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대나무 전설
첫 얼음이 얼었다. 십이월의 하늘을 검은 날개로 뒤덮인 까마귀떼들은 어디로인지 자취를감추어버리고 십이월의 하늘은 기러기떼 차지가 되었다. 기러기떼는 까마귀떼와는 달리 아무리 많은 무리가 날아도 하늘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정연한 대오를 갖추어 날았고, 우짖음ㄷ 대오만큼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는 합창이었다. 얼음이 얼고 날새가 기러기뿐이면 바야흐로 엄동이 열린 것이었다. 삼남의 겨울은 늦게 오고 일찍 떠나갔다. 바다가 가까운 남녘은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유난히 추위를 꺼려했다. 긴 여름을 살아내는데 익숙해진 체질 탓인지도 모른다. 결빙 추위를 헤치며 이른 아침부터 고샅, 고샅을 바지런하게 잰절음질치고 있는 것은 큰 광주리를 무겁게 인 꼬막장수 여인네들뿐이었다. 꼬막맛은제 철이었고, 살림살이가 어지간한 집들은 꼬막장수를 그냥 지나쳐보내는 일이 없었다.
김범우는 바쁜 걸음으로 소화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들몰을 줄달음 질쳐온 매운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입에서는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면귀가 시린 것을 느꼈다. 벌써 겨울이구나, 그는 겨울을 실감했고, 뒤따라 염상진이 생각났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쫓겨야 하는 겨울 산생활이 앞으로 얼마나 어려울것인가. 김범우는 자신도 모르게 옥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창민의 부상은 어떠한지, 염상진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염려스러운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며 김범우는 마음이무거워졌다. 그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순천행 통학열차 시각이 임박해 있었다. 전 원장의집행유예 판결과 석방을 기다리며 광주에 머물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학교에서 보낸 편지가와 있었다. 십이월 초하루부터 정상수업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틀동안 무단결근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결근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정상수업을 실시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정상수업이 이루어 지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던 것이다. 선생들이나 학생들이 적지 않게 죽고 상한데다 사회분위기도 뒤숭숭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열 서너 명의 남학생들이 김범우를 보자 인사들을 했다.
거지반 거수경례를 하는데 굳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 학생도 두어 명 있었다. 대충인사를 받고 난 김범우는 담배를 빼물었다. 통학열차를 타기 전에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의습관이었다. 학생들이 태반인 열차안에서는 되도록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는 먼 눈길로 첨산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 염려하지 마시오.
선방이 어디 따로 있나요. 그저 선방에 앉아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면 되는 게지요. 마음 놓이는 자리에 따라 극락이고 지옥이고 정해지는 법 아니던가요." 송 선생, 아니 법일 스님이담담한 어조로 한 말이었다. 잔잔한 미소가 감돌고 있는 그의 얼굴은 감방에 갇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위식할 수 없도록 평온했었다. "어디 나만 겪는 고초인가요. 나는 역사의 줄기를 꿰뚫어볼 안목이나 식견은 갖추지 못했지만 어차피 해방이 되고 한번은 치러야 할 역사의 홍역이 아니었겠소?" 법일 스님은 어조를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빛이 변화를 나타냈다. 약간 치켜뜬 듯한 눈은 의지적이고 신념에 차 있었다. 그 눈은 관념적 허무를 바라보는 승려의 눈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눈이었다. 법일 스님과 작별한다음에도 '역사의 홍역'이라는 말이 자꾸만 되씹혀졌다. "그 중, 골치 아픈 중이오. 중이면열심히 목탁이나 칠 일이지 뭘 먹겠다고 빨갱이 질이냔 말야." 검사는 거침없이 내쏘았다.
"순수한 사회개혁 의식이라고요? 그게 무슨 근거가 있는 말이요? 김 선생, 괜히 동정하지마시오. 그자는 골수빨갱이요. 순천지구에서 발행된 지하신문에 자금을 댔소. 그런데도 순수하오?" 검사는 증오의 빛까지 드러냈다. 그의 앞에 내놓은 소개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사회개혁이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나 다를 게 뭐가 있소. 다 이웃사촌이고 그게 그거지." 일정치하에서 자격을 획득한 검사다운 말이었다.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검사실을 등지고 나오는데 빗장뼈가 부러져 한쪽 어깨가 기울어져 있는 법일 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기차는 쇠끼리 맞갈리는 마찰음을 뿌리며 멈춰서고 있었다. 김범우는 학생들이 먼저 오르기를 느리게 걸음을 옮겨놓았다.
"선생님, 여기 앉으시지요."
한 학생이 자리를 권해왔다. 빈 자리는 드문드문 있었다. 학생의 얼굴은 다소 눈익었지만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잘 모르시지요?" 자리를 권한 학생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고, "짜아석, 니까진 걸 선생님이 워처께 아시냐?" 맞은편 자리에 앉은 학생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자리를 권한 것이 의례적인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용건이 있어서였음을 느낀 김범우는 두 학생의 명찰을 빠르게 살폈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은 양효석이었고, 맞은 편의 학생은 현오봉이었다. 현오봉의 옆에 앉은 학생은 책읽기에 열중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는 사이가 아닌 것 같았다.
"저는 양효석이라고 합니다. 본정통에 있는 포목점이 제 집입니다." 옆자리의 학생이 말하며 엉덩이를 들먹했다가 앉았고, "저는 현오봉입니다. 청년단장이 제 아버님이었습니다." 맞은 편의 학생이 모자를 약간 들어올리며 고개를 꾸벅했다. 아, 네가 바로 죽은 현준배씨의아들이구나, 그 확인과 함께 김범우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염상구에게 제지를 종용했던 테러행위였다. 거기에 청년단장의 아들이 끼여 있다는 염상구의 말은 기억에 남아 있지만 포목점의 아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 둘이 함께 행동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저어... 선생님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현오봉이가 어려워하며 말을 꺼냈다. 김범우는 무슨 말인지를 눈으로 묻고 있었다.
"저어... 다름이 아니고, 내년 봄에 학교를 졸업하는데, 육군사관 학교를 가는게 어떨지, 그걸 좀 알아보고 싶어서요."
"육군사관학교?"
김범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의외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짜아석, 말재주도 드럽게도 웂네. 으째서 육군사과학교럴 갈라고 허느냐, 이만저만해서 육사럴 갈라고 허는디 선생님 생각은 어떠시냐, 허고 조단조단 말얼 해야 선생님이 쉽게 알아들으실 것 아니겄냐, 요런 등신아."
양효석은 상대방이 무색할이만큼 핀잔을 주었다.
"그렁께 애초에 성보고 말허라고 혔잖냔 말여."
현오봉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핀잔을 튕겨냈다.
"알겄어." 모자챙을 매만지며 자리를 고쳐앉은 양효석은, "선생님, 다른 것이 아니고 요번에 우리 아부지나 오봉이 아부지나 다 염상진 이놈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너무 분하고 참을 수가 없어서 원수를 갚자고 뜻맞는 사람 다섯이서 멸공단을 조직했습니다. 멸공단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판인데 강제로 해산을 당했습니다. 분은 다 풀지 못했고, 두고두고 빨갱이놈들한테 원수 갚을 생각을 하다가 육사를 가면 좋겠다고 우리끼리 의견을 모으게 됐습니다. 우리들 계획이 어떤지,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양효석의 말은 그런대로 조리가 있었다. 책을 읽고 있건 옆자리의 학생은 어느새 책을 덮고 양효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범우는 불현 듯 흡연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담배를 꺼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차는 순천만의 염전지대 옆을 달리고 있었다.
겨울철 염전은 벼포기만 남은 들판보다 더 황량해 보였다. 김범우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이 군인이되고자 하는데는 그 원인이 지극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바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행동의 계기인 셈이었다. 그건 교육적인 의견을 피력할 성질의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의견을 듣고자 하는 것도 부정이 아니라 긍정 쪽일 것이고 반대가아니라 찬성을 원하고 있을 터였다.
"다섯 사람이 다 육사를 가기로 했나?"
김범우는 선생으로서의 최소한의 임무를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우리 둘이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야만 이야기가 순조롭게 풀릴 것이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자네들 생각이 나쁠 건 없지. 그런데 육사를 가는 건 평생 직업군인이 되는 길이네. 부친들의 원수를 갚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한데, 군인으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원수를 갚는 일과 구분해서 진중하게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두 학생은 말이 없었다. 김범우는 담배를 피울까말까 생각하며 그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이 지나도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김범우는 시선을 창 밖으로 옮겼다. 그들의 침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굳이 살펴보고 싶지는 않았다. 양효석의 옆자리에 앉은 학생이 다시 책을 폈다. 기차는 야산 굽이를 돌아가며 쉰 듯한 소리의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난 공산주의라면 치가 떨려요. 이가 갈린단 말요. 빨갱이는 내 철천지 웬수요." 선우진 선생의 증오였다. 그의 반공에는 피해자로서의 원색적 감정뿐이었다. 배울 만큼 배운 그에게서이성을 기대할 수 없었는데 부친을 잃은 두 학생이 이성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일지 몰랐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말할 자격이 없어요." 선우진 선생의 그런 부르짖듯 하는 거부 앞에서는 논리적 이해라는 것이 오히려 감상이 되었다. 빼앗긴 자가빼앗으려는 욕구나, 빼앗은 자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구가 본능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본능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빼앗긴 자의 본능이 생존권 선언이라면, 빼앗은 자의 본능은 재산권 옹호였다. 빼앗긴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힘은 공격적일 수밖에없고, 빼앗은 자는 어쩔 수 없이 방어적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 대립은 필연적으로 폭력을낳고, 그 피해자인 선우진 같은 사람들은 감정적 반공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니, 싸운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될지 모르겠는데, 이게 대체 누구 잘못인가요? 꼭 미국이나 쏘련의 잘못일까요?" 기차를 타고 광주에서내려오며 전 원장이 꺼낸 말이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한 그의 표정이나 어감은다분히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김범우는 입을 열기에 앞서 전 원장을 바라보며 어색스런 웃음을 지었다. 전 원장도 따라서 떨떠름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터지는 격이 된 전 원장은 감방에 갇혀 이런저런 정치적 문제를 되작거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전 원장을 생각하자 자신이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민망하고 난처해서 어색하게 웃음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장님 말씀은... 바로, 분단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는 것인데요. 글쎄요, 그게 한마디로 하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 같습니다. 지금 원장님께서 의문을 표시한 대목만 잡아 말하자면, 물론 미국과 쏘련만의 책임일수 없습니다. 각 개인의 집에 주인이 있듯이 한 나라에도분명 주인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이 든 것까지는 주인의 책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도둑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무슨 방법으로 몰아낼 것이냐 하는 것은 주인의 책임입니다. 도둑을 맞아 한 집안이 망하게 되었을 때, 도둑은 그 집안을 망하게 한 원인일 뿐이지, 책임을 물을 대상은 아닙니다. 도둑은 직업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집안 사람들이 비겁하고 빈충맞아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도둑에게 전가시킬 수는 있겠지요. 아니면, 무식학 아둔해서 원인과 책임을 구분조차 못하고 있거나 말입니다."
"그래요. 내 짧은 생각에도 그러리라 싶었어요. 그런데, 도둑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즐었는데 어째서 힘을 합쳐 두둑들을 몰아낼 생각은 안하고 양쪽으로 갈라져 도둑들 편을 드나요?"
"예, 그건 분단의 원인규명이 되겠는데요, 그게 참 복잡하고 미묘한 문젭니다. 저도 서민영선생께 그 점을 여쭤봤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야 밝혀질 문제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제 나름대로 막연하게나마 몇 가지로 의문을 정리하고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그거라도 좀 들려주시지요."
"글쎄요, 원장님이 아시고자 하는 데 도움이 안되고 혼란만 드릴 텐데요." "혼란이라도 안겪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이런 시국에 살면서." "그런 문제에 관심 쓰시다가 우리 읍이명의 한 분 잃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나도 당이나 하나 만들어야겠소."
두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은 아까처럼 어색하거나 떨떠름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냥 한번 들어보시지요. 그게 그러니까, 먼저 외적인 원인과 내적인 원인으로 대별할 수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원인을 다시 열강들의 국제적인 역학과 이데올로기의 상층으로 나눕니다. 국제적인 역학은 세계이차대전 전과 후로, 이데올로기의 상층은 미,쏘의 냉정상황으로세분합니다. 그리고, 내적인 원인은 사회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사회적측면은 다시 전통적 인습사회와 서구적 개조사회로, 정치적 측면은 식민지시대와 해방후시대로 나눕니다. 그리고, 서구적 개조사회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식민지시대 정치는 보수적 독립운동과 진보적 독립운동으로, 해방후시대 정치는 보수적 독립운동과 진보적 독립운동으로, 해방후시대 정치는 식민지시대 정치세력과 친일세력으로 세분됩니다. 대충 이렇게갈라놓고 보면 외적인 원인은 수평적이고 횡적이 되며, 내적인 원인은 수직적이고 종적이되어 상호 교차하게 됩니다. 위에서 구분한 항목들을 따라 세밀하게 조사하고, 그것들의 상관관계를 따져가며 종합하게 되면 원인이 규명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십니까,머리만 혼란해지셨지요?"
"짐작했던 대로 역시 간단치 않은 문제로군요. 그런데 말이지요. 난 이번에 너무 딴 세상을겪으면서 정치니 사상이니 하는 것에는 무식한 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봤어요. 아무리생각해봐도 무식한 결온은 하나였어요. 왜 우리끼리 죽이고 죽고 하느냐는 것이었지요. 서로한 발식 양보하고 힘을 합치면 될 게 아니냐는 것이지요. 역시 단순하고 무식한 결론이죠?"
전 원장은 춥게 느껴지는 웃음을 어색하게 지었다.
"아닙니다. 바로 그 방법이 우리 입장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영리한 방법이었습니다. 구라파에서 연합군한테 분할점령된 나라가 독일말고 또 오스트리아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는지금 연합군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모든 정채세력들이 신탁통치의 종식을 위해 단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도 공산당이 있고, 보수정당이 있고, 종교세력 정당이 있습니다. 외세를몰아내기 위새서죠. 그들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되느냐,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고,우리의 문제점입니다."
"그것 참 묘한 일이군요. 똑같은 조건 아래서 한 나라는 외세를 몰아낼 준비를 하는데, 또한 나라는 외세에 앞장서 둘오 갈라졌으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게 아까 말했던분단 원인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김 선생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입장이니까 그런 일을 하기엔 적임자란 생각이 드오."
"원 별 말씀을..."
김범우는 담배를 꺼내다가 언뜻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눈길을 의식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숙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녀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핼쓱하게 야윈 얼굴은 차가울 정도로 무표정했는데, 눈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무슨 말인가를 담고 있었다. 김범우는 성냥을 켜는 체하며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로서는 여자의눈길을 그처럼 똑바로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눈길이 여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님을, 그러나, 어떤 호감을 표하고 있었음을 김범우는 느끼고 있었다. 김범우는 비로소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던 안개가 걷히는 것을 의식했다. 너는 단순히 안창민의 애인만은 아니다!
기차 안이 소란스러워지고, 기차는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김범우는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두 학생이 언제 자리를 떴는지 의자는 비어 있었다. 김범우는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서일어났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우운처어어언, 수우운처어어언, 여기는 순천, 순천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으신물건 없이 차례차례 하차하시어 후미끼리를 건널 때 유의하시와 개찰구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울리고 있었다. 김범우는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는 코웃음을 흘렸다. 도착역의이름을 청승맞을 정도로 길게 늘여빼는 것도 일본식 그대로였디만, 후미끼리라는 일본말을아직까지도 우리말로 바꾸지 않은 채 쓰고 있는 것이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그 말은 들을때마다 신경에 거슬렸다.
예상했던 대로 수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고를 당한 학생들의 책상은 반마다 모두 치웠기 때문에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출석부에는 유고자의 수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한 반에 찰팔 명이 보통이었고 어떤 반은 열 명이 넘기도 했다. 학생들은 공부 할 의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생들도 기계적으로 종소리에 맞춰 움직일 뿐이었다.
김범우가 선우진 선생이 사고를 당한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시간째가 끝나고서였다. 선우진은 개학 첫날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공산주의와 빨갱이에 대해서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날 밤 서너 명의 괴한들에게 난도질을 당했다고 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바람에 주의사람들에게 빨리 알려졌고,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었다.
사건전말을 듣고 난 김범우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선우진의성급함이 딱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안타까왔다. 그는 단순하게도 좌익학생들이완전히 제거된 줄 알았을 것이고, 어리석게도 자신의 증오에 찬 감정을 마음껏 토로했을 것이다. 그가 조직의 생리에 대해 몰이해했던 것이 불찰이었고, 화를 자초한 원인이었다. 정치성을 띤 조직이란 그 어떤 것이나 양성과 음성의 양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고, 특히 공산당조직이란 자기네가 본받은 천주교조직을 능가할 정도로 치밀하고 비밀스럽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야 했다.
김범우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도립병원을 찾아갔다. 선우진이 당한 자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심했다. 배를 깊이 찔려 내출혈이 심했으므로 개복수술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가슴부위를 찔러 허파가 상했거나 심장이라도 다쳤더라면 큰일 당할 뻔했지요." 담당 의사의 말이었다. 선우진은 실물대 크기의 붕대 뭉치라고 해야 옳을 지경이었다. 머리부터 팔다리까지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난도질을 당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 선생, 내가 이 꼴이 될라고 월남을 한 게 아닙니다." 김범우를 알아본 선우진이 목이메어 한 첫말이었다. 그의 눈에 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려 붕대로 스며들었다. '월남'이라는 말과 나이 든 남자의 눈믈이 기묘한 힘으로 김범우의 가슴을 자극해왔다. 자신의의사와는 상관없이 고향을 버려야 했고, 다시 타향에서 생명의 위기를 당한 한 남자의 외로움과 비통함이 붕대에 싸여 있었다.
"선우 선생, 의사 말이, 경과가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김범우는 궁색한 거짓말ㅇ르 찾아내고 있었다.
"김 선생, 범인들, 아니 날 이 꼴로 만든 빨갱이놈들은 잡았다고 하던가요?" "글쎄요, 난 오늘 첫 출근해서 선우 선생이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오는 길이라서 그것까진 장 모르겠군요."
"세 놈이었어요, 세 놈. 어두워 얼굴을 보지 못한게 원통해요. 김 선생, 그놈들을 꼭 잡아야합니다. 김 선생이 그놈들을 꼭 좀 잡아주세요."
선우진의 감정은 격해지고 있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선우 선생은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빨리 회복하도록 해요."
김범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 자기 자신에게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알았다는 말이나 고개 끄덕임ㅇ르 선우진을 분명 약속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 선생, 내가 월남해서 크게 잘못한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선우진은 어느새 감정을 다스렸는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뭘요?"
"월남했을 때 선생이 되지 말고 남들처럼 경찰에 투신하거나 군대에 들어갔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빨갱이한테 원수도 속시원하게 갚고, 이런 꼴도 안 당했을 것 아닙니까." 김범우는한심스러운 심정으로 선우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기차에서 두 학생의 말을 듣고 선우진을 떠올렸었는데 이제 선우진의 말을 듣고 두 학생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선우 선생, 그렇게 편리할 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만약 경찰이나 군인이 되었더라면 이미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경찰이나 군인이 되면 빨갱이한테 속시원한 복수를 가할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죽을 확률도 크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김범우는 매정하다 싶게 말을 해벼렸다. 그 말은 진작 기차 안에서 두 학생에게 하려다가 그들이 나이 어린 것을 생각해서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선우진의 말이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완치가 되면 경찰이나 군인이 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싶어 미리 그 말을 해버린 것이다.
선우진은 더 말이 없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다. 눈두덩이 부석부석했다. 김범우는 자신의 말이 다소 지나쳤나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눈까지 감아버린 선우진의 침묵이 자신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선우 선생, 나 다음 수업이 있어서 들어가봐야 되겠습니다. 또 들를 테니 몸조리 잘 하세요."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우진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김범우는 붕대로 감싸인 그의 몸을 측은한 눈길로 훑어보고는 침대에서 돌아섰다. 있는 집 자식으로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자라 영문학을 전공했고,지주의 기득권을 천부적인 절대적인 것처럼 믿어 그 부가 형성된 과정의 모순에 대해서는한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해본 적이 없는 사나이. 그러므로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의식의 변화를 이해하거나 수용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우리에 갇혀 불행을 키워가는 연약한 사나이. 가문의 재산이나마 보호되어 있으면 모르되 빈손에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처지에 세파를 헤쳐 나가기에는 부적격한 사나이. 김범우가 긴 복도를 걸어나오며 정리하고 있는 선우진이었다.
낙안댁은 남편이 시키는 대로 아들 하섭에게 세 차례에 걸쳐 돈을 장만해준 것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남정네가 허는 일얼안에서 어찌 다 알겄소." 그녀는 이 말을 태연스럽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아주 그럴 듯하다고는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고스란히 남편에게 뒤집어씌우는 죄스러움에 가슴이 아팠다. 남편과 이십 년이 넘게 살을맞대고 살아오면서 수다하게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했지만 죄스러움으로 그렇게 가슴이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들 하섭한테는 전에 없던 미움이 솟는 것이었다. 남편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아들을 향해 미움으로 바뀌었다. 세 차례씩이나 남편 모르게 돈을 구려줄 때만 해도 에미의 안타깝고 안쓰러운 정풀이로 한일이었을 뿐 남편이 죄인으로 갇힌 후환이 끼치리라도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더욱이 공산당이 번창하고 융성하라는 뜻은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심 대장이라는 사람은 찬바람이 이는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그 웃음이 이쪽의 속을 환히 알고 있다는 표시 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더 캐묻지 않았다. "좋습니다. 부부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죄 없는 아주머니까지 잡아둘 수는 없지요." 아들이 미워지는 건 그 심대장이라는 사람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젊은 사람이 어느 한 구석이라도 녹록해 보이는 데가 없이 강단지고 반듯해 보였던 것이다. 인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지난번 사건을 소작인들 좋도록 해결한 것을 보면 분명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낙안댁은 집으로 돌아와서는 줄곧 그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수로 그 사람의 마음을 돌려 남편이 풀려나게 할 것인가... 아무리 궁리를 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타고, 애가 타다보면 아들에 대한 미움이 살아오르고는 했다. 그리 애를 끓이고 앉아 있는데 염상구가 찾아들었다. 낙안댁은 마음이 조급하고도 허하던 참이라 염상구를 대하는 순간 평소에 하시하던 감정은 간데가 없고 반가움이 앞섰다. 저것이 그래도 청년단장인데 무슨 수가 있을지도 모르지. 저 구름에 비 들었으랴 싶은데 소나기 쏟아진다 하지 않던가.
"어쩐 일이신가, 날도 추운디."
낙안댁의 음성은 어느 때 없이 부드럽고 그 얼굴에는 반가움이 드러났다.
"전헐 말이 있어 왔구만이라."
염상구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옳지 죄럴 짓고 봉께 나 겉은 놈헌테도 기가 팍 죽어 요리살붙게 허는 구만, 하고 넘겨짚고 있었다.
"무신 말, 심 대장이 무신 말 전허라고 허등가?"
낙안댁은 성급하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 대장이요? 아닌디요."
염상구는 상대방의 심정을 다 헤아리며 일부러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허먼, 무신 전헐 말이 있으까아?"
말꼬리가 길어지며 낙안댁의 안색은 새치름하게 변했다.
"워따메, 날이 쇠불알 얼어붙게 칩네이." 염상구는 혼잣소리처럼 말을 뱉으며 과장되게 진저리를 치고는, "나가 정헐라는 말이 사령관님 말씸은 아니드락도 요분 사건에 직접 관현된말이구만이라. 워째, 들어보실라요?" 싫다면 그냥 돌아가겠다는 태로를 취했다.
"어이, 날이 찬디 방으로 잠 들오소. 나가 정신이 웂어서 사람얼 추운 디다 세우고 이러네,시방."
낙안댁은 자신의 경솔을 책하며 염상구를 방으로 들게 했다. 염상구는 간단히 한마디 전하고 돌아서려 했던 당초의 마음을 바꿔 일삼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반기는 척했다가 홀대하다가 하는 못돼먹은 심보에 비위가 상해, 속을 좀 긁어주고 싶은 오기가 동했던 것이다.
"아짐씨, 무당며느리 보게 생겼습디다?"
염상구는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고개를 외로 틀며 느닷없는 말을 내던졌다.
"머시여? 고것이 무신 소리여?"
생각했던 대로 낙안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굴이 딱 굳어졌다. 염상구는 낙안댁을 곁눈질하며 태평스럽게 담배갑을 꺼내고 있었다.
"이사람아, 고것이 무신 소리냐니께?"
말을 다그치고 있는 낙안댁의 가슴은 쿵쿵 울리고 있었다. 소화가 임신이라도 했단 말인가.
설마 하섭이가 천한 무당의 몸에 손을 댔으랴. 소화가 심부름한 것을 그렇게 과장하며 이놈이 돈푼을 알겨내려는 것인가. 낙안댁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엇갈리고 있었다.
"아짐씨넌 안직 몰르고 있었습디여? 그라먼 나가 먼첨 알았는가아?" 염상구는 담배연기를천장을 향해 푸우 뿜어내고는 딴전을 피우듯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아, 사람 속 태우지 말고 싸게싸게 말을 허소." "알겠구만요. 확 말얼 해뿔제라. 그처녀무당이 아덜 애럴 뱄드만이라." 염상구는 낙안댁을 똑바로 쳐다보며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워메, 이 일얼 워쩔끄나!"
쪼그려앉았던 낙안댁은 털퍽 주저앉고 말았다. 아랫입술을 문 채 눈을 꼭 감은 낙안댁의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담배연기를 건성으로 내뿜으며 실눈 아래로 낙안댁을 보고 있는 염상구의 입 언저리에는 가소로와하는 웃음이 는적거리고 있었다.
"나 인자 가볼라요."
낙안댁이 질겁을 하며 눈을 떴다.
"이 사람아, 이러고 가먼 워쩔 것인가. 나허고 의논 잠 허세." 낙안댁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염상구의 소매를 붙들며 매달렸다.
"시악씨가 아조 이쁘고도 얌전튼디, 아짐씨 허는 것 본께, 며느리 삼기가 싫은갑제라?" "이사람아, 넘 속에 불질르지 말소. 근디, 애럴 뱄어도 안직 표는 안 날 것인디, 자네 취조에 그것꺼정 자백허등가?"
머리 돌아가는 것이 제법이라고 염상구는 생각했다.
"활동사진 보디끼 훤허게 아시능마요."
"고것이야 워찌 되었거나 상관웂는 일이고, 인자 워쨌거나 애럴 못낳게 해야 헐 것이디..."
낙안댁은 속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감정을 수습하고 냉정하게 해결방법을 찾고 있었다. 염상구는 이제 그만 사실대로 털어놓을까 하다가 기왕 시작한 거 좀더애를 먹이기로 했다.
"이보소, 무신 존 방도가 웂겄는가?"
"글씨요, 무당 배에 씨럴 뿌리지 말았어야제라."
"인자 고런 소리 허먼 무신 소양이 있어. 애럴 못 낳게 헐 방도럴 말허랑께." 낙안댁이 짜증을 부렸다. 그려, 애가 타제? 쪼깐 더 애가 타야 써. 염상구는 박하사탕을 와삭와삭 씹는기분이었다.
"금메 말이요, 나는 무당헌테 씨럴 못 뿌려봐서 잘 모르겼는디요," "자네 시방 내 가심에불질를라고 작정혔능가!"
낙안댁이 그만 소리를 질렀다.
"와따메 귀창 떨어지겄소. 나도 답답헌께 허는 소리지라." 염상구는 낯 두꺼운 능청을 떨고있었다.
"그려, 존 방도가 있네." 낙안댁이 갑자기 밝은 음성으로 말하고는 염상구와 눈길이 마주치자 앞으로 다가앉으며, "자네가 애럴 띠주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 나가 의사도 아니고 무당도 아닌디 무신 수로 애럴 띠어라. 의사먼 수술이나 허고,무당이먼 굿이라도 허겄지만 나넌 헐 것이 아무것도 웂지 않는가비요?" "내 말 듣소. 자네취조험시로 매질 안허는가? 고때 애 떨어지게 해도란 말이시." 낙안댁의 목소리는 속삭이듯이 낮았다. 아, 이 무서운 여자. 양반입네 부자네 하며 겉으로는 점잖은 척, 깨끗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런 끔찍한 생각을 품고 있는 징글맞은 여자. 그래, 기왕 애는 떨어진 것, 이런 부탁을 맨입으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염상구는 낙안댁을 응시한 채 두가지 생각을 거의동시에 하고 있었다.
"글씨요, 아무리 보도 듣도 못허는 것이라 혀도 고것이 인종은 인종인디..." "보소, 수고비톡톡허니 낼 것이니 나 잠 살려주소. 무당이 새끼럴 나서 안고 들어오는 날에는 우리 집안망허네."
"근디, 을매럴 주시겼소?"
"쌀 닷 가마."
염상구는 고개를 저었다.
"허먼, 여섯 가마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음마, 그라먼 일곱..."
"니기럴, 다 그만두씨요. 누구럴 거지새끼로 아요? 실인얼 허라고 시킴스로 헌다는짓거리가요게 머시여."
염상구는 방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시, 아녀. 여자 소견에 그리 되얐으니 자네가 불러보소." 낙안댁은 염상구를 붙들고늘어졌다.
"좋소. 일곱에 세 곱얼 내씨요."
"글먼, 고것이 을매여?"
낙안댁이 입을 딱 벌렸다.
"삼 칠에 이십에 일이요. 남자가 짜잔허게 꼬랑댕이 붙은 것꺼정 받기 싫은께 딱 스무 가마니만 내씨요. 더 무신 말 허먼 나허고는 그만이요."
"알겄네."
낙안댁은 맥빠진 소리를 흘리며 염상구를 붙들었던 두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당장 가서 일얼 끝내겄소. 쌀언 일 끝내고 챙길 것잉께 준비혀두시씨요." 염상구는 당당하고도 기운찬 걸음걸이로 안방을 나섰다.
그뒤로 염상구한테서 낙안댁에게 전화가 걸려온 거의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패도 너무 무작허게 팼는지 피가 주체럴 못허게 쏟아져, 죽을까 겁이 나서 병원으로 옮겨놨구만이라. 애 떨어진 것 확인도 허고 병문안도 허고 겸사겸사 혀서 병원에 한차례 가보시제라."
이 말은 처음에 전하려고 했던 말이었다. 다만 '애 떨어진 것 확인도 허고'하는 대목이 새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확인헐 것 웂네. 근디 병원에 있음서 그 일이 소문나먼 워쩔 것인가?" "매질 심허게 혀서애 떨군 것이야 나가 뒤집어쓰는 잘못으로 끝나제 그 일이 워찌 소문이 나겄소?"
"알었네, 쌀 실어가소."
"고맙구만이라. 헌디, 그 여자가 피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애 떨어진 줄 알고는 피럴 보듬고보듬고 험시로 발광허대끼 통곡을 해대는디, 맘이 짠혀서 못 보겄드만이라. 은제라도 병문안얼 한분 가보시는 것이 워쩌실께라?"
"내 알아 헐 일인께 간섭 말소."
낙안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낙안댁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워진 다음에 병원을 찾아간 것은 나흘 뒤였다. 다음날이소화의 퇴원이었다. 낙안댁은 치료비와 입원비를 치르고 소화의 방을 찾았다. 방문을 열고들어서던 낙안댁은 소화를 보는 순간 걸음을 주춤했다.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것은 소화가아니라 전혀 다른 여자 같았던 것이다. 그 곱고 풋풋하던 모습은 간곳이 없고 창백하게 시든 병자가 누워 있었다. 저것이 못할 고생을 하는구나. 낙안댁은 뜨거운 물이 덮씌워져오는것 같은 죄의식을 느꼈다. 작정하고 왔던 마음이 허물어지려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낙안댁을 알아본 소화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닐세, 그냥 눠 있게."
낙안댁은 소화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머 헐라고 이리 오셨는게라."
소화의 목소리는 병색 짙은 파리한 모습만큼이나 가녀리고 힘이 없었다.
"하섭이 땀시 자네 고상이 너무 크고 무겁네. 입이 열 개라도 미안허고 면목웂는 말언 다헐 수가 웂네. 차차로 갚아가도록 험세."
낙안댁은 품위를 갖추어 반듯하게 인사치레를 했다.
"아니구만요, 그리 말씸허시먼 지가 더 면목 웂고 부끄러지는구만요." 낙안댁의 귀에는 소화의 말이, 당연히 할 일을 했고, 당연히 당할 일을 당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화의 입에서 금방 '어머님'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자네가... 워째서 입원얼 했는지 다 들었네. 우선 책임 못 질 짓헌 하섭이가 양심 웂는 인종이시. 그라고 그 담이... 여자로 몸간수지대로 못헌 것이 자네잘못이네. 둘이는 애당초 인연이 아니었네. 젊은 사람덜이 철웂어 저질른 잘못이었응께 인자 깨끔허니 잊어뿌러야 헐것이네. 허고 앞으로는 하섭이가 무신 소리럴 혀도 심바람 나서지 말고 퇴허소. 자네가 심바람얼 와도 자에럴 내가 퇴헐 것잉께. 아픈 자네 앞에서 차마 못헐 소리 허고 있는 줄 알제만, 나만 야속타고 타박허진 말아주소. 요런 좋잖은 소리 허는 내 속도 편치럴 않네." 낙안댁의 말 마디마디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소화의 양쪽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관자놀이께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아래로 스미고 있었다.
이지숙은 중병을 앓듯 하며 이틀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식은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끝이 없는 악몽과 환각에 시달렸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뼈가 드러나도록 끊임없니매질을 당하고, 염상구에게 목이 졸려 죽기도 하고, 자신이 염상구를 난도질쳐 죽이기도 하고, 안창민의 한쪽 다리가 썩어들어가고, 목발을 짚은 안창민이가 염상진에게 버림받아 산골짜기를 헤매며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안창민이가 건강한 두 다리로 자신에게 뚜벅뚜벅걸아와 손을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자기 학급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일제히 빨갱이를외치며 신주머니고, 필통이고 돌멩이를 던지고, 선생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온갖 욕을 퍼붓고, 자신이 난사하는 총앞에서 염상구고 경찰이고 안창민이고 김범우고 거구러져 죽고... 그녀는 눈 감기를 두려워하며 이틀을 보냈다.
서너 숟가락을 뜨다 말고 아침밥상ㅇ르 물린 그녀는 벽에 몸을 부린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이 허물어져내리는 것 같고, 정신마저 흐리멍덩한 태 갑작스러운 현기증으로 아뜩해지거나 터무니없는 환각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몸 여기저기에 잡힌멍자국들은 처음의 검푸르칙칙한 색깔에서 누르퉁퉁하고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이 선생님, 선생님 계십니껴?"
조심스러운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방문 가까이에서 들렸다.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몸을 수습한 이지숙은 앉은 걸음으로 몸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선생님, 안녕허셨어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단발머리의 소녀는 학교사환이었다. 이지숙은 그 아이가 왜 왔는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선생님, 교장선생님게서 뵙자고 허십니다."
이지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을 닫으려는데 소녀는 돌아설 낌새가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이지숙은 소녀에게 먼저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선생님이 영 아파뵈는디 지가 뫼시고 갈라능마요."
소녀가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나 혼자 갈 수 있다. 학교 일이 바쁜데 늦게 가면 야단맞는다. 난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해야 하니까 어서 가서 교장선생님한테 금방 오신다더라고 여쭤라." 이지숙은소녀의 마음으 고마워하며 다정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참말로 혼자 오실 수 있으신게라?"
"그러엄."
"글먼 지 먼첨 가겄구만요."
소녀는 꾸벅 인사를 했다. 까만 단발머리가 탄력있게 흔들거렸다. 이지숙은 그 머리결의 흔들림을 보며, 곱기도 해라, 순간적인 신선감을 느끼고 있었다. 봄의 양지에거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노란 솜털을 보았을 때 감정의 현을 울려오는 감탄스러운 경이로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교단을 떠나기를 아쉬워하고 있구나,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판독하며 씁스레하게 웃음지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끝낸 교장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호흡 짧은 연기를 두어 번 내뿜고는자리를 고쳐 앉았다.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담배를 뻐끔거렸다. 눈을 아래로 뜬 이지숙은 교장의 그런 동작들을 빠짐없이 감지하며 어서 말을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의 서두를 시작하기만 하면 더 이상 교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방치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이 선생, 저어 다름이 아니라... 나도 중간입장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난감한..." "교장선생님, 말씀 안하셔도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날로 사표를 제출하는 것이 예의고도리인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아프고 기동하기가 어려워 부르시게까지 한 불찰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지숙은 준비했던 말을 한달음에 마치고, 써가지고 온 사표를 손가방에거 꺼내 교장 앞에밀어놓았다.
"이거 참, 내가 아무 힘도 되지 못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전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이지숙은 일어섰다. 교장이 담배불을 끄며 따라 일어섰다. 이지숙은 교무실을 향해 복도를걸었다. 이 년 동안 낯익었던 환경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어느 교실에선지 풍금소리와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왔고, 어느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방울 구르듯 맑게 들려왔다. 내 학급은 누가 가르치나! 이지숙은 뒤늦은 생각에 부딪치며 걸음을멈칫했다. 사표를 내기 전에 이미 자신의 자리를 없어진 것이었다. 불현 듯, 아이들이 보고싶었다. 태반이 가난하여 점심을 굶어야 하는 아이들, 손가락마디만한 몽당연필을 대나무에끼워 써야 하는 아이들, 그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교직을 박탈당한 것과는 별개로 그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음이 새로운 슬픔과 헛헛함으로 가슴을 아리게 했다.
수업중이라서 교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교감은 정물처럼 멀리 앉아 있었고, 사환아이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지숙은 책상정리를 서둘렀다. 수업이 끝나기전에 학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들을 만나보았자 반가와할 사람도 없었고, 반가운 사람도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겉으로는 입에 발린 소리들을 늘어놓으면서 속으로는 구경거리를삼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만 담임이 이미 바뀌어 있었다. 만나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면 되었지 정작 만나서 무얼 할 것이가. 그리고 학교측도,새 담임도 원하는 바가 아닐 수도 있었다.
책상서랍들에서 챙겨야 할 사물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보자기에 싸서 들고 교감 앞으로다가갔다.
"교감 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무언가를 읽고 있던 교감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길로 이쪽을 보다가 이지숙을 알아보고는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교, 교장선생님은 만나보셨는가요?"
"네에."
"아아, 그러셨구만요. 뭘 좀 읽니라고 이 선생 들어오신 것도 몰르고 있었습니다그려." "책상은 다 정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지숙은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이거 서운해서..."
교감은 교무실 문까지 따라나왔다. 이지숙은 고개를 숙이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뒤돌아보지 말자고 자신에게 약속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과 맞서게 된것이었다. 이지숙은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교문을 벗어났다.
이지숙의 교향은 담양이었다. 담양은 예로부터 농산물보다는 죽세공품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만큼 무성한 대밭이 사철 푸름 속에 산재해 있었다. 담양의 대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타지방의 대에 비해 질이 월등히 좋은 까닭이었다. 삼남지방에서만자생하는 대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다년생나무였는데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집집의 윗울차리 노릇을 하는 양하며 울울히 퍼져 있었다. 그런데 담양의 대는 그 많은 고장의 대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힐 만큼 질이 좋았던 것이다. 담양의 대는 흔히들 '왕대'라고 불렀는데,그
이름대로 원통의 크기가 대개 어른의 양쪽 손가락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만든 원만큼씩 했고, 키도 열 길 높이로 치솟았다. 담양대가 그렇게 걸출한 것은 품종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담양대를 다른 지방에 옮겨다 심으면 그 걸출한 모습은 간 데가 없고 '좀대'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상해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기후와 토양 탓이라는 것쯤은 헤아리고 있었다. 담양에서 대가 아무리 유명하다 하나 치부의 수단이나 기준은 역시 전답이었다. 이지숙은 담양 지주 이자원의 사남일녀 중 막내인 고명딸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은 셋째오빠의 영향이었다. 그녀는 생김새는 물론 성격까지 셋째오빠를 닮은 데가 많았다. 셋째오빠는 말수가 적은 냉정한 성격에 사리분별이 정확했다. 그녀는 어려씅ㄹ 적부터 그런 셋째오빠가 좋아 유달리 따랐고, 오빠도 여동생을 남달리 사랑했다. 그녀의 셋째오빠는 광주서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회주의의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소학생인 그녀에게 셋째오빠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서로 같으냐, 틀리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하대하는 것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말을 불쑥불쑥 묻고는 했다.
그녀가 대답을 제대로 하면 셋째오빠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기도 했고, 캐러멜을 교복주머니에서 꺼내기도 했다. 그리고 대답이 잘못 되면 셋째오빠는 왜 잘못 된 생각인지를 알아듣기 쉬운 말로 차근차근 설명해주고는 했다. "떡 한 쪽이라도 가난함 아이들과 나눠 먹어라."
"내가 배가 부를 때 배가 고픈 동무가 열이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이런 말도 수시로들려주고는 했다. 대나무의 전설을 들려준 것도 셋째오빠였다.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큰부자가 하나 있었다. 작은 마을에 큰부자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을의 논밭이며 산이 모두 그 부자의 것이었고, 삼십여 가구 사람들은 모두 그 집의종이나 마찬가지인 소작인들이었다. 그 부자는 어찌나 욕심이 많고 마음이 혹독한지 추수때나락을 받아들이며 자기가 보는 앞에서 일일이 말질을 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을쿵쿵 두 차례씩 다지게 했다. 자기 산에서는 솔가지 하나 꺾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솔잎 한 갈퀴 긁어내지 못하게 단속을 했다 동네사람들은 나무 한짐을 하자면 몇 십리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작인들의 닭을 예사로 잡아갔고, 자기 집 잔치에 돼지를추렴시키고는 했다. 그런 그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소작료에 사정을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해도 아니고 내리 삼년을 흉작이 덮쳐왔다. 빚 무서운 줄 알면서도 굶어죽을 수는 없어 두 해에 걸쳐 빌어다 먹은 장리쌀빚이 있는데다가 또 흉년이 겹쳐 소작료에 장리빚 이자만을 합쳐 나락을 바치더라도 사람들은 거의가 굶어죽게 될 형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장리빚을 내년으로 연기해주거나, 그것이 아니면 소작료 반을 일년 동안 연기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 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은 추수가 끝나고 오히려 굶주리기시작했다. 겨울이 닥치는데 그대로 굶어죽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몇 차례나 지주를 찾아가장리쌀을 풀어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지주는 쌀쌀하게 고개를 저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죽마저 끓일 수 없는 집들이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세 남자가 부자집 담을 넘어갔다가 그 집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다음날 세 남자는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자집하인들에게 맞아죽었다. 그일이 있고부터 그 누구도 부자집 창고를 넘 볼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여섯 남자가 비밀리에 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 굴은 부자집 창고를 향하여 뚫려나갔다. 죽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도 여섯 사람은 사생결단 굴을 파서 마침내 창고아래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살가마니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쌀가마니 무게로 굴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결국 여섯 가람은 쌀가마니에 갈려 죽은 것이었다. 부자집 종들이 파낸 시체들은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모두 한구덩이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여섯 사람의 가족들은 마을에서강제로 내몰렸다. 그것은 부자가 분풀이를 한 것만이 아니었다. 농사지을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그 가족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집 저 집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노인네들이 죽어갔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부자집으로 몰려가 제발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애걸했지만 대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겨울이 지나고 났을 때 동네 사람들은 삼할 정도가 굶어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영양실조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서야 농사지을 일이 걱정이 된 부자는 장리쌀을 풀어 내놓았다. 그런데, 땅에서 싹이 돋고 나무에서 움이 트기 시작하면서 동네 이곳저곳에서는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졌다. 전에볼 수 없었던 괴상스럽게 생긴 싹이 돋아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잎도 줄기도 없이, 성낸새벽 남근같이 생긴 그 싹은 부자집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안방 구들을 뚫고도 솟았고, 창고 쌀가마니를 뚫고도 솟았다. 부자는 종들에게 그 싹을 다 쳐없애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그다음날이면 다른 싹이 돋아올랐고, 쳐내고 나면 또 다른 싹이 돋아올랐다. 여름이 되자 부자집은 그 이름 모를 나무로 가득차 완전히 폐가가 되었고, 농토에도 빽빽이 들어차 농사를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자가 마을을 뜬다는 소문이 퍼졌다.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졌으므로 소작인들도 마을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동네 남자들은 꿈을 꾸었다. 맞아죽은 세 사람과 굴에 파묻혀 죽은 여섯 사람이 함께 나타나서, 배곯는것도 서러운데 우리는 죽음도 너무 원통절통하게 했다. 우리는 가슴에 서리서리 맺힌 한을풀 길이 없어 나무로 환생을 했다. 먹을 것은 전부 부자놈한테 뺏기고 배를 곯을 대로 곯아겉모양만 사람이었지 속은 텅텅 비었던 생전의 꼴새 그대로 환생한 까닭에 나무속도 마디마다 텅텅 비어있다. 나무를 잘라보면 알것이니 놀라지 마라. 그 나무를 길게 잘라 한쪽 끝을뾰족하게 다듬어 그것으로 부자놈 배째기를 찔러 죽여라. 그리고 빈 통에 그놈의 피를 채워우리 묻힌 자리에 뿌려주면 맺힌 한을 풀고 저승길을 편히 갈 것이다. 부자놈이 떠나기 전에 당장 우리 원수를 갚아라. 너희들은 우리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이번에도 우리 원수를 갚아주지 않으면 화가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아홉사람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꿈이 하도 기이하고 생생해 남자들은 일시에 잠이 깨었고,옆집 옆집으로 연락을 취해 다 한자리에 모여앉고 나서 모두 똑같은 꿈을 꾼 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망자들의 뜻을 따라 원수를 갚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나무를 잘랐고, 나무는과연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남자들은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 창을 만들고 들어 어둠을헤쳐 부자집으로 쳐들어갔다. 부자는 창에 전신을 찔려 죽었고 창을 뺐을 때는 그 빈통에부자의 피가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피는 아홉 사람이 묻힌 자리에 뿌려졌다. 며칠 뒤에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농통에 솟은 그 나무들이 노란 꽃을 피우더니만 꽃이지면서 그 나무들도 죽어갔다. 왜 하필 농토에 솟은 나무들만 죽는지를 사람들은 생각하게되었고, 마침내, 그 노란 꽃은 한을 푼 넋들의 승천이고, 나무들이 말라죽은 것은 다시 농사를 짓고 살라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은 나무슾에 불을 질러 다시 농토를 일군 다음 골고루 몫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 농토는 전보다 훨씬 기름져 곡식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망자들의 넋에 고마워하며 추수첫 곡식으로 제사장을 걸고 정성스럽게 차렸으며, 그 나무는 옮겨심는 사람도 없는데 해마다 이 고을, 저 고을로 번창해나갔다. 누가 이름지었는지 모른 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대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대를 물린 가난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기도 했고, 남들 대신 죽어 남을이롭게 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나무는 가난한 소작인의 넋이라서 춥고배고픈 것을 싫어해 기온이 따뜻하고 농지가 넓은 땅에만 산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에 댓잎들이 유난히 서걱거리는 것은 '추워, 배고파, 옷 줘, 밥 줘'하는 넋들의 읇조림이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소학교를 졸업한 이지숙은 공주사범에 진학하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셋째오빠가 세상을 떠나 것은 그녀가 삼학년때였다. 일본경찰의 체포를피해 도주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는 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녀가 벌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은신책이었다.
이틀동안 자리에 누워만 있던 이지숙은 사흘째 되는 날 외출을 했다. 그녀가 찾아간 것은서민영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대충 소개했고, 전 원장 사건의 결말에 관심을 기울여왔던 서민영은 이지숙을 그런 대로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저를 선생님 야학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이지숙은 또렷하게 한 말이었다. 서민영은 아무런 내색없이 이지숙을 한동안 바라보기만했다.
"야학에는 보수가 없소."
서민영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생계는 어찌할 거요?"
"그 동안 저축한 게 있습니다."
"결혼할 연령이 아니시오?"
"아실지 모르지만 아직 결혼할 처지가 못 됩니다."
서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강요는 아니오만, 신 앞에 기도할 수 있으시오?"
"지금까지 종교를 갖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교는 경배해야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그건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오. 뜻이 있다니 일을 해보도록 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지숙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정보수는 없지만 주식을 해결할 만큼 양식은 드리게 될 게요." "그런 건 신경 한 쓰셔도좋습니다."
"그건 최소한의 내 소임일 뿐이오. 신성한 노동의 착취란 인간 최대의 죄악이오." 이지숙은감동 어린 눈으로 서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법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내린 이상 자신이 굳이 그녀의 사상문제에 신경 슬 필요가 없다는것을 서민영은 되짚고 있었다.
첫댓글 음악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