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라와 바락 2 (삿 4:4-5)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오늘도 드보라와 바락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솔의 가나안왕 야빈과 시스라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자아(自我)란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 어떤 일을 하는 주체적인 나 자신을 의미합니다. 주체적인 나 자신이 자아입니다. 자아도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내 중심의 완고한 자아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 중심의 변화된 자아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완고한 자아가 어떻게 부서지고 변화되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왕 야빈의 압제의 그 고통 속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구원자를 일으키셨는데 그 이름이 드보라와 바락입니다. 그러니까 드보라와 바락이 자아의 변화를 위한 대안입니다.
그 방법이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드보라적 방법과 다른 하나는 바락적인 방법입니다. 그것이 말씀과 징계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자아처리이고 그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32:8-8에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말씀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4-5절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이 말씀에서 그러한 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에서 은혜를 받습니까?
1. 성경이 꿀송이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드보라'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의 뜻은 '꿀벌'이란 뜻입니다. 꿀벌이 되어야 합니다. 꿀은 무엇일까요? 시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꿀은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꿀벌이 되어 부지런히 성경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꿀벌은 꽃에서 부지런히 당분을 빨아 먹어 소화액을 혼합한 다음에 다시 토해내어 남을 먹이는 신기한 곤충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자들이나 요한도 말씀을 먹었는데 먹을 때 입에는 꿀처럼 달았으나 배에는 심히 썼습니다. 그래서 벌이 토하게 되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그 말씀대로 살고 또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제대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변화가 없다면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마11:21-24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꿀송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 속에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고 기적이 있고 천국이 있고 형통이 있고 건강과 부요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119:98에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했고, 162절에는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했습니다.
2.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이 드보라는 소개하면서 랍비돗의 아내라 했습니다. 여기 남편의 이름 '랍비돗'은 '횃불, 밝은 빛'이란 뜻입니다. 성서시대의 아내들은 성경을 모르면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고전14:35에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이처럼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면 말씀을 깨닫도록 조명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벧후1:20 이하에 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사사로이 풀지 말고 성령의 감동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 말씀을 나에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영적 체험으로 다가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떠나지 않아야 할 2가지가 있습니다.
3. 교리와 기도를 중요 시 하는 것입니다.
5절에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드보라가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했던 것처럼 우리가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이 2가지입니다. 먼저 ‘라마’는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장차 선지학교가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권위 있게 높여놓으신 사도와 선지자들이 세운 정통신학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정통신학은 성경의 줄거리 주요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앞서고 수준 높은 주의 종들의 저서와 가르침을 무시하지 마세요. 그 분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한 시대 귀하게 쓰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그 분들도 사모하다가 하나님께 받았고, 나의 영적인 문제들을 그 분들도 성경을 통하여 응답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십 년간 몸부림치며 깨달은 말씀들을 편히 앉아서 그냥 듣습니다.
그리고 벧엘 역시 높은 곳에 있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높은 곳에 있으니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을 제일로 삼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 잘해야 합니다. 교리와 기도, 이것이 성경해석의 두 기둥입니다. 교리를 통해서 성경은 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답을 가지고 성경을 접근합니다.
그러므로 정통적인 신학의 틀을 떠나지 말고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앞서 간 사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영적 구속사적으로 연구할 때 베드로가 말씀한 것처럼 어두운 가운데 샛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점점 원만한 이해에 다다르게 됩니다(벧후1:19).
4.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5절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했는데 드보라의 권위는 종려나무에서 나옵니다. 종려나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왕이 오신다고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했듯이 왕의 구원과 승리와 풍요의 상징입니다. 종려나무는 왕 메시아를 암시하는 그런 나무입니다. 아무리 여자이지만 사사가 종려나무 아래 있으니 왕의 권세를 나타냅니다.
성경에 상수리나무도 그런 비슷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도 상수리나무 아래에 거했고, 경건한 레갑 자손들도 상수리나무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상수리나무 아래 가면 참 신앙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만 보고 찾아가면 교회이듯이 당시 상수리나무가 어떤 종교적 표시였습니다. 야곱이 상수리나무 아래 우상을 묻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이 장소는 우상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종려나무 권세 아래 드보라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현명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이 자아처리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곳이 없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순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지배를 허용치 않으며 길길이 날뛰던 야생마를 길들이면 주인의 뜻을 따르는 명마가 되듯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복하는 사람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말과 나를 비워야 한다는 말을 오해하는데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빌2:7-9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듯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 거기서 자아처리가 이루어집니다.
삿5:7에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했듯 하나님이 왕이시고 그 말씀이 왕의 말씀이므로 그 말씀의 통치에 온전히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함이 곧 자아의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늘 보좌 영광의 자리를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셨듯이 내 중심의 사고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 자아처리입니다. 그러기 위해 무지하고 보잘 것없는 인간의 지식 다 내려놓고 진리이신 하나님과 그 말씀에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의 가르치신 바를 따라서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쓰실 수 있는 온전한 새 자아의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