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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
성경본문 : 에스라 5:1-5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3.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고하였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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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시작했든지, 끝은 바르게 맺어야 아름답다. 정리되지 못하고, 끝맺지 못한 일은, 차라리 시작하지 아니한 만, 못할 때가 많다. 특별히 건물의 공사가 그렇다. 공사를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건물은 더 음산하고 흉하다.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의 전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도구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정성을 기울여, 좋은 마무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의욕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지만, 끝까지 성공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1)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였을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게 된다.
(2) 시간이 점차 흘러가면서, 처음 열심히 점차 식어져가고, 게으름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3) 쉬지 못하고 몸살날 정도로 뛰지만, 영적인 불균형으로 인해, 한쪽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빌 하이벨스'목사는 '인간경영' 책에서, 그것을 '선택적 게으름'이라 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을 부여해 주셨다. 그런데 직장에만 열심히 하고, 가정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거나, 가정은 잘 돌보지만, 교회 일을 소홀히 한다.
교회 일을 빙자하여, 가정이나 직장에서 해야 할 일에 게을리 함으로, 문제가 생기게 됨을 말한다. 그렇게 될 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나, 가족에게는 외면당하고, 교회에서는 인정받으나, 직장에서는 무시당하고, 사회에서는 존경받으나, 교회에서는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 된다.
물론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기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영적인 게으름이나 불균형에 빠져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이,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고, 영적으로 깨어 일어나는, 은혜를 받아야 하겠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리는 고난주일이고, 4월 4일은 예수님이, 죽음을 깨트리고, 다시 사신 부활주일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고난의 형틀인 동시에, 그 형틀의 죽음을 깨트린,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부활의 신앙이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심지로 내려와, 기독교를 여러 가지로 모방하고 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 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린다.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 없다. 그것이 부활이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다.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부활 때문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1. 침묵을 깨신 하나님
지난주일 말씀드린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을 재건하려 했을 때, 대적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요한 훼방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기간이 16년 간 성전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런데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계속 침묵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될 때, 고난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일을 고통가운데도,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시며, 침묵하며 참고 기다리신다.
시간은 아픈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는, 고통을 경감시키는 마취제 역할을 하지만, 영적으로 나태한 사람에게는,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수면제 역할을 한다.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으로 인해, 중단 된지가 벌써 1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공사가 중단되었던 초기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 하든지, 성전을 재건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점차 시간이 점차 흘러, 16년이 지났을 때, 성전재건에 대한 의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자기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그들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들은 오직 부자가 되어서,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재건 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훼방한 마귀의 전략이다. 그들은 영적인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성전공사를 중단하고 있는 동안, 별다른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자는 일상적인 삶,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신,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영적 깊은 잠에 빠졌다. 과거 바벨론에서의 삶이나, 현재 예루살렘에서의 삶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영적 깊은 잠에 빠져,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하게 하신다.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여기서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한 것은 자기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덮쳐서, 사로잡혀서' 예언하였다. 예언자는 자기의사에 위배되더라도, 부득이 전달받은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했고, 때로는 행동으로 나타내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학개서와 스가랴서를 보면, 하나님이 오랜 기간의 침묵을 깨뜨리시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오랜 기간의 침묵을 깨뜨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내용인가?
(학1:2-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여기에서 판벽한 집은, 지붕을 덮고 벽판을 댄 집을 말한다.
이는 성전공사가 중단된 지, 16년 동안 성전은 흉물스러워졌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보면서, 아무 자극을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은 성전 재건이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자기 집 건축에만 급급한 모습을, 자신들의 모습을 한번 돌이켜 보라고 책망하는 말씀이다
과거의 그들은 임시처소에 살면서도, 먼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하는 일을 위해, 자기들이 소유했던 재산을, 기꺼이 성전 건축 헌금했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셨다.
(학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오늘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영적 잠에 빠져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불신자처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일관하는 삶을 산다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알기 바란다. 또 부활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자각하고, 어서 깨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깨어 일어나, 일치된 마음과 헌신한 이스라엘
예나 지금이나,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있는 영혼을 일깨우시는 도구는, 하나님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전하여질 때, 일어나는 반응은 3가지다.
(1) 마음을 열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요나처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2) 깨달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미루기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롯과 같은 사람이 있다.
(3) 즉각 자리를 떨고 일어나,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 순종의 사람이 있다.
선지자가 책망하자,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지도자들이 앞장섰다.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지도자들이 앞장섰다.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되려면, 앞장서는 자가 되라. 유다지파는 항상 선봉에 섰다. 유다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온 것을 볼 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유다지파는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선봉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서 '일어나'는, 단순히 몸을 일으키는 것만 아니라, 중대한 일을 하기로, 마음에 결단하고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손발을 맞추는 뜻이 아니다. 각자 자기의 위치에, 힘을 최대한 발휘하여, 목표를 이루는 일에, 다 같이 마음이 일치했다는 뜻이다.
과거에도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전 빈터에 제단을 쌓고, 첫 번 제사를 드릴 때도, 모범을 보이며 앞장섰던 지도자들이다(스3:2). 지도자들이 앞장서자, 안일한 백성들을 신랄하게 책망한 선지자들도 함께 일어나, 유다 지도자들을 도와, 성전재건공사를 합류했다.
지도자들은 함께 일 했다. 함께 일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동역자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 예배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 기도도 혼자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모세는 기도할 때,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았다.
영적 전쟁에서는 절대적으로 동역자가 필요하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를 낸다. 개미도 모이면 사자를 잡아먹는다. 나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라고 해서, 동료는 아니다. 마음과 뜻이 모아져, 함께 일어나는 자들이 진정한 동료이다. 특별히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동역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신다. 하물며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우리에게야, 얼마나 많은 동역자가 필요하겠는가? 교회가 먼저 하나되어, 함께 협력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이런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큰 도전을 받고, 마음이 하나되어 일어났다. 16년 만에 일어나는 변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옛날보다 더 좋고, 주변 환경이 성전재건공사를 해도 좋을 만큼 호전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그만큼 흘렀기에, 외적 조건은 더 나빠졌다.
그들은 단지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말씀 앞에서 벌떡 일어나,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재건공사를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16년 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조건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나?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다.
하나님이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셔, 바벨론 땅에서 70년 동안 종살이를 하던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막대한 물질과, 많은 수고를 해야만 했는데, 마음을 다 하나되게 해주셨기에, 착공이 가능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부부, 가족, 친구, 이웃, 교우간의 마음도, 하나가 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로 다투게 된다. 우리 마음을 창조하신 분,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요17장).
3. 영적 정체성이 회복된 믿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16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서로 마음이 일치되어 공사를 재개하였을 때, 제일 먼저 예상되는 애로 사항이 무엇인가?
16년 전, 성전재건공사를 방해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다. 이들이 과연 묵인하고 넘어갔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열심히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였다.
본문은 닷드내 총독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공사가 재개된 경위를, 바사 왕에게 자세히 적어 보고한 글이다.
(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다리오 왕 때, 닷드내 총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단시킨 성전공사를, 재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심문하듯이, 그 경위와 더불어, 주모자의 명단을 요구하였다.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닷드내 총독의 요구에, 당당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은 가관이다.
(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이스라엘 장로들의 답변을 통해서, 지난 16년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중한 2가지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1) 정체성의 회복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았다. 자기들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하였다. 물론 종이란 노예라는 말이며,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하고,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다.
(2) 사명감의 회복이다.
주인 되시는 천지의 하나님이, 그의 종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16년 동안 중단된 성전공사를, 재개하는 것임을 깨닫고, 재개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훼방과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에, 힘없이 굴복하여 16년 동안, 자기들의 정체성과 사명감을 망각한 채, 이방인과 다름이 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오로지 좋은 집을 짓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린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영적 잠을 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심으로, 자신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되는 사람인지를 깨닫고, 과감히 자리를 떨고 일어서서 중단되었던 성전공사를 재개하게 되었다.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여기서 '돌아본다'는 말은, 눈으로 주목한다는 뜻이고, '기다렸더라'는 말은 미완료 형으로, 왕의 회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이방인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16년 간의, 긴 침묵을 깨고, 성전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돌아보셨으므로, 성전 공사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리오 왕이 판단을 하셔서, 계속하게 할지 이제라도 중단을 시켜야 하는 것인지, 답을 주십시오'라는 상소문이다(6-17). 16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에, 하나님은 침묵만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고난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는지를 주목하고 계셨다.
자기들이 누구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정체성과 사명감을 망각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들을 더 이상 보고만 계실 수 없어서, 늦잠을 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우시어, 성전 공사를 재개하게 하셨다는 의미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그 음성을 귀로 들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돌아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요, 구원받은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요,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 되신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요,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망각하고, 내 힘으로 사는 줄 알고, 감사하지 않고,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았음을 회개하고,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은 계속 나를 돌아보아 주실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정체성을 찾고, 사명감을 회복하고,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가정과 직장과 교회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잘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결론
결론이다.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말한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전이다. 이 성전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거룩을 위한 싸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악한 것의 방해 때문에, 힘을 잃고, 거룩을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오늘은 고난주간이다. 우리가 깊이 있고, 믿음 있는 신앙인이 되어도, 고난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부활의 힘과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부어 주신다. 우리를 좌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재 상황이 조금 불리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영적으로 나태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앙망하며, 더욱 더 신앙으로 무장하여, 상황이 호전될 때를 인내로 기다리는, 지혜를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