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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무화과 4권(서형석 박사, 배화여자대학교)
1. 들어가는 말
먼저, 평소 논자는 신앙선배들의 설교를 분석하여 한국적 성서해석의 지평을 여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진호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고 그 과제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논자는 요한복음을 연구하고 있는 신학도로서 목사님의 설교를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읽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감히 분석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성서신학적 관점, 특히 성서해석학의 관점으로 작은 논의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2. 구속사적 관점
목사님은 철저한 기독교 신앙 가운데 서서 하나님이 역사를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운영하고 계시다는 신앙에 입각해 모든 설교를 구성하고 계십니다. 논자는 이러한 목사님의 성경관을 구속사적 관점이라고 정리해 봅니다.
목사님은 구속사적 관점으로 성서를 해석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혹은 불로, 혹은 물로 세상에 큰 혁명을 일으켜서 메시아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그 소원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주의 거룩하신 뜻과 죽음을 본받아 그 육체를 혹은 불로 혹은 물로 사르고 씻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하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목사님은 외치십니다(무화과 제 5권, 156). 목사님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의도가 주님의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구속론의 입장에 서 계시지만, 세상에 큰 혁명을 꿈꾸시는 사회혁명도 바라십니다. 원래 목사님의 신앙구조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차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속론적 관점은 보수적 경향이라고 구분하는 요즘의 분류를 넘어서는 목사님의 신앙의 폭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한편 목사님은 전통적으로 구속사적 관점도 소유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역사 이래 다 정치에 경험이 있습니다. 생활상에 각종 박해를 받고 이상적인 통치자인 메시야가 강림하여 새로운사회를 건설하고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기를 희망 합니다”(무화과 제 5권, 248) 이 주장은 전통적인 구속사 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를 주장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목사님은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은 구속사적 신앙과 하나님 나라의 신앙을 통합하여 신앙이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에 머무르는 한계를 돌파하십니다. 구속사적 관점을 지나 목사님은 사회사적 관점으로 성서를 이해하시면서 어려운 사회 환경을 복음이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강하게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3. 사회사적 관점
목사님은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파악하고 계시지만, 늘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그 당시 조선 사회에 말씀을 적용하시려는 사회사적 관점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요즘 보수신앙과 진보신앙으로 신앙을 양분하여 이해하려는 경향과는 사뭇 다른 구속사적 관점으로서의 보수적 경향과 사회사적 관점으로서의 진보적 경향을 통합하는 목사님의 독특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사회사적 관점으로 서술된 목사님의 설교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조선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오로지 슬프게 한탄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니까? 희망과 영화와 즐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앞에서 자리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고난의 잔을 넘치게 하심은 마음을 연단하시어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무화과 제 5권 “경주자가 취할 것과 버릴 것”(히브리서12:1-2), 25) 이 설교는 히브리서12장의 경주자가 달려나가야 할 앞을 민족의 갈 길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내용을 민족이 처한 사회적 정황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입니다. 2)
또한 목사님은 사회 현상을 영적으로도 해석하는 경향도 드러내셨습니다. 성서를 가지고 지금의 사회 현상을 해석하기도 하시고, 사회현상을 영적으로도 분석하시기도 합니다. “두 왕자를 전부 폐출시키며 마귀의 술책을 믿고 대군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였으므로 결국 자신이 패망하여 몰락하게 되었으니 이는 마귀의 일입니다.”(무화과 5권, 52). 조선의 역사적인 단면을 목사님은 마귀의 일로 해석하십니다. 이것은 사회적 갈등을 영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회사적 해석 경향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3)
목사님은 한 현상을 영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해석하는 경향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사회현상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도 다르고, 성서를 사회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과도 구분됩니다.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라는 설교에서 목사님은 풍랑을 해석하시면서 “환란은 풍랑입니다. 사람마다 있고, 집집마다 있는데 하물며 조선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하고 질문하십니다. 4) 이러한 사회적 해석은 개인적인 풍랑과 민족적인 풍랑을 병렬하여 소개하는 방식입니다. 목사님에게는 개인의 풍랑과 조선의 풍랑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4. 유비적 관점
목사님은 성경을 해석할 때 먼저 성경 자체에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서술하시지만, 청중들을 고려하여 이미 청중들이 알고 있는 맹자나 유교의 경전을 인용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그 당시 청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다른 경전과의 비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사님의 독특한 성경해석학입니다. 목사님은 다른 경전과 비교를 하지만, 항시 드러내시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목사님이 어머님 주일에 하신 설교는 유비론적 관점을 드러냅니다. 목사님은 “자식을 어질고 훌륭하게 만들기 위하여서 맹자 어머니는 세 번 이나 이사를 다녔을 뿐 아니라, 짜던 베를 끊어 중도에 공부를 포기하면 이와 같이 된다고 가르친 단기의 일화가 있으며, 모세의 어머니는 우상이 가득한 궁중에 들어가서 몰래 그 아들에게 여호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모가 비록 악하더라도 그 자식은 착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나가 출세하고 이념을 확립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를 바라는 것은 어머니의 소망입니다”(무화과 제 5권, 108)라고 언급하시면서 맹자와 단기의 일화와 유비론적 관점으로 모세의 어머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논자는 유비론적 관점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5)
목사님은 기독교가 유교와 불교를 넘어서는 종교라는 관점으로 설교를 하시기도 하십니다. “불교는 마른 나무에 불 꺼진 재와 같고, 유교는 현실을 버리고 동산에 피신해 있으니, 이들은 세상 사람과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목적을 삼고 몸을 십자가에 바치셨습니다”(무화과 제 5권, 144). 주님이 오신 목적을 목사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하시면서, 기독교가 불교와 유교와는 구별되는 구원의 종교임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유교와 불교를 넘어서는 유비론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해석하시는 목사님의 독특한 성서해석방법입니다. 6)
5. 체험적 관점
목사님의 성경해석에는 생활세계라는 일상의 영역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목사님께서 활동하시던 교회나 사회의 일상적인 소소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통하여 설교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히시는 방법으로 목사님은 본인의 설교를 구성하고 계십니다. 논자는 이러한 경향을 목사님의 체험적 관점으로 성서읽기라고 정의해 봅니다. 일상의 생활세계에서의 체험은 목사님만의 독특한 체험이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청중들이 체험했거나 체험하고 있는 내용일 가능성이 높으며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7) 이러한 성서읽기를 통하여 목사님의 설교는 생동감 있으며 청중들로부터 큰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이와 같으니라”는 설교에서 봄바람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봄바람이 한 번 불어오면 텅 비었던 골짜기에 초목들이 모두 소생하게 됩니다. 겨울 동안 꽃 잎이 입을 닫고 열지 않다가, 봄바람이 불어오면, 만 잎이 웃으며 벌어지고 온화한 기운이 골짜기에 가득하게 됩니다. 선지자가‘생기야! 사방으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무화과 제 5권, 57) 여기서 목사님은 그 당시 모든 청중들이 알고 있는 봄바람의 위력으로 생기를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활세계를 중요한 공감의 장으로 설정하고 청중들과 소통하려고 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방법론에 입각한 내용입니다.
목사님은 “부활의 두 길”이라는 설교 결론에서 체험론적 관점을 명확하게 나타내십니다. “동쪽 하늘에서 올라온 태양이 무덤 속을 밝게 비취자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세상은 위엄과 장쾌한 분위기로 밝고 신선하고 깨끗하고 고상하여 소망이 충만하게 되었으니 저 컴컴하고 어둡던 세계에 비하여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 것입니까?”(무화과 제 5권, 88)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의 부활의 이미지를 일출로 서술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체험적인 관점에서 성서를 더욱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 서술하시는 목사님의 독특한 성서해석방법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독특한 경험을 중요하게 언급하실 때 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이후 경험한 일이 평범하지 않았고, 내 앞에 닥친 경우에 평탄하지 않아서 안내가 없으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인내하고, 해 마다 인내하여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의 인생은 다 인내로 이루어져있습니다”(무화과 제5권, 198)는 언급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인생 전반의 경험으로 제시하시려는 목사님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 또한 성경을 체험론적 관점으로 제시하시는 목사님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6. 계몽적 관점
목사님이 설교하실 당시 한국 사회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식민지 백성의 근성을 뿌리 뽑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러한 조선 사람들의 식민지 근성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이는 설교를 여러 편 하셨습니다. 설교의 주된 내용이 계몽이 아니더라도 목사님은 계몽적 내용을 삽입하셔서 조선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목사님의 마음이 설교들 속에 절절하게 배어나옵니다. 논자는 이러한 목사님의 설교적 경향을 계몽적 관점으로 성서읽기라고 정리해 봅니다.
목사님은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라는 설교에서 “구원의 방법도 그러하여 마땅히 오늘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구원이 전날에 있었다고 하나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조선 사람이 이런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냥 선조의 백골만 믿고 있습니다. 혹은 선대의 산소가 명산 길지에 있고, 집터가 명당 길지인 것만 믿는다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무화과 재 5권, 97). 이것은 풍수지리에 의존하여 과거 지향적으로 삶을 규정하려는 조선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계몽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논자는 이것을 계몽적 관점이라고 정의합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내신 목사님은 민족의식을 계몽하려는 관점을 설교에 포함하고 계십니다. 8) “손발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부엌귀신, 번개귀신, 산신, 지신 등 가는 곳 마다 귀신이 있어 입도 함부로 못 열고, 손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상에 노예가 된 피해가 이렇게 큽니다”(무화과 제 5권, 218) 이 말씀은 우상숭배가 노예근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목사님은 조선 민족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자유로와 지기를 바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목사님은 조선 사람들이 현재에 분투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날 조선인은 임금이 적은 것을 보고 노동을 하는 일에 나아가지 않고, 천한 일이라고 일하지 않으며 앉아서 일이 잘 되기를 기다리면서 말하기를 ‘반드시 참된 주께서 나를 찾아 오시게 되면 그 때는 내가 반드시 귀하고 운수가 대통한다’고 합니다”라고 갈파하시면서, 조선인들이 현재에 분투하는 생활을 하기를 촉구하십니다. 9) 이 또한 계몽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나가는 말
목사님은 이미 논자가 제시한 여러 관점들을 하나로 정리하는 틀을 가지고 계십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논자는 반복되는 주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표준, 준칙, 극기 10) 등의 단어를 반복적으로 설교에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목사님이 성서를 해석하고 신앙을 이해하는데 어떤 원칙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목사님은 자기를 극복하는 것을 신앙의 원칙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으로 논자는 판단합니다. 11) 이기심을 극복하는 일, 12)의뢰심을 극복하는 일,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로 극기는 완성됩니다. “목사님은 예수를 표준으로 삼아 앞으로 앞으로 그치지 않고 나아가면 영광의 미래는 쉽게 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흑과 지옥이 다 그 결과가 됩니다” 13) 목사님의 표준은 개인적인 신앙과 사회변혁을 이루는 준칙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신앙하는 예수가 그 표준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는 예수를 표준으로 삼은즉 생활이 모두 예수로 변화됩니다.”라고 주장하십니다(무화과 제 5권, 318).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은 그리스도인은 군자와 같이 비루해 보여도 비루하게 살지 않으며, 신앙으로 인하여 당하는 모든 고난을 인내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인내의 가치를 설교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십니다(무화과 제 4권, 147-153, 무화과 제 5권, 372, 383). 14)
세상에서 세상이 주는 고난을 모두 인내할 수 있는 신앙인은 자유합니다. 세상이 신앙인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폭력은 죽음인데 그것도 부활의 신앙으로 이길 수 있다면, 신앙인은 자유할 수 있습니다. 15) 그러나 물욕은 신앙인을 사망으로 이끌며,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16)
논자는 목사님의 설교를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이 틀은 기초적인 것이라고 언급해야 정직할 것입니다. 앞으로 목사님만의 독특한 성서해석 방법을 더욱 구체적으로 읽어내는 기초작업이었다고 논자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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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화과 제 5권, 146. “오늘날 세상에는 선한 이가 약하고 악한 이가 강하니 양과 같이 선한 것이 어찌 사자와 범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암흑이 광명을 누르려고 하고 죄악이 정의를 덮으려고 하니 성공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는 일제의 강점기에 활동하신 목사님의 상황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마땅히 결실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무화과 재5권, 147)라는 언급에서 허공을 치는 것 같은 세상의 성공을 부러워 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2) 무화과 제 5권,103. “우리들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귀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진 것을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목사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과 조산의 이름을 귀히 여기는 것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 또한 사회사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획가 요구하는 것은 현세를 위하여 봉사하고 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복음을 이해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생활의 준칙이 되게하여 복종하게 한 후에 천국이 인간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무화과 제 5권, 176) 이 주장도 역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통합하는 목사님의 독특한 구속사적 관점입니다. “오늘날 조선사람들의 형편은 요단강보다 더 위험합니다”(무화과 제4권, 230).
3) 무화과 제 5권 184. “마귀는 그때를 틈타서 들어와 그 민족을 망치고 그 나라를 말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주장도 나라의 망함을 마귀의 일로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4) 무화과 제 4권, 105.
5) 무화과 제 4권,67. “공자가 주역을 하도 많이 애독하여 책을 맨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그 책을 다독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사랑하기를 공자가 주역을 사랑하듯 하십시오” 동등한 비교의 방법으로 목사님은 유교를 언급하시기도 하시며 유교를 넘어서는 기독교의 모습을 강조하기도 하십니다. 또한 목사님은 불교도 동등한 비교방법으로 서술하기도 하십니다. “내가 금강산에 가서 절에서 숙박한 일이 잇었는데 그 절의 중이 밤새도록 독경을 하고 절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엇습니다. 이러하거늘 하물며 교우들이 ,성경.을 읽이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무화과 제 4권, 118)
6) 무화과 제 5권, 163. “이 세상에 불교도 깨끗하다고 하고, 유교도 역시 깨끗하다고는 하나 모두 진실로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도 역시 유비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무화과 제 5권, 127. “꽃이 핀 뒤에 결실을 하기 때문에 그냥 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을 보는 것은 희망으로 봅니다” 라는 목사님의 설교는 어린주이주일에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꽃을 어린이로 해석하는 체험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7엔 짜리 양말을 일본 여자들도 비싸다거 살 엄두를 못 내는데, 조선의 여학생이 제일 먼저 사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이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말하기를 망국적인 종자라고 하였답니다”(무화과 제 5권, 229) 이런 언급을 통해 목사님은 검소한 생활을 계몽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9) 무화과 제 4권, 84.
10) 무화과 제 4권,245참조.
11) 무화과 제 4권, 25.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은 극기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극기는 옥을 다듬는 것과 같습니다”
12) 목사님은 무화과 제 4권,200에서 이것을 애타주의라고 변형하여 선포하시도 합니다.
13) 무화과 제 5권, 286.
14) 무화과 제 5권, 336-342, 목사님은 “주의 인내를 배움”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십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심가치이며, 우리가 인내하는 것이지만, 그 인내도 하나님이 인내하게 하신 것으므로 인간의 인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화과 제 4권, 153에서 목사님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인내하라고 설교하십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조급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5) 무화과 제 4권 44. “이러한 자유는 부자도 모르고, 자유는 남녀도 모르고, 자유는 국가도 모릅니다. 자유를 오용하게 되면 인류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6:18) 이것이 바로 참된 해방입니다.”
16) 무화과 제 4권, 1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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