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사헌 파직
(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다 )
하륜이 팔 걷어 부치고 나선 관료들의 기강확립이 통하기 시작했다. 남의 말을 빼앗은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김한로를 파직하고 태상전 건축에 쓸 기와를 빼돌린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권방위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김한로는 태종 이방원과 과거 동방이며 훗날 양녕대군의 장인이 된 사람이다.
태종 이방원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에 응시하여 7등으로 겨우 합격했을 때 김한로는 장원급제했다. 20년이 흐른 지금 장원 급제자는 판봉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꼴찌로 턱걸이 한 자는 용상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나 보다.
대대적인 기강잡기에 대어가 걸려들었다. 하지만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대사헌 이원이 야간통행금지 위반으로 걸려든 것이다. 당시 야간에 통행할 수 있는 사람은 임금이 특별히 내준 야간통행증을 휴대한 자만이 통행할 수 있었다.
대사헌이나 대사간도 이에 속하지 않았다.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통행할 수 있는 사람은 왕의 밀명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야간에 통행하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의법 처리했다. 야간 통행자는 모반(謀叛)과 연계하여 엄중하게 다스렸다.
대사헌이라 하면 오늘날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막강한 권력자다. 통행금지를 위반한 이원을 잡은 호군(護軍) 순관(巡官) 윤종이 대사헌의 위세에 눌려 이원을 풀어주었다. 놓아주었다 라기 보다 대사헌 이원이 야간통행을 검문하는 윤종에게 오히려 호통을 치고 집으로 가버렸다. 호군 순관쯤은 무시한 것이다. 이것이 말썽이 된 것이다.
"신이 초경(初更) 3점(點)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통행금지를 위반하였다 하여 순관이 신을 잡았습니다. 윤종이 만일 초경 3점 전에 행순(行巡)하였다면 윤종이 잘못한 것이오며 신이 3점 후에 통행하였으면 신이 죄가 있는 것이오니 이 일이 판명되기 전에는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임금에게 위반을 추궁 당하던 대사헌 이원이 위반 시점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원의 변명인 즉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되는 밤 7시 이전에 자신은 통행했으니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발한 탈출구다.
대사헌, 야간 통행금지 위반으로 적발되다
음주측정기가 없을 때 음주 운전자를 적발하고 "술 마셨다", "안 마셨다" 라고 싸우는 경찰과 운전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오늘날처럼 단속자나 위반자가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이러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당시에는 시계나 휴대폰이 없었다. 대사헌의 책임회피에 사간원이 나섰다.
"대사헌(大司憲) 이원은 풍기(風紀)를 다스리는 직책의 우두머리로서 법을 구차히 할 수 없습니다. 통행금지를 위반하여 순관 윤종에게 욕을 당하기까지 하였고 호군 윤종은 순관으로서 위반한 사람을 붙잡았으면 마땅히 가두어 놓고 계문(啓聞)했어야 할 터인데 이내 놓아주었으니 사(私)를 따르고 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고위 관료일수록 법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대사헌 이원을 붙잡았다 놓아준 윤종은 처벌받았고 대사헌 이원은 파직 당했다. 사사로운 법 위반으로 대사헌 이원이 물러난 것이다. 고위 직책에 있던 대사헌이야 책임을 지는 퇴장이었지만 순관 윤종은 억울한 처벌이었다.
조선이 전근대적인 사회라 하지만 감찰총수가 소소한 야통법 위반으로 물러난 것으로 보아 장사하여 돈 좀 벌었다고 법을 우습게 보는 졸부나 무뢰배를 동원하여 사람을 패는 무법자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하옥되었을 것이며 늑장부리거나 눈감아준 포도대장은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난타전을 벌인 사헌부와 사간원
관료들을 강하게 몰아 부치자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튀어나왔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 치고 받는 난타전이 벌어진 것이다. 사헌부가 사간원을 탄핵하면 사간원이 사헌부를 맞받아 쳤다.
동등한 지위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권력기관이 영역 확보와 기(氣) 싸움을 벌인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태종이 좌사간(左司諫) 진의귀를 광주(廣州)로 귀양 보내고 우헌납(右獻納) 김여지를 원평으로 유배 보낸 다음 새로 임명한 좌사간(左司諫) 조용을 불렀다.
"출사(出仕)하면 오늘은 무슨 일을 간(諫)할 것인가? 어떤 사람을 논핵(論劾)할 것인가?’ 생각하고 반드시 행하려 하므로 군신(君臣)간에 소원해지고 동료가 꺼리어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나의 이 말은 나의 과실을 말하지 말고 백료(百僚)의 시비를 논핵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바르게 간(諫)하고 공평하게 탄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태종실록>
건수에 집착한 사간원을 준엄하게 꾸짖고 사헌부로 하여금 사간원을 규찰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수평을 유지하던 사간원과 사헌부의 위상이 깨진 것이다. 이것은 태종의 오른팔 하륜의 복안과 정면 배치되는 상황이다.
하륜은 사간원을 격상시켜 왕권을 제어하려 했고 태종 역시 하륜의 의중을 받아들여 의정부 산하였던 간원을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는데 동의했었다. 이는 태종이 왕권에 소금 역할을 하는 사간원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간원(諫員)들에게 있었다. 무소불위의 왕권을 감시하고 제어한다는 자부심에 젊은 간원들이 너무 앞서 나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야기했고 조정을 흔들었다. 이에 절묘한 태종의 수가 나온 것이다.
올렸다 내리는 것. 업무의 균형을 깨트려 두 기관의 충성심을 배가시키려는 주도면밀한 용병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