼
매형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처럼 추억들을 회상해 봅니다.
첫 만남의 따뜻한 미소,
가난했던 그 시절의 기억,
든든한 버팀목 되어주셨던 그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 들이
내 마음속에 석류알처럼 박혀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참으로 힘들었지만,
매형의 따뜻한 손길과 사랑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밥 한 끼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던 그 시간,
비닐하우스로 생계를 꾸리던 겨울 날의 손 시린 회상들이
이제는 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창조적 고통은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이며.
진실은 추위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이라는 믿음아래
분발과 좌절의 되풀이가 얼마나 뼈저린 인간사의
살상인가를 잘 알게 된 이즈음
먼저 떠난 매형이 그립습니다.
슬픈 식욕처럼 정신의 공복감
인색한 저울로 사람을 달아 따지는
몰이해의 사나운 돌팔매들이 남긴 상처들 속에서
먼저 다가서는 만남을 보았습니다.
주님!
서로의 신상을 성실한 관심으로 서로 돌보고 가꾸지 않는다면
사람의 정인들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눈빛은 하나같이 절절하여
염원과 소망의 집을 짓고 부수는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사이,
우리의 머리엔 흰 서리가 짙어갑니다.
헐벗은 영혼의 추운 눈시울을
따스한 불가에 녹이고
이슬에 씻긴 과일처럼 신선한 축복
겸허한 충족에 이르게 하소서
존재의 심연에서 생명이 분출되고
생명이 연소 되어
발아에서 열매를 맺기까지
그 자연의 순환에 나를 맡기고
서서히 미래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감정의 부상으로 인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고독과 절망과 삶의 낭떠러지와
모든 위급한 처지에서
저희와 동행하신 주님,
먼저 떠난 영혼을 당신의 자비로운 품에 받아주소서
우리의 삶은 자유에 바쳐진 시간이며
삶의 준령은 언제나 능력의 상한선 그 위에 솟아있고
그 높이는 무섭습니다.
존재의 밑바닥까지 아픈 금을 입히는 손길
기도와 헌신, 증여와 부축으로
사람을 길러내는 거기에 생명이 만발하게 하소서
=== 2 ===============================================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려면
http://www.ofmkorea.org/ofmkfb/562358
이마르첼리노M 2024.10.12 06:43
작은아들,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 창녀, 세리, 나병환자, 죄인, 여자, 흑인, 비종교인, 동성애자, 이들을 쫓아내려는 힘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당신이 발견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배척이나 추방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다. 불행하게도 나는 여태까지 나에게서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있는 우익과 좌익을 당신의 말씀으로 부수고 들어오셨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있는 흔들리는 추를 당신의 말씀으로 고정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있는 왕들을 몰아내시고 예언자를 받아들이게 하셨다.
이러한 고백을 조금이라도 하고 세상을 마친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 3 ===============================================
감정 (마음의 정서적 자유를 찾아서)
http://www.ofmkorea.org/ofmkfb/562478
이마르첼리노M 2024.10.16 04:18
우리의 몸과 마음의 정서를 깊이 살펴보면 감성과 감정의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감정이 부상을 입게 되면 감성도 영향을 받아 내면이 어둡습니다. 내면이 어두우면 평화가 깨지고, 내면의 평화가 없으면 희생양을 찾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관계를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느라고, 또 위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과 사람과 모종의 거래를 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진리가 왜곡되고 진실이 둔갑하는 곳에서는 하느님이 미움을 받습니다. 관계를 금 가게 하고 단절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은 매우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당신의 메시지를 내쫓기고 버려진 계층의 사람들이 왜 먼저 알아듣는다고 생각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자만심에 가득 찬 이들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할 뿐 말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탐욕과 위선의 현장에는 의미와 가치가 사라진 실재하지 않는 문화를 실재하는 것처럼 포장하여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는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깨어진 부분과 가난한 부분들까지 개별적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의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제외시키고 차별하는 배타적 제도는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가난과 겸손으로 육화를 드러내시는 예수께서는 결정적 죽음 이전의 작은 죽음이 인간의 감정을 거처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감정의 단계를 묵살하거나 무시하면 그것들이 더 깊은 형태의 변장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폭력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분노 조절 장애와 위궤양과 우울증은 감정을 선으로 통제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노의 희생자가 되거나 온갖 종류의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됩니다.
깊이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필 수 없습니다. 느낌이 깊을수록 사랑도 깊어집니다. 감정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아닙니다. 감정은 몸의 언어입니다. 자기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기 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내면의 사정을 외부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려는 언어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은 통제되지 않으면 폭력으로 관계를 해칩니다. 감정은 사랑하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마다 머리와 가슴과 몸속에 있는 신비들을 붙잡고 씨름해야 합니다. 자신과 만나는 일이 쉽지 않더라도 매일 매일 자기와 만나 씨름해야 합니다. 나의 감정은 정말로 신비롭습니다. 감정의 사계절을 매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굴복하려는 멈춤과 머무름이 없다면 그것들이 나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제되지 않은 감정은 결국 폭력으로 모든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사라지고 홀로 남아 죽음의 계곡에서 신음할 것입니다. 자만심이 만든 감정은 기어이 전쟁으로 생을 마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변화시키는 영성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놓아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벌거벗고 충분히 가난해질수록 깊은 만족에 이르게 합니다. 나와 내 것이 사라진 거기에 해방과 자유가 있고 하느님 안에 있는 진짜 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처음에 가난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법을 깨달았지만, 나중에는 자유롭기 위해서 가난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연결은 가난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것도 가난한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증명할 필요도 포장할 필요도 없고 다른 누구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무엇을 남겨놓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여백과 자유의 공간이 사라지면 감정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 저항할 수 없었던 억압된 분노와 상처들은 나이가 들면서 폭력의 싹을 키워 다른 사람과 소통을 어렵게 하고 어울릴 줄 모르게 하고 독점과 소유로 지배의 칼을 휘두르다가 외톨이로 생을 마감하게 합니다.
정서적 자유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선과 연결되어 있을 때 누리는 자유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실상이며 인간은 여기서 상처와 억압된 분노를 잊어버립니다. 두려움과 자기방어, 증오에 대한 근거를 잊어버립니다. 부정적 성향은 그 뿌리와 싹을 잘라야 합니다. 즉 생각과 감정에서 잘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부정적 행동과 태도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4 ===============================================
가을밤에 쓰는 달빛 소야곡 제 1부 1/2
http://www.ofmkorea.org/ofmkfb/562630
이마르첼리노M 2024.10.21 15:51
1
찬 바람이 부는 어느 가을날
지나온 세월의 굴곡을 보는 듯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으로
억새들의 하얀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을 보았습니다.
찬바람이 가슴속을 파고드는 밤,
가녀린 여인들의 가슴 시린 사연을 떠 올리며
공감의 창을 열어 놓고 동반과 부축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낙엽은 소리 없이 흩어지고,
은은한 달빛은 그녀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며 밤을 비춥니다.
그녀들의 눈물은 이슬처럼 맺히고,
그 고요한 바람 속에 작은 희망의 속삭임이 들립니다.
2
가을,
손 시린 회상의 그리운 얼굴들
슬픔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피어납니다.
낙엽이 쌓여가는 길 위에 흩어졌던 그리움
험준한 등산길을 헐떡이며 걷던 날
사람의 추위를 신의 제단에 올리며
한없이 안으로만 품었던 그들의 비애
베개를 적시며 쓸어내린 기억의 조각들이 스치며 지나갑니다.
주저앉고 싶었던 절망과 애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강인하게 피어난 소망의 얼굴들.
삶의 질곡에서 아직은 지쳐있는 모습을 봅니다.
여전히 견뎌내야 하는 일상의 무게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내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3
찬 바람이 불어오는 이 계절,
결코 지치지 않는 가슴이여!
가을 들국화처럼 계속 피어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
가을 정원에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꽃들을 보려고 거기에 갔습니다.
여름날 강인한 열정으로 피어나는 노랑 나리꽃
순백의 송이로 환하게 웃는 함박꽃
가을 하늘 아래 맑고 깨끗하게 피는 들국화
보랏빛 눈망울에 맑은 이슬 담은 물망초
수수하고 담백한 코스모스
꽃들은 다투지 않고
저마다의 색깔과 진한 향기로 창조주를 찬미하면서
생명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4
나는 그들의 염원과 진홍의 사랑에 실려 오는 전율,
사슴처럼 슬픈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는 생명의 충일로
마침내 가슴을 쪼개고 마는 석류의 파열 속에
유리를 입힌 듯 반짝이는 붉은 홍옥들의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5
한 개비 성냥으로 능히
지옥의 불바다를 부를 수 있는 위험한 불씨
죄의 끈질긴 유혹과
목덜미에 휘휘 감기는 고독과 외로움
좌절에 기울었던 그만큼이나
헐벗은 영혼의 추운 눈시울을
따스한 불가에 녹이고 싶은 마음을 보았습니다.
제2부로 ---
=== 5 ===============================================
가을 밤에 쓰는 달빛 소야곡 제2부 2/2
http://www.ofmkorea.org/ofmkfb/562632
이마르첼리노M 2024.10.21. 15:55
제2부 시작
6
사랑하는 건 부끄러운 감정이 아닙니다.
속으로만 삭이던 말을 밖으로 내 보내도 괜찮습니다.
슬픈 여인들의 얘기가 어디 한두 가지에 그치겠습니까?
슬픔속의 종자 같은 그녀들의 내심에 핀 지순한 소망의 꽃잎들
속마음을 비추는 벌거벗은 촛불 앞에
미사가 끝난 후
텅 빈 성당의 쓸쓸한 제대처럼 고요히 비쳐 오는 시간을 압니다.
7
생명을 낳은 모성이여!
가시덩굴에서 피는 장미를 보십시오.
눈부신 그 기쁨을 보십시오.
빛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기쁨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자유도, 예술심도, 상냥함도, 기도의 말들도
그리고 달과 별들도 친구들도 남아있고
소중한 시간과 여기에 더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있습니다.
8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슴이여!
밤사이에 떨어지는 나뭇잎의 건조한 작은 음향에도 무심할 수 없는
섬세한 감정의 살결이여!
그대들이 치른 산욕의 수고,
절대의 진통으로부터 하나의 생명을 품어내던 그때
어두운 육체에서 온통 빛투성이의 축복이 커다랗게 소리치던
모성의 영광을 기억하십시오.
9
얼마쯤은 늘 상처 입은 가슴
한 번씩 손이시린 노여움과 덤불이 탈 때 같이
뜨거운 혼란에 휘말리는 그대들의 비애
그대들의 눈물
불면의 밤을 보내던 날
창문을 때리던 빗줄기의 그 사나운 주먹질에도
삶의 애환과 무게를 돌아보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인색한 저울로 사람을 달아 따지는
이반과 몰이해의 사나운 돌팔매들이 부산히 바람을 가르고 다가올 때
아무도 이를 막아줄 방도를 찾을 길 없어
하늘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의 향을 올리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10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옷섶 가득히 가장 맑은 눈물을 담아 보내고
부디 다함 없는 축원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자신의 체온으로 얼어붙은 영혼을 녹여주려는 꽃들이여!
주고 또 주어도 매번 줄 것이 모자라는 헌신에의 조바심
동반의 여정에 부축의 손길로
생명을 품어 기르는 그대들이 있어
아직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2024년 10월 21일 새벽에 2부 끝
=== 6 ===============================================
자연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선
http://www.ofmkorea.org/ofmkfb/562671
이마르첼리노M 2024.10.22 19:15
자연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평온한 자연은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하느님의 부드러운 손길입니다.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처럼 처신하기를 즐겨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으로 인하여 깊은 만족을 누리고 있기에 특별한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중독성 있는 종교적 광신에 빠진 자들은 자기의 얼굴과 태도로 자아도취의 중독증상을 드러냅니다. 내어줌이 없이 단순히 자신의 종교적 신조를 바꾸기만 한 자들이 우월한 엘리트 의식으로 누구를 배척합니다. 이들은 정치적 명분에만 관심을 보일 뿐,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남들이 이루어 놓은 선을 가로채고, 수고를 가로채고, 꼭대기에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종교적 광신에서 나오는 광기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희생을 강요하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영웅이 아니면 희생양이라는 극단의 관계가 우리 인생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양심을 팔고 성공한들 내면의 기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고 진실하지 않으면 기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회피가 아닌 변화를 추구합니다. 누군가를 희생제물로 만들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은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움으로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모면하고 우월감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많은 관계들이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영의 거처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은 자신을 완전히 도구적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에 종교적 관념이나 신조를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를 배척하거나 제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큰 무엇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고, 그분에게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품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으로부터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 내어주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선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사람은 무한한 내어줌이 만든 깊은 포옹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우월한 사람으로 입증할 필요가 사라집니다.
하느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완전한 그림을 보는 사람은 존재 자체를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창조가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사적인 행복을 추구할 때 우리는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있는 우상을 만들어 세웁니다.
타인은 또 다른 자기의 얼굴입니다. 그들과 연대를 거부함으로써 관계가 단절되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기쁨을 발생시킬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내어줌으로 내 얼굴은 빛납니다. 하느님의 얼굴은 그렇게 우리의 빛나는 얼굴에서, 기쁨에 찬 표정에서, 전신으로 발산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복음은 자연 안에서 복음이 됩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시골 농부의 얼굴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 7 ===============================================
하느님께서 그려놓은 큰 그림
http://www.ofmkorea.org/ofmkfb/562703
이마르첼리노M 2024.10.24. 04:39
하느님의 작은 부분을 체험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아는 사람은 성급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은 진짜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매력에 끌림을 경험한 사람은 갈망과 목마름이 더 큰 기갈을 불러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어주는 기쁨이 내어주는 갈망을 더 크게 함으로써 죽어도 죽는지조차 모르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내 작은 시야는 점점 커져서 아버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이르게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사라지고 드디어 창조주가 바라보는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립니다. 나밖에 모르던 내가 아버지가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 보는 세상이 낙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저지르고 있는 폭력의 한가운데에서도 낙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하는 나를 창조하심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가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 예외없이 자비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쓸모없는 건 없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을 찾으려는 사람은 구원에서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제아무리 많은 기도와 희생과 제물을 바쳐도 하느님께서는 바쳐서 얻으려는 마음에 반응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얻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훔치는 사람입니다.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놀랍습니다. 눈이 열린 사람만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홀로 유일한 선하심이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이면서 보편적 선(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그려놓는 그림입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갈라놓는 절대적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쓸모가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갈라놓기를 좋아합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물질과 영을 가르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언제나 좋은 쪽에 두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벌하는 대신 회복하심으로써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당신의 임무가 무슨 이유로든 신성한 신분을 상실하거나, 변두리로 내몰리거나, 인간의 품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회복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모든 사람의 참되고 온전한 정체성을 회복하심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누구는 상주고 누구는 벌주는 것밖에 모르는 인과응보의 정의하고는 정반대입니다. 대가를 계산해야만 한다고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공로 없이 받는 사랑이 그들의 유일한 형벌일 것입니다.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려놓은 큰 그림, 그 그림을 보는 눈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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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http://www.ofmkorea.org/ofmkfb/562734
이마르첼리노M 2024.10.25. 02:53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위선을 질책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도덕적 성취가 곧 구원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서의 계시가 도덕적 성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눈뜸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며 또한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허용하시는 하느님보다는 지배하시고 통제하시는 하느님을 더 좋아합니다. 인과응보의 논리로 하느님을 설명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허용을 배우기 전까지는 말씀이 나를 바꾸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허용을 이용하는 결과만 남게 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일차적인 이유가 어떤 역할과 과제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자신이 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되도록 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가 말해주는 신비는 만물은 각자 그 자체로서 존재함으로써 선택받고, 사랑받고, 보존되는 신비로써 하느님의 돌보심을 드러냅니다.
일단 우리의 영혼이 겉껍질을 벗고 진짜 자기에 이르면 우리의 영혼은 놀랍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자연스럽게 초연하며 어느 것에도 중독되지 않습니다. 또 무엇을 붙잡고 늘어지거나 고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구체적 일을 하는 데서, 보다 순수한 존재가 되는 데서 이미 인생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어드린 자유 안에서 영이 활동할 공간을 만들게 되면 우리는 누구와도 함께 더불어 살며 다른 피조물과도 어울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것을 배제한다거나 우월의식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영의 거처로 내어드린 내 자유 안에서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과 우주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체와 연결된 자신을 보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 안에서 이미 중요한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이처럼 은혜롭게 나를 이 세상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살도록 하셨다면 도대체 왜 그분께서 다음 세상이라고 마음을 바꾸시겠습니까? 사랑은 영원하며 죽음의 공포는 사라집니다.
가짜 자기는 나쁘기보다 본인이 모르는 자기입니다. 본인이 모르는 이유는 가짜 자기가 그 이상인 것처럼 젠체하며 자만심과 우월감으로 꾸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다양한 가짜 자기들, 일시적인 옷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 한계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계속 진짜로 성장하게 되면 가짜 자기는 더 큰 빛에 노출되어 죽고 맙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의 가짜 자기를 내려놓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고착되어 있으며 덫에 걸려있다는 뜻이며, 우리가 스스로에게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한 전통적인 용어가 죄였습니다.
우리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의 가짜 자기를 넘어설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면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삶의 방식을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배우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으며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해방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전체에 연결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애착을 느꼈던 부분을 보호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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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갈망에 비춰본 나의 갈망
http://www.ofmkorea.org/ofmkfb/563229
이마르첼리노M 2024.11.07 03:59
성 보나벤투라는 대 전기에서 이렇게 프란치스코의 갈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프란치스꼬는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위대한 사정들을 배웠지만, 진정한 작은 형제여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로부터 작은 일에서조차 충고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무슨 방법으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 더욱 완전히 봉사할 수 있는지 특별한 열정으로 찾곤 하였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완덕의 정상에 더욱 효과적으로 도달하는 방법을 유식한 사람이건, 불완전한 사람이건, 젊은이건 늙은이건, 상관하지 않고 묻는 것, 이것이 그의 최고 철학이었으며 가장 큰 갈망이었다."
생명은 사랑과 무한에 대해 언제나 목마름을 탑니다. 나는 반대 받는 표적으로 사셨던 분을 따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삶의 자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나는 깊은 심연에서 나의 갈망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눈물에 내가 빠지는 벌을 받으면서 앎이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안에서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상당히 겁을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기뻤습니다.
겨울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내 인생의 추운 날, 영혼의 추위를 타면서 품속에 감추었던 윤택한 초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겨울이야말로 따뜻한 모성의 전형일 듯싶고 견디는 일의 극한을 통해 분만과 회임을 반복하면서 선하신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통해 지금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를 낳는 일,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일, 측은한 마음으로 가엾이 여겨주고 돌보아 주는 일, 곧 육화의 도구로써 성소를 사는 일이 나의 전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희망이요 염원이요 갈망이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언제나 초월을 향해 나아가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과 자유에 참여하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곡된 인식과 온갖 견해로 가득 찬 머리, 즉 안다고 하는 것들을 비우고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배워야 했고 자기밖에 모르는 막혀있는 가슴을 가장 가까운 관계부터 넓혀야 했습니다. 자기방어에만 급급했던 내가 몸을 굽혀 ‘너’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했고 그때그때 상황을 선으로 바꿔놓으려 했습니다. 머리를 비우면서 가슴을 채우는 곳에서부터 영의 거처가 조금씩 마련되었습니다.
진짜로 중요한 건 하느님이 인간 영혼과 친밀해지기를 바라시고 추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감추어두셨던 비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갈망과 하느님의 갈망이 만나는 곳에 주님 영의 현존이 있고 영의 현존은 친밀함을 경험 뒤에 일어나는 관계의 현실들이었습니다. 신비로움과 놀라움, 친절함과 단순함, 수치에 대한 벌거벗음, 모험과 황홀함, 그리움과 고통까지, 그리고 사랑하면 연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사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었습니다.
허용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깊은 차원에서 만날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허용을 배워 자기 생각과 해석에만 몰입되어 고독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사람이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나를 동반하고 부축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슴을 열면 하늘이 보였습니다. 남들이 나에게 붙여 준 딱지들에 반응하느라 정신없이 살던 내가 내 영을 덮어씌우던 불평불만과 양심에 불안을 주는 판단을 뒤로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를 바꿔놓도록 허용할 때, 마음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은 의지의 굴복이며 간절한 갈망의 꽃이라는 믿음 아래 내적 갈망에 자신을 두는 것, 이러한 갈망을 의식하는 것, 갈망이 자신의 방향을 정하고 자신을 이끌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성 프란치스코를 닮으려는 나의 갈망입니다. 내 육신의 힘이 다할 때까지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조금도 주저 없이 기쁘게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2024, 11, 7. 휴가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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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로써 존재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http://www.ofmkorea.org/ofmkfb/563502
이마르첼리노M 2024.11.14 09:07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가 17, 21)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묵시 21,3)
안주하고 방황하는 종교에서 새로 태어나는 교회 조직들이 번창하는 중입니다. 주일 종교에서 정통이라는 신조만을 강조할 때, 이들은 정통 실천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 현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주택건설, 다양한 사회봉사, 관상기도 단체, 자원봉사와 선교, 등 자비의 도구요 육화의 도구로써 실질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생시키는 변화된 교회가 언저리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사람들이 도구적 존재로 관계의 혁명을 이루는 곳에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내가 완전히 내어 맡긴 나의 자유를 통해 주님의 영께서 나를 도구 삼아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이러한 움직임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전달하는 기쁨의 봉사자들입니다.
이원론과 인과응보가 긴 세월을 장악해 온 교회에서 이원론에 만족하지 않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놀라운 신비의 경험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까지 함께 받아들입니다. 신비는 신비로 묻어두고 알아들은 신비만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려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도구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관계에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인간적 삶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모든 것을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전달합니다. 특히 곤경 중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하느님의 자비를 날라다 주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허용과 협력이 이 시대에 복음을 발생시킵니다. 다름을 허용하고 명령이 아닌 부탁으로, 앙갚음하려는 감정으로 공격하고 벌하는 대신,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품격을 잃어버린 꼴찌들에게 다가가서 첫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허용하고 놓아주는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에게 전달되는 곳에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십니다. 상주고 벌주는 것밖에 모르고 거기에 길들여진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도 그 경험을 통해 변화의 길을 가는 삶이라면 여기가 낙원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을 우리 안에서 직면하고 그것을 남에게 떠넘기는 대신 그 처참한 결과들을 흡수하여 더는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 통제를 멈춰야 합니다. 그것이 악을 벌하거나 모조리 박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악을 구속하고 내어주는 사랑으로 변형시키시는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도구로써 존재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너와 피조물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는 하느님의 자비는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내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그렇듯이 너에게 전달하는 하느님의 자비 또한 나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하느님을 선물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주는 작은 실천들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동원하여 너에게 다가갑니다. 친밀함을 주는 나의 행동으로, 기쁨과 평화로운 얼굴과 표정으로, 사용하는 단어와 말투로, 문자와 카톡으로, 내가 선하다는 의식이 없이 행하는 선으로, 너의 긴급한 필요를 채우려고 다정하고 겸손하게 내어주는 시간과 재능과 일들로, 온유하고 부드럽게 연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때로는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불편함을 주었던 사실을 용서 청하고, 네가 나에게 주었던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면서 관계가 회복되고 공유된 선으로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 내가 다스리는 왕국을 만들 것입니다. 겸손하게 내어주는 사랑, 도구적 존재로 그 길을 가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는 언제나 지금이며 바로 여기입니다. 일상의 모든 관계가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내어주는 사랑으로 시작되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도구로써 그 길을 갑니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줍니다. 간직된 말씀과 받아 모신 성체, 내어주시는 몸을 받아 모신 내가 내어주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거기에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성전이 아름답게 빛납니다. 영의 현존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나의 얼굴에서 빛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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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손에 들려있는 나의 자유
http://www.ofmkorea.org/ofmkfb/563540
이마르첼리노M 2024.11.16 03:06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높은 자리에 앉는 순간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걸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성급하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진정한 동기나 의도를 잘 모르면서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객관적 진리에서 나오는 사랑과 무관한 판단은 위험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인간이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이지 인간이 할 일은 아닙니다. 꼭대기에 앉은 사람만 그렇게 합니다. 누구는 지옥으로 보내고 누구는 하늘나라에 보내며, 자신의 통치를 드러냅니다. 무엇이 자신을 우월하다고 여기게 할까요? 자신이 바친 희생과 기도와 재능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고 더 거룩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이 바친 업적과 공로가 많을수록 지배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자신이 만든 저울과 잣대로 심판자의 행세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자만심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만심은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악(惡)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창세 2,16.17) 아담이 순종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까지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동산에 있었던 모든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善)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육화의 도구로 주님의 손에 자신의 의지를 내어드립니다. 깨어지고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음에 대한 응답을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내어 주는 사랑이 시작되었으며 인간은 내어 주시는 사랑을 받아 내어 주는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모든 선은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성령의 활동이며 공유하는 선으로 관계를 넓혀가도록 인간의 내면에서 일하십니다.
영의 현존은 그렇게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현존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입니다. 경험된 지식으로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내 의지가 도구로 사용될 때, 또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안에서 내어 주는 사랑이 크면 클수록 영의 현존을 더 크게 경험하였습니다. 나의 기도와 관상은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난과 겸손으로 만들어진 나의 빈자리에서 영의 활동을 봅니다. 도구적 존재로 인식하는 나의 변화는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나의 변화가 관계의 변화로, 나를 통하여 너와 피조물로 확장되는 선과 너를 통하여 나에게 전달되는 선을 보는 것이 나의 관상입니다. 거기서 나는 하느님을 더 알게 되었고 나를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순간 상처 입기 쉬운 몸과 열린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순응하는 복음적 불안정, 현존은 거기서 숨을 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보호막을 하나둘 걷어내면서 영의 거처가 내 안에 마련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영의 현존 안에서는 벌거숭이가 되었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에게서 내가 점점 사라지고 마침내 나에게서 내가 완전히 해방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 곧 하느님의 통치안에 어린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내가 어린아이의 순수성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 나의 자유는 완전히 그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단순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유,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그 자유야말로 내가 찾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도구가 된다는 사실은 완성된 기쁜 소식입니다.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선을 선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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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혁명가 성 프란치스코
http://www.ofmkorea.org/ofmkfb/563785
이마르첼리노M 2024.11.25 03:48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과거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거부당하는 이들이 제 길을 찾아가고, 꼭대기가 아니라 바닥에 있는 자들에 의해,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는 능력의 노예로 만드는 세상의 변두리에서,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보다 더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기도와 관상의 영역을 넓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산성이 없는 이들, 곧 아이들과 노인들,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과,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지고 살아가는 이들, 목마름과 배고픔을 겪는 이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과 배우지 못한 이들, 미디어와 가깝지 않은 이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여 훨씬 하느님과 가깝게 살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는 자국 우선주의 신봉자들에 의해 전쟁과 폭력으로 죽이고 빼앗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동물의 왕국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저지르는 무수한 살육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의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만심이 공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영역에서부터 단체와 공동체, 국가들 사이에서 관계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에 굴복하지 않고 말씀에 굴복하는 이들과 더불어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인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 가장자리와 변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풍족하게 채워주셨지만 카인과 아벨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느님을 저버리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을 보아왔습니다. 과도한 인간의 탐욕은 어느 시대에도 있어 왔으며 지금도 여전합니다.
평화와 공존은 개인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비폭력과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용서와 원수 사랑을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꿔 놓아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장차 올 내세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평화를 일구는 도구로써 살아가기보다 편한 쪽을 택했습니다. 우선의 이익과 즐거움, 그리고 편안함을 먼저 찾았습니다. 보편적 구원보다 개인의 구원에 더 많은 투자를 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위대한 평화 혁명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했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가난을 선택하였고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겸손하심이 그의 삶을 바꿔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고 인간의 동등성을 취하신 한없이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육화와 수난의 사랑이 그의 삶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적 편견이나 한계를 극복하고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를 망치는 배타적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이 관계 안에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나만 찾는 교회에서 누구도 제외하거나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보편적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보편교회가 원수 사랑과 비폭력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들을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하느님의 손에 들려있는 도구적 존재로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공존의 지혜를 배우면서 다시 태어나는 성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님처럼 누군가를 품에 안으려는 몸짓으로 과감히 허용하고 과감히 내려놓는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겸손하심이 우리의 관계를 비추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24년 11월 24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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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성찬례
http://www.ofmkorea.org/ofmkfb/563863
이마르첼리노M 2024.11.27 09:16
성찬례는 말씀 선포에 따른 실천적 행위로써 행동하는 자비가 관계 안에 자리를 잡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몸으로 마련하셨습니다. “너희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나의 몸이다.” 식탁 둘레에 앉아있는 이들의 자격을 따지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죄인과 의인의 자리가 아니었고 선행의 보상으로 얻은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차별하거나 제외하는 식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결같은 포옹이었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식탁이었습니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8-29)
예수께서는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죄인과 의인, 흑인과 백인,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과 부자, 순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배운 사람과 배움이 없는 사람, 등 그 누구도 가르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성찬례 자체가 가톨릭교회에서도 쓸모 있고 순결하고 진정한 신자들을 구별 짓거나 아니면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아 왔습니다. 공존의 지혜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갈라놓습니다. 나만 챙겨보겠다는 그릇된 생각들이 누군가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시대에서는 복음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이단의 출현도 많았습니다. 현존하는 교회가 복음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신생 교회의 출현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성 교회의 구조들이나 다른 어떤 것에 반대하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 반대하는 행위는 똑같이 반대하는 다른 반응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불의에 항거하는 수단으로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 안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선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것에 대한 최선의 비판은 그보다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관상에서 나오는 순수한 저항의 수단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과거를 비판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다만 더 나은 일을 지금 하는 것, 실제로 이것이 나의 동기를 더욱 순수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뒷담화에서의 험담은 나를 높이고 나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결국 나는 잘했는데 너는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나를 꼭대기에 머물게 합니다. 결론은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각이 가장 흔한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숙하지 못한 조직이나 단체를 피하고 그것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말없이, 그리고 아무리 작은 선이라도 단순하게 지금, 여기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에 반대하기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에 필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부정적 비판보다 긍정적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배운 지혜입니다.
성찬례는 내어주는 몸을 받아들여 나를 내어주면서 관계 안에 잉태된 말씀이 출산하는 현장입니다. 부정적이고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긍정적이고 단순하게 관계 안에 선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창조가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육화의 도구로서 살아가는 프란치스칸의 성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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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닦는 죽음
http://www.ofmkorea.org/ofmkfb/563899
이마르첼리노M 2024.11.28 22:39
“먼저 잔의 속을 깨끗이 닦아라.” (마태 23,25-26) 미숙한 영성은 자기방어에 많은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도덕적 우위를 점령한 사람들은 우리를 하느님께 데려가지 못합니다. 도덕적 성취가 하느님 사랑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위선을 드러낼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힘을 모았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도덕주의가 신비주의의 영역을 넘으려면 죽음이라는 확실한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이 죽음은 일상의 작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내건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내어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죽기 싫어서 사랑의 대용품을 사용하려는 현상을 자주 봅니다. 이 대용품은 영성 생활의 초기에는 자신을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죄가 무엇이고 죄를 짓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에 눈뜨게 만드는 것은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에 있습니다.
내면을 깨끗하게 닦는 것과, 땅에 떨어진 밀알의 죽음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인식 안에서는 겉과 속이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성취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인과 응보적인 하느님으로서 그들이 만들어 낸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으로 가득 찬 그들의 위선을 질책하셨습니다. 본질적인 하느님의 진리에서 벗어난 그들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도덕으로 포장된 자기 내면을 하느님으로 바꿔서 하느님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온통 우리 자신에 관한 것들입니다. 율법 준수, 계명 준수라는 명분으로 행위 동시적 만족과 싸우기 위하여 씨름하는 것이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으로, 복음으로, 진리로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다는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업적과 공로가 마치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미숙한 종교는 자기방어에 능한 사람만을 만들어 냅니다. 초기 단계의 신앙인들은 대게가 옳고자 하는 욕구,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려는 욕구,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욕구, 자기중심적 욕구를 따라갑니다. 이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진실로 찾는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자신을 찾는데 그렇게 하면 하느님이 자신을 알아 주실 것처럼 생각합니다. 보이기 위한 동기들이 그렇게 재촉합니다.
사랑하려는 의지보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성장이 시작됩니다. 구원은 많은 양의 기도와 희생과 제물을 바쳐서 얻는 구원이 아니라 넘치도록 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얻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신비, 우리가 필요한 것은 창조 때부터 이미 주어져 있고 아름답고 순수한 본질을 보는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해 너그러우셨으나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화를 내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바꿔 놓지 않은 그것을 후대에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변화는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순수한 동기가 순수한 변화로, 순수한 변화가 순수한 관계로, 순수한 관계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발견되는 장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면 도덕적 승리를 앞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승리일 뿐입니다. 우월한 상태로는 하느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도구적 존재가 될 때만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내면의 깨끗한 상태는 죽음으로써 유지됩니다. 낮아지고 내려가는 죽음, 내려놓고 허용하는 죽음, 밀알의 죽음은 그렇게 주님의 영이 활동할 공간을 만듭니다. 내가 차지한 자리가 많을수록, 내가 운전대를 계속해서 잡고 있을수록, 그분은 내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잔의 속을 닦기 위해 거울에 비친 나를 보아야 하고 거울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 프란치스코는 나의 거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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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령의 결과
http://www.ofmkorea.org/ofmkfb/564141
이마르첼리노M 2024.12.05 22:38
위임받은 권한을 자기 것으로 남용한 결과
무지와 무책임과 무능에서 나온 결과
자아도취의 심각한 중독의 결과
이기심과 과도한 탐욕의 결과
미친놈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쿠데타, 내란이라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민중의 외치는 소리가 방방곡곡 터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명분도 절차도 없이 몇몇이 앉아 벌인 참극,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한 이들이다.
촛불의 힘으로 온 국민이 저항해야 한다.
신뢰의 상실
불공정성 초래
불평등 심화
민주주의와 정의의 훼손
나라와 공동체 발전 저해
경제와 금융의 손실
사회적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방해
불신과 정치 불안
사회적 혼란
국민의 사기 저하
국격의 이미지 실추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앙이다.
누구를 위한 계엄인가?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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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 (성탄절 묵상)
http://www.ofmkorea.org/ofmkfb/564668
이마르첼리노M 2024.12.24 00:21
성탄은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비는 육화의 신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육을 선택하셨기에 볼 수 있는 물질세계에서 그분을 발견하고 만나고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말씀이 사람의 육신으로 되었기에 하느님을 지금 여기서 오감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순간 육화가 있으면 다른 곳에는 왜 없겠습니까? 온 우주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육화된 말씀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 안에 당신을 감추십니다. 그래서 오직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만이 그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태계의 살아있는 무수한 개체 안에서 발견하는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이 진리로 표현된 말씀으로 인식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처음 만난 곳 그곳은 말구유였습니다. 말구유 같은 우리의 관계들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선으로 살리시는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몸짓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낮추심이 육화의 겸손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위대한 사랑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내려가는 길이 진리요, 내려놓는 길이 아름다운 길이며 허용하는 놓아주는 해방과 자유의 길이 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고자, 우리와 동등해지고자, 우리를 섬기기 위해 겪으셔야 했던 하느님의 갈망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일깨워 또 다른 사랑으로 전달되며, 선은 그렇게 자발적이며 확산하는 신비로 관계를 비춥니다.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의 처지에까지 내려오신 성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사랑을 찾다가 사랑을 만나 사랑이 되어가는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창조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말씀과 실천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나를 도구 삼아 선을 행하십니다.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육화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와 기쁨과 해방을 경험합니다.
예수를 따르다가 사랑을 배우고, 용서하는 사랑이 내어주는 몸이 되는 신비, 길에서 길을 만나 길이 되어가는 도구적 존재가 육화의 겸손한 사랑을 배워 관계 안에 선으로 태어나는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어주는 사랑이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왔다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관계 안에 사랑을 낳습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노래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내어주는 사랑과 받아들이는 사랑이 만나는 곳에 하느님의 현존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갈망과 인간을 찾으시는 하느님의 갈망이 만나는 곳에 하느님의 현존이 있습니다. 그리움은 그리움을 낳고 원천의 그리움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에 그리움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인도해 줍니다.
하느님의 가난하심과 겸손을 배우는 현장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선택하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있으며 나약함으로 나약함을 구원하시는 육화의 신비가 있습니다. 인간과 동등해지기 위하여 하느님의 동등성을 포기하신 예수님의 육화는 사랑의 신비이며, 사랑은 동등할 때 사랑하기 쉽고, 더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길 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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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의 시간에 (미래에 꽃피게 될 희망 안에서 위대한 만족이 겪는 고난들)
http://www.ofmkorea.org/ofmkfb/564874
이마르첼리노M 2024.12.31. 03:17
송년의 시간에 (미래에 꽃피게 될 희망 안에서 위대한 민족이 겪는 고난들)
점점 가까워지는 새해의 발걸음
보내고 맞이하는 송년의 시간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맞이할 것인가?
아닌 줄 알면서도 가고 싶은 길
설익은 욕망의 그 감미로움
그릇된 일의 열정
어리석은 이들끼리 나눠 갖는 공감이
혼돈과 어둠을 이 땅에 몰고 왔다.
강하고 안정되고 통제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통제하는 관계를 만든다.
땅과 연결되지 않은 하느님을 믿으며
피와 살을 가진 삶과 연결되지 않고
종교심 안에 하느님을 가두고
행동하지 않고 말만 앞세우는 이들의 자만심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내란과 국가적 재난 속에서도 믿는 이들은 희망을 본다.
추락하는 인간성
인간의 자유가 저지르는 참혹한 실상
더는 내려갈 곳이 없다.
바닥의 진실에 직면해야 희망이 보인다.
공존과 공생의 길에는 자만과 공허의 혼돈을 거쳐야 한다.
바닥과 기초를 튼튼하게 하는 과정을 본다.
진리는 언제나 관계적 사랑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마음
물리적 세계와 주변의 세상과 씨름하지 않는 이론과 사상은 공허한 진리다.
인류에게 지금 필요한 진리는
구체적이며 우리의 실생활과 연관성이 있는 진리다.
우리가 실제로 본받을 수 있고 인간적 기준을 세워주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너와 나의 관계적 현실에 대답할 수 있는 진리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사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시간과 공간과 마음의 여백뿐 아니라 너를 품어낼 여백은
언제나 나의 죽음 뒤편에서 마련된다.
나에게서 내가 죽는 그 죽음의 순간들이 영이 활동할 여백을 만들기 때문이다.
성탄의 신비가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 연결되어 있다.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볼 수 있는 사랑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미래에 꽃피게 될 희망 안에서 과정의 죽음을 본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열정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이 만들 위대한 삶의 축제를 미리 본다.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의 기쁨이 커지면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래에 꽃피게 될 희망 안에서 위대한 민족이 겪는 고난의 현장에서
아픔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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