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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6:1-23)
로마서 3-5장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하는 칭의(稱義)와 화해(和解)의 문제를 말한다면, 즉 신분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면, 6-8장은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된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성화(聖化)의 문제, 곧 삶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마치 바울이 칭의와 성화, 신분과 삶을 서로 구분하거나 분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 없는 부활이나 부활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이 칭의 없는 성화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성화 없는 칭의도 있을 수 없다.
양자는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구분일 뿐 시간적이거나 질적인 구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는, 5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단순한 법적인 선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배자의 전환, 곧 죄와 율법과 사망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과 성령이 지배하는 영역으로의 전환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 우리의 독특한 신분을 먼저 말한 다음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말한다. 신분은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맞지만 새로운 신분 없이는 새로운 삶도 없고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자나 공주로부터 이름 없는 거지의 삶을 요구할 수 없고, 이름 없는 거지로부터 왕자나 공주의 삶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 죄와 죽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삶을 요구할 수 없다. 죄와 죽음의 자리에 있는 자는 그에 맞는 삶이 따르게 되는 것처럼, 은혜와 의와 소망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야 한다.
바울은 7-8장에서 구체적으로 두 종류의 삶, 율법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의 삶을 비교하면서, 신자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한다. 6장에서는 7-8장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권면에 앞서 왜 신자가 죄와 사망의 삶을 살지 않고 의와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근거를 말한다. 바울의 답변은 신자는 그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그의 새 사람이 시작하였기 때문에, 곧 신자는 죄와 죽음을 멸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어 있고, 의와 생명을 가져온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어 있으므로, 이제 죄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옛 사람의 삶이 아닌, 의와 생명의 지배를 받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6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인 6:1-14절은 우리 크리스천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임을 강조한다. 둘째 부분인 6:15-23절은 크리스천은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아닌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전자는 왜 신자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 근거와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면, 후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신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새로운 삶인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1) 신자의 삶의 근거, 그리스도와의 연합(6:1-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3)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8)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9)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10)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14).”
본문개관
바울은 5장에서 우리는 한때 아담을 통하여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신자는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었는가? 바울은 신자가 완전히 죄로부터 유혹을 받지 않은 영광스러운 몸, 곧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한 몸을 입는 것은 미래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자가 이 세상에 살고 육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죄의 영역에서 은혜의 영역으로, 사망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주인이 바뀌어졌고 삶의 영역이 달아졌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과거의 주인과 과거의 삶의 영역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신자의 삶은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전진해가고 있는 것처럼 죄와 사망과 싸우며 계속 전진해가는 투쟁의 삶이이다.
로마서 6:1-14절은 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영적 투쟁을 하여야 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6장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6:1-14절은 1-2절, 3-5절, 6-10절, 12-14절 등 모두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원리를 천명하고 있다(1-2절). 둘째, 부분은 신자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뜻하는 세례를 받은 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임을 밝히고 있다(3-5절). 셋째, 신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옛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과, 예수가 부활할 때 우리도 함께 부활한 새 사람인 사실을 각각 알고,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종노릇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6-10절). 넷째,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삼아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아야 할 것과,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을 부활한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로 알고 의를 행하는 도구로 삼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12-14절).
본문주해
①죄로부터의 해방
바울은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죄를 정복할 수 있는 은혜의 크고 풍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마치 바울이 “더 많은 은혜를 받기 위해 더 많은 죄를 범하자”고 말한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계속해서 죄를 지어야 하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런 다음 로마서에서 종종 강한 부정을 말할 때 사용하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3:4,6,31; 6:15; 7:7,13; 9:14; 11:1,11), “결코 그럴 수 없다”(mh;< gevnoito)라고 말한다. 즉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신자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고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 그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신자도 이 세상에 사는 한 여전히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죄가 더 이상 그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새 주인은 그리스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히 제기되는 질문은, 그렇다면 신자는 언제,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고,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는가, 어떻게 죄가 그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새 주인이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바울은 이 문제를 3절 이하에서 대답한다.
바울은 그 대답을 세례에서 찾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우리가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고백하고 그를 믿어,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설사 그 세례가 물세례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성령을 통해, 5장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세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동시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되었을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장사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였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뜻한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이 세례를 통하여, 성령에 의해 내 개인의 체험적 역사로 현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알고 더 이상 죄의 지배아래 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알고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바울은 이미 5장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분의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바울은 여기서 아담의 범죄가 전 인류의 범죄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 인류를 위한 의로운 행위로 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며 인간을 취급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를 위한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과 연합된다. 세례 자체가 마법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기 때문이다.285) 이 연합은 추상적인 연합이 아니고 성령을 통한 신비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다. 그러므로 믿고 세례를 받은 신자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한 자로 인식하여야한다. 신자의 새로운 삶은 여기서 출발한다.
②그리스도를 위한 삶
6-10절은 3-5절에서 말한 연합의 의미, 곧 신자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였다는 사실이 실제로 신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먼저 6-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8-1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6-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첫째,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다 준 아담에게 속한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죄에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의 몸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는 삶, 곧 계속해서 죄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고 말한다.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죄로부터 자유 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함을 뜻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6-7절의 가장 좋은 주석중의 하나는 다시 갈라디아서 2:20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옛 자아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나와 연합하시고 나의 삶의 주가 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나의 새 주인이 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바울 사도가 거듭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가 의로운 삶은 물론, 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령문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명령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시 죄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고, 오직 의의 삶만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면 죄의 삶을 살지 말라는 명령문이 주어질 필요도 없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고, 우리의 삶의 목표와 영역이 달라졌으며, 따라서 예수 믿기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당위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과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받을 수도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미 과거와의 단절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에 있지만, 완전한 단절은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때 이르게 되는 미래적인 것이다. 그때는 우리에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명령이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8-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먼저 8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없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9-10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암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부활은 첫째,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말한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셨다는 것이다(고전 15:20절 참조).
둘째, 다시 죽을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의 세력이 그리스도를 다시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부활은 죽음을 가져오는 죄를 정복하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가져왔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을 가져오는 더 근본적인 악의 세력인 죄(고전 15:55-56절 참조)를 정복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속사역을 완수하시고, 다시 영화로운 몸이 되어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의 삶을 가지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또한 신자를 위한 것이며 신자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뜻한다.
③하나님의 은혜 아래의 삶
바울은 11-14절에서 8-10절에서 말한 것을 로마교회 신자에게 직접 적용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신자의 칭의, 곧 새로운 신분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신자의 성화, 곧 새로운 삶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는 우리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주시는 우리의 삶의 모범자이시고, 위대한 선생이시라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4:25),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 산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신자의 신분(직설법)과 삶(명령법)의 원천이 된다.
이점은 11-13절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너희는 여기라”(11절), “너희는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12절), “너희는 드리지 말라”, “너희는 드리라”(13절) 등 여러 명령법의 문장에서 확인된다. 14절은 11-13절에서 말한 여러 명령법의 이유인 동시에 1-13절까지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는 말은, 명령법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지배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 점은 14절 하반절의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죽음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이것이 신자가 죄로부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근거이다. 따라서 신자는 죄로부터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사역과 그 분의 약속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하느냐가 죄로부터 우리의 승리적 삶의 성패를 좌우한다.
(2) 죄의 종과 의의 종(6:15-23)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16)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7)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20)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21)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2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
본문개관
6장의 전반부(1-14)가 먼저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계속해서 죄에 거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강한 부정인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답변한다. 그 다음 3절 이하에서 왜 우리가 죄에 거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6장의 후반부(15-23) 역시 먼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이제 죄를 지어도 되느냐?”는 수사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강한 부정인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답변한 다음, 16절 이하에서 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6장의 후반부가 전반부의 반복 내지 확장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신자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단순하다. 우리는 죄의 종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는데, 다시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죄의 열매인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어 영생을 가져다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종이 되든지, 하나님을 위하는 의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 중립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 모두 죄이기 때문이다.
6:15-23절 역시 15-16, 17-19, 20-21, 22-23절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신자는 사망을 가져오는 죄의 종이 되든지, 의를 가져오는 의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15-16절). 둘째, 신자의 경우 본래 죄의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에게서 해방시켜 의의 종의 되게 하셨기 때문에, 신자는 이제 자기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17-19절). 셋째, 신자가 과거에 죄의 종이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사망이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0-21절). 넷째, 신자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으므로 이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함을 밝힌다(22-23절).
본문주해
①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15절의 수사학적인 질문과 대답,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이제 죄를 지어도 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6:1-2절의 질문과 대답,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와 서로 유비관계가 있다. 양자는 다 같이 은혜와 죄는 서로 양립할 수 없음을 밝힌다. 차이가 있다면 15절에서 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율법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15절은 14절의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이 가져올 수 있는 오해를 예상하고 거기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서 죄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요, 죄의 영역으로 옮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다시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섬기는 종의 종이 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 누구도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여기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죄의 영역으로부터 은혜의 영역으로 옮겨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크다. 죄를 선택하게 되면 죄의 종이 되고 그 결과는 사망이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선택하면 의의 종이 되고 그 결과는 의와 영생이다.
17절 이하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그가 말해온 내용을 직접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시킨다. 그는 먼저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본래 죄의 종이었지만,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받아드려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점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 이었다”는 말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예수 믿기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 믿기 전 이방인들로서 죄를 섬기는 죄의 종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에게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죄에게서의) “해방”과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두 동사를 행동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뜻하는 신적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여, 이 일을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에게서 해방시키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의를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진정한 자유(해방)와 의는 하나님을 섬길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누가복음 15장의 예수의 탕자 이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반면에 아버지 되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분과 더불어 창조주-피조물, 아버지-아들로서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 편으로부터 여하한 반응 없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의 진리를 그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행동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즉 하나님은 복음의 전달과 그 복음에 대한 사람의 적극적인 응답의 과정(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일하신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마련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다. 19절에서 바울은 로마 크리스천들에게 이제 그들의 삶의 영역과 주인이 과거로부터 달라졌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이제 달라져야할 것을 당부한다. 죄의 종이었던 과거에는 그들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의 도구로 삼았지만, 이제는 의의 종으로써 그들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삼아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이다.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들의 삶도 당연히 달라져야한다는 것이다.
20-21절에서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예수 믿기 이전의 신분과 삶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22-23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곧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신분과 그 신분에 합당한 새로운 삶에 대한 교훈을 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20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예수 믿기 이전에 자신을 어떤 자로 생각하였든지, 자신을 자유인으로 생각하였든지, 아니면 비자유인으로 생각하였든지 관계없이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고 의의 지배를 받는 자도 아니고, 죄의 종이었고, 죄의 종으로서 부끄러운 일을 행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결국 사망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그들의 부끄러운 신분과 그들의 부끄러운 행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와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자, 그들의 옛 신분과 옛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22절은 20-21절의 내용과 대조되는 로마 크리스천들의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는 말은 그들의 신분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의 영역과 그들의 삶의 주관자가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의 용어는 3:21절의 “그러나 이제는”의 용어처럼 단순히 한 개인의 실존적 전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고후 5:17절의 “누구든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창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이제는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선언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의 실존과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세계사적 전환과 종말론적 전환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전에 죄의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 사망을 가져오는 부정과 불의의 부끄러운 열매를 맺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영생을 가져오는 거룩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23절은 좁게는 6:15-22절의 내용을, 넓게는 6장에서 계속해서 말해 온 죄와 은혜, 사망과 생명의 주제에 대한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죄는 필연적으로 사망을 가져오고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영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가져올 수 있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용어가 뜻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이 공로가 되어 우리가 영생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종말론적 영생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