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믿음 (잠 26:7-9)
7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8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때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9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이 시간에 “잘못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은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결론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집니다.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지금 이 시간에 주님께서 이 질문을 우리에게 하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부르셔도 천국 갈 확신 있다고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울이 왜 이런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했을까요? 고린도교회는 잘못된 믿음이 많기로 유명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열매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지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잘못된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1.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잘못된 믿음입니다.
7절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나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 여기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을 장애인의 다리에 비유합니다. 가고 싶어도 다리가 약하면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솔로몬과 같이 풍부한 지혜의 말씀을 가졌어도 믿음이 없어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지식이 풍부하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것을 외우고 그것을 전파하고 가르칠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2:17-19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했습니다.
귀신들도 알기는 우리보다 더 잘 압니다. 하나님도 알고 예수도 성령도 성경도 압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기에 마귀일 뿐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주로 부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까? 감사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까? 이처럼 지식만 있지 행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란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기도를 배웠으면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찬송을 배웠으면 찬송생활해야 합니다. 감사, 충성, 전도, 사랑, 회개, 겸손, 공경, 헌금, 교회출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영적실제가 없는 믿음이 잘못된 믿음입니다.
8절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여기 영예는 어떤 일을 수행해야 할 높은 직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물매는 돌을 던지는 소형 투석기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물매는 두 끈이 달린 가죽에 돌을 담아서 돌리다가 한 끈을 놓으면 날아가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돌을 물매에다 단단히 매놓으면 날아갈 수 있겠습니까? 던진다고 돌리지만 빈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난 연평해전 때 우리 아군의 교전수칙이 얼마나 불리한 수칙이었습니까? 경고방송 시위기동 차단기동 경고사격 그 다음에가 격파사격인데 격파사격은 적이 먼저 공격해 올 때만 사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해야 비로서 사격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 사격마저도 적 군함의 물속 아래만 쏘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니 북한이 우리 군대를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처럼 물매에다 돌을 묶어두면 돌이 날아가지 않습니다. 빈탕입니다. 헛탕입니다. 이처럼 미련한 자에게 높은 직책을 주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우리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군 뽑을 때 잘 뽑아야 합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의무감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기회주의에 능하고 주님 편에 서지 않으면 그건 허깨비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도 허상을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의 결과가 따르지 않는 믿음이 허상의 믿음입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고 믿었는데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신다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돕지 않는다면 그 역시 중대한 문제입니다. 믿음에 착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신학자 로이드존스의 예화를 보면 신유의 복음을 믿다가 헛탕 친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몸에 암이 퍼져나가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우리 질고를 담당하셨으므로 나는 나은 자이므로 신유의 복음 외에 다른 것은 사실상 필요가 없다. 그 뿐 아니라 회중 앞에서나 매사의 삶에서 예수 안에서 치료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못되어 그 여인은 죽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신유의 복음이 잘못일까요? 이 복음을 끝까지 믿은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조금도 잘못이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보면 우리 병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중대한 실수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의 원리만 알았지 그 실상에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 부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미 복음을 안 자는 회개하며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죄를 버리고 낮아지고 사랑하며 경외하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루신 치유가 실상으로 다가옵니다. 혹은 치료할 좋은 방법을 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약5:16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도 좋지만 회개도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바벨론과 로마가 쳐들어 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100%를 넘어 200% 쯤 믿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하나도 들어주지 아니하시고 백성도 나라도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버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셨는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빈탕의 믿음이었습니다.
회개 없는 복음, 성령 없는 복음, 주님과 만남 없는 복음은 허상이지 실상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천국을 노래하지만 천국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지식에 머물지 말고 진실로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가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 믿음은 허상이 아닌 실상이 되고 우리가 주와 하나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 율법적 믿음이 잘못된 믿음입니다.
9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술 취한 자가 가시나무를 들고 있다면 그는 아무렇게나 휘둘러 자기도 상하고 남도 상하게 할 것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귀한 말씀으로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가지고 사람을 자기 기분 대로 정죄하고 죽이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하면 율법적 믿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은 좋지만 사랑 없이 그것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적용한다면 가시 채를 휘두름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경대로 한 것이라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3:8-10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했습니다.
사랑 없는 율법은 죽이는 율법입니다. 사랑할 때는 나쁜 점이 발견되지 않고 발견되어도 이해하지만 사랑이 식어지면 좋으냐 나쁘냐 선이냐 악이냐 율법의 눈만 밝아져 서로 잘못만 지적하고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는 천사노릇하면서 밖에만 나오면 형사 노릇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못 봐주겠더군요. 집에서는 천사가 왜 남에게는 그렇게 그렇게 합니까? 스스로 정의의 사자로 자처하면서 모든 다툼과 불화와 전쟁의 중심에서 서 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5) 하셨습니다.
비판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사랑에 달렸습니다. 형사의 눈보다 부모의 눈을 가지고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책망해 주시기 바랍니다. 율법적인 믿음은 술 취한 자가 가시 채를 휘두르듯 나를 죽이고 남을 죽이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두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믿음이 어떻게 평가될지 깊이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지식은 있지만 행함이 없는 건 아닌지, 진리에 섰지만 회개가 없는 건 아닌지, 아니면 진리는 있지만 사랑이 없는 율법적 믿음은 아닌지 이 시간 함께 살펴보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