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문진에 피아노를 들여오던 역사를 더듬어 픽션 동화로 구성하였습니다.
행복한 피아노
박경선
220915.
‘순간 이동 놀이’와 ‘택배 놀이’
“누나, 저기 해적들이 온다. 순간 이동!”
코로나19를 앓으며 『귀신통 피아노』 동화책만 읽고 누워 있던 윤상이가 다 나았나 보다. 플라스틱 칼을 뽑아 들고 순간 이동을 외친다. 난 생기가 되살아난 윤상이랑 놀아주고 싶었다.
“알았어, 순간 이동!”
나도 넓게 펼쳐둔 노란 보자기 배에 올라타며 순간 이동을 외쳤다. 배에는 시꺼먼 여행 가방이 귀신통으로 변신하여 실려 있다. 윤상이는 베개 해적들을 발차기로 물리쳤다.나는 실로폰으로 ‘바람의 빛깔’ 노래를 연주하며 귀신통 소리를 내였다. 윤상이가 신이 났다.
“야, 귀신통을 우리가 지켰다!”
두 팔을 번쩍 올려 소리치더니 엉덩이로 ‘바람의 빛깔’ 리듬을 타며 실룩거렸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보다가 ‘하하’ 웃었다.
“와, 윤상이 다 나아서 잘 노네. 좋다야! 윤서는 어제 배달했던 것, 아직 문고리에 달려 있는 집이 있나 좀 보고 와!”
우리 취미는 동화책 읽고 연극하며 노는 것인데, 엄마 취미는 다르다. 아파트에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 반찬을 해서 나누며 우리를 택배 기사로 부리는 놀이가 취미다. 전에는 문고리에 걸어두고 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심해지고부터, 우리에게 ‘택배 기사’ 일이 더 늘었다. 그 전날 문고리에 걸어둔 종이가방에 든 반찬이 아직 달려 있는지 보고 와야 한다. 오늘도 넷 집을 다녀왔다.
“엄마, 1504호는 그대로 달려 있던데요? 휠체어도 안 보였어요.”
하며 종이가방을 거둬왔더니,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아파트에 소독하러 다니는 아줌마가 오셨다. 약을 다 치고 나서려는데 엄마가 식탁에 앉히며 부탁했다.
“박하 차 한 잔 마시고 가세요. 1504호에 약 치러 가시면 할머니가 계신지 좀 알려 주세요. 어르신 혼자 사시는데 안 보이니 걱정되어서요.”
하며 보냈다. 한참 뒤에 인터폰이 울렸다.
“1004호지요? 1504호에 사람이 없어 저도 소독약 못 치고 가요.”
그러자, 엄마는 내게 과일 접시를 들려 경비아저씨께 갖다 드리며, 할머니 소식을 알아보고 오라고 시켰다. 택배 기사 일을 마치고 와 일렀다.
“경비아저씨도 요 며칠간 1504호 할머니 다니시는 것 못 봤다던데요?”
엄마는 관리사무소 소장님께 전화해서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할머니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자 엄마는 안절부절못하였다. 나는 엄마 마음을 안다. 시골 사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틀 뒤에야 알았다. 그 뒤로 엄마는 아파트에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모두 외할머니처럼 고독사하실까 봐 더 신경 쓰는 것 같다. 나도 우리 외할머니가 불쌍했다.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아무도 없다면? 죽기 전에 무서워 기절할 것 같다.
2. 우리 둘만의 비밀
어느 날 저녁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1504호 할머니가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다 나아서 오셨단다. 엄마는 할머니 댁 문고리에 배추겉절이와 전복죽이 든 종이 가방을 걸어 놓고 오라고 시켰다. 우리는 15층으로 올라갔다. 1504호 앞에 할머니가 타고 다니는 휠체어가 보여 반가웠다. 내가 문고리에 반찬 가방을 매다는 사이, 윤상이가 벨을 한 번 누르고 돌아서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으? 안녕하세요? 들키지 말고 걸어 놓고만 오랬는데….”
“윤서와 윤상이구나. 너희는 인사성도 발라! 나도 복숭아 좀 나눠 줄게. 매번 얻어먹기만 해 서.”
하며 우리 손목을 잡아 현관문 안으로 끌고 갔다.
“어, 안 주셔도 되는데….”
우리는 신발장 앞에 엉거주춤 섰다. 거실에 놓인 피아노가 보였다.
“야, 저 귀신통 피아노 치면 실제 소리가 나나요?”
내 말에 할머니 눈동자가 커졌다.
“귀신통 같냐? 그렇게 고물은 아닌데….”
할머니 말에 내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요, 우리 누나! 피아니스트가 꿈인데요. 실로폰이나 종이 피아노(건반)만 치다가 실제 피아노를 보니 신기해서 그래요.”
윤상이 말에 내가 덧붙였다.
“할머니, 귀신통 동화책 보면요. 조선시대에 처음 피아노 소리 들은 사람들이 귀신통 소리라 했데요.”
“하하, 그랬어? 우리 집 귀신통 소리도 잘 나는지 들어와 쳐보려무나.”
“아니에요. 우리 집에도 곧 피아노 살 거거든요. 에취!”
내가 둘러대며 재채기를 하자, 윤상이도 정말이라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고 ‘쉿’ 신호를 해 보였다.
“누나, 나도 알아. 우리 거짓말한 것 비밀로 할게. 우리 집에 피아노 살 돈이 어디 있다고!”
우리 집 형편을 짐작할 줄 아는 윤상이가 1학년이지만 의젓해 보였다.
3. 복귀신 머리카락
학교에서 돌아왔다. 윤상이는 동화책을 읽고 있고, 베란다빨래걸이에 마른빨래들이 널려있다. 엄마는 슈퍼마켓에 일 다니며 바쁘게 빨래를 늘고 가셨나 보다. 혼자서 우리 둘을 키우며 안간힘 쓰는데 나라도 철이 들어야지. 빨래를 걷어와 마루에 앉았다. 어느새 윤상이도 내 곁에 앉았다. 양말 짝을 맞춰 개더니 자기 양말 발목에 그려진 강아지를 불러내었다.
“누나, 내 양말 강아지들 귀엽지? 오요 오요.”
우리 집 형편에,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윤상이 소원을 들어줄 수 없어 미안했다. 나는 그저 웃어주며, 수건부터 착착 개고 엄마 바지들도 두 다리통을 반듯하게 모아 개었다. 그러다가 엉클어진 머리카락 한 줌을 발견하였다.
“누구 머리카락이지?”
“누나, 너무 길어. 귀신 머리카락 같아.”
“귀신 머리카락?”
“그냥 귀신 머리카락이 아니야. 힘센 복귀신 머리카락일걸? 삼손 머리카락처럼 엄청 길잖아!”
윤상이는 성당 주일학교에서 들은 삼손의 머리카락 이야기에 자기 상상을 보태었다.
“복귀신이 우리 집에 귀신통 피아노 가져왔다가 머리카락이 다 빠졌을 거야. 힘들어서!”
장차 재미있는 이야기책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윤상이의 상상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복귀신이 갖다준 귀신통이 안 보이네?”
“누나, 귀신은 귀신끼리 통하잖아. 100대 피아노 연주하던 사문진! 거기 ‘귀신통 납시오’ 통에 가서 물어보자. 우리 집에 갖다 준 피아노 어디에 숨겨 놨는지….”
나는 윤상이 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집에 강아지 키우고 싶다는 윤상이 소원을 못 들어줘 내 마음이 아팠듯이, 윤상이도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으면 좋겠다는 내 소원을 이뤄주고 싶어 온갖 상상을 짜내보는 마음이 애잔하게 보였다. 그래서 무조건 따라나섰다.
“좋아!”
우리는 집에서 한참 걸어서 사문진 나루까지 갔다. 아빠랑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훔쳐보았다. 참 행복해 보였다. 윤상이 신경을 딴 데로 돌리고 싶어 선착장 동산 위에 세워진 피노키오 조형물을 가리켰다.
“저기 피노키오가 우리를 태워주려고 배를 젓고 있네.”
“쳇, 책에서 피노키오는 거짓말 안 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는데, 저 피노키오는 아직도 코가 길어!”
윤상이 말에 나도 거짓말 한 말이 설핏 떠올랐다.
“윤상아, 나도 1504호 할머니께 거짓말했잖아.”
“나도!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은 아닐 거야.”
하더니 ‘순간 이동’을 외쳤다. 우리는 ‘순간 이동’ 마법을 평소에 익혀두었던 터라 눈 깜빡 할 사이에 피노키오 배에 올라탔다.
“피노키오야, 조선시대 귀신통을 옮기던 복귀신이 우리 집에 머리카락을 빠트리고 갔어. 어 디 가면 만날 수 있니?”
윤상이 물음에 피노키오가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알려주었다.
“저기 낙동강 나루에 조선 시대 귀신통을 실은 배가 오고 있네. 순간 이동해 봐!”
우리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순간 이동 마법으로 조선 시대 뱃사람들의 배에 올라탔다. 우리가 현대 사람이라서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국 선교사 부인 말이야. 샌프란시스코가 어디야? 거기서 이곳까지 배로 귀신통을 옮겨 오겠다니 무슨 병난 귀신인지 원…….”
“병이야 달리 있겠어? 귀신통도 하나 없는 우리 조선에 와서, 미국 고향 향수병이 난 게지.”
“하지만, 우린 배에서 내려 무거운 귀신통을 둘러메고 산길, 들길을 걸어가야 하니 개고생이지.”
우리가 마치 미국 선교사 부인 집 아이가 된 듯 귀신통을 둘러맬 아저씨들에게 미안했다.
“누나, 그래도 저 ‘귀신통’ 피아노가 우리 집에도 한 대 있으면 좋겠지?”
“그런데 긴 머리카락 복귀신이 안 보이네?”
“누나, 저 사람들이 ‘귀신통 납시오’까지 귀신통을 들고 갈 거야. 그러면 복귀신이 나타나서 우리 집으로 메다 줄 걸? 헤헤!”
어쨌든, 우리 집에 피아노가 올 것이라는 윤상이의 애절한 상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윤상이의 상상을 순간 이동 마법으로 따라갔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귀신통을 메고 가서 <귀신통 납시오> 조형물이 있는 자리에 놓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시커먼 네모 모양 돌로 변해버린 건반 없는 형체의 귀신통이 빨간, 노란, 파란 버튼을 달고 있었다. 윤상이가 ‘한국어’라고 쓰인 파란 버튼을 눌렀다. ‘궁금한 것 뭐든지 물어보세요.’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온 복귀신 머리카락을 꺼내어 보이며 물었다.
“이 머리카락 주인, 복귀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귀신통에서 어린아이가 흉내 내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저 느림보 우체통에 소원을 적어 넣고 가시오.”
우리는 <귀신통 납시오>통이 시키는 대로 소원 쪽지가 놓인 지붕 밑으로 갔다. <우리 집에 귀신통 피아노 한 대 있으면 좋겠어요!> 쓰고 보니 윤상이도 나를 따라 썼다. 바로 옆에 느림보 우체통이 보였다.
“잠깐, 느림보 우체통이 통나무야. 여기 쪽지가 갇히면 꺼낼 수 있을까?”
내 말에 윤상이가 우체통 뒤로 돌아가더니 나를 불렀다.
“누나. 와 봐. 뒤에 문이 있어. 자물통을 열면 소원 쪽지를 꺼내어 배달해 줄 수 있겠어.”
우리는 소원 쪽지를 안심하고 느림보 우체통에 넣고 집으로 왔다.
4. 느림보 우체통 속의 소원
저녁에 엄마가 퇴근해왔다. 우리가 차려놓은 밥과 김치를 맛있게 드셨다. 엄마한테 오늘 재미있게 논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빨래 갠 놀이하며, 복귀신 머리카락을 가져가 귀신통에게 물어보고 온 일까지.
“복귀신 머리카락이라고? 어디 보자.”
내가 호주머니에서 복귀신 머리카락을 꺼내어 엄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에계계. 이건 엄마 바짓단의 실이 풀린 거네.”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이제껏 따라다닌 마법의 효과가 풀려버리는 순간이었다. 시무룩해진 우리 얼굴을 보던 엄마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까, 1504호 할머니가 전화했더라. 거동이 불편해서 아들네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물건들을 처분해야 한다나. 피아노가 필요하면 그냥 주겠다는데 사양했어. 우리가 없이 살아도 남의 동정을 받으며 살 처지는 아니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윤상이 눈빛은 초강력 빛을 뿜어내며 반짝거렸다. 그러자 엄마가 윤상이 눈을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할머니가 ‘중고 파는 당근 마켓에 내어 놓아야겠네’ 했으니 거기서 살 수 있으려나?”
엄마 말에 윤상이가 자기 돼지 저금통과 내 돼지 저금통을 들고 와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엄마 손전화기(휴대폰)를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할머니가 아파트를 떠나면 슬프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할머니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할머니, 우리 아파트를 떠나신다니 슬퍼요. 그런데… 그런데, 당근 마켓에 피아노 내어놓으셨지요? 혹시 돼지 저금통에 든 돈도 받으시나요?”
“우리 집 피아노를 돈 받고 팔아버릴 수는 없지. 가격에 상관없이 피아노가 가서 행복할 집 에 보내고 싶어.”
“피아노가 행복할 집이라고요?”
피아노가 우리 집에 오면 우리는 행복하지만, 피아노가 행복할지는 몰라 전화를 끊으려는데 할머니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우리 집 피아노가 그랬어. 피아니스트가 꿈인 아이, 인사성이 바른 아이, 윤서나 윤상이처럼
착한 남매가 사는 그런 집에 가면 행복하겠다고. 윤서야, 우리 집 피아노 잘 부탁한다!”
나는 할머니가 내 목소리를 알아본 것도 놀랐지만, 피아노를 부탁한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동생 잘 부탁해! ‘엄마 잘 부탁해!’하는 말은 해봤지만, 피아노를 잘 부탁한다니….“
“할머니, 피아노를 부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한테 피아노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가족이었던가 보다. 복귀신도 할머니와 우리에게 복을 다 나누어주었다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얘야, 인사성이 바르면 복이 온단다!”
2022.9.13.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