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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기숙사 생활] “엄격한 규율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애들이고 남자 기사들이 많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기사들은 기숙사가 따로 없었지만 혹 풍기가 문란해질까 봐 그랬겠죠. 회사는 우리를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낮에 아저씨들하고 하루 종일 일하는데 무슨 사고가 없었겠어? 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미리 예상하고, 어린 애들을 지키려고 그렇게 규율을 엄격하게 한 것이었겠죠.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에는.” 회사로서는 풍기 문란을 예방하고, 당시 어리고 순진했던 버스 안내양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숙사를 무단이탈하거나 이유 없이 외박을 할 때는 한두 번 정도는 봐 줬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예 회사를 나가야만 했다. 그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밤에 뭔가 먹고 싶으면 바구니에 돈을 담아서 옆 가게에 전달한다. 그러면 가게에서는 그 바구니에 먹을 것과 잔돈을 담아서 다시 보내 주었다.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요.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름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돌이켜 보면 활짝 핀 꽃과 같이 화려했던 날들이었다.
부마 항쟁 때였다. 그날도 진숙 씨는 남포동을 지나는 86번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때도 계엄령 때문에 열 시만 되면 도로가 차단되었다. 낮에 남포동을 지나는데 학생들이 막 울면서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최루탄이 뭔지 몰랐던 진숙 씨는 덜컥 겁이 났다. 진숙 씨는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최루탄 냄새를 맡고 울고 있었고, 군인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저항도 못 하고 맞고 있었다. 또 장갑차들은 시내 큰 도로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짜 겁나기는 겁나데요.” 진숙 씨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포동에서 학생들을 잡아서 끌고 가는 것도 많이 봤다. 일부 학생들이 진숙 씨네 버스에 올라타기도 했다. 아무리 돈을 받는 것이 진숙 씨의 임무라고는 하지만 그 학생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너무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아예 받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숨겨 주고 싶고, 안 타도 억지로 버스에 태우고 싶고 그런 마음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버스에 있다 보면 사람들이 하는 온갖 얘기들이 들린다. 어느 날에는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광주의 하천에서 핏물이 하루 종일 내려온다는 소문도 승객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버스는 하루 종일 라디오를 켜 놓는다. 그래서 진숙 씨는 다른 사람들보다 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1979년 10·26 사건도 버스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진숙 씨도 나라의 큰 어른이 총탄에 쓰러졌다는 얘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쉬는 날에 부산진구청에 마련되어 있던 빈소에 조문을 가기도 했다. 1983년에 있었던 아웅산 테러 사건도 버스 안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그때도 큰 충격을 받았고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84년의 서면 대아 호텔 화재 사건 때에도 현장에 있었다. 당시 32번 버스가 화명동에서 서면을 지나 전포동으로 갔기 때문에 생생하게 현장을 기억하고 있다. 화재 때문에 서면 로터리가 엉망으로 막혀서 버스가 꼼짝을 못했다. 화재 현장을 쳐다만 보고 있자니 무척 마음이 아팠다. “서면 대아 호텔에서 불이 났을 때 무척이나 안타까웠어요.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창문 밖으로 소리치고 하는데……. 옥상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런데 우리는 길이 막혀서 쳐다만 보고 있을 뿐 어쩔 수가 없잖아요. 나는 남의 지붕에 떨어지는 사람을 바로 봤거든요. 그때는 정말 끔찍했죠.” 한 번은 버스 승객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우연히 고향 소식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날 일을 하는데 나랑 같은 진주 사람들이 탔어요.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진주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때 내가 좋아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걔는 억수로 부잣집 애고 나는 가난한 집 애고. 신분 차가 나다 보니까 좀 사귀다가, 헤어진 것도 아니고 안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런 애매한 관계였어요. 그런데 어떤 손님이 그 애 얘기를 하는 걸 우연히 엿들었어요. 그 남자 집이 진주에서 방앗간을 했거든요. 그 손님들이 하는 얘기가, 방앗간 집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패물을 얼마나 했고 결혼 준비에 돈을 얼마를 썼고 하는 그런 얘길 하는 거예요. 포기를 했는데도 막상 그 말을 들으니까 충격을 받아 들고 있던 돈을 땅에 다 쏟아 버렸지요.” 버스에서 어떻게 그런 우연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렇듯 버스는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온갖 얘기들을 다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27세, 버스에서 내리다] 진숙 씨는 버스에서 내려올 때, 이미 버스 안내양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점점 버스는 손님이 줄어들고 있었고, 그에 상응해서 자가용과 택시가 늘어나고 있었다. 또 지하철도 곧 개통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스에 앞문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앞문에 있는 요금함에 토큰을 넣었다. 처음 토큰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많이 편했다. 돈을 일일이 헤아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큰의 사용은 버스 안내양의 종말을 앞당긴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진숙 씨가 일을 그만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 안내양들은 대량 해고됐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지어졌던 기숙사들은 부서지고 다른 용도로 대체되었다. 대도시에서는 1985년에서 1986년을 거치면서 버스 안내양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시골에서는 그로부터 1~2년 정도 더 존재하다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1989년 안내원을 태우도록 규정한 「자동차 운수 사업법」 33조가 삭제됨으로써 버스 안내양의 역사는 창고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버스 안내양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버스는 서민들의 꿈과 희망, 삶의 애환을 싣고 달리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버스 창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접하고, 버스 안에서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배운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 에어컨 빵빵한 버스를 타고 부산 시내 여행을 다녀 보는 것은 어떨까. 비록 이제는 버스 안내양들의 낭랑한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