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호명하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김춘수 시인은 소외와 익명성으로 존재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인간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그들을 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꽃은 이름을 상실했다. 그것은 오직 은유의 보조관념이거나 추상적 개념으로 화해 버린 것이다. 아니면 디지컬 기기 속의 아이콘으로만 존재한다. 이는 근대 문명의 특성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근대 이후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이거나 부속물이거나 아니면 배경에 불과했다. 자연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될 수 없었고 우리가 자연을 찾더라도 그것은 단지 지금 여기를 떠나고 싶은 가상의 피안의 세계만으로 존재할 뿐이다.
문효치 시인은 이렇게 사라진 꽃들의 이름을 다시 살려낸다. 이름을 잊고 들꽃으로만 존재하거나 어느날 소풍길에 단지 스마트폰 사진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꽃들의 잊혀진 이름을 다시 호명한다. 그렇게 불려진 꽃들은 그것이 가진 구체적 이미지를 획득한다. 개념의 추상성과 아이콘의 대표성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꽃이 가진 개별적 구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꽃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다음 시를 보자.
지구의 안테나
오늘은 오리온좌로부터 들어온 소식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이웃의 많은 별들을 한 번씩 방문하여
이름 지어 주었노라고
꽃대마다 전기가 켜지고
파르르 떨림으로 만들어진 말들
어제는 태풍의 분노가 있었노라고
답신을 보낸다
요즈음 자주 화가 나는 지구
갱년기인가
다시금
얼굴 화끈 열이 오른다고 타전한다
- 「참취」 전문
참취는 향기롭고 맛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산나물의 하나다. 시인은 그 참취의 예쁜 꽃을 보고 “꽃대마다 전기가 켜”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기불의 떨림으로 우주와 소통을 한다고 상상해본다. 그런데 그렇게 소통하면서 하는 참취의 말은 지구가 갱년기라는 것이다. 갱년기에 얼굴에 열이 오르듯 지구가 점점 뜨거워져 사라져갈 위기가 오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향기로운 참취도 사라져갈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인이 참취라는 풀꽃의 이름을 불러줄 때 자연은 그 자신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만약에 우리가 들에서 풀을 하나 발견했다고 하자. 그 이름을 몰랐을 때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 소용되는 것인지도 몰랐을 때 그것은 이름 없는 들풀에 불과하다.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할 이유는 지구를 지키자는 아주 추상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그 들풀이 우리가 즐겨 먹는 비싼 산나물 참취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소중한 자연자산이 되고 그것이 소멸될지 모르는 미래의 앞날이 구체적인 나의 삶의 문제로 걱정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렇게 그것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확실한 구체성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름을 불러 존재의 구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삶의 구체성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가 머리 풀고 와
히히 우스워
머리 풀고 나를 놀래켜
낄낄 우스워
술 한 잔만 마셔도
그녀는 온 몸에 붉은 해가 떠
머리를 풀어도 옷을 벗어도
그녀는 해야
...(중략)...
암귀신 서너 마리
돌아가며 춤추고 있어
돌고 돌다가
돌아버려
이 산의 양지바른 곳에
핏방울 뚝뚝
돌아버린 그녀가 가고 있어
- 술패랭이꽃 부분
시인은 술패랭이꽃을 보고 옛날에 한 동네 한 명쯤을 있었을 미친 여자를 떠올린다. 이 꽃의 모습에서 산발한 여자의 머리 모습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꽃의 밝고 선명한 붉은 색으로부터 해를 떠올리고 미친 여자가 겪었을 격렬한 정서적 충동과 그것에 이끌린 광기 그리고 그 때문에 초래될 비참한 죽음까지도 떠올린다. 이런 일련의 연상을 통해 시인은 술패랭이꽃이라는 구체적인 자연물을 통해 우리 삶의 일부분이기도 했던 어떤 한 존재의 삶을 다시 구체적으로 돌아보는 계기를 얻게 된다. 동네 마다 있던 미친 여자의 모습을 통해 그 미친 삶을 가능하게 했던 어느 한 시대의 우리의 삶의 모습과 그런 형상을 통해 떠올리던 과거 삶의 한 시기를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다시 돌아보게 한다. 자연은 자연만으로 소중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연이 불러일으킨 정서와 그 정서의 토대가 되는 삶의 현장과 긴밀히 관련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한 것이다. 이 시는 바로 이런 점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 준다.
다음 시도 마찬가지이다.
밤이 오면 싫어
암내 난 고양이
눈 크게 뜨고 와
그놈에겐
풀도 밥이야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
윽윽 크르륵
고압의 전기가
온 세상에 방전돼
세상은 온통
도둑고양이
- 쥐꼬리망초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의 형상을 기억하는 것이다. 쥐꼬리망초는 열매가 맺는 줄기 부분이 쥐꼬리 모양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꽃이다. 시인은 이런 이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도둑고양이를 떠올리고 가련한 꽃을 괴롭히는 세상의 잔인함을 토로한다. 물론 실제로 고양이가 이 풀을 쥐로 알고 잡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쥐꼬리망초처럼 연약하고 힘없는 것들을 괴롭히고 이들에게 갑질하는 존재들이 득세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풀의 이름에서 이렇게 세상의 모습을 다시 읽는다. 이렇듯 꽃의 이름을 불러 그것의 구체적인 형상을 불러오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은 사물을 대신하는 기호이다. 그런데 왜 말로 사물을 대신해야 할까? 그 사물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없는 사물을 불러내는 행위이다. 없는 것을 환기하는 이 언어의 힘이 주문이 되고 기도가 된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바로 이 언어의 환기적 힘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바람타고 건너오는 말
나를 흔들며 몸 안으로 들어온다
말은
사랑이 되고 때론 바늘도 되지만
우주의 비나 울음도 된다
몸 안에
작은 정자 짓는다
- 까마중 전문
사실 ‘까마중’이라는 까만 열매를 맺는 풀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시가 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산에서 한번쯤 봤을 만한, 눈에 띄는 까만 열매가 그 생김새를 잘 표현한 “까마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선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느낌을 시인은 말이라는 화두로 잘 표현하고 있다. 말은 공중에 바람처럼 떠돌 때 그것은 진정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말이 아닌 말들이 지배하고 있다. 정치가들의 내용 없는 정치 선전이나 눈만 뜨면 쏟아지는 각종 상품 광고들은 이런 떠도는 바람 같은 말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이긴 하지만 나를 뒤흔들지 못하는 가짜의 언어들이다. 이런 언어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피상적인 관계들의 스침만이 존재하는 단절과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일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은 ‘까마중’이라는 존재의 이름을 통해 이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한 존재의 모습을 오롯이 불러내는 하나의 단어가 “나를 흔들며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박힐 때 그 존재는 가장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그 존재를 나타내는 말은 비로소 “사랑이 되고 때론 바늘이 되”는 것처럼 나의 육체적 감각이 되고 “우주의 비나 울음” 같은 어떤 질서와 이치의 비의가 된다. 그것은 다음의 시처럼 영적인 경험과도 연결된다.
강신 중이다
온몸이 떨리고
귀신의 말이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세상은 온통
작두날
귀신의 힘이 씌우지 않으면
발은 잘리고 만다
땅속의 비밀을 꺼내어
하늘과 내통한다
물렀거라
썩 물렀거라
- 바람꽃 전문
높은 지대에 하늘을 보고 피어있는 ‘바람꽃’을 보고 시인은 강신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절멱 끝에 피어 있는 이 예쁜 꽃에 ‘바람꽃“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귀신과 내통할 수 있는 이런 힘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말의 힘이다. 이렇듯 한 존재의 이름을 통해 말의 본래적 힘을 회복하려는 노력 이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