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92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개울물 소리없이
(澗水無聲遶竹流)
왕안석(王安石) 선사
간수무성요죽류
澗水無聲遶竹流
죽서화초농춘유
竹西花草弄春柔
모첨상대좌종일
茅簷相對坐終日
일조불명산갱유
一鳥不鳴山更幽
개울물 소리도 없이
대밭을 감싸며 흐르고
그 대밭 옆(邊) 꽃과 풀은
봄기운에 흠뻑 취했구나.
초가삼간 풀집 처마를 보며
하루 온 종일 앉아 있어보니
한 마리 새조차도 울지 않아
깊고 깊은 산이 더욱 그윽하네.
"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고대 중국(中國)
송(宋) 나라 때(時代)
개혁정치(改革政治)를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人物)로
흔히
우리나라
조선시대(朝鮮時代)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상당부분 비교(比較)되는
인물(人物)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과
후학 인재양성(人材養盛)을
목표(目標)로 내세웠던
국가적 정책에
신법(新法)을 실현하고자 하며
수많은 파란(波亂)을 겪었던
그(왕안석)는
만년(滿年, 노후)에
모든 관직(官職, 벼슬길)에서
스소로 물러나
종산(鐘山)에서
남은 여생(餘生)을 보냈다.
당대(當代,
당면한 시대)의
뛰어난 학자(學者, 철학자)요
문인(文人,
詩書畵, 작가)이기도 했던
그(왕안석)는
구양수(歐陽修)를
스승으로 하여
명석(明晳)하여
우수하고 뛰어나며 박력있는
자신만의 문체(文體)를
만들어 냈다.
독창적인
문장(文章, 글,
언어, 문장, 문필가(글씨)의
대가(大家)가 되어
당(唐), 송(宋) 시대
팔대가(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 꽆아 치기도 한다.
자연(自然)을
읊은 시(自然詩, 목가시)가
특히 뛰어나고 우수하며
유교(儒敎,
성리학, 선비학)와
불교(佛敎)의
경학(經學, 경전과 학문)에도
두루 널리 매우 밝았다.
불교(佛敎)에
심취(深聚, 깊이 빠져듬)하여
수많은 경전(經典)을 찾아
열람(閱覽)하고
당대(當代,
당면한 시대)의
고승(高僧大德)들과 만나
많은 대화(對話)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종산(鐘山)의
초야(草野)에 묻혀 살 때
왕안석(王安石)이 짓은(作)
자연시(自然詩)로
고요(高窈)한
자연(大自然) 속에
선(禪, Zen)의 경지(境地)가
은근히 피어나는
선시(禪詩)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시(詩, 게송)이다.
※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송(宋) 나라 때(時代)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이자
사회 개혁(改革)에 앞장섰던
정치가(政治家)이다.
장시성(江西省,
現 푸저우시) 출신으로
북송(北宋)
시기(時期, 시대)의
시인(詩人), 문필가(文筆家)로
활약(活躍)하였다.
자(字)는 개보(介甫)
호(號)는 반산(半山)이다.
그(왕안석)는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等等)
정치적으로
신법(新法)을 주장하며
수많은 개혁(改革)을 하려고
노력(努力)했지만
당쟁(黨爭,
붕당정치, 당파싸움)은
더욱 격화(激化一路)하고
정치(政治)가
혼란(混亂)에 빠지면서
큰 성과(成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의
보수파(保守派)는
그(왕안석)의 개혁정치(신법)을
평가절하(平價切下) 무시하고
매도(罵倒)했지만
그(왕안석)의
문장력(文章力, 문체)만은
동료와 정적(政敵)들이
모두 아울러
이구동성(二口同聲 한 목소리)
인정(認定)할 만큼
뛰어났다.
고대 중국
당나라, 송나라 때 활동한
문학가(文學家, 문장가)
8명(八大家)
즉,
중국 근현대 이전의
문장 형식과 내용, 산문 이론을
정립하여 퍼트린 업적이 있는
인물(人物)들로
흔히
당송팔대문학가
(唐宋八大文學家)라고도
불리우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中) 한 사람(一人)이다.
시인(詩인)으로서의
왕안석(王安石,1021~1086)은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
712 ~ 770)의 시(詩文)에
그 진가(眞價, 참된 가치)를
처음으로 높이 평가하여
그 후 송(宋) 나라
시(詩文學)의 세계(世界)에
두보(杜甫)를 존경하는
새로운 풍조(風調, 시대흐름)를
처음으로 개척했다.
참고적으로
두보(杜甫, 712 ~ 770)는
자(字)는 자미(子美)
호(號)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중국 고대 시(詩文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었음으로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두보)의 작품은
두시(杜詩) 또는 시사(詩史)
라고 부른다.
청련거사(靑蓮居士)
이백(李白,
이태백, 701~762)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당면한 시대)
정의(正義, Justice)가 없는
경제구조(經濟構造)로
고통(苦痛)받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民衆生)을
시(詩, 문장)로 묘사(描寫)한
시인(詩人)이다.
※
ㅡ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후배(先後輩)
제현(諸賢)님들 께서는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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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