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24.성탄의 큰 별
성경본문
( 시 147:1-4, 마 2:1-12 )
출 처| 이성희 목사
별은 이렇듯 서정과 낭만을 간직한 밤의 제왕입니다. 별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인간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별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큰 별을 보고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알고 동방에서부터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마고스(magos)라고 부르는 별을 관찰하는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문 지리 등을 연구하여 국가의 경영을 자문하는 상류인이었습니다. 성탄의 큰 별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성탄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1. 예수님의 별
성경에는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성탄에 나타난 큰 별은 예수님의 별이었습니다. 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별만이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가 신비롭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별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별이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별은 예수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입니다(계 22:16). 예수님은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십니다(계 1:16). 예수님은 별이시기 때문에 가능하십니다.
2. 인도하는 별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별이 그들을 인도한 것입니다. 9절은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고 합니다. 별이 구체적으로 박사들을 인도한 것입니다. 전 하늘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대략 6,000개에 이릅니다. 왕궁에서 나온 박사들은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을 다시 보고 따라갑니다.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는 별을 따라 가는 것은 중요한 삶의 여정입니다. 별의 인도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3. 기쁨을 주는 별
10절은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합니다. 별은 동방박사에게 기쁨을 주는 별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치른 평생의 60번의 큰 전쟁 가운데 참패한 두 번의 전쟁인 모스크바 전쟁과 워털루 전쟁은 늦게 일어나 새벽 별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새벽 별은 그에게 영감고 기쁨을 주는 별이었습니다. 성경은 저주의 별도 있습니다. 계명성은 악한 별입니다. 기쁨의 별은 동시에 심판의 별이기도 합니다. 박사에게는 기쁨의 별이지만 헤롯에게는 심판의 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별입니다. 그리고 유명인을 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별이어야 합니다.
23.사람이 되신 하나님
>성경본문|마01장 18절 ~ 25절
>출 처| 옥한흠목사
성경을 읽을 때면 가끔 기적적으로 출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가장 먼저 기적적인 출생을 경험한 부부가 있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둘 다 100세에 이르는 노령의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무자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이제 자녀를 가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사라의 태를 여시고 이삭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밖에 위대한 지도자인 삼손이나 사무엘도 비슷한 출생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부모가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해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인물들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가장 먼저 이 기적적인 출생을 체험한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는 다 늙었습니다. 자연법칙 상 자녀가 태어날 가능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노령의 부모였습니다. 비록 자녀를 달라고는 계속 기도하고 있었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틀렸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세례 요한을 아들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옥동자가 태어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위대한 선지자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몇몇 기적적으로 태어난 인물들이 있지만 초자연적인 출생의 절정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는, 그가 자연법칙에 의해서가 아닌 처녀의 몸을 통해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600여 년 전 이사야에 의해 이미 예언된바 있습니다.
오늘 다룰 본문 중 23절에도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은 잘 납득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오시기 수백 년 전부터 그분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관계에 있으면서 아직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정혼이란 유대나라 관습 중 하나로,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들끼리 서로 혼인을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 집 딸 아이를 보니 참 귀엽네요. 우리 집 아이가 자라면 둘이 결혼시킵시다." 이런 말이 처음에는 부모들 간에 장난 삼아 오가다가 그 다음에는 "그럴 바에야 정식으로 두 아이를 엮어주도록 양가가 약속을 합시다." 하고 합의를 봅니다. 당시 정혼한 관계의 남녀는 15-16세가 넘어가면 언제든지 부모의 허락을 받아 동거할 수 있었으며, 결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이미 10대 후반에 접어든 성인으로서, 그들을 결혼시키기로 정혼한 부모들의 승낙 아래 언제든지 동거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고 동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가 요셉에게 찾아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요셉, 내 말 좀 들어봐." "날 믿지? 꼭 믿어야 돼. 그리고 나를 의심하면 안돼. 내가 하는 말을 꼭 믿어줬으면 좋겠어. 나를 사랑하지?" 그러자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인데, 말해 봐." 그리고는 마리아에게서 "나 임신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요셉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어서 마리아가 정신을 가다듬고 메마른 입술을 축여가면서 요셉을 설득시키려고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갑자기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내게 나타나서,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성령이 네게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고 그 아들이 태어나면 다윗의 위를 이어받아 만왕의 왕이 될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나는 남자를 아직 모르는데요.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어. 그러자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네가 잉태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다는 거야. 너무나 확실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면 그렇게 되어지리다." 하고 허락을 했어. 그런데 얼마 지나서 정말 내가 임신을 한 거야. 내 말 믿을 수 있겠어?"
과연 요셉이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 뒤로 요셉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일을 어떻게 하지? 마리아가 틀림없이 실수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한다지. 이 사실이 온 동네에 알려지면 옛날 율법대로 그녀는 돌에 맞아 죽을 텐데...그래,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자.'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라." 그것도 두 번이나 요셉에게 확인시켜주시면서 그의 마음에서 의심을 쓸어내셨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리지 말고 마리아를 데려와서 동거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시를 받고, 다음날 당장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동거했습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본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먼저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족보, 혈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이어진 예수님의 족보 안에 4명의 여자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특별히 그 여자들을 언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몇 가지 구절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말합니다. 5절에 가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6절 중간에 가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여자가 나올 때는 누가 어떤 여자를 통해서 누구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가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원래대로 말하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며,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고 해야 정상적인 패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위에서 기록해 내려오던 패턴을 완전히 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요셉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나오신 것뿐이지, 요셉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로 인해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절대 지칭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리아에게서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은 위대한 여성입니다.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시면, 그 뒤에 지불해야 될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런 마리아의 위대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 나머지, 나중에는 마치 그녀를 하나님처럼 우상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죄가 없다', '마리아는 영원한 동정녀다. 절대 결혼한 일이 없고 자녀를 낳은 일도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나중에 승천했다.'고 말하면서 지난 수천 년 동안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고 손을 비비면서 법석을 떠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런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가톨릭이 부패할 때 생겨난 잘못된 유전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현상들이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헌신한 위대한 여성이었음을 부인하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마음에 두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사실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꼭 묻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안 믿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버클리 대학에서 미국 교회를 대상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놀랍게도 가장 복음적이라고 하는 침례교회에서만 해도 31%가 나왔습니다. 곧 10명 중 3명은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장로교는 43%, 감리교는 66%까지 나왔습니다. 따라서 감리교의 경우 10명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 그 중 7명은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신앙적인 내용으로만 받아들일 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 데는 부인합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믿게 되면 치명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분명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예수님의 무죄설-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요셉의 아들이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되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십자가의 죽음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의 중요한 복음의 핵심들을 절대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을 안 믿는다면 우리는 벌써 믿음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안 믿으시는 분들께 참고로 말씀 드리면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이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최고의 이적은 천지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을 펴자마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과 함께 6일 동안의 천지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는 것만큼 어려운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처녀의 몸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처녀의 몸을 빌려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시는 것이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주저 없이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은 암수가 결합해서 새끼를 낳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합해서 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 한번 자기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일을 하셨습니다. 위대한 기독교 문학자 C.S. 루이스는 그 일을 두고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단 한번 자기가 사람이 되는 신비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생명창조의 도구라고 하는 남자의 역할을 하나님이 옆으로 제쳐놓고, 대신 자기의 손가락을 처녀 마리아에게 대서 임신을 하게 하셨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단 한번 자연의 거대한 장갑을 자기 손에서 벗어버리고 맨손으로 마리아에게 손을 대셨다는 것입니다. 자연의 장갑이라고 하면 남녀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자연법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을 그런 법칙에 구애 받지 않는 순수한 하나님의 손으로 마리아를 터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이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천사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이 마리아를 감동하고,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매우 힘있고, 신선케 하는 능력이 있어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하나님의 아들에게 죄가 오염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 없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람이시면서도 죄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중심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믿을 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마음에 묵상하면서 특별히 2가지 사실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첫째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절)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셨습니다. 교제할 수 없을 것 같이 높아 보이던 하나님이 맘껏 친구처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곧 우리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른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다만 유대인처럼 구약에 있는 하나님만 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에게서 어떤 이미지를 느끼게 됩니까? 높이 그리고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두려우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시내 산에서 우레소리와 함께 연기와 구름가운데 임하시던,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3, 4대까지 징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설혹 죄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죄 값을 반드시 갚으시는 철저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만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하나님으로만 알 것입니다.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요, 너무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요, 너무나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조마조마 해야 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되고,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그 하나님이 어떻게 마음에 와 닿습니까? 어떤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려집니까?
어떤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진짜 심각한 필요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품을 가지셨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깊이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하나님의 진면모를 확인한 사람에게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 혁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 세상에 오신 하나님, 내 곁에 오신 하나님,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 내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 안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 때 어떤 모습이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가까이 가서 그분의 옷자락을 잡고, 그분의 눈에 눈동자를 맞추면서 얼마든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대중 앞에 나타나셨을 때 가난한 자들, 고통 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짓밟히는 자들에게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 가까이 하며 함께 식사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주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하고, 고통하고, 짓밟히지만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자녀로 삼으시고 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내가 울 때 내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하나님, 내가 좌절하고 앉아서 일어나지를 못할 때 내 곁에 와서 내 손을 붙들고 일으켜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전에는 이런 하나님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을 흔들어 깨움으로, 우리의 감성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달구시는 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느낌을 통해 가까이 접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게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옛날처럼 멀리 보이던 하나님, 높이 보이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나와 함께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찬송93장)
이 찬송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근심에 짓눌려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 옆에 와 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다. 진짜 사랑의 하나님은 네가 울 때 네 옆에 있단다. 너의 눈물을 씻어 주신단다. 어떤 때는 너와 함께 울기도 하시지. 네가 근심에 쌓일 때 그 근심을 덜어주려고 네 곁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해주신 분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이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벌써 내 곁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여 놓았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완전히 들끓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머리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하나님입니다.
이번에 대선을 치르면서 노무현씨가 당선이 되었다는 확정 보도를 함께 들었습니다. 그리고 2, 30대 젊은이들이 광화문 네거리와 민주당사 앞에서, 그 밖에 도시 이곳 저곳에서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풍선을 들고 노란 머플러를 두르고는 좋아서 열광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제게 한가지 숙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저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저 젊은이들의 정서를 움직여 열광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흔히 말하는 노 후보의 정치경력, 곧 원칙과 정직을 평생 신조로 삼은 채 고난을 무릅쓰고 지금까지 외길로 걸어온 그의 정치 경력이 주는 감동일까? 물론 그런 부분도 약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노 후보는 멀리 보이고, 높아만 보이던 대통령의 이미지를 젊은이들의 가슴에 닿도록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정서, 감정을 움직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두 사람을 보면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 상당히 귀족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노 후보에게는 서민적이고, 고생을 많이 하고, 많은 실패와 고통과 좌절을 맛보면서 걸어온 어떤 감동적인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감성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노 후보의 홍보 영상물을 통해 보아 왔듯이 리어카를 들고 추운 겨울날 골목을 올라가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이미지, 사회 부조리를 쳐다보면서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는 이미지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감성에 호소했습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애환을 알아주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에 숨기고 있는 열등감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곁에 와 있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은혜도 바로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보이고 높이 계시는 거룩하신 분이지만, 그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에 접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우리 가슴으로 느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 하나님 때문에 울고, 웃고, 찬양하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도록 만든 배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곁에 와 계시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다일공동체를 운영하고 계시는 최일도 목사님을 많이 아실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서울 청량리 역 근처에서 소외되고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반 때, 평소 시를 잘 쓰시던 목사님은 이 일을 위해 춘천으로 가려고 청량리 역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청량리 역 마당을 지나갈 무렵, 갑자기 자기 앞에서 어떤 노인이 푹 하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갈 길이 바빠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겠지 하고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춘천에 가서 하루 종일 시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또 다시 기차를 타고 저녁 나절이 되어 청량리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광장으로 나오면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날 아침에 쓰러졌던 노인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하루 종일 이렇게 있었는지, 뭐라도 드셨는지 물었더니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을 부축하고는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의 가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앞으로 목사로서 어떤 사역을 해야 될까? 이렇게 굶주리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치자." 그래서 독일로 유학 가려던 꿈도 접고 청량리 역 근처를 자신의 목회지로 삼고는 지금까지 사역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노인들, 부랑아들, 창녀들을 위해 손수레에 버너와 라면을 싣고 다니면서 그들을 먹이는 사역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최일도 목사님을 통해서 목사를 만난 그 사람들이 갖는 목사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청량리 역에서 최목사를 만난 사람들은 목사 하면 가난할 때 가까이 와주는 사람,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 자기들과 같이 울어줄 수 있고 웃어줄 수 있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목사를 떠올릴 때면 정서적인 따뜻함을 마음 속으로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에서 어떤 분인가를 세밀하게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하나님을 성탄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우리가 마음에 꼭 담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 성탄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은혜는 속죄양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도 21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어린양 되신 예수님으로 우리는 주님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은혜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가 세상으로 내려간 것은 죄로 인해 폐허가 된 온 세상을 자신과 함께 들어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잡한 짐 아래로 자신을 넣으려고 몸을 굽히는 인간을 그려보십시오. 짐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는 몸을 굽혀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죄 많은 세상 밑으로 내려오셔서 마치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짐 밑으로 기어들어가 어깨에 짐을 받치고 일어서려는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 짐을 친히 짊어지고 일어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살을 자기의 살로, 우리의 뼈를 자기의 뼈로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뿐이라면 그는 죽음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람뿐이라면 죽음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죄를 대속하는 데에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었고, 죽음과 싸워 승리한 데에는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어린 속죄양이 되시려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 이사야가 오래 전에 예언한 내용의 성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멸시를 받고 싫어 버림을 당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허물을 위해 찔림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위해 상함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징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양의 은혜입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 죄가 용서 받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성탄을 맞아 우리가 2가지 은혜를 마음에 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가슴 뜨겁게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속죄양의 은혜, 곧 십자가에서 내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어린양이 되게 하시고, 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가 용서 받아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해 이 크신 은혜를 다시 한번 마음으로 반추하고 고백하고 찬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구주로 주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도록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2.예수를 잃어버린 사람들
>성경본문|눅2장 41절 ~ 절
>출 처| 김동호목사
아주 오래 전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비틀즈 단원 중 한 사람이 솔로로 데뷔하는 자리에 지금 이름은 잘 기억할 수 없지만 아주 유명한 가수 한 사람이 권총을 들고 무대로 올라가 쏴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답니다.
사람들이 나서서 겨우 말린 후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때 그 가수의 대답은 '저 놈의 노래엔 혼이 없어. 혼이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용서 할 수 없어'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 때 그 글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냥 대중적인 가벼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자기 나름대로 자기 노래에 혼을 담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세상적으로도 인기를 얻고 성공을 하는 가수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물 하나 하나에 당신의 혼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 하셨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신은 영어로 'sprit of God'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신을 의미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혼과 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것 하나 하나에 당신의 혼과 얼을 심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만물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혼이 있고 하나님의 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고 완벽한 것입니다.
음악을 듣다가 죽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음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음악 속에 그 음악을 작곡한 사람의 혼과 그 음악을 연주하고 지휘하는 사람의 얼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느끼고 그리고 그것에 감동하였을 때 정말 황홀하였었습니다.
어느 호텔 커피 숍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정성 없이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들어주는 청중이 없는 곳에서 혼을 불어넣는 연주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연 저들의 연주에는 혼이 없었습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권총을 들고 무대로 뛰어 올라갔었다는 어느 가수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었습니다.
혼을 불어넣은 음악과 혼을 불어넣는 연주를 들을 때, 혼이 들어있는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혼이 들어있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감동합니다. 그러나 그 혼과 얼이 빠진 음악과 그림 그리고 책을 만날 때 우리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고 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자기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기쁩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그냥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근사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결혼을 앞두고 하나님께 말이 통하는 사람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말이 통하는 아내, 말이 통하는 친구, 말이 통하는 자식.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좀 험한 표현이지만 세상에는 혼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얼 빠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혼과 얼이 빠진 사람은 추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하여도, 아무리 출세하여 세상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의 삶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얼이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얼과 혼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혼이고 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없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정작 예수가 없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성전에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었습니다. 하룻길이나 잃어 버렸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저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뒤늦게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사흘 길을 돌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잃어버리는데는 하루가 걸리지만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데는 사흘이 걸렸습니다.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착각이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속에 예수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있습니다. 자기가 목사요 장로요 집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속에 예수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있습니다. 전에 자기 속에 예수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금도 예수가 자기 속에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목회에 성공하여 큰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이고 교회 재정도 넉넉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실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특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우리는 그와 같은 착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정작 중요한 예수님을 잃어버린 교회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얼입니다. 혼입니다. 그 예수 한 분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우리는 그냥 얼빠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얼빠진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떠들어도, 구제를 합네, 선교를 합네 떠들어도 얼빠진 노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희 교회 게시판에 저에 대한 쓰여진 글 몇 편을 읽었습니다. 저에 대하여 염려하며 혹은 안타까워하며 쓰신 글이었습니다. 그 중 한 두 가지가 마음에 깊이 걸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김동호 목사가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여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수 천명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당한 충격을 제게 주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왜 그렇게 삐딱하게 사람을 볼까?'하는 마음과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의식과 의도 속에 그와 같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글과 지적은 매우 예리하고 중요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제 의식과 의도 속에 그와 같은 생각과 마음이 없다고 하여도 언제 그와 같은 의식과 의도를 가지게 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가 아니라 이미 제 무의식과 의도되지 않은 일들 속에 그와 같은 위험이 내재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펄펄 뛰면 변명하기 보다 나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조심하는 것이 옳고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젼과 야망처럼 색깔이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나름대로 제가 평생 주님 안에서 꿈꾸어 오던 비젼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개인적인 야망으로 바뀌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 내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과 혼이 빠져나가게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기는 비젼이라고 붙들고 있는데 그것이 비젼이 아니고 개인적인 야망이 되어 얼빠진 사람이 될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인 추종자를 불러모으려고 교회를 개척한 것이 아닙니다. 추종자가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정말 함께) 교회를 세워 가보기 위하여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심(初心)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여 동역자들을 추종자로 취급하고 생각하게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조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그와 같은 글을 읽었을 때 조금 섭섭했지만 많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 맹목적인 추종자만 붙여 놓지 않으시고 좋은 의미에서 파숫군과 감시자들을 붙여 놓으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예수를 잘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잃어버리게 될는지 알 수 없음으로 늘 조심하고 경계하여야만 합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비젼을 개인적으로 야망으로 바꾸지 아니하고 동역자들을 추종자로 만들지 않기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한 마디로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함께 조심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중심에 계시지 아니하고 사람이 그 자리에 대신 하지 않도록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언제나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늘 조심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 전 이중섭의 작품전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중섭의 어느 그림 앞에서 아주 아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을 흘리며 저는 그 그림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흘리는 그 눈물이 바로 이 그림을 그릴 때 이중섭이 흘렸던 바로 그 눈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그림에는 작가인 이중섭의 혼과 얼이 살아 있었습니다.
이중섭이라는 사람은 비록 가난하여 은박지 껍질에 철필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는 얼과 혼이 있어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이중섭 보다 많이 부자여서 좋은 물감과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겁니다. 그러나 제게는 제 혼과 얼을 그림 속에 불어넣을 수 있는 달란트가 없습니다. 때문에 저의 그림은 아무리 좋은 물감과 붓으로 그렸다고 하여도, 아무리 좋고 비싼 캔버스에 그렸다고 하여도 가치가 없는 죽은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고 하여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살아있는 교회라면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작은 교회라고 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살아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뜻밖에 그와 같은 착각을 잘합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하여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빠져 있는 교회라면, 그리하여 그 교회의 중심과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어떤 한 인기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비젼을 가장한 개인적인 야망이 교회를 움직이고 있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무가치한 교회입니다.(그러나 무조건 큰 교회라고 해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혼과 얼이 빠져 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대형교회 목사라고 해서 모두가 다 타락한 목회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뜻밖에 그런 착각을 잘 합니다)
아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이중섭과 같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좋은 물감과 붓을 가지고 크고 화려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도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좋은 물감과 붓 그리고 크고 좋은 캔버스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은박지이던 크고 화려한 캔버스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얼이 담겨져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고 처음으로 맞는 성탄절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한 분 잊어 버리거나 잃어버리면 순식간에 우리는 얼빠진 사람, 정신나간 교회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들이 될겁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도 하나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시며 우리를 뿌리치실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오늘 이 복된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예수님이 성탄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 무의도 속에 언제나 예수님이 계시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좋아하여 전에 우리 교회 게시판에 올렸던 이해인 수녀의 '겨울 길을 간다'라는 시를 읽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겨울 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게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 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고운 별 같은 예수님 한 분 내 삶에 계시면 겨울 숲길을 가도 행복하겠지만 고운 별 같은 그 분 한 분 잃어버리면 비록 내 삶이 풍성한 여름과 가을 같다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언제나 고운 별 같은 예수님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20.성탄에 복 받는 가정
>성경본문/눅2장 1절 ~ 14절
>출 처| 김선도목사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면, 옛날 에 밤잠을 자지 아니하고 성탄 트리 를 만들고 연극을 준비하며 뛰어다 니던 참으로 행복한 추억들을 회상 하며 동심을 돌아가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성탄이라고 생 각합니다. 어떤 교회에 초등학교 4 학년 학생들이 성탄 성극을 준비하 였습니다. 바비이라고 하는 어린이 가 베들레헴의 여관집 주인역을 맡 았습니다. 바비의 부모님들은 손님 이 오면 융숭하게 대접을 하는 친절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비는 여관 집 주인의 역을 하면서 요셉과 마리 아가 여관에 찾아왔을 때에 성극의 대본대로
"미안합니다. 이 여관에는 방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돌아서 나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소년은 늘 눈물이 글썽이게 되었습 니다. 며칠을 연습한 후 성극을 하 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요셉과 마리 아가 여관을 찾아왔습니다. 문전에 서서 이 소년은 대본대로 말을 했습 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소년은 대 본에도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 지만 잠깐 들어오셔서 차나 한잔 들 고 가시지요."
이것이 동심의 세계 의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성탄절은 온 세계의 가정이 성탄절로 인해서 축복을 받는 세계의 명절입니다. 서 구의 성탄절은 흩어졌던 온 가족이 집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나누며 정 담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받는 날입 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구정과 같 습니다.
처음 성탄절의 기록을 보면 가정 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러 고향 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 혼한 요셉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 태된 어린 아기를 낳는 이야기가 나 옵니다. 말구유에 예수님이 탄생했 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homeless-people이 노숙하는 곳에 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야기입 니다. 노상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말 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우리 가정이 복된 가정 으로 성탄의 은총을 입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온 세계의 가정의 명절인 이 성탄절에 우리가 축복을 가정이 되기 위해서 세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의 가정에 평화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축복의 가정이 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게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 습니다. 성탄의 메시지는 평화의 메 시지입니다. 세계 제 1,2차 대전 때 에 성탄절이 되면 정전 협정도 없이 서로 전쟁을 멈추고 적들과 먹을 것 을 나누고 선물을 나누며 피차간의 가정을 그리고 향수에 젖는 날로 보 냈다고 합니다. 저 멀리 유대 땅 베 들레헴에 태어난 예수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친 세상, 살벌한 세 상,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는 이 세 상에서, 성탄절의 평화의 왕이 우리 가정에 태어나게 될 때에 그 가정에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게 됩 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축복입 니다.
한달 반전에 저희 가정에 7번째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을 호산 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호산 나! 호산나!"라는 말이 좋다고 제 손자인 호백이가 지어준 것입니다. 저도 집에 함께 있으면서 어린 아기 가 태어날 때까지 기도하며 순산하 기를 바랬습니다. 마침내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소리를 지르 며 이 가정의 가운데 뉘어질 때에 온 가정이 변화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뻐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는 바로 어린 아기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비스 럽습니다. 우리 가정에 손자 한 명 이 태어나도 그렇게 기쁘고 즐겁다 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우리들의 가정 한 가운데 태 어나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탄생될 때에, 그리고 그 아기 예수 님을 믿음으로 맞이하게 될 때에 우 리는 기쁘고 감사하게 되며 365일을 평화의 날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 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찬의 삶입니다.
한 유대인이
"행복의 비결"이라 는 책에 행복은 건강, 재물, 아름다 움, 즐거움, 조화 등이 있어야 된다 고 갖가지 조건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을 유대인 랍비에게 읽어보라 고 드렸는데 그 유대인 랍비가 그 책을 읽어보고는 그 많은 조건들이 다 갖추어져도 불행해 질 수 있으며 행복을 위해서 한가지 꼭 필요한 것 이 있다고 그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평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돈과 권력이 아무리 많이 있 어도 평화가 없이 다투기만 한다면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탄생될 때에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 는 행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광림 교회에 있는 스태인드글래 스를 자세히 보시면 색유리 조각들 이 모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징 하고 성령과 교회를 상징하며 숲 속 에 불타는 호렙산, 웨슬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조화를 이루어서 위대 한 예술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 럼 우리의 조각나고 모난 것들이 예 수님의 사랑으로 뭉쳐지게 될 때에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아름다운 축복 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 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에 평화가 임할 때에 이 살벌한 시대에 주님을 모시고 참으로 행복한 가정 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린 아기 예수를 찬양하고 예배할 때에 행복한 가정이 된다.
성탄절 때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 님께 찬양을 하고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Christ(그리스도) + mass(천주교의 미사)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그리스도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탄 절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백화점 앞에 가보면 산타클로스가 사슴들이 끄는 썰매를 타는 것이 성탄인 것으 로 상징을 합니다. 그러나 처음 성 탄절의 이야기에는 산타클로스가 없 습니다. 서구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잘 드리지 않다가도 성탄절과 부활 절 때에는 예배에 꼭 참석을 한다고 합니다. 성탄절 때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성탄절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탄절이 가까워 올 때마다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공산치하에서 도 어떻게 하면 그날만큼은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기쁘게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옛날의 추억에 행복감을 느끼게됩니다. 성 탄절 성극을 할 때에 제가 모세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억압받는 이스라 엘 백성을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 으로 인도하는 모세역을 할 때, 공 산치하에서 억압받는 가운데 그 성 극을 하게 될 때에 저는 많은 은혜 를 받았습니다. 공산당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새벽에 성도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그 앞에서 캐롤을 부르 고 찬양을 하며 성도들과 뜨거운 정 을 나누면서 성탄을 지냈던 그때를 생각할 때에 그것이 바로 참 성탄절 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점성학을 연구하 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 상한 별을 보고는 예물을 들고 베들 레헴에 찾아온 것은 예배를 하기 위 함이었습니다. 왕 앞에 경배하기 위 함이었습니다. 카스파라는 동방박사 는 황금을 가지고 예수님께 드렸는 데 황금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인간 소유의 최고의 것을 드렸다는 것입 니다. 넬콰이어라는 동방박사는 사 상과 영향력을 상징하는 유향을 드 렸습니다. 발타진이라는 박사는 몰 약을 드렸는데 예수님의 시체를 썩 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몰약을 드렸다 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우리 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정성을 다해 서 예배드릴 때에, 어린 아기 예수 님 앞에 경배하고 찬양할 때에 큰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됨 을 믿습니다. 찬양하는 성탄, 예배하 는 성탄이 바로 축복의 상징입니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가정에 축복이 임한다.
성탄절은 홀로 지낼 수 없습니 다. 혼자서 지내는 성탄절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지내는 성탄절이 되어 야 합니다. 가난한자,외로운자를 생 각해야 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유학 하던 시절에 홀로 성탄을 맞이한 경 험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탄을 맞이하게 되면 한 달 동안을 분주하게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텅텅빈 기숙사에서 홀로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앉아 홀 로 성경을 펴고 성탄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고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홀로 보내는 성탄절은 적적하기 짝 이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저를 늘 사랑해 주시던 미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도 홀로 성탄절 을 맞이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에게 선물할 큰 구두를 한 켤레 사가지고 홀로 계신 그분의 집 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찾아가자 그 분은 반갑다고 저를 끌어안으셨고 제가 드린 그 선물을 붙잡고 너무나 도 기뻐했습니다. 둘이서 식사를 하 며, 서로를 위로하며 성탄절을 지냈 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홀로 지 낼 수 없는 성탄절에 너그러운 마 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 야 합니다. 이 살벌한 세상속에서 성탄절에 선을 베풀고자 하는 선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에 축 복이 임하게 됩니다.
여러 해 전에 카돌릭 교회의 "마리세리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 가 오갈 곳이 없을 때에 수도원에 가서 수도사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락에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은 수도사들조차도 들어 갈 수 없는 곳 입니다. 이 소년은 그 방을 들어가 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사 는 그 방은 금단의 방이라 수도사들 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소년 에게 말을 했으나 소년은 몰래 그 방을 들어갔습니다. 그 방에는 다른 것은 없고 예수님이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메달려 있는 고(古)상이 하 나 있었습니다. 한참을 십자가에 달 린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그 소년은 예수님이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 을 했습니다. 그 소년은 담요 한 장 을 훔쳐가지고 벗은 몸으로 있는 예 수님의 상을 덮었습니다. 그 소년은 예수님이 시장해 보이는 것처럼 느 끼고는 매일 아침마다 빵 한 덩어리 를 예수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동 심에 젖은 이 소년이 정성을 기울이 는 동안에 이 소년은 예수님과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소년이 예수님 께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보고 싶다 고 호소를 합니다. 이 소년의 애타 게 부르짖는 모습을 보시고는 예수 님이 잠시 사라지셨다가 나타나셔서 그 소년의 어머니가 천국에 있으니 함께 가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 소년이 굶주리고 추운 예수님을 돌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이 소년에게 있었던 지극한 소원이 이 루어졌다는 신비스러운 영화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실직을 당한 신 체 장애자들 95명을 비행기로 제주 도에 모시고 가서 서귀포에 있는 호 텔에 모셨습니다. 그분들은 건강한 사람들도 출 수 없을 정도로 기쁨에 넘치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출봉에 올라갔 습니다. 휠처를 타고 일출봉에 오르 려는 그분들을 제주도 도지사가 119 구조대원들과 부녀소방대원들을 동 원해서 신체장애자들을 부등켜안고 일출봉을 올라가도록 도와 주셨습니 다. 그리고 해가 뜨는 모습을 보는 그분들에게 부녀소방대원들께서 따 끈한 커피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 들은 크리스찬들이 아닙니다. 그들 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을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축복을 받은 성 탄에 평화의 왕을 우리 가정에 모시 는 믿음이 있을 때에, 어린 아기 예 수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있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베푸는 사람 들의 가정에 성탄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9.성탄의 실현
>성경본문| 눅2장 1절 ~ 절
>출 처| 이동원목사
20대 초, 예수 믿기 직전 죽음을 생각해본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자살의 유혹을 느끼게 한 소설이 두 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까뮈의 이방인이었는데 주인공 뫼르소는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살인합니다.--살인의 이유가 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강렬한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 진것입니다. 그는 장례식에 가서 울지 않습니다. 해변가에 파티에서 웃지도 않습니다.--전 어쩐지 그를 이해할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의 소설(에세이)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중간에/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덥다.--나는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무슨 제목으로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아무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이 두 개의 작품의 주인공이 걸린 병은 권태였습니다.(후자의 책은 초 현실주의 작가라고 불리우는 이상의 권태의 첫머리글 이었습니다.)
성탄의 계절인데 좀처럼 삶의 의욕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너무나 똑같은 그날이 그날이라는 이 평범성 때문에 삶의 의욕을 못 느끼고 계신 분이 있으신지요? 저도 한때 인생은 이렇게 부조리하고 권태로운 힘겨운 존재 그 자체라고 믿고있었습니다만 예수 믿고 나니까하루 하루가 기대요, 감격입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내 인생을 바꿀줄 정말 몰랐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2000 년 전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기리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의 증언을 통해서 그가 이 땅에 오신 방법과 그 교훈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방법--그는 의외의 방법으로,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1.의외의 방법
1) 의외의 상황
--가이사의 호적등록의 명령이 그것을 입증합니다./2:1--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초대황제이었습니다. (본명은 Caius Octavius, 30BC-14AD)줄리우스 씨저의 조카였던 그는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독재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은 그의 생일인 9.23을 새해로 바꾸었고, 그를 구세주와 신으로 선포했습니다.--세금수입이 중요했던 그에게는호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고, 이것이 요셉과 마리아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진짜 구세주가 탄생한 것입니다. 가짜 구세주의 통치하에 진짜 구세주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 의외의 장소
--베들레헴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의수도 로마, 성도 예루살렘, 항구도시 가이사랴, 욥바, 아름다운 갈릴리 해변 의 디베리아스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라니? 오죽하면 미가 선지자 가 주전 650년경에 예언하기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한 로마의 변방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에서도 작고 가난한 마을을 택하신 것이 의외가 아닙니까!
3) 의외의 인물
--마리아와 아기/나사렛땅의 틴 에이저 소녀를 통해 아기의 모습으로.구세주가 이렇게 오심도 의외였습니다.
2.평범한 방법
우리가 그의 출생에서 느끼는 의외성은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평범하게 오셔서는 안된다는 가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매우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의외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1) 호적등록
--독재자의 통치수단인 인구조사로 세금을 강화하여 정부의 재원을 증가시켜 보겠다는 것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목격하는 평범한 현실이 불과 합니다.
2) 베들레헴
--이스라엘 땅의 평범한 서민마을로 지금도 팔레스틴 통치아래서 인구수는--수지보다 적은 가난하고, 평범한 마을일뿐입니다.
3) 마리아와 아기
--미혼모였다는 것이 특별해 보이지만(우리는 성령의 잉태라는 사건을 알고 있지만) 외적으로만 보면 미혼모들을 통한 출생도 죄인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회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그들 일행이 호적등록으로 분주한 이 마을에서 투숙 거절을 당한 것도 평범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II.교훈--의외의 방법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오셨다는 것-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요?- 두가지 교훈을 기억해야 합니다
1.평범한 일이 중요한 일이다.
2.평범한 일이 주님의 일이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삶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원론적 사고의 극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일과 세상일이,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따로 따로 존재한다는 사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로 가정일과 직장일 에 당당하게 임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베들레헴 주민들과 여관주인의 입장에서 그 날 얼마나 많은 손님들을 치러야 했을까요?
무감각하게 될 수 있음을 이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주님이 태어날것을 알았더라면, 메시아의 부모가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무슨일을 하든--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가르칩니다. 6-7절에 보면, 해산의 과정에서 도움을 준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주님의 태어남을 알았더라면 그랬을까요? 그 일이 우리를 권태롭게 하는 아주 평범한 반복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섬김의 대상이 보잘 것 없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우리가 주님이 맡겨 주신일로 알고 주께하듯 한다면 우리의 일상적 삶은 얼마나 놀라운 삶으로 변신할수 있을까요?
이런 시각 곧 주님의 시각으로 본다면 인생은-하루 하루가 특별한 날이요, 경험하는 모든 일이 특별한 일들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인 평범한 아기에 대해서도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18.마리아의 찬가- 하나님의 지혜
>성경본문|눅1장 46절 ~ 56절
>출 처| 이동원목사
우리가 기독교의 메세지를 가리켜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기쁜 소식 Good news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천사는 아기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가난의 땅 유대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탄생한 이 사건은 당시의 관념, 오늘날의 관념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스캔달에 불과한 사건이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지구촌의 한 작은 이 마을에서 발생한 스캔달이 어떻게 인류를 위한 복음의 사건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놀라웁게도 그 대답을 바로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이나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추구해온 대표적인 세가지가 있었다면 하나는 지혜, 지혜를 통한 이성을 통한 행복의 추구,.또 하나는 권력을 통한 추구, 또 하나는 물질을 추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이 세가지가 철저하게 부인되고 부정되고 있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가 아니고 권력이 아니고 물질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복음일 수가 있습니까? 그 대답은 차라리 단순한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지혜 있는 사람들만 행복하고 구원 받을 수 있었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지혜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만약 권력 있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쟁취한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힘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물질을 획득하거나 소유한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가 있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면 가진 것이 없이 살아야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기예수로 오신 바로 그 분, 또 33년의 짧은 시간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신 그 분은 어쩌면 그러기에 무지한 그 수많은 이 땅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도 힘이 없이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복음일 수 있다는 역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있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기예수의 사건이 정말 여러분의 복음이 되고 나의 복음이 되고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마리아의 찬가는 우리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동의해야 할 세 가지의 사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혜라는 낱말 대신에 이성 이라는 낱말을 삽입시켜도 무방합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추구, 지혜를 통한 추구,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므로 행복하거나 구원을 얻을려는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가능하지 않다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에 나타난 5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51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여기 마음의 생각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사람들이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소유할려는 그 끈질긴 행복의 노력 구원의 노력을 하나님은 무의로 돌리셨다라고 오늘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기독교는 결코 반 지식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지식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성경은 하나님이 지식의 근원이고 지혜의 근원 이라고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잠언 같은 책은 그 책 한 권 전체가 지혜의 중요성, 혹은 지식의 중요성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이성이 눈을 뜨고 지식이 개발되는 역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인간적 지식의 추구만으로 사람은 행복하거나 결코 구원될 수는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동의 하십니까? 인간적인 지식만의 추구 하나님을 떠난 지혜의 추구 혹은 이성의 추구만으로 결코 인간이 행복하거나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 마리아의 찬가는 바로 여기에 중요한 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교도소에서 일하고있는 교도관이였는데 이 사람은 인간의 모든 범죄가 무지에서부터 온다고 확신한 사람이였습니다. 벌써 오래 전 얘기입니다만 우리나라에 아직도 글을 깨우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때 그는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열심히 문맹 퇴치 운동을 했고 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 왔습니다. 한 수인이 교도소에 들어와서 비로소 글을 깨우치게 되었고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가 출소하면서 이 교도관을 찾아와서 참 감사하다고 제가 글을 깨우치고 새사람이 되어서 나간다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면서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얼마후에 아~이 교도소를 나갔든 사람이 다시 들어왔어요. 똑같은 교도소에 왔어요. 교도관이 이번에는 왜 들어 왔나? 살펴보았더니 제목이 문서위조 죄 였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우리는 소위 지식 경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이 지식, 지식만으로 결코 이 지식이 이 현대의 사회 속에 그리고 앞으로 미래의 사회 속에 결코 그것만으로 복음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의 상징은 아무래도 인터넷일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지식의 전파,그것은 벌써부터 만만치 않는 피해를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자살 사이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명을 버리는 모험을 계속하고있는 슬픈 사실을 봅니다. 인터넷에 뜨고 있는 수많은 포르노 사이트라든지 혹은 한 공동체를 반대하고 음해하기위한 수많은 앤티 사이트들, 그리고 익명성을 이용한 책임 없는 공동체 비판들이 얼마나 오늘 우리 사회에 크다란 새로운 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인가를 우리는 뚜렷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오욕 내지는 지식의 악용의 현장들을 이미 우리는 눈을 떠서 보고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이 아니라 본래 인류 역사의 맨 처음부터 그러했든 것입니다. 사탄이 처음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보여주었을 때 성경은 아담이 그것이 지혜스럽게 할 만큼 탐스러움이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지식은 이미 악이였든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 1장21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사람의 이성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의 지식의 추구가 아무리 놀랍게 현저히 발달해도 사람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라고 성경은 단언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고요.
이 지식 사회에서 ‘예수 믿으십시요 그러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단순한 복음의 접근은 얼마나 무지해 보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이 단순한 복음의 접근을 통해서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같은 고리도 전서 1장18절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파워라고 바울사도는 증언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있든 고린도 라는 도시는 그 당시 아테네와 함께 아직도 지식의 현란한 프라이드를 자랑하고 있든 지성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지성의 도시 고린도에 살면서 지식 최고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고를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보시면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하나님을 떠난 지식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가이드 되지 못하는 지식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지 못하는 지식은 인생을 교만하게 할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오히려 흩어놓으신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를 생각해 보십시요.지식이 행복의 길이라면 지식이 구원의 길이라면 저 나사렛 땅이나 베들레헴 땅이 아닌 예루살렘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 소위 랍비들이,허다한 랍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산해드린 이라는 종교회의 안에는 당당하게 공부를 한 수많은 학자들이 존재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 희랍의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공부하고 있었든 아니 로마에서 키케로(Cicero) 를 위시한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위한 구세주를 보내고자 하실 때 이런 모든 지식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비, 나사렛 땅에 살고있었든 무명의 한 여인, 소녀 마리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신비를 바라보십시요. 이것은 지혜의 추구가 지식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식이 대답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통해서 아기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첫번째 사실입니다.
이 아기예수의 탄생이 나의 복음 우리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동의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그 둘째는 권력의 추구가 또한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권력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생존의 의지, 나로 하여금 여기에 살게 하는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살게 하는, 인간의 생존을 붙들고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Will to power, 이 권력에 대한 의지는 정치가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권력으로 말미암은 갈등은 삶의 현장 어디에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의 갈등 그리고 고부사이의 갈등 시어머니와 며누리의 갈등, 누가 보스냐 이 말이죠. 곳간 열쇠를 누가 쥐느냐? 그것도 권력의 갈등이에요. 권력에 대한 의지, 이 권력의 갈등의 모습은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도 소란스러운 이 세상의 모든 삶의 현장 도처에서 우리는 바로 이 권력의 갈등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보면 한 사람이 권력의 정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립니다.돌은 정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 내려 옵니다. 그러나 이 도달 할 수 없는 정상을 향해서 계속해서 돌을 굴러 올리고 있는 이 시지프스의 이 처량한 모습은 바로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 사람들이 그것이 해결이 아니라는 어렴풋한 어떤 느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권력에 집착하고 있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이 권력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어떤 일이고 할 수가 있다는 그런 착각때문 이죠.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권력으로 결코 못할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첫째 권력으로 우리는 행복을 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권력으로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 앞에 비천한 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신비를 찬양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다시 한번 52절의 본문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다.같이 우리 52절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 비천한 자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48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하나님 어째서 나를 선택하셨나요?
만약 권력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권력자가 이 세상에 소망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올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황실을 통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가이사는, 시저는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황실을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땅에 살고 있었든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든 한 어린 소녀, 이 소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놀라운 작정의 신비, 이 선택의 신비를 어떻게 우리는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배경에서 다시 말씀을 읽어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들을 오히려 그 위에서 내려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쓰시는 하나님, 나같이 비천한 소녀를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 놀라우신 주님을 지금 마리아는 찬양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권력이 크다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지 못합니다.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죠.
제가 이따금씩 교인들에게 이런 부탁을 받습니다. 종종 자주 받는 부탁중의 하나가 이런 것 입니다. ‘목사님 이분 아무개 있죠? 목사님 좀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이 분이 한번 제대로 믿으면 아주 큰 일을 할 사람이니까 목사님 잘 봐주세요’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은 셋 중에 하나에요. 어떤 사람? 첫째로 좀 많이 배운 사람이라든지, 이 사람이 가진 지식의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 또 하나는 어떤 생각입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권력이 좀 있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있는 사람, 그럼 이 권력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돈이 좀 있는 분, 그래서 그것 가지고 굉장히 크다란 일을 할 것이라고, 그래서 목사님 좀 관심을 가져주세요. 엑스트라(extra)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래서 저가 철이 없을 때 관심을 그런 분들에게 많이 가졌든 적이 있습니다. 하하~ 그리고 시간을 써 보았어요 그런데 한번도 성공한적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아직도 큰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 권력만이 혹은 돈만이 혹은 이 물질만이 어떤 복음의 전파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생각을 은근히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뭐 그런 생각할 수도 있죠.
저는 요즘 그 KBS엔가 어디에서 굉장히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강의를 하고 계시는 분을 보면서 아! 저분이 예수를 잘 믿으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할까? 뭐 돌인지 도올인지 말이에요. 어쩌다가 예수를 잘못 믿어 가지고 나와 가지고 저렇게 기독교를 왜곡하고있는 얘기를 함부로 던지고 있을까? 그분이 제대로 잘 믿었으면 오히려 얼마나 복음 전파에 크다란 도움이 될까? 생각할 수가 있잖아요? 그런 생각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비판해도 기독교의 복음에 영향력은 결코 축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선택해서 놀라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도 도올이 아닌 돌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해 내실 수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고 복음의 신비에요. 우리가 그 선교역사를 이렇게 읽어보면은요 복음이 전파될 때 한 사회에 들어갈 때 대부분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서민 계층에서 복음이 시작이 됩니다. 물론 전혀 그 예외로서 좀 권력을 가지고 있고, 또 물질도 가지고 있고 또 지성도 높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쓰임을 받는 경우가 없었든 것은 아니에요 참 귀한 분들이죠. 그러나 그것은 예외입니다. 보편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복음이 전해질 때 항상 서민계층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 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한 사회를 바꾸고 문화를 바꿔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천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27절의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그리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권력이 해결이 아니다 권력이 행복이 아니다 권력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로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강포에 쌓인 아기의 모습으로 이땅에 찾아오신 크리스마스의 사건,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일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무력해 보이는 한 아기, 힘없어 보이는 한 아기, 마리아라는 소녀를 통해서 나사렛 땅에서 자라나게 하신 힘없는 무력해보이는 이 아기의 사건, 그러나 이것이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휴머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지금 이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찬양을 들어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그렇습니다. 권력의 추구 그것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비로소 아기 예수의 사건은 복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또한 우리는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의해야 합니다.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영웅은 부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분,돈보다도 강력한 크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돈을 추구하느냐, 돈을 추구하고 돈을 따라 다니다가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 돈이 결코 할 수 없는 것 기억 하세요. 이 세가지 다 마찬가지 입니다마는 결코 돈이 할 수 없는 것, 돈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우리가 좋은 침대는 살 수가 있지만 돈으로 달콤한 잠을 살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우리는 비싼 헬스Equipment를, 건강기구를 살 수가 있지만 돈이 우리의 건강을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돈으로 근사한 책들을 사서 아름다운 데코레이션을 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이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사람은 살 수가 있지만 사랑은 살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출세는 살 수가 있지만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고가의 금 십자가를 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돈으로 구원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자주 물질은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심은 구원 받는 길에 크다란 장애요소로 우리를 방해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타난,복음서에 나타난 어떤 청년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죠? 만일 이 사람이 물질을 잘 관리 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였드라면 네가 물질을 가지고 나를 섬기면서 따라오라고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물질은 주인이였습니다. 물질이 신이였습니다. 그 물질 때문에 결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갈 여백이 없었음을 알았든 우리 주님은 그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어떤 도전을 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팔 수가 있느냐? 팔고 나를 쫓으라!’ 성경은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슬픈 모습으로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탐심은 주인이 였습니다.탐심이 그에게 있어서는 우상이였든 것입니다.
그래서 53절에서 마리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찬양 합니다. 자,본문에 나타난 53절의 마리아의 찬양 부분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53절 다같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주리는 자가 오히려 좋은 것으로 체험을 받을 수가 있지만 가진 자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는 그 비극, 때로 그래서 이 부자는 빈손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행복을 갖지 못했고 구원을 가질 수가 없었든 것입니다. 그는 빈손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물질 그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악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악이라고 말할 뿐이지 돈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언제 돈이 악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돈은 우상입니다. 돈이 나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해마다 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한 몇 가지 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각나는 이야기들이 있어요.그 중에 하나,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아마 들어셨을거에요. 이것이 때때로 말하는 사람에 의해서 좀 변화되어서 소개 되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드린 얘기가 그의 오리지날에 가깝다고 생각을 해요.녜,이것은 본래 맨 처음 실화인데, 시작된 것이 카나다에 온테리오에 크리스챤 엘레멘트리 스쿨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어느날 이 학교에서는 성탄, 소위 크리스마스 피젼 플레이라는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극 그 스타들을 그 배우들을 모집을 하는데 한 학생이 너무 너무 연극을 하고 싶었어요. 랄프라는 학생이였습니다. 4학년 학생이였는데 정서 장애를 갖고 있었든 학생이였어요. 이 학생이 너무 너무 연극에 나가고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어떻게 그가 연극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크리스챤 Teacher는,선생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랄프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역을 하나 맡겼습니다. 아무래도 액션을 많이 하거나 말을 많이 하는 배역은 맡을 수가 없겠죠? 그래서 아주 가장 말이 적은 배역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여관주인 이였습니다. 사관주인,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밴 마리아를 데리고 요셉이 여관의 문을 두들겼을 때 이 사관주인이 하는 말, 한마디 말만 하면 돼요. ‘방 없어요’ 방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랄프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열심히 연극 연습을 시켰습니다. 한마디 말이니까 정성스럽게 또박 또박 발음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방 없어요’ 그 말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것을 세 번 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한번에 물러간 것이 아니라 ‘큰일 났는데요 이 사람이 아기를 낳을 것 같아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그러면 한번 더 ‘방 없어요’ 세 번 하면 되는 거예요. 자, 드디어 연극이 시작 되었습니다. 자, 연극을 지도했든 모든 분들은 숨을 죽이고 랄프가 어떻게 역할을 감당하는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여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관 문을 두드립니다. 주인이 나왔습니다. 랄프가 나와서 또박 또박 연습한데로 말을 했습니다. ‘방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않고 한번 더 매달렸습니다. ‘큰일 났어요 이 사람이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에게 방 을 줄 수가 없나요?’ ‘방 없어요’ 한번만 더 하면 돼요. ‘어떻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랄프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러면요 제 방 오세요’ 하하~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약속을 깼어요.그러나 그것은 숙연한 감동이였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누가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가 있을까요? 이런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오실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간의 지혜가 대답이 아니라고 믿으십니까? 인간의 지혜의 추구, 이성의 추구가 행복의 길이 아니고 구원의 길은 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믿으시나요? 두 사람만 믿으시나요?하하~ 권력이 대답이 아니라고 믿으시나요? 권력이 행복이 아니고 그리고 권력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그렇게 믿으시나요? 물질의 추구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소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아기 예수로 이땅에 오시게 하셨다는 사실, 이 성육신의 사건은 복음일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33년 후 이 아기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할 그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셨으며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사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셨다는 이 사건이 복음일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그러나 말이죠 아직도 우리 가운데 인간의 지혜에 희망을 걸고 있는 분이 있다면, 또 인간의 권력의 추구에 내 인생의 행복이 있다고 믿고있는 사람이 있다면,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에만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복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추구하고있는 내 지성, 그 지식,나는 이제 이 지혜의 한계를 알았으며 지식의 남용의 무서운 악도 알았으며 또 우리가 추구하고있는 사람들의 권력의 추구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사람들이 그토록 매달리는 그 물질, 그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물질의 허상을 아셨다면 이제 2000년 전 이땅에 아기예수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아기 예수의 구유앞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33년 후 그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옵니까? 우리대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버림을 받으시며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면서 붉은 피를, 보혈을 떨구어 계시든 골고다의 언덕 갈보리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요. 주 예수여 당신이 그리스도이시며 당신이 구주이시며 당신이 소망이시며 당신이 행복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참된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들만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이 행복을 이 구원을 아는 모든 분들에게 성탄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도 하십시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우리가운데 아직도 참 행복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한 체 이 성탄절을 맞이하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 구세주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아니하고 확신 되지 아니하는 그런 분들이 있나요? 이 조용한 시간 성탄을 하루 앞둔 이날 크리스마스의 전날,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 있다면 이 성탄은 얼마나 좋은 성탄일까요? 목사님 저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계절,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내 마음속에 맞아드리고 싶어요.예수님 내 방에 오세요.내 마음의 방에 오세요.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오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싶은 분이 있다면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는 이 시간에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백과 같다면 따라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주 예수여 내 마음속에 오십시요.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저를 구원해 주십시요. 오직 당신만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맞아드립니다.
이 기도는 되풀이 할 필요가 없는 내 일생의 가장 주요한 기도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맞아드린 여러분, 그러나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모시고도 아직도 내가 주인노릇하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주시는,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해 주시는 그 삶의 진정한 의미와 보람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다시 여러분의 짐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시죠. 그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통치 앞에 순종하십시요.
예수는 그리스도, 참으로 그렇게 고백 할 수 있다면 이세상에 우리를 둘러 싼 삶의 환경이 좀 열악해도 찬바람이 불어도 너무 그렇게 위축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마리아처럼 찬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해서 큰일을 행하신다. 오 하나님 제가 그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의뢰하면서 이 어려운 시대를 찬양하며 살아 갈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예수께서 나의 주님 되신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인정합니다. 주님 높여드립니다. 찬양합니다. 우리에게서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당신의 놀라운 은혜로 임재 하셔서 우리를 붙잡아 인도해 주시옵소서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경배해
거룩하신 주님 보좌 앞에 엎으려 절하세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우리 다 일어나서 찬양하십시다.
17.큰 기쁨의 좋은 소식
>성경본문|눅02장 09절 ~ 11절
>출 처| 석원태목사
기독교가 인류에게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이 대답의 확실성과 명확성은 기독교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두말 할 필요없이 기독교는 인류에게 기쁨의 희망을 줄 수 있는 복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사색이나 인간 이성의 산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초자연적인 하나님 자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식(eujaggevlion)의 구약적 배경은 전쟁승리의 좋은 소식과 관계하고 있습니다(삼상 31:9). 뿐만 아니라 아이 출생과 관계되어 좋은 소식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렘 20:15). 그러나 영감의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가 그 백성에게 온다는 메시야적 강세를 예언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사 40:9, 50:7). 신약 복음시대를 여는 역사의 아침에 보냄받은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은 양치던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탄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eujagglivzomai uJmi'n cara;n megavlhn)이 되는가?
Ⅰ.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2절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8절에 「…하나님의 복음으로」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복음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보내어진 좋은 소식’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이 세상적인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다른 신의 산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적으로 높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자신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사람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생각도 못한 기상천외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시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는 사람의 모양을 띠고 세상 중에 임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쇼킹한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였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 자기 사랑의 최대, 최고, 최귀, 최종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13절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4절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 자신’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 바로 그 장본인이 되기 때문입니다(마 1:21). 예수는 복음입니다. 그 둘째는 예수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도록 실제로 구현시킨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놓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막 10:45). 그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직접 나타내 보이신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복음의 정체로 오시고, 복음의 정체성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드러내신 분이었습니다. 그 소식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 것입니다.
Ⅲ.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11절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식의 내용은 구주의 탄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주’이시라고 하였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① 너희에게 - 곧 개인의 것입니다.
② 다윗의 동네 - 곧 가정과 이웃의 것입니다.
③ 온 백성의 것입니다.
④ 그리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의 구주’였기 때문입니다(요 4:42).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렇게 온 우주가 공유할 구원의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Ⅳ. 그 좋은 소식의 내용이 크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① 진리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5절에 ‘복음의 진리’, 아니면 ‘진리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갈 2:14). 골로새서 1장 5절에는 ‘복음의 진리’라고 하였습니다.
② 소망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23절에 ‘복음의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약속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평화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15절에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죄의 평안, 사랑의 평안, 기쁨의 평안, 복된 평안, 영원한 평안의 소식입니다.
④ 불멸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하였습니다. 그 복음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쇠하거나 변하거나 없어지거나 소멸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받고, 가지고, 먹고 사는 자에게는 죽음이란 생명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멸절에로의 출발이 아니고, 영원과 함께 출발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 중에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8). 말하자면 좋은 소식이 담고 있는 내용의 정체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진리의 좋은 소식이요, 소망의 좋은 소식이요, 평화의 좋은 소식이요, 불멸의 좋은 소식이요, 부활의 좋은 소식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구원의 복음인고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브리엘 천사가 들려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사실상 예수님의 성탄을 가르쳐 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갈 1:11~12). 그것이 예수 자신의 화육강세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세상에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성탄은 온 세상 사람 모두에게까지 미치는 우주적 기쁨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보유하고 있는 지상최대의 복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받고, 믿고, 즐기는 자들로 하여금 형성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교회로 하여금 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대명을 내렸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자랑하고, 복음전하기를 부끄러워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롬 1:15, 16). 그는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고후 11:7)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성탄을 맞는 다윗의 동네는 불가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받고 전하는 복음의 고장이 된 것입니다. 실로 최초의 아름다운 원시적 복음의 동네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네게 구주가 나시리니 / 예수는 놀라운 주님 / 선생이나, 좋은 모범이 아닌 / 하나님의 아들, 살아계신 말씀. 공상으로 꿈의 씨실을 잣고 있는 철학자도 / 미래를 주시하는 예언자도 / 과거를 탐구하는 학자도 아니신 분. 오늘날 네게 구세주가 나시리니 / 빛나라 별들이여! 소리치라 천사의 음성이여! 네게 이 귀중한 선물 주어졌으니 / 노래하라 땅이여 / 하늘의 모든 것들아 기뻐하라. 그러한 구세주를 오래 기다려온 이 세상은 / 죄에 빠져 있고, 의심과 공포로 찢어져 있네. /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진리와 지혜를 찾아 헤맸지 / 영광 영광의 빛이 드러나네. 오늘날 네게 구세주가 나시리니 / 이 땅의 유일한 희망, 생명, 진리, 길 / 능력의 하나님 영광스러운 구세주 /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나셨네. (Wilfred A. Peterson, ‘The Art of Living’)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그것은 나의 것입니다. 나의 동네의 것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의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것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받은 자들에게 축복이 있을지어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에게 영광이 있을 지어다! - 아 멘 -
16.기쁜 소식을 전하노라
>성경본문| 눅02장 08절 ~ 15절
>출 처| 김삼환목사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의 기쁨의 날입니다. 한 개인의 기쁨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기쁨이 아닙니다. 모두의 기쁨이요, 인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큰 기쁨입니다. 지극히 놓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하고, 주님이 오심으로 왜 우리에게 기쁨이 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죄악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하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이 사건을 가장 위대한 비교할 수 없는 큰 사건으로 온 인류가 국경을 초월하여 이 날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대영제국이 자기 국가의 시조를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맞추어서 주후 2002년을 온 세계가 쓰고 있습니다. 대 로마제국이 자기나라의 기원을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추어서, 미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우리가 단군에 맞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맞추어서 온 인류의 예수님의 탄생에 맞추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의 악기를 가지고 한 나라를 다스린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지휘하시는 온 인류의 왕이시며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지휘자이십니다. 그래서 소련도 자기 나라의 국력을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한 날에 맞추어서 역사를 카운트다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도 국경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지도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땅위에 모든 지도자는 어떻게 하면 살까. 바로 살까. 길을 찾았던 분이고 고민했던 분이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야는 이 땅위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세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가장 큰 날이며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날이요, 인류에게 평화를 주는, 하늘과 땅을 다같이 충만한 은혜로 채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나에게 기쁨을 우리에게 기쁨을 인류에게 기쁨을, 임종을 맞이한 분에게도 소망을, 오늘도 교도소에 있는 분에게도 거기에서도 기쁨을, 병원에 있는 분에게도 기쁨을 가난한 분에게도 기쁨을,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학자, 모든 지식인 정치인에게 다같이 기쁨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50년 역사 속에 가장 큰 뉴스는 많이 있지만은, 슬픈 뉴스, 놀라는 뉴스 많이 있지만은 대한민국이 다같이 기뻐했던 뉴스는 30여년 전에 포항 앞 바다에 석유가 난다고 해서 온 나라가 다 둘러 빠졌어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100% 국민이 다 좋아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그날은 온 국민이 다 흥분하고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세상에 우리나라에 석유가 난다니,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던 그 당시 상황으로는 얼마나 놀라운 뉴스였습니까? 나중에 정부에서 석유는 안 나고 가스가 난다고 해서 얼마나 낙심을 했는지 가스야 우리 집에도 있는데 말이죠. 정말 너무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그 다음에 두 번째 온 나라가 흥분하고 감격했던 것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가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은 통일과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 100%가 세상에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일성이를 만날 수 있을까? 일성이는 영원히 못 만나는 신으로 생각을 했지
세상에 그 당시로서는 긴박한 순간인데 어떻게 일성이를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큰 꿈을 가졌어요. 그러나 그 기쁜 소식은 끊임없는 그 이후에 긴장으로 이어지고, 남북회담도 많이 왔다갔다하고 많이 했지만은, 남북관계는 아직도 태산 넘어 태산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뉴스가 있습니다. 월드컵 뉴스, 노벨상을 받은 우리 대통령, 수없이 많은 뉴스가 있었지만은, 참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뉴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도 참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뉴스는 어디에 있는지, 이것은 하늘로부터 주시는 천사가 전하여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주신, 이 기쁜 소식 외에는 참 기쁨이 이 땅위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근본문제를 다 해결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는 문제를 다 두고 그대로 우리가 문제 앞에서 우리가 가쁨을 잠시 누릴 뿐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실존적인 모든 기본,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를 걱정에서 불안에서 죄에서 저주에서 멸망에서 실패에서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구세주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하세요.
구세주... 구세주, 예수는 구세주예요. 히브리말로 메시아예요. 헬라어로 그리스도예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예요.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 건져내는 거예요. 기독교는 건지는 종교예요. 건져내는 거예요. 물에 빠진 자를 건지는 거예요. 죄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거예요. 저주에서 건지는 거예요. 멸망과 불행에서 우리는 건지시는 거예요. 우리를 건져야 할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미움, 간단한 것 같지만, 미움을 못이깁니다. 미움에 빠지면 결국 미움에 의해서 칼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미움은 살인 이예요. 의심 별 것 아니지만, 결국 의심을 못이기는 거예요. 누가 의심을 이길 사람이 있어요. 낙심을 누가 이겨요. 못이깁니다.
우리의 악한 생각, 불의한 생각, 이 모든데서 우리를 건져낼 자가 누구예요. 우리 교회도 검찰도 많고 경찰도 많고 변호사도 많고 판사도 많습니다. 많은 죄인을 잡아다가 구속하고 가두고, 감옥에 집어넣고, 그런다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죄는 어디 있느냐. 그 속에 있는데 사람 속에 있는데, 속에 있는 것을 꺼내지 아니하는 한, 인간은 건져낼 수 없어요. 감옥에 가두어도 안되요. 그래서 감옥에 가도 자기 마음대로 안돼.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를 이 많고 많음 문제에서 건져낼 자가 누구예요. 이 모든 죄의 배후에는 성경에는 사탄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은 크게 우리를 두 가지로 넘어뜨리는데, 하나는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거예요. 우상에 모든 것을 바치게 하면서 거두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나라,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국가는 다 지금도 우상숭배에 다 빠져 있어요. 그래서 그 나라는 좋은 지하자원, 좋은 여건을 가지고도, 하나도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우상숭배 때문이에요. 네팔이나 인도, 이집트, 버마,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우상 숭배하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전에 우리 인류가 유대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주변의 나라가 이집트, 그리스문명, 바벨론 문명 다 우상입니다. 사람이 우상 앞에 가서 앞날을 빌고, 건강을 달라고 하고, 자녀 달라고 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병을 치료할 생각은 안하고 거기 가서 자꾸 빌어봐요. 그런 나라일수록 평균 수명이 짧고 질병도 많고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거기에서 일생을 금욕하며 금식하며 평생을 거기에 바치니 얼마나 불쌍해요. 우상에서 건져낼 자가 없어요. 그리스도가 아니면 건져낼 수가 없어요. 할렐루야.
죄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우상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아의 가장 찬란한 문명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중국이라고 생각하지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문명이 대단합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라고 하는 곳은요 세계7대 불가사의입니다. 이거 잘 알아야 합니다. 앙코라는 아프리카에 있구요. 앙고라는 토끼구요. 앙코르와트 비슷한 말 같아도 다 달라요. 앙코르와트 이것이 캄보디아입니다. 아마 지상에 있는 유적지 가운데는 제일 장엄합니다. 피라밋보다 더 장엄합니다. 엄청납니다. 만리장성보다 더 장엄합니다. 길이가 20km, 남북이 10km, 대단한 큰 도시입니다. 그 당시에 100만 명이 살았습니다. 690년부터 1400년까지 1431년까지 이 앙코르 제국이 수도를 건설해서 여기에서 태국, 버어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까지 다 지배했던 거대한, 엄청난 큰 왕국입니다. 규모가 놀랍습니다. 지금 사원이 290개인데요, 한곳의 사원의 돌이 7톤의 돌만 1700개를 세워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앙코르 제국이 어떻게 망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 인류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오백년을 숲 속에 지내다가 발견한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신비하잖아요. 설악산의 조그만 집이 있어도 우리가 알게 마련인데, 이 큰 도시가 있는데도 인류가 전혀 몰랐고, 캄보디아 국민들도 전혀 몰랐어요. 한 사람도 모르고 역사 앞에 최고의 강대국이 어떻게 한 순간에 사라졌는지, 거기에 있었던 것을 인류가 모른 것에 대한 인류를 과학자가 못 찾고 있어요.
여러분 한 번 인터넷에 들어가 찾아보세요. 길이 없어요. 이 거대한 국가가 왜 이렇게 몰락했는지 알 길이 없는데, 지금 학자들이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어요. 하나는 그 주변의 주민들 이야기가 그 곳의 수만개의 우상, 힌두교 사원, 불교사원들이에요. 힌두교로 시작했다가 불교로 끝났는데, 두 종교의 사상은 비슷하니까 윤회설이니까 이 우상귀신으로 인해 몰락했다라는 거예요. 이 왕국의 글 하나도 문서 하나도 찾아낼 수 없어요. 지금, 이것이 우리 조선시대 일인데, 지금 그걸 모르는 거예요. 미개한 나라도 다 자료가 나오는데, 이 최고국가의 흔적을 하나도 알 길이 없는 거예요. 한 번 가 보십시오. 대단합니다.
또 하나는 이 사원에 궁궐에 역사를 돌에다 생활과 업적을 기록했는데, 마지막 그 왕국이 끝났을 때에 자기들의 모습을 그려놨는데, 괴질, 문둥병이 들린 국민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마지막으로 나오고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학자들이 마지막에 전염병에 걸려 몽땅 죽었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고야 사람을 통해서라도 알 것 아니에요. 도굴꾼이라도 들어와 전해졌을 거 아니에요. 누구라도 나무하러 가서라도, 짐승을 잡으러 가서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사백년 동안 인류가 그렇게 모를 수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옛날 전설의 고향 같아요. 몽땅 전염병으로 죽었던지, 아니면 밤마다 귀신이 나타나서 전체를 없애 버렸던지, 이 두 가지로 학자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어요. 확실한 것은 귀신을 섬겼으니, 귀신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에요. 우상을 섬기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귀신을 섬기는 거예요. 나는 캄보디아에 가서 잠을 자면 머리가 아파서 잠을 못 자요. 전 나라가 다 뱀이라니까요. 문 손잡이도 다 뱀이에요. 교량, 다리, 기둥 처음부터 끝까지 다 뱀이에요. 그렇게 그 나라에 귀신이 지배하니 그렇게 분열이 많고... 여러분 가정이나 국가나 자꾸 싸우면 그것은 사탄에 놀아나는 거예요. 싸울 일이 없어요. 예수 믿고 살아봐요. 싸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좋은 일만 많이 있고 싸울 일은 없어요. 믿으시면 아멘.
마음에 증오가 있고, 불안이 있고, 다 이기적이고, 욕심이고, 정욕이고, 교만이고, 이런데서 다 싸움이 일어나는데, 분쟁이 어디에서 와요. 캄보디아는 지금까지 뱀귀신이 다 덮고 있어요. 얼마나 가난한지 세계에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찬란한 문명을 가진 후손들이 왜 저렇게 어렵습니까? 뱀이 그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까 모든 문화가 뱀문화예요. 잘 들으십시오. 캄보디아 글도 뱀글이예요. 한번 가 보십시오. 그 분들은 춤도 꼭 뱀 춤입니다. 마지막을 꼭 뱀같이 틀어요. 노래도 뱀노래예요. 희한하다니까요. 정말이에요. 우상숭배라고하는 것은 모든 문화, 삶까지 지식까지 다 그렇게 지배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를 자유케 할 자가 없어요. 우상에서 건져내시고 불의에서 건져내시고, 가난에서 건져내시고, 모든 저주에서 건져내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북한 땅을 살리는 길이 쌀 많이 보내주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만 들어가 보아요. 예수만 믿어봐요. 북한이 우리보다 원래 더 잘 살던 곳인데 이 기쁜 소식만 들어가 봐요. 그 나라는 최고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에요. 그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어두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그는 생명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죽음에서 건지시고 그는 부유하심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가난에서 건지시고 그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셔서 불행에서 건지시고 그의 능력은 우리를 모든 저주에서 멸망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은혜는 우리를 만가지 어려움에서 건지시는 줄 믿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그가 있는 곳에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어디에서든지 기쁜 소식이 기쁨이 그 가정에 그 삶 속에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국에서 두 청년이 길을 걸어가다가 한 사람은 교회로 발을 돌리고 한 사람은 세상 길로 갔어요. 교회로 간 이 사람은 미국의 클리브렌트라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어요, 세상으로 나간 그 친구는 죄악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감옥으로 가게 되었어요.
헐리웃의 최고의 스타는 마릴린 몬로예요. 몬로와 겨루는 최고의 배우가 있는데 콜린 다운젠스 에반스라고 하는 배우예요. 두 사람이 헐리웃에 쌍벽을 이루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로 나와서 젊은 목사님과 결혼을 해서 선교사로 갔습니다. 이 분은 아직도 살아있어요.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물었어요. 어떻게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버리고 갈 수가 있냐고, 괜찮으냐고. 예, 저는 영국 여왕보다 더 행복하고 미국 대통령보다 행복합니다. 이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 아닙니다.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실 때에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좋은데도 이렇게 만가지 좋은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우리가 답답하고 가정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길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퇴폐 문화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은 없어서가 아니에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기 때문이에요. 주님의 빛이 주님의 은혜가 주님의 사랑이 주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할 줄 믿습니다. 행복을 찾아갔던 몬로는 행복을 찾지 못했어요. 인기를 찾아가고 온갖 부귀 영광을 누리려고 했지만, 그는 그 곳에는 행복이 없다고 했어요. 그의 책에는 나는 늘 한 손으로 잡으려고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고 했어요.
저도 저의 친구 하나가, 인물도 좋고 구리 수염이 얼굴을 멋지게 가리우고 멋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몇 개나 나오고, 나는 우리 나라에 큰 지도자가 될 줄 알았어요. 늘 그와 같이 놀러 다니고, 같이 잠자고, 그에게는 아가씨들도 많이 따랐어요. 나는 하나도 안 따라 오는데 얼마나 여자 친구들이 많은지 제게 늘 인사를 시켜주고는 했어요. 나는 이 친구가 훌륭한 사람이 될 줄 알았어요. 어려서는 교회를 잘 다니더니 세상 길로 갔어요. 제가 명성교회를 맡고 신문에도 나고 하니까 찾아 왔어요. 사무실 집기가 다 밖으로 나와 있는데 몇 백만원만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실도 집기도 찾아 주었어요. 그런데도 몇 년 전에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술 먹고 노량진에서 새벽 1시 반 버스에 치어 죽었어요. 나는 이 친구가 너무 아까운 거예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매인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오늘 우리는 사람이 외모가 얼마냐 좋으냐 인물이 얼마나 좋으냐 능력이 얼마나
있느냐 이런 것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어요. 그러나 남들처럼 가진 것도 없고, 인물이 부족해도, 배운 것이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만 서면 우리는 이 세상에 모든 문제를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노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 제일 큰 평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고 믿음의 생활하면서 마음의 평화가 주어집니다. 마음의 걱정, 근심, 의심, 염려, 낙심, 좌절이 없습니다. 다 주님의 능력으로 떠나갑니다. 사람은 거룩한, 오늘 찬송한대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우리 인간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때. 할렐루야.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 백성의 박수를 받아도 행복이 없지만은 아무 박수를 안 받고 혼자 살아도 내 안에 우리 주님이 오시면 온 우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참으로 첫째가 내 안에 평안이에요. 안에 행복이에요. 내가 기쁨이 없는 사람, 자신 없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내 옷을 벗겨 주시고 새 옷을 갈아 입혀 주시는 분이에요.
두 번째가 어디에 평화이냐. 기독교의 두 번째 평화의 포인트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가정에 행복이 없으면 말하지 마세요. 부부간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이 만남 속에서 평안이 있어야 돼요. 행복해야 돼요. 길이길이 70년, 60년 살면서도 하루같이 살아야 돼요. 사랑은 그것이 참 사랑이에요. 보이는 것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외모 좋아하고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이것은 엔조이예요. 오래갈 수 없어요 사랑은 영원한 거예요. 할렐루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의 얼굴이 빛나야 집이 잘되는 거예요. 아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얼굴이 화장을 잘 받고 이래야 그 집이 잘돼요.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야 그 집이 잘되는 거예요. 처음 모르는 사람은 밖에 가서 성공을 하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가정에 행복이 있어야 밖이 잘돼요. 되면 뭐해요. 집이 무너졌는데. 있을 곳이 없는데. 아내가 화장도 잘하고 머리도 잘 만지고 가꾸고, 옷도 깨끗하게 입으면서 음성도 밝고 이래야 그 집이 잘되는 거예요. 화장하기도 싫어하고 세수도 싫어하고 머리도 안 감고 그렇게 지내면 집이 안돼요. 집에서 바가지 긁고 불평 불만하면 나가서 무엇을 해도 소용도 없고 안돼요. 되지를 않아요. 저도 처음 목회를 모를 때는 교회를 부흥시키려 했는데 아니에요. 내 집이 부흥되어야 교회가 부흥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질서가 있어요. 내가 먼저 기쁨이 있고 가정에 기쁨이 있어야 이 기쁨이 남에게 전해지는데 자기는 불평 불만으로 가
득 차 있으면서 남에게 복음을 전하니 그것이 될 리가 있어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저희 집사람 한번 만나보세요. 40대 같아요. 결혼한지 37년이 넘었는데 얼마나 예쁘고 화장도 잘하고 머리도 잘하고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면 미장원에 안 가도 집안에서 젓가락을 가스 위에 올려놓고서라도 머리를 만져요. 가정불화 일으키면 안됩니다.
아내는 성경에 연약한 그릇이라고 했어요. 연약하게 다루어야 돼요. 강하게 다루면 강하게 나와요. 집이 무너져요. 연약한 자로 다루면 계속 연약해요. 아름다운 것은 연약하게 하셨어요. 꽃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하나님께서 연약하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아내를 강하게 다루려고 하면 실패하는 거예요. 약하게 접근해야 아내가 끝까지 아름답게 보존이 될 수 있어요. 남편은 하늘같이 받들어야 돼요. 자기는 계속 대접을 받고 남편 대접은 안하고 아침도 안 해주고 직장에 보내면 안돼요. 하루종일 나가서 시달리는 남편을 위해서 아침은 일찍 일어나서 화장도 하고 아침을 준비하고 인사를 하고 당신은 나의 태양이십니다. 그러면 집안이 잘되는 거예요. 다른 것은 걱정하지 말아요. 사업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행복하게 나와서 사업을 하면요 사업이 신나게 잘되고요 설령 사업이 잘 되도 가정이 무너지면 어느 함정에 빠질지 몰라요. 정상적인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나면 항상 위험하게 되어 있어요.
사업 하나만 잘되면 소용 있어요? 사업이 행복이에요? 인생에 전부예요? 아니에요. 아내는 영원히 천국까지 같이 가는 사랑의 파트너예요. 끝까지 사랑해야 해요. 할렐루야.
주님이 주신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이 주신 기쁨이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이 주신 평안이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함께 하시고 이 나라 이 땅 위에 함께 하시고 또 우리 나라가 새로운 대통령을 모시고 이 나라가 화합하고 다시 한번 정말 멋있는 21세기에 세계에 온 민족이 부러워하는 복된 나라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15.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성경본문|마02장 01절 ~ 6절
>출 처| 최성규목사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
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
서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
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
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는 한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이르렀습
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ꡔ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ꡕ(마 2:2)라고 질
문했습니다. 만약 동방박사들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
습니까? 2천년 전 헤롯 왕과 유대인들은 동방박사들의 질문을 듣고 대 소동에
빠졌습니다(마 2:3). 유대인들은 아기 예수가 나신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유대인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
들은 말씀을 보고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알려주었을 뿐입니다(마 2:4-5). 이방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는데, 정
작 가야 할 유대인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아기 예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은데, 경배하는 사람은 적
습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은 많으나,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예수를 경배
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돌잔치에서 아기가 소외되듯이, 성탄절에 예수
님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2천년 전,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는 지금도 우리 가
운데 찾아오십니다. 성도된 우리는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가 어디 계신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목자들처럼 “서로” 말해서 아기 예수께 나아가 경배해야 합
니다. ꡔ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
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ꡕ(눅 2:15).
그러면,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께서 어디 계신지 알아봄으로,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성탄절을 만듭시다.
첫째, 길 위에 계신 아기 예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는 화려한 궁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왕이신 아
기 예수는 이 땅에 오실 때, 여관방조차 구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
와 요셉이 ꡔ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
이 없ꡕ(눅 2:7)었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오늘
날의 마구간과 같은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1세기의 마구간은 천정과 벽이 따로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여관의 안 마당이
나, 자연 동굴이 마구간 역할을 했습니다. 그곳에 동물들을 묶어 놓을 울타리
와 먹이를 주도록 구유가 놓여 있습니다. 그곳은 동물과 종들과 가난한 사람들
이 함께 밤을 지새우는 곳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길 위에서 태어나셨고, 길 위
에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기 예수는 길 위에 계십니다. 길 위에 계신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지
고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안식처가 되어주십니다. 실패를 만나서 길 위에
지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꿈과 소망을 잃고 어느 길
로 가야할지 몰라서 고통당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길이 되어주십니다. 육체
와 마음의 병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치료해주십니다. 이처럼 아
기 예수는 길 위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담당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바
울은 ꡔ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
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
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ꡕ(히 4:15-16)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에게 가야 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상처받은 자와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를 경
배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성대한 잔치와 화려한 추리는 진정
한 성탄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는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람으로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낮아져서 모
두가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성탄을 만듭시다.
둘째, 말씀 속에 계신 아기 예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서는 말씀 앞에 나와야 합니다. 말씀
을 모르면 왕이신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아기 예수께
나아가기 위해서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
고 유대 땅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별이 사라진 것입니
다. 하나님은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까지 별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아기 예수
에 대한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동
방박사들의 질문에 말씀으로 대답하게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왕
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는 동방박사들에게 ꡔ유대 베들레헴이오
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
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ꡕ(마 2:5-6)라고 대답했습니다. 동방박사들
이 이 말씀에 따라 베들레헴으로 향하자 다시 별이 나타났습니다(마 2:9).
이처럼 말씀이 없는 성탄은 성탄이 아닙니다. 성탄절이 되었다고 거리에 화려
한 조명만 빛이 나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불을 밝히는 것입니
다. 말씀을 들어야 아기 예수가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한 인류를 구원
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소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
다. ꡔ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
게 전하노라ꡕ(눅 2:10). 지금도 아기 예수는 말씀을 통해 우리 가운데 찾아오
십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도 전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12월은 믿지 않
는 자에게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달입니다. 아기 예수의 오심
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배입니다. 우리 모두 힘써 복음
을 증거함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왕되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합시다.
셋째,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
구유란 동물들의 먹이통입니다. 깨끗하지도, 편안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곳
입니다. 어디서든지 볼 수 있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유는 세
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왕이신 아기 예수는 하필 구유에 누우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누구든지” 아기 예수께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누
구든지” 아기 예수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위대한 모세와
다윗조차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을 뿐입니
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동방박사들까지 만
나주셨습니다. 왕이신 아기 예수는 박사들뿐만 아니라, 목자들까지 만나주셨습
니다. 만약 구유 옆에 동물이 있었다면, 동물까지 아기 예수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2002년 성탄절 역시 누구든지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죄
인들은 아기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친히 ꡔ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ꡕ(눅 5:32)고 말씀하십니다. 아
기 예수는 바로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주이십니다. ꡔ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
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ꡕ(눅 2:11).
아기 예수는 지금도 구유에 누워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께 나아
가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영광을 맛봅니다(눅 2:14). 구유에누운 아기
예수께 함께 갑시다. 특별전도 기간 때만 동원하지 말고, 성탄절에 양로원, 고
아원, 소년 소녀 가장, 홀몸 노인분들을 초청합시다. 우리의 초청이아기 예수
께는 큰 축하 선물이요, 우리에게는 큰 상급입니다.
14.베들레헴 성탄절
>성경본문|마02장 01절 ~ 6절
>출 처| 박종순목사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1-6)
동네가 인물을 배출하는 경우가 있고, 위대한 인물이 그 동네를 빛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 동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극히 작은 동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서 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세계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치고 베들레헴 방문을 빼지 않는 이유는 그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국 중부지방 워릭성 외곽에 스프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t-upon-Avon)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동네 규모도 작고 인구도 많지 않은 작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영국을 여행하는 사람들, 특히 문학을 사랑하거나 지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유는 셰익스피어가 그곳에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가를 보존하고 그가 쓰던 책상과 집기들을 관광객들에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때문에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명소가 된 것입니다.
전라남도 하의도 하면 섬중의 섬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의도 사람들은 대통령을 배출했다는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곳에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때문에 동네가 유명해진 본보기들인 것입니다.
베들레헴 역시 이름없는 마을이었는데 예수님 탄생사건으로 유명해진 마을이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베들레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 때문에 이름난 동네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8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지금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이어서 더 낙후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1에 의하면 다윗왕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다윗과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미가서 5:2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미가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사건은 우연히 길 가다가 나신 것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마을, 이름없는 마을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출발부터가 지극히 작은 자들과 작은 동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보다 먼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일본 선교의 특징은 선교사들이 상류사회, 지식계층을 겨냥했다는 것입니다. 일본 기독교는 고급종교로 접근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일본 기독교인의 지적수준은 세계적입니다만 수가 불어나질 않습니다. 일본 기독교는 인구의 1%가 채 못됩니다.
그러나 한국 선교의 특징은 민초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습니다.
부자들과 양반들은 기독교를 서양귀신이라고 거부하고 박해했지만 서민속으로 파고든 기독교는 마치 딸기 뿌리처럼 땅속으로 뻗고 뻗어 대중종교로 발전했습니다.
머슴도 예수 믿고, 장사꾼도 예수 믿고, 마부도 예수 믿고, 무당점쟁이도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100년이 지난 지금은 1,200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작은 자들이 모여 한국 교회는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운영의 경우도 같습니다. 특정인 몇 사람이 헌금해 교회가 운영되는 것보다는 전교인이 적든 많든 참여해 운영되는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유명해진 베들레헴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본래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별로 없는 나라였습니다. 세계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아시아의 지극히 작은나라, 전쟁으로 무너지고 폐허가 되어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경기로 전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국가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입니다. 전세계 기독교 국가와 기독교인들마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 놀랐고, 한국 교회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고 외국목회자들은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설교 한번 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3일 스웨덴 임마누엘 교회의 오께 목사님과 울레 목사님 두 분을 저희 교회가 초청했습니다. 오께 목사님은 저희 교회를 다녀가셨지만 울레 목사님은 한국방문이 처음이었습니다. 10월 27일 주일 5부예배는 오께 목사님이, 저녁예배는 울레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저녁예배 후 두 분은 설교단에서 자신들의 설교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가 하면 일생 잊을수 없는 영광이라며 기뻐했습니다.
교통사고 세계 1위, 양주소비 세계 1위, 사치품수입 세계 1위 등 부끄러운 1위도 있긴 하지만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떳떳한 1위는 교회성장입니다.
한국 교회는 작은 베들레헴들이 모여 이룩된 교회입니다. 힘없고 약하고 밀림받던 사람들이 모여 이룩한 교회가 한국 교회인 것입니다.
서울시내 모 교회 부흥회 집회 중 낮 공부시간에 교회론을 공부한 일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교회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교인들의 대답은 "저희 교회는 XXX장관이 출석하는데요" "저희 교회는 국회의원이 출석하는데요" "저희 교회는 XXX기업 XXX회장이 출석하는데요"라고.
교회는 베들레헴 예수님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우린 어떻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됐고,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2. 예수님 때문에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사실을 가까이 있던 헤롯왕은 모르고 있었고, 먼나라 동방의 박사들은 그 소식을 알고 경배하러 찾아왔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동방을 페르시아나 바벨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떻든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것입니다.
가깝다고 예수를 잘 믿고 멀다고 예수를 못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공식은 없습니다.
주일마다 단골 지각생은 먼데서 오는 교인이 아닙니다. 교회 근처 사람들입니다. 저녁예배도 교회 근처 사람들은 빠지는가 하면 동두천, 양평, 미사리, 명일동, 안양에 사는 사람들은 빠지지 않습니다.
헤롯은 옆 동네에서 태어난 예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고, 동방박사들은 경배하러 찾아 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헤롯은 땅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고, 박사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권력, 명예, 치부, 지상영광 지향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박사들은 하늘 바라보며 별을 연구하다가 이상한 별의 움직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별을 보고, 해를 보고, 달을 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그의 꿈대로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무엇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고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유대나라까지 오긴했지만 박사들로서는 예수 나신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헤롯 왕궁을 찾아가 별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설명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신가?"고 물었습니다. 마태복음 2:3을 보면 이 말을 듣고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지라"고 했습니다. 요즘말로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 경배하고 난 뒤 헤롯은 이 아기가 자신의 왕권을 빼앗을 도전자라고 여겨 베들레헴 경내에 영아 학살령을 내렸습니다. 마태복음 2:16을 보면 "베들레헴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은 그 명령을 따라 집집마다 뒤져 두 살아래 사내 아이는 다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아이들이야말로 예수님 때문에 생명을 빼앗긴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고 베들레헴은 최초의 순교지가 된 것입니다.
지난 12월 2일부터 4일까지 교역자와 장로님들이 한국안의 기독교 순교지를 순례하는 여행을 했습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 천안에 있는 유관순 생가, 여수에 있는 손양원 목사님과 두 아들의 순교지인 애양원, 제암리교회, 그리고 77명의 순교자를 낸 전남영광의 염산교회와 65명의 순교자를 낸 야월교회를 순례했습니다.
전남 영광에 있는 야월교회는 1908년 4월 배유지(Eugene Bell)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나기 3일전인 6월 22일 밤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인민군 1개 부대가 야음을 틈타 이 동네에 상륙하는 것을 목격한 주민들이 염산면 지서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 후 6.25 전쟁으로 공산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다가 9.28 수복으로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야월교회 교인들이 자신들을 신고했고 반대했다는 구실로 당시 전교인 65명을 칼로 치고, 죽창으로 찌르고, 바다에 던져 수장하는 등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했습니다.
야월교회 마당에는 순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순교비 뒷면에는 당시 순교했던 교인들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그 중에는 "갓난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전교인 65명을 다 죽였는데 채 이름도 짓지 못한 갓난애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갓낫이 라고 새겨 놓은 것입니다. 이름도 채 갖지 못한 갓난애가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간 것입니다.
독립만세 부르다 순교한 사람들, 공산주의에 반대하다 순교한 사람들의 피가 이 땅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순교자들의 피와 희생을 잊은 채 살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이야말로 예수님을 위해 피 흘린 영아들의 순교성지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베들레헴 성탄절과 나와의 관계 설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시 베들레헴보다 더 작은 나였고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신 이후로부터 나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가치가 변하고, 꿈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지하자원 한가지도 나지 않는 나라, 남북분단으로 토막난 나라, IMF의 외환통치를 받던 나라, 그런 나라가 올림픽을 치뤘고, 월드컵을 치렀습니다. IMF 통치를 벗어났고 아시아 국가들의 합한 국가예산보다 우리나라 예산이 더 많습니다. 그뿐입니까? 세계교회 어느 곳도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과 부흥을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를 연구하기 위해 방한했던 미국 교회 지도자는 그 원인을 한국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순교자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조용한 마을에 오신 예수님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살리셨고, 내 가정을 살리셨고, 이 민족을 살리셨습니다.
우리 힘을모아 성탄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13.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경본문| 마1장 20절 ~ 21절
>출 처| 석원태목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최대, 최고, 최귀, 최종의 선물입니다(요 3:16). 이것은 세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헤롯 왕처럼 오히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처럼 구주의 탄생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지는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 2:1-18).
그럼에도 천군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영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눅 2:14). 양을 치던 목자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 가서 고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께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면서 경배하였습니다(눅 2:15-18).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예루살렘의 경건한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전에 나아오는 아기 예수를 안고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눅 2:25-35). 또 과부된 지 84년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던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눅 2:36-38).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을 찾아와 현몽한 내용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21).
지금 요셉은 그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수태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고민하면서 잠들던 중에 천사로부터 이 현몽을 받았습니다.
그 현몽 중에 받은 메시지는 ① 마리아에게 수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 ②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 ③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은 유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규례대로 부모가 지어준 것이 아닙니다. 또 낳은 후에 지은 이름이 아니라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짓는 권한을 행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신적 사역을 위한 택자들에게 그 이름을 직접 명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Ⅰ. 예수 탄생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모노게네(monogen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출생방식을 인간적인 생리방식에 의하지 않고, 독특한 하나님의 방법 곧 하나님의 초자연성에 의해서 출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마 1:20). 요셉에게 오기 전에 천사는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례요한이 어머니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은 지 여섯 달째 되는 때였습니다(눅 1:26).
천사는 그녀에게 평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자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면서 영광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눅 1:28-38).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1:31).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2-33). 실로 엄청난 메시지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놀라면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눅 1:34). 그 당시는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유대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죽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5). 그리고 덧붙이기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37). 이때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38).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는 또 요셉에게 가서 예수의 성령잉태와 출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의 잉태에는 보통 수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는데, 여기 ‘덮다(ejpiskivasei)’라는 말은 성경에서 몇 가지 경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한 경우입니다(창 1:2). 하나님의 성령이 공허(수면)를 덮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창조된 우주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여기 ‘운행’이란 말이 곧 ‘덮음’입니다. 그것은 어미 새가 새끼를 까기 위해서, 혹은 돌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알을 품고’ 있는 상태나, 또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새끼 위를 계속해서 너풀거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신 32: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공허(수면) 중에 운행(덮어줌)함으로 우주의 맥박이 뛰게 하였습니다. 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덮어주심(품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된 것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을 경우에도 나타납니다(출 40:34-35). 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그 덮으심의 결과 이스라엘은 광야의 위험과 적들의 위험에서 안전했습니다(시 91:4, 140:7). 이렇게 예수의 잉태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마리아를 덮으신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심은 그의 초자연적 탄생을 알려주는 내용이었습니다.
Ⅱ. 예수 출생의 초자연적 목적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성탄의 목적성을 확실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명을 띠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명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과 함께 그의 탄생을 통하여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 이 세상 중에 ‘자기 백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중에 ‘자기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가운데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라고 하였습니다(요 17:11).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11). 저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요 17:6). 그 아버지의 것인 자기 사람들을 예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요 17:7-8).
이 놀라운 사실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을 영접하는 비유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상 중에 예수의 자기 백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이름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해주시기 위하여 ‘임마누엘’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1:23).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다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5).
2. 이 세상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1).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구원이 필요했을까? 이 세상에 있는 예수의 자기 백성은 죄인이었고, 죄로 인한 사망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오셨습니다(히 2:14-15).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기 백성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선택받은 자’, ’언약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세리장이라고 하는 직장 때문에 동족인들에게 죄인 취급,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를 찾기 위하여 여리고에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2000년 성탄을 맞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지고하신 축복의 선물, 영광의 선물을 내려주신 날입니다.
그 선물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처녀 마리아를 품어(덮어)주신 결과로 잉태되고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목적적 이름, 사명적 이름이었습니다.
구별된 출생, 구별된 이름, 독특한 이름의 출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을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성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를 체험한 자만이 예수 이름의 존귀성, 탁월성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받는 축복입니다. 바로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요 1:12-13).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 드리는 감사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하는 주는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충만한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은혜 / 가장 거룩하신 분이 밟았던 그 곳을 / 가장 비천한 사람이 밟고 지날지 모르네. /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계시된 놀라운 은혜 / 크리스마스의 은나팔들이 울려 퍼질 때 /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네. < by Phillips Brooks >
성탄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영광의 날입니다. 그 분을 영접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12.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
>성경본문|마2장 1절 ~ 절
>출 처| 정필도목사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0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03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0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0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0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저는 지난 십이월 초, 미국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집회를 잘 인도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 모두 여러분께서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신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곳은 12월초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안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호텔에서도 역시 캐롤 음악이 흐르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교회보다 먼저 성탄절이 온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로 인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연히 성탄절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미국의 [USA Today]라는 잡지에서 사람들에게 “성탄절에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대답은 불과 1/3에 불과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 사람들 중 97%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심리학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 40명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크리스마스 트리, 선물, 공휴일, 캐롤송, 산타클로스 ... 라고 답했으며, 예수님이라고 대답한 학생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첫 번째 이유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고, 혹 믿더라도 신앙심이 별로 없다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기독교인이 석가 탄신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듯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성탄절이 왔다고 해서 특별히 예수님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는 말을 듣고, 유대인의 왕의 탄생소식을 듣게 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동은 기쁨의 환호성이 아니라 비극의 탄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전혀 이러한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메시아를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보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메시아를 목마르게 고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그들안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유대의 작은 고을 중의 하나인 베들레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에서 [떡집]이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농사를 많이 짓는 고장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비록 베들레헴이 작은 고을에 불과했지만, 야곱이 그의 아내 라헬을 장사지낸 곳이며,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살던 곳이고, 위대한 왕인 다윗이 태어난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미가서 5:2절을 보면, 이곳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헤롯왕이 그 땅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가장 미워하는 에돔사람으로 로마의 황제인 시저에 의해 주전 47년에 유대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7년 후인 주전 40년에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예수님이 탄생할 무렵까지 오랫동안 그 땅을 다스렸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0세쯤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고 또 자신이 사용하던 금접시를 녹여 백성들의 식량을 사들임으로 해서 백성들을 감동시키는 정치적 수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내와 장모를 죽이고 장남과 다른 두 아들도 죽인 비정한 인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 명의 아내를 두고 살면서, 그 중에 한 명은 자신의 동생 빌립으로부터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만든 인륜을 저버린 비열한 인간이었습니다.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헤롯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유언하기를, 백성들로부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자신이 죽는 순간 같이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모두 다 잘 죽었다고 저주를 퍼부으며 아무도 눈물을 흘려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운명시각에 맞추어 그 사람을 죽이면 백성들이 그 사람을 위해 애통할 때 자연히 그 사람에 묻혀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런 야비한 유언을 한 것입니다. 이런 악독한 인간이 통치하고 있던 때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왕을 대표하는 헤롯이 통치하고 있는 세상속에,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의 탄생으로 인해 자신의 왕권이 위협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헤롯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태어난다고 예언되었는지 알아보게 하였고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에게 그 아기를 찾으면 곧바로 알려주어서 자신도 경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찾자마자 죽일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나중에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자신에게 가르쳐주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버린 것을 알고 심히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그때를 기준으로 해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마음에도 없는 거짓된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태도도 정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부터 성경을 매우 잘 아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메시아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어쩌면 그렇게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메시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나서는 그길에 한 사람도 동행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1절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을 때 아무도 영접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동방박사들은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찾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 일입니까?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로 평소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으로부터 메시아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그 징조가 유대인의 왕인 메시아가 나타난 것으로 확신하여, 그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까지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온 목적은 오직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려고 온 것입니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어떻게 했습니까?
1.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중국 장춘에 가서 한 이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인도할 때에 그 교회 목사님께서 이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400리 먼 곳으로부터 온 사람이 많이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길도 나쁘고 교통도 별로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여러 시간을 버스를 타고 걷기도 하며 이곳까지 와서 하루종일 예배를 드리고 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꽉 찬 것은 물론이요 마당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들어찼습니다. 이들은 예배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희생해가며 참석한 그들을 보고 저는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중국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통역을 세워 설교를 했습니다. 사실 통역을 세우면 말을 많이 못합니다. 짧게 끊어서 해야 합니다. 자연히 설교가 부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그토록 정성을 들여 준비했으니 어찌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명성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김삼환 목사님이 한 장로님을 가리키며 강원도 속초에서 오신다고 소개했습니다. 장로님의 사업체가 그쪽에 있으신가 봅니다. 제가 그 장로님께, 아마 장로님께서 교회에 오시면서 은혜를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다고 하시면서 교회에 와서 은혜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정성을 쏟고 희생을 드리는 만큼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이렇게 희생을 치르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야말로 헌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는 태도에 따라 은혜 받는 양이나 질이 달라집니다. 솔직히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태도로,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오느냐 하는 것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너무나 정성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데 손해를 많이 봅니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도무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그 먼길을 찾아올 때 죽음을 각오했을지도 모릅니다. 중간에 강도를 만나면 가지고 있던 것도 다 빼앗기고 목숨도 위험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기 예수가 어디에 계신지 모르고 무작정 별을 따라 찾아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고생 끝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감격스러운 경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자에게는 어떤 자세로 예배드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교회에 어떤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오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쏟았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김해, 양산은 물론 저 멀리 울산을 비롯하여 창원, 마산, 광양에서 나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마 그분들은 보통 분보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오시는 줄 압니다. 그러므로 설교 한번 들으면 안 듣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참석하신 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줄 믿습니다. 또 어떤 분은 수영로 교회가 잘 지었다고 하는데 어디 구경 한번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오신 분도 계실 줄 압니다. 혹은 찬양대의 찬양을 들으러 또는 친구를 만나러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잘못된 태도는 은혜 받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태도만 잘 가져도 예배당에 들어오는 순간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이 쏟아지고 불이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생명을 걸고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2.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예물을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참된 예배란 정성어린 예물을 드림으로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
[황금]은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라고 합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 황금을 드리는 것은 합당한 예물입니다. [유황]은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송진으로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합당한 예물인줄 믿습니다. [몰약]은 시체를 염할 때 사용하는 방부제로서, 매우 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죽었을 때만 그 시체에 바르는 고가의 값비싼 물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몰약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예물로서 매우 합당한 예물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은 어찌 보면 진정한 예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헌금드리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고 형식적으로 드리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적당히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헌금을 드릴 때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예배에는 감격이 있어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3.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이들은 별이 인도하는 대로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드디어 앞서 인도하던 별이 아기 예수 앞에 머물러 섰을 때에 이들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순종으로 시작하여 순종으로 완성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교회에 나와 봉사도 하고 헌금을 해도, 자기 생각대로 자기 기분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참된 예배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헌신과 정성이 담긴 예물이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동방박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열납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성탄과 동방박사
>성경본문/ 마2장 1절 ~ 절
>출 처| 석원태목사
오늘날 네게 구세주가 나시리니 / 예수는 놀라운 주님 / 선생이나 좋은 모범이 아닌 / 하나님의 아들, 살아계신 말씀. 공상으로 꿈의 씨실을 잡고 있는 철학자도 / 미래를 주시하는 예언자도 / 과거를 탐구하는 학자도 아닌 분. 오늘날 네게 구세주가 나시리니 / 빛나라 별들이여! / 소리치라 천사의 음성이여! / 네게 이 귀중한 선물은 주어졌으니 / 노래하라, 땅이여! / 하늘의 모든 것들아, 기뻐하라! 그러한 구세주를 오래 기다려온 이 세상은 / 죄에 빠져 있고 의심과 공포로 찢어져 있네 /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진리와 지혜를 찾아 헤맸지 /영광, 영광의 빛이 드러나네. 오늘날 네게 구세주가 나시리니 / 이 땅의 유일한 희망, 생명, 진리, 길 / 능력의 하나님, 영광의 구세주 /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나셨네. (A Johnson Flint) 우리 함께 동방박사들의 성탄맞이를 생각합니다.
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마태복음 2장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하였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 성탄 때 저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던진 질문입니다. ‘동방으로부터 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떠오르는 곳으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페르시아를 지칭한다고 함이 정설입니다. 여기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란 말 ‘마고이’(mavgoi)는 천문학자, 철학, 의학, 자연과학에 전문하는 자들, 아니면 일종의 예언자들 그리고 꿈을 해석하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들은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 그리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로 존경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동방으로부터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별의 인도를 받고 왔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무슨 별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대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별로 하여금 저들의 걸음을 유대인의 왕께로 인도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온 자들입니다. 저들의 입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저들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당시 이방 세계가 유대에서 탄생할 메시야를 의미하여 부르는 별칭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라고 하는 별칭을 썼듯이 이방인들은 그 유대인의 메시야를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수많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토한 메시야 예언의 영향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 질문은 참으로 중대하고 중대한 의미의 물음입니다. 또 올바른 물음입니다. 그 이유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계 17:14).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고 하였습니다. 그는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 오실 유대인의 메시야였기 때문입니다(마 2:5-6, 미 5:2).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마 1:1, 9:27, 12:23, 15:22).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요 18:37). 그는 진리의 왕이시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예수는 단순한 인간일 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인간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왕이시지만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었습니다. 폭군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멸망받을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왕이시었습니다. 사탄을 정복하실 승리의 왕이시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진 저 동방박사들의 물음은, 실로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알리는 말이 아닌가! 새로운 임금의 통치를 알리는 물음이 아닌가! 그래서 이 물음 앞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을 피웠습니다. 저들이야말로 선언된 성경예언의 성취를 전혀 몰랐던 자들이 아닌가! 아니 새 임금의 도래 앞에 세상의 보좌가 흔들림이 아닌가! 아니 새 임금의 도래를 준비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던가! 그러나 동방의 박사들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메시야)을 찾아왔습니다.
Ⅱ. 우리는 그(왕)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에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경배(proakunevw)’는 마태복음에 무려 13회나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2회, 누가복음에는 3회, 요한복음에는 9회, 요한계시록에는 24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어의는 ‘입맞추다’라는 뜻 ‘퀴네오(kunevw)’와 ‘…에게로 가까이 가다’라는 뜻 ‘프로스 (pro")’의 합성어로 ‘입맞춤으로 존경을 표하다’, ‘엎드려 절하여 존경심을 표하다’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장 9절의 ‘경배하다’, 요한복음 4장 20절에 ‘예배하다’ 그리고 다른 성경들에서 ‘절하다’(마 8:2, 막 5:6, 행 7:43)라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한 이 말은 단순한 인간적인 존경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종교적 용법으로 유대인들이 큰 명절에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정통적 예배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요 12:20, 행 8:27). 그러므로 단순한 인간적인 존경심을 초월하여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방문 목적은 분명합니다. 메시야이신 유대인의 왕을 환영하고 기뻐하며 그에게 최상 최고의 숭모행위인 예배를 드리려고 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사람된 제일의 목적, 본분을 다하러 왔다는 뜻입니다. 박사들은 다시 저들에게 나타난 별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서 버린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마 2:9-10).
그리고 저들을 인도한 별은 그곳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유는 그 별보다 더 밝고 빛나는 영광의 예수님이 저들 앞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예배(경배)에는 세 가지 예물이 따랐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에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황금과 유향과 몰약에 근거하고 박사 세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대한 것은 저들이 왕이신 주께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예물로 함께 드리는 경배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세계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왕 앞에 나아갈 때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표로, 여기에 나타난 세 가지 예물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삼상 9:7-8, 왕상 10:2). 또한 구약의 성경에는 이방의 왕들이 오실 메시야에게 예물을 드리며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시 45:8, 72:10, 사 60:5-6, 61:6, 66:20, 습 3:10, 학 2:7-8). 우리는 이 박사들이 왕께 경배하면서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이 단순한 예물에서 끝남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영적,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왕으로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그 통치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복종과 감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유향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제물을 가지고 연결하여 주는 폰티펙스(pontifex), 곧 가교입니다. 교량입니다. 예수가 하시는 결정적인 사역 중에 하나가 그가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됨에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의 무죄하신 신성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대속주로서의 예수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몰약은 죽은 시체 위에 바르는 방부제용입니다. 희생의 속죄주, 대속주를 나타내는 상징이 됩니다. 그렇다면 왕을 위한 황금, 제사장을 위한 유향, 대속주를 위한 몰약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왕이신 예수, 마침내 인간의 대속을 위한 구주이신 예수께 경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 속에 시간이 계속될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계속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출생하였다는 사건은 새 역사의 전환점이 됩니다. B.C.에서 A.D.로 옮겨지는 구약의 종착, 신약의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역사의 요람이 되고, 약속 성취의 절정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기록하는 역사의 새 장(章)이 되었습니다. 저 동방박사들의 성탄맞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바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요, 이방인의 왕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왕은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그 이름 ‘예수’라는 사실입니다(마 1:21). 그래서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찾아온 자기 백성은 언약의 백성 곧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그는 말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였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는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11:12).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11:25). 합쳐진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11:26). 그 수는 영적으로 14만 4천인이라고 하였습니다(계 7:4, 14:1). 그 14만 4천인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라고 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은 예수를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통치에 절대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왕적 성탄을 축하하고 또 왕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만 절대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영원한 왕으로 고백하는 황금의 예물과, 그를 영원한 신성의 제사장으로 고백하는 유향과, 유일무이하신 대속주로 고백하는 몰약을 드리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Christ)’와 축제(Festival)라는 뜻을 가진 ‘마스(Mass)’의 합성어입니다.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현대 교회의 크리스마스에 그리스도는 없고, 마스(축제)만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고 그에게만 경배(예배)하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함께 합니다. 예수는 나의 왕이십니다. 왕중의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경배를 받으실 영광의 왕이십니다. 이것이 동방박사들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아니 오늘 우리들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왕께 경배! 이것이 성탄의 축제입니다. - 아 멘 -
10.깊은 밤에 그 별을 바라봅시다.
>성경본문| 마2장 10절 ~ 절
>출 처| 박조준목사
고독했던 여류시인 노천명씨는 '별을 바라보며 삽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별은 높은 곳에서 빛납니다. 별은 우리가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별을 바라보듯 마음속에 우러러 보는 이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별처럼 높이 바라보는 탁월한 인물을 우리는 스타(Star)라고 합니다. 현대의 대중 사회에서는 스타의 개념과 차원이 타락하고 저속해지고 말았습니다.
별은 영원의 상징입니다. 별은 이상의 심벌입니다. 별은 언제나 어두운 밤에 빛납니다. 별이 없는 방은 캄캄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상의 별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어두운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팔레스틴의 밤은 깊었습니다. 작은 촌 베들레헴도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깊은 밤에 주의 영광이 두루 비치었습니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리라" 지금도 이 세상은 어두움이 땅을 덮었습니다. 캄캄한 세상입니다. 무지의 흑암이 아직도 이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여 우주선을 발사하고 우주를 왕래하고 있지마는 아직도 인생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하러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헤매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두움이 만민을 가리웠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워서 갈 길을 모릅니다.
예수님 나실 때 동방박사들은 이상한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올 때는 자기들의 생각대로 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새로 나시게 되면 으례히 유대 땅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나실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았기 때문에 헤롯왕의 마음이 격동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어린애가 무참하게 학살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안내 배후에는 헤롯의 흉계가 따랐습니다. 무서운 위험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 뵙게 된 것은 별의 인도 때문이었습니다. 그 별의 인도를 받을 때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결국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중에 '그 별'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 별은 우리를 인도하는 별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는 길이요' 한말은 '오직 나만이 그 길이다'는 강한 뜻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길 중에 한 길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길이십니다.
사람들은 연습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는 연습도 없고, 실패도 없고, 한 번 하심으로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간 생활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태양광선을 가리우며 길을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밤 찬 기운을 덮어 주고 어두운 밤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르는 한 잘못된 염려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이 땅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길을 잘못 들어 허덕이는 사람은 얼마입니까? 자기 생각대로 가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친걸음이니 다음을 생각지도 않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신없이 터지는 금융사고와 예측할 수 없는 정부정책 때문에 도대체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회전반에 팽배한 불확실성으로 심리적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소위 철학원이라는 점 집을 찾는 사람이 줄을 선다고 합니다. 이제는 인터넷 역술 사이트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300여 곳에 이르는 사이트가 300여 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역술 사이트인 사주닷컴(sazoo.com)에 하루에 방문자 수가 무려 3만 명까지 된다고 합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점 집을 운영하는 점쟁이는 "빚진 사람과 빚준 사람 사이에 어디로 가야 상대를 찾겠나? 어디로 가면 빚쟁이를 피할 수 있겠나?"를 물어오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렇게 어둡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하셨습니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고 그 과정에서 겪을 상처와 갈등은 우리 사회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멍들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식으로 미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큰 것 하나 먹어야겠다는 한탕주의가 범람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의 도덕적 해이가 그 사회의 생존 방식처럼 되면 그 사회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혼미를 일깨우고, 그 도덕적 파산이 가져올 위기를 경고해야 합니다.
복잡한 네거리에 신호등이 고장이 나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 혼란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의 도덕적인 해이, 혼란이 어디서 왔습니까? 깊은 밤에 신호등의 빛이 꺼져서 그럽니다. 주님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구실을 다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빛이 꺼져 있으면서도 꺼진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친구의 집에 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 가려하니 앞을 보는 친구가 등불을 하나 켜 주면서 이것을 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맹인은 오해를 하고 섭섭해했습니다. "너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잘 알면서 내가 이 등불이 무슨 소용 있나?"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너는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네 손의 등불을 보면 패해 갈 수 있지 않니?"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어 고마운 마음으로 등불을 들고 가는데 어떤 행인이 이 맹인을 부딪쳤습니다. 이 맹인은 화를 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내 친구가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내 손에 등을 들려 주었는데 당신은 나를 뭐로 알고 이렇게 일부러 부딪치는거요?" 행인이 하는 말 "당신 손에 등이 어디 켜 있어요?" 이 맹인은 자기 손에 든 등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심령 상태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등대 노릇을 하고 신호등 노릇을 바로 하면 이런 혼란, 이런 해이, 이런 부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내 책임입니다. 내가 목사 노릇 제대로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교인 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이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을 회개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하셨습니다. 진리의 빛, 사랑의 빛, 성결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은 또한 슬픔의 세상입니다. 눈물과 탄식과 슬픔의 깊은 밤입니다. 무지는 슬픔을 가져오고, 죄악은 애통을 가져옵니다.
저는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 일제의 압박으로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광복 후에는 38선의 슬픔, 6.25 한국 동란의 슬픔, 가족 분산의 슬픔, 민족 상잔의 슬픔, 쿠데타의 슬픔, 부정 선거의 슬픔, 군사 독재의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만일 제가 주님을 몰랐다면 어떻게 오늘까지 살아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마태복음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그런데 이 글이 누구의 글입니까? 이 글은 예수님이 나시기 전 58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였었는데 오랫동안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를 당했다가 함락이 되어버리고 승리한 바벨론 군대의 횡포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 비참한 광경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참하게 전사당한 아들의 부모, 오랫동안 바벨로 군대에게 포위 당해서 결국 먹을 것을 공급받지 못해 굶어 죽은 자식들의 부모,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남긴하였으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는 부모들, 저희들의 통곡하며 애끓는 울음소리는 하늘을 진동케 했고 그 광경은 한 마디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먼 이방 나라로 끌려가는 슬픔, 포로들이 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라헬의 무덤 앞을 지나던 광경을 그려 놓은 글입니다. 이와 같은 슬픔의 주인공들, 눈물로 엮어진 역사의 주인공들을 낳은 어머니들의 슬픔을 한마디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고 슬픔 가운데 빠지게 되면 위로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갑자기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 아내에게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있으며, 구 위로의 말이 남편을 잃고 앞이 캄캄해 하는 여인의 귀에 들리겠습니까? 뜻밖의 교통사고로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런 참변을 당한 사람의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동안 쌓아 올렸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을 당할 때 무슨 말을 가지고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로의 말을 한들 그 말이 귀에 들리겠습니까? 고통과 슬픔이 너무 심하면 위로 받기를 거절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기사를 쓴 대목에 이런 말씀이 있을까요?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모든 것이 넉넉한 사람들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슬픔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모든 슬픔을 무색케하는 비통한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직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차 있는 역사 안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슬픔의 주인공으로 오신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통과 가난 그리고 슬픔 속에 죽으려 태어났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슬픈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한 자리에서 슬픔을 바라보며 위로한 것이 아니고 슬픈 이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 자기 자신이 뛰어 들어와서 함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 샘터를 하나씩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께서 당하신 슬픔 안에서 무색해지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힘이 임해 오는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아니,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찾는 길은 오직 슬픔을 안은 채 슬픔 속에 빠지지 말고 저 말구유에 나신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마태복음 2장 10절을 보세요.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고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기 위하여 주가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깊은 밤, 슬픔의 밤에 그 별을 바라보므로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과 슬픔의 세계는 또한 절망의 깊은 밤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20세기의 상징은 '버섯구름'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핵무기가 폭발하면 공중에 그 불과 연기가 버섯모양으로 퍼졌다가 땅위에 쏟아져 내려 무차별하게 파괴시켜 버리고 맙니다. 핵무기는 과학문명의 자랑도 되지만 또한 현대 문명의 절망의 상징도 됩니다. 이 버섯같은 검은 구름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가기만 합니다.
전세계 인류의 간절한 바람은 무엇입니까? 세계 평화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나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비극입니다. 지금도 성지 근방의 포성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아직도 도처에 어두움의 세력이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문자 그대로 절망의 깊은 밤입니다. 이 절망의 깊은 밤에 그 별이 빛납니다. 그 별은 소망의 별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왈츠라고 하는 사람이 그린 '소망'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둥근 지구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혼자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 가슴에는 하프를 안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 하프의 줄이 거의 다 끊어져 있습니다. 오직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다 끊어지고 남은 한 줄의 하프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합니다. 그 여인의 뒤에는 별 하나가 유난히도 빛나고 있습니다. 이 별은 소망의 별입니다. 이 줄은 소망의 줄입니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집니다. 사업이 실패합니다. 직장에서 퇴출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납니다. 여러 가지 믿던 줄이 하나 둘 끊어집니다. 그러나 소망의 줄 하나만 붙잡을 수 있다면 그 소망의 줄 하나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능히 모든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소망을 가리켜 영혼의 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 큰 바다를 항해 할 때 어떤 때는 큰 폭풍을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닻을 큰 바위에 내리게되면 아무리 풍파가 높아도 우리 심령의 배는 떠내려가거나 깨어지지 않습니다. 큰 바위에 내린 닻은 소망의 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소망이 끊어져 낙심과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서 인생의 배가 파선 당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많은 사람이 소망의 기초를 잘못 두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의 기초가 물질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돈은 그의 전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돈이 없어지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살까지 합니다. 권력도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시편 기자는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물론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도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역사 평론가들은 20세기를 환멸과 절망의 세기였다고 평했습니다. 20세기에 과학 문명은 많은 발전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 되었습니까? 과학이 발전하면 평안히 살 것이라고 소망했던 이 세상이 20세기에 와서 정말 추악하고 무서운 짐승만도 못한 세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맹목적으로 소망하던 사람들이 환멸과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지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가의 정책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환멸의 비애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전세계 인류들은 불안과 환멸, 그리고 실망의 깊은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둘러보고 아무리 땅을 내려 다 보아야 인류의 소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류의 참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라도 우리는 땅만 보지 말고, 사람의 하는 일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그 별, 소망의 새벽 별을 바라보십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소망으로 삼으면 어떤 실패, 어떤 타락, 어떤 환란, 어떤 슬픔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깊은 밤에 소망의 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므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새 은총을 입어 소망 중에 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어두움과 슬픔과 절망의 세계는 또한 사망의 깊은 밤입니다.
이 세상은 불의의 사고가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만도 4만 5천명이라고 합니다. 매년 세상을 떠나는 분이 100만 명이라니까 매일 2,740명이 세상을 떠납니다. 뇌일혈이나 심장마비같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심각한 일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살수가 있습니까? 하루하루를 나의 마지막 날 인줄 알고 사는 생활밖에 지혜로운 생활이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마는 이 설교가 제게 마지막 설교가 될 런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이 말씀을 듣고 계시는 어떤 개인에게 있어서는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깊은 밤이 언제 찾아올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날이 내 일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한다면 하지 않을 일도 있을 것이고, 가지 않아야 할 곳은 가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죽음의 깊은 밤, 일 할 수 없는 깊은 밤이 오기 전에 할 일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내가 조금 있으면 주님을 만나게 될 터인데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아직까지 회개하지 못한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 생각하고 제일 먼저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자기의 죄를 회개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임종하시면서 미쳐 회개하지 못했던 죄를 다 회개하시고 천국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정말 축복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그런 기회가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회개할 기회가 없어서 못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산다고 하면 내 삶에서 회개해야 할 것은 온전히 회개해야 합니다.
혹시 분한 일이 있어도 성경 말씀과 같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형제간에 어떤 일로 인해서 마음으로 담을 쌓고 있으면 다 헐어버리고 화목해야합니다. 그리고 내 책임이 무엇이든지 그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여러 가지 책임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그 책임 성실하게 감당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 할 수 없는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더 힘써 일 할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이 올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을 써서 하던지 말로 하던지 남길 말, 유언이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경우 유언이나 유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도 유언을 써서 봉해 놓고 세상을 떠난 후에 보라고 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 친구에게 무엇을 부탁하셨습니까? 다른 말 부탁할 것이 많이 있겠지마는 예수 잘 믿으라고 할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 죽음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분명치 않은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입니다. 그런데 '주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이 깊은 밤에 이 기쁜 소식이 들리십니까? 빛 되신 주, 기쁨의 주, 소망의 주, 생명의 주를 만나기 원하십니까?
깊은 밤에 그 별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9.성탄과 동방박사
>성경본문|마2장 1절 ~ 11절
>출 처| 최성규목사
오늘 이 시간에는 "성탄과 동방박사",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탄과 동방박사."
드디어 내일이면 새 천년 들어서 첫 번째 성탄절, 또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모두가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기 예수를 위하여, 아기 예수 때문에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마저도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그 누구의 생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들되시는 예수님, 구세주되신 예수님, 메시아되신 예수님의 생일날입니다. 이 날만큼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아기 예수"께 돌려져야 됩니다. 이 성탄절 때 실시하는 여러 행사와 이웃 사랑은 아기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성탄절은 아기 예수를 위한 날인가? 우리가 기뻐하고,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하는 성탄절이 정말로 하나님 아들되시는 예수, 메시아 예수, 우리의 구세주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정말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는 날인가? 그 예수님의 그 날을, 탄생하신 그 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인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이방인으로 가장 먼저 아기 예수께 경배한 사람, 동방 박사의 자세를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아기 예수께 돌려드립시다.
첫째,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첫째로,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먼 길을 찾아온 동방 박사. 감사하게도 우리 순복음인천교회에도 먼 데에서부터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이 많이 계세요. 연안부두에서, 월미도에서, 저 계산동에서, 또 부개동에서. 인천만이 아닙니다. 여태명 장로님은 저 일산에서, 그 뿐이 아닙니다. 민병우 장로님은 저 대전에서, 한국방송공사 대전 지부장으로 가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민병우 장로님은 아침 일찍 출발해서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또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몰라요.
동방 박사들은 목숨을 걸고 아기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 2:1)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 성수하러 교회에 온 것은 아기 예수, 우리의 구세주 예수,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동방"이란 어디를 말하느냐? 바벨론 지역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습니다. 강도의 위험, 질병의 위험, 사막의 위험, 강의 위험,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먼 길을 찾아서 아기 예수를 만나러 동방 박사들이 왔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멀고 먼 길을 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눈물 흘렸던 첫사랑을 회복하는 성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마다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면서,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과연 정말로 예수님을 믿을 때의 첫 사랑, 처음 은혜 받았던 그 첫 사랑을 회복하고 있는가? 정말로 감사하고 있는가? 기뻐하고 있는가? 즐거워하고 있는가? 예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라도 오직 그것 하나가 제일이다, 찾는 신앙.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성경의 예언을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장 4절로 5절 말씀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마 2:4-5) 그랬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누구입니까? 서기관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풀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잘 몰랐던 동방 박사는 머나먼 길을 떠나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던 대제사장들이나 그것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정도 하지 아니하고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온전히 믿었다면,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면, 쉽게 이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그들이 있는 베들레헴은 8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가르쳐주었지만, "설마!" 설마 그럴까? 설마 베들레헴 그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까? 그것은 분명히 예언한대로, 성경이 기록한 대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마!"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설마"를 말하면 안돼요. 설마를 따라가면 안돼요. 우리 속담에도 뭐라고 그러죠? "설마가" 뭐라 그래요? "사람 잡는다." 설마가 인생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설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하는 거예요. 우리가 듣고, 우리가 그대로 믿고,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면서 복되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 믿으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경험과 환경에 근거해서 말씀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데 앞장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보다는 경험을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반대로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우리 눈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우리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고, 내 앞 길이 칠흙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 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마 9:29). 그런 기적, 그런 은혜 다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말씀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져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입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그렇습니다. 은혜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그 다음에 두 번째,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지식이 있어요. 그 뿐 아닙니다. 부귀가 있어요. 그 뿐이 아닙니다. 명예가 있어요. 그들은 학문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온 것은 뭐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를 만나면 복을 받는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올라간다, 인정을 받는다, 박사가 된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명예와 권세가 올라간다."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뭐냐? 오직 한 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님 아들로 오신 메시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 성수하러 교회 올 때는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러 간다. 나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간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그 신앙이 산 신앙이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앙이요, 인정받는 신앙이요, 칭찬받는 신앙이요, 복 받는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 거래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간에는 거래하면 안되요. 내가 이렇게 하면 부모님이 복 주실거야, 그게 아닌 것입니다. 자식이니까, 자녀이니까, 피로 낳아 주시고, 나를 길러 주시고, 나를 교육해 주신 부모님, 나는 그 부모님 앞에 나는 감사해야 돼요. 효도해야 돼요. 그 분을 공경해야 돼. 그것은 뭐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거래가 아닌 것입니다. 거래는, 그런 사랑은 필레오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냥 주신 거예요. 그냥 주신 것이 감사하여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2절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2).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조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이런 삶이 아닙니까?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옵니까? 과연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한 번 따라합시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어떤 뜻입니까? "그리스도"와 "경배"란 말의 합성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그 뒤에 뭡니까? "경배."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란 말이 뭡니까? "그리스도께 경배한다", "예수님께 경배한다." 그 말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놀고 즐기는 날이 아닌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는 날, 그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날, 예배드리는 날, 높여드리는 날, 자랑하는 날, 경배하는 날. 이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들끼리, 가족과 가족들끼리, 친구와 친구들끼리, 선물 교환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선물을 교환하는 날이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기 예수께 경배는 쏙 빠지고, 서로서로 선물만 교환하는 것이, 그냥 나가서 노는 것이 크리스마스로 잘못 안다면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먼저 경배하고, 아기 예수를 먼저 찬양하고, 아기 예수께 먼저 감사하고 그 사랑을 받아서 이제는 가족들끼리, 이웃끼리, 형제끼리, 친구끼리 선물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의 축복, 예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이 최고의 특권. 그렇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복이 뭔가? 최고의 특권이 뭔가? 예수를 믿는 것이 최고의 복,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면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살 맛이 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복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을,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에, 그것도 방도 없이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왕이라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그것을 믿었어요. 하나님이 역사하셨어요. 그들은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가 어디서 나신 것을 알았어요. 그들은 성경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배운 성경, 그들이 들은 성경을 그들은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 드렸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상반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 2:11상).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여기서 "경배한다"는 것은 뭡니까? "몸을 던져 엎드렸다" 그 말입니다. 지식도 있는 사람이, 부귀도 있는 사람이, 명예도 있는 동방 박사들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 아주 어린 아기 예수, 피 덩어리 같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했어요. 아주 절하면서 경배했어요.
예배가 뭡니까? 경배하는 겁니다. 기도가 뭡니까? 엎드리는 겁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 이게 진정한 경배요,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지금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계시다고요. 그러나 진정한 마음은, 여러분의 몸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는 뭡니까? 항상 엎드린 자세,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주님이 흠양하시는 예배, 응답하시는 기도가 되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예배는요? 예배드리는 마음의 중심이 뭐예요? 우리는 겸손해야 해요. 교회 나와서 엎드리는 거예요. 예배는 엎드리는 거예요. 경배는 엎드리는 거예요.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 엎드려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지위와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다 버렸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완전히 그들은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배인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생각을 드리고, 내 몸을 몽땅 드리는 것, 이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내 고백이 될 때, 예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가 되고, 온전한 경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예수님은 흥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예수님은 사셔야 되겠고, 나는 죽어야 되겠다."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이런 자세가 누구의 자세냐? 동방 박사가 예수께 경배한 자세. 이런 자세가 어떤 자세냐? 하나님께, 아기 예수께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셋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세 번째,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동방 박사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찾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배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박 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드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는 가장 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성경에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하).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때는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을 준비합니다. 이사 갈 때의 선물은 뭐합니까? 세제를 사 가지고 갑니다. 비누를 사 가지고 갑니다. 아니면, 화장지를 사 가지고 갑니다. 그렇지요? 김장할 때의 선물을 산다면, 아마 젖(젖갈)을 사서 줄 겁니다. 그죠? 소금을 사서 줄 겁니다. 고춧가루, 마늘을 갖다 줄 것입니다. 결혼하는 사람은 결혼에 합당한 결혼 선물이 또 따로 있습니다. 약혼하는 사람에게는 약혼 선물이 또 따로 있습니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동방 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 예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뭡니까? 황금입니다. 황금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상징합니다. 황금은 왕을 상징합니다. 또 "유향"은 제사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을 알고 드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몰약은 뭡니까?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나의 죄, 너의 죄,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것을 벌써 알고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셔들임으로 말미암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절, 새 천년 들어 첫 번째 맞는 성탄절, 금번 성탄절은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까? 우리들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의 왕이시자,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예물을 드리는 성탄절이 됩시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뭐냐? 우리 자신을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우리의 마음, 우리의 몸,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을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또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요구하신 것은 그것이 모자라거나, 필요해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향유와 과부의 두 렙돈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부터 황금같은 믿음, 유향같은 기도, 몰약같은 헌신과 봉사를 받기 원하시는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황금같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유향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가 몰약같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나 개인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것을 쓰면서, 예수님께는, 아기 예수께는 어떤 예물을 드리기로 준비되어 있는지, 준비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성탄절 날이 되면 자기 자녀에게, 가족에게, 친척에게, 거래측에게 많은 선물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냐? 나는 과연 아기 예수께 드릴 예물이 뭘까?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고요? 황금같은 믿음, 유향같은 기도, 몰약같은 헌신, 이것을 준비하고 드릴 때 주님이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각자, 각자 자기 생애 최고의 예물을 주님께 드리는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결론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 드리는 성탄절의 영광을 누린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기 예수를 기다렸고, 사모했으며, 하늘의 음성에 귀가 열린 사람들이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가 아니라, 아기 예수를 보고, 또 경배하고, 드리는 영광의 날이 될 수 있도록 기억될 수 있는,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는 성탄절이 되게 합시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우리는 은혜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르게 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며, 복되게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주님, 이제 이번 성탄절은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성탄절, 20세기 마지막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기 예수 탄생을 진정으로, 성경대로, 우리가 체험한 믿음대로 경배하고 찬양하는 성탄절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온전한 성탄절을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아기 예수께 경배함으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더 많이 받고, 베풀어주며, 나누어주며, 우리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 사회가 되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8.아기 예수께 경배한 네 박사들
>성경본문| 마2장 1절 ~ 12절
>출 처| 김명혁목사
1. 어릴 때의 기억이 평생 간다.
오늘 아침 유치부 어린이들의 귀여운 핸드벨 연주를 보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멋진 연주인지 모릅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은 오늘 아침 핸드벨 연주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유치부 어린이 때 교회에서 연설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개를 다 맺어 보세" 이렇게 노래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른들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어릴 때 무엇을 기억하게 하느냐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유치부 어린이었을 때 평안북도 신의주 제이 교회에서 성탄절 날 연극을 보았는데 지금도 그 연극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애기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데 알타반 박사가 그 군인에게 보물을 주며 애기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고 그 애기를 엄마에게 돌려주던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 쓸어져 가는 알타반 박사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가슴이 찡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이후 지금까지 56년 동안 알타반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읽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갑자기 알타반 박사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저녁 우리 교역자들에게 알타반 박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섭섭하게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인터넷에 들어가서 알타반 박사에 대한 기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를 찾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유치부 어린이때 들었던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여러분들에게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방 박사 세 사람과 그리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네 번째 박사 알타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동방 박사 네 사람의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난 21세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한 평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자세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아기 예수께 무엇을 예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손길을 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동방 박사 세 사람과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2. 네 번째 박사 알타반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알타반(Artaban)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은 페르샤에서 다른 박사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기를 살피기로 했습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 밤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캄캄한 밤 하늘에 푸르고 붉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흥분한 알타반 박사는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 박사는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들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왕께 경배하기 하시옵소서." 그리고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말은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달리던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말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 별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길가에 누어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온 몸에 질병의 흔적이 가득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그에게 다가 갔을 때 그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날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알타반 박사는 그곳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병자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준비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병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말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진리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진리의 길입니까 자비의 길입니까?" 결국 알타반 박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는 겉 옷을 벗고 가지고 온 약들을 병자의 몸에 바르며 병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 병자는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알타반은 가지고 가던 빵과 포도주와 약초와 여비를 모두다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가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은 최고의 속도로 빨리 달렸지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그곳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글귀만 부쳐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먼저 떠납니다. 우리의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 오시오." 알타박 박사는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 박사는 바벨론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베들레헴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아니 음산하고 삭막했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 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의 떠드는 소리와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아기를 죽인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군인들이 집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군인 장교가 소리를 지르며 알타반 박사를 밀치려고 했습니다. "이 집에 아기를 잡아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알타반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알타반의 손에는 커다란 루비 보석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보석을 주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소. 장교는 이 보석을 받고 다른 곳으로 가시오." 군인 장교는 보석의 찬란함에 놀라며 보석을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가자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서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 기뻐서 우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당신은 나의 애기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아기의 얼굴에는 평안과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곳곳을 찾아갔습니다. 피라미드 근처들을 뒤졌고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거리들도 뒤졌고 히브리 랍비들을 만나서 그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히브리 랍비들은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병자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재난 당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노예 시장들도 찾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경배의 대상은 찾지 못했지만 섬김의 대상들은 너무 많이 찾았습니다. 수 십년이 지나는 동안 알타반 박사는 배고픈 자들을 먹였고 벌거벗은 자들을 입혔고 병든 자들을 치료했고 갇힌 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엔 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 알타반의 가슴은 큰 소리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저의 아비지도 박사였는데 죽었어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할아버지 박사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 박사는 또 한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에서 경험했던 고뇌, 그가 베들레헴에서 경험했던 고뇌를 다시 한번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두 개의 보석인 사파이어와 루비를 왕 대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잘못을 범해야만 하는가? 그의 영혼은 깊은 고뇌로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 팔려가는 소녀를 내 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결국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진주 보석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이것이 네 몸 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 박사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집들이 흔들렸습니다. 군인들은 무서워서 도망을 쳤습니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또 한 번의 지진이 땅을 흔들어 댔습니다. 무너져 내린 돌들이 알타반 박사의 몸을 뒤 덮었습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 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알타반은 너무 놀랐습니다. 알타반의 옆에 기대어 있던 구출된 소녀는 알타반이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셨을 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제가 치료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아닙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제가 가서 도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팔려갈 때 제가 구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33년 동안 저는 나의 왕 되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온 적도 없고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는 알타반 박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 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 그 분에 의해서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3. 인생의 목적은 왕을 만나 왕께 경배하는 일이다.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방의 네 박사들은 인생의 목적을 왕을 만나 왕께 경배하는데 두었습니다. 왕께 가장 귀한 보물을 드리는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을 만나 왕께 직접 경배하는 일과 함께 가장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겠습니까? 왕께 경배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7.아기 예수께 경배한 네 박사들
>성경본문/ 마2장 1절 ~ 12절
>출 처| 김명혁목사
1. 어릴 때의 기억이 평생 간다.
오늘 아침 유치부 어린이들의 귀여운 핸드벨 연주를 보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멋진 연주인지 모릅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은 오늘 아침 핸드벨 연주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유치부 어린이 때 교회에서 연설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개를 다 맺어 보세" 이렇게 노래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른들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어릴 때 무엇을 기억하게 하느냐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유치부 어린이었을 때 평안북도 신의주 제이 교회에서 성탄절 날 연극을 보았는데 지금도 그 연극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애기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데 알타반 박사가 그 군인에게 보물을 주며 애기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고 그 애기를 엄마에게 돌려주던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 쓸어져 가는 알타반 박사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가슴이 찡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이후 지금까지 56년 동안 알타반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읽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갑자기 알타반 박사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저녁 우리 교역자들에게 알타반 박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섭섭하게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인터넷에 들어가서 알타반 박사에 대한 기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를 찾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유치부 어린이때 들었던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여러분들에게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방 박사 세 사람과 그리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네 번째 박사 알타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동방 박사 네 사람의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난 21세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한 평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자세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아기 예수께 무엇을 예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손길을 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동방 박사 세 사람과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2. 네 번째 박사 알타반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알타반(Artaban)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은 페르샤에서 다른 박사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기를 살피기로 했습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 밤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캄캄한 밤 하늘에 푸르고 붉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흥분한 알타반 박사는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 박사는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들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왕께 경배하기 하시옵소서." 그리고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말은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달리던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말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 별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길가에 누어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온 몸에 질병의 흔적이 가득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그에게 다가 갔을 때 그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날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알타반 박사는 그곳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병자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준비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병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말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진리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진리의 길입니까 자비의 길입니까?" 결국 알타반 박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는 겉 옷을 벗고 가지고 온 약들을 병자의 몸에 바르며 병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 병자는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알타반은 가지고 가던 빵과 포도주와 약초와 여비를 모두다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가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은 최고의 속도로 빨리 달렸지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그곳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글귀만 부쳐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먼저 떠납니다. 우리의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 오시오." 알타박 박사는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 박사는 바벨론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베들레헴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아니 음산하고 삭막했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 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의 떠드는 소리와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아기를 죽인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군인들이 집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군인 장교가 소리를 지르며 알타반 박사를 밀치려고 했습니다. "이 집에 아기를 잡아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알타반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알타반의 손에는 커다란 루비 보석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보석을 주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소. 장교는 이 보석을 받고 다른 곳으로 가시오." 군인 장교는 보석의 찬란함에 놀라며 보석을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가자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서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 기뻐서 우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당신은 나의 애기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아기의 얼굴에는 평안과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곳곳을 찾아갔습니다. 피라미드 근처들을 뒤졌고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거리들도 뒤졌고 히브리 랍비들을 만나서 그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히브리 랍비들은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병자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재난 당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노예 시장들도 찾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경배의 대상은 찾지 못했지만 섬김의 대상들은 너무 많이 찾았습니다. 수 십년이 지나는 동안 알타반 박사는 배고픈 자들을 먹였고 벌거벗은 자들을 입혔고 병든 자들을 치료했고 갇힌 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엔 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 알타반의 가슴은 큰 소리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저의 아비지도 박사였는데 죽었어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할아버지 박사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 박사는 또 한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에서 경험했던 고뇌, 그가 베들레헴에서 경험했던 고뇌를 다시 한번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두 개의 보석인 사파이어와 루비를 왕 대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잘못을 범해야만 하는가? 그의 영혼은 깊은 고뇌로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 팔려가는 소녀를 내 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결국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진주 보석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이것이 네 몸 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 박사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집들이 흔들렸습니다. 군인들은 무서워서 도망을 쳤습니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또 한 번의 지진이 땅을 흔들어 댔습니다. 무너져 내린 돌들이 알타반 박사의 몸을 뒤 덮었습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 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알타반은 너무 놀랐습니다. 알타반의 옆에 기대어 있던 구출된 소녀는 알타반이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셨을 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제가 치료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아닙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제가 가서 도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팔려갈 때 제가 구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33년 동안 저는 나의 왕 되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온 적도 없고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는 알타반 박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 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 그 분에 의해서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3. 인생의 목적은 왕을 만나 왕께 경배하는 일이다.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방의 네 박사들은 인생의 목적을 왕을 만나 왕께 경배하는데 두었습니다. 왕께 가장 귀한 보물을 드리는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을 만나 왕께 직접 경배하는 일과 함께 가장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겠습니까? 왕께 경배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6.주께 드리네
>성경|마2장 9절 ~ 절
>출 처| 김명혁목사
1 주님께 예물을 드린 사람들(1)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했을 때 제일 먼저 예물을 드린 사람은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아니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께 드린 예물이었고 유향은 선지자에게 드린 예물이었고 몰약은 제사장에게 드린 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예물은 없었지만 천사들의 노래 소리로 가득한 찬양의 마음을 예물로 드렸고 아기 예수에 대한 경배의 무릎을 예물로 드렸고 천사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입술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네 번째 박사였던 알타반 박사는 자기가 준비한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아기 예수님께 직접 예물로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파이어를 사용했고 헤롯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려던 한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루비를 사용했고 노예로 팔려가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진주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알타반 박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서 병자와 아기와 한 여인을 위해서 사용했던 자기의 예물들이 바로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 드려진 예물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여기 저기 나타납니다. 이름 모르는 한 소년은 예수님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예수님에게 자기들의 소유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은 예수님에게 향유와 눈물과 입맞춤을 사랑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 예물은 예수님의 마음에 큰 감동과 기쁨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디베랴 바다에서 부활하신 주님에게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가슴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 120명 제자들은 10일 동안 회개의 눈물과 헌신의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과 피와 삶과 죽음을 모두 산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루디아는 자기의 집과 재물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의 집과 아울러 자기들의 목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에바브로디는 자기의 목숨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드려진 예물들은 주님 자신에게 드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빌2:30).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2 주님께 예물을 드린 사람들(2)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자기가 물려받은 유산과 자기가 입던 옷과 자기가 자던 침대와 자기가 누리던 모든 생의 평안함을 모두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드려진 예물은 주님 자신에게 드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은 어린 소년 시절 주님께 귀한 예물을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서 어느날 헌금 바구니 위에 두 발을 얹고 자기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결국 그는 한 평생을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삶과 죽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교회의 청년 서문욱 군을 만났는데 서문욱 군이 몇 주전 설교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 평생의 1년 또는 몇 년이라도 주님을 위해 바칠 마음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씀에 도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할까 또는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까 생각을 하다가 내년 한 해를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시간을 바치기로 맘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시간과 몸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할 일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주 만물을 다 소유하고 계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지만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예물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물들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오병 이어를 귀하게 사용하셔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양영자 선수나 이영무 선수가 스포츠의 재능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더니 주님은 그것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정근모 장로님이 과학적 재능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더니 주님은 그것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김동수 장로님과 이의숙 권사님이 자기의 사업을 주님께 드렸더니 주님께서 한국도자기 사업을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며칠 전 티비를 통해서 80이 지난 어느 할머니가 수년동안 매일 이대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위한 자원 봉사의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남은 생애를 환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시간을 봉사의 예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로 어제 아침 MBC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봉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부산에 있는 어느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일을 하고 있는 어느 여선생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걷지 못하는 성호라는 장애 어린이가 선생님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MBC 방송국에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성호라는 어린이는 선생님을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착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음 토요일 호산나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선생님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한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여선생님이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안도와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박진경 선생은 김승연씨와 잠시 대화를 하면서 장애아들을 가르치며 돌보는 일이 너무 좋다고 소박하게 말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 드려지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호산나 교회에 다음과 같은 축하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성호가 선생님을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박진경 선생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
3 무엇을 드릴까요?
우리는 만왕의 왕으로 구유에 탄생하신 우리 주님께 무엇인가를 예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예물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무엇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북 치는 작은 소년"이라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 보자고 그들이 말을 했어요. 새로 태어난 왕을 보러 가자고 말을 했어요. 가장 좋은 선물을 가지고 가서 왕 앞에 드리며 그분을 경배하자고 말을 했어요. 우리는 가서 어린 아기를 뵈었어요. 나는 가난한 어린 아이 여서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었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그래그래 그것이 내가 왕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야.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새로 태어난 왕이시여, 내가 왕을 위해 북을 쳐 드릴까요? 파럼 펌펌펌. 그때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와 양들도 그렇다고 장단을 맞추었어요. 나는 왕을 위해서 북을 쳤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나는 최고의 기술을 발휘해서 북을 쳤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그때 아기 왕께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셨어요. 나와 내 북을 보고 미소를 지으셨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북 치는 작은 소년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북을 쳐서 멋진 북 소리를 아기 왕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예물로 드리겠습니까?
첫째 우리의 마음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장이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삼상16:7).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 우리 마음을 살펴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신8:2).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높이는 우리의 마음과 주님을 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겉 모습 보다는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니까? 외모와 겉 모습이 아닌 여러분들의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니까?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처럼 여러분들의 가슴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눈물로 뜨거워져 있습니까? 혹시 바리새인처럼 냉랭한 마음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디베랴 바다가의 베드로처럼 여러분들의 가슴이 주님을 향한 회개와 사랑의 눈물로 뜨거워져 있습니까? 주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예물로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의 몸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의 몸을 예물로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몸은 구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몸은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의미하고 우리의 삶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양영자 선수와 이영무 선수가 시간과 재능을 드리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서문욱 군이 일년의 시간과 재능을 봉사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김정숙 어머니 정삼례 어머니 김병원 어머니 등이 매일매일의 새벽을 기도의 시간으로 드리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구제부원들이 거의 매주마다 지체 장애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몸을 ?어 주며 돌보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드려진 예물은 바로 주님 자신에게 드려진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시간과 재능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여기 재능은 노래는 하는 목소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피아노나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손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손을 가리킬 수도 있고 운동을 하는 손과 발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장애아들의 몸을 씻기는 손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저의 남은 시간과 재능을 어떻게 하면 모두 주님께 온전한 예물로 드릴 수 있을까를 요사이 거의 날마다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재물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의 재물을 예물로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기 재물은 돈과 집과 밭과 음식물과 의약품과 금은보석 등 모든 종류의 재산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재물을 주님께 예물로 드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한 소년은 오병이어를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의 소유와 재산을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지극히 기름과 포도주와 짐승과 치료비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예물로 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 드려진 예물과 같았습니다. 바나바는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 드려진 예물과 같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구제했고 사도 바울의 선교를 도왔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예물이었습니다.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여러분들도 주님께 재물을 예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재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마음도 드릴 수 없습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마6:21). 재물을 드릴 때 반드시 많은 액수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재물과 수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드리면 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 궤에 넣었는데 주님은 그 헌금을 너무나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우리들을 다스를 우리의 왕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아기 예수께 무엇인가를 예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겠습니까? 무엇을 예물로 드리시겠습니까? 먼저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십시다. 주님을 행한 간절한 회개와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재물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이제 우리교회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부른 소망이란 제목의 찬양을 들으신 다음 찬송가 71장을 다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5.성탄의 비전과 새 시대
>성경본문|미가5장 1절 ~ 15절
>출 처| 석원태목사
미가는 주전 8세기경에 약 60여 년간이나 오래 활동한 유다의 선지 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요담왕 (왕하 15:32-36)과, 친 앗수르적 사 대주의 정책을 취하던 아하스왕과 (왕하 16:1-16), 반 앗수르적 정책을 취하다가 그의 침략을 받았던 히스 기야왕(왕하 18:1-8)의 치세 어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선지자 미가에게 임한 영감의 사 명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남 은 자의 구원을 외치는 것이었습니 다. 이런 죄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외침은 비단 미가의 경우뿐 아니라, 사실상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외친 저들의 존재적 사명의 주제였습니 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미 가 선지자에게 영감된 거룩한 메시 야의 탄생, 곧 성탄과 그 성탄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 시대인 신약복 음시대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 장 면입니다.
Ⅰ.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받았 습니다(미 5:1-4).
메시야의 탄생은 유대땅 베들레 헴이고, 그의 기원은 태초요 영원이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 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하였 습니다.
1. 언제 탄생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수난기라고 하였습니 다. 딸 군대, 딸 시온(미 4:8, 10, 13, 5:1), 곧 이스라엘의 통치자(재판자) 가 이방의 침략을 받아 업신여김을 받을 때(미 5:1)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임산한 여인이 고통을 겪는 해산의 기간'이라고 비 유하였습니다(미 5:3). 바로 이러한 성경의 표현은 이스라엘에 왕이 끊 어진 수난기를 뜻합니다.
메시야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에 붙인바 되어 고난을 겪을 것이고, 그 동안 에 베들레헴에서 먼저 난 다윗 왕가 는 단절이 되어 버린 때를 가리킵니 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기를 가 리켜 「고통하던 자」, 「흑암에 행 하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말 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여 년간의 암흑기를 가리킵니다.
2. 어디에서 탄생할 것인가?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 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 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하 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인데 여기에 에브라다라는 말이 붙어 있 습니다. 에브라다는 '열매가 많다'라 는 뜻인데, 스불론의 베들레헴과(수 19:5) 구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에브라다'는 라헬 이 베냐민을 해산하고서 죽어 장사 되어, 라헬의 묘비가 세워진 기념 장소로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 기도 합니다(창 35:19, 48:7).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 작 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 시에도 하나의 동네였습니다(눅 2:4). 초라한 시골 촌락이었습니다 (요 7:42).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오 실 메시야는 어떤 특정 지역의 후광 을 입고 오시지 않고, 이름없는 한 작은 촌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 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 민이 먹을 생명의 양식으로 떡집인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 다.
3. 어떤 분이신가? 메시야의 실 체가 어떠한가?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라고 하였습니다(미 5:2).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바로 왕되신 메시야를 뜻합니다(마 2:2). 그 분은 영원하신 메시야라고 하였 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 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옛 날부터, 영원의 날부터'라는 뜻으로, 메시야의 자존적 영원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야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었습니다(요 1:1).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사 9:6).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 게 거룩한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보 여 주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이스 라엘이 이방인의 막대기 아래 압제 를 당하던 흑암의 날(때), 곧 임산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날에, 작은 고을 유다 베들레헴에서 상고, 태초이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 분이, 곧 왕이 탄생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처녀의 몸 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생하실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 이름은 임마 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 7:14). 학개 선지자는 그 분을 가리켜 '만국의 보배' 곧 만국의 소 원이라고 하였습니다(학 2:7). 말라 기 선지자는 '의로운 태양', '치료하 는 광선'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말 4:2).
Ⅱ. 메시야의 새로운 통치 시대 를 예언하였습니다(미 5:5-15).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 게 메시야의 탄생으로 말미암는 새 시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메 시야 시대의 영적 통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메시야 시대 곧 새 시대의 영적 통치를 몇 가지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신적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메시야 자신이 여호와의 자 격으로 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에 「그가 여호와 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 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섰다'고 하였습 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으 로 서서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에 오실 메시야 자신이 하나님이시 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과 하나님(아버지)은 하나라고 하였 습니다(요 5:17-23, 14:7-10). 요한복 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 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목자적 통치(다스림)라고 하 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중에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 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자신이 선언하신 대로 선한 목자였습니다(요 10:11). 그는 양의 문이었습니다(요 10:9). 그가 양의 목자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양의 목자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그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 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그의 양떼를 먹이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도 그의 손에서 그 양을 빼앗을 자 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양 들에게 영생을 보장한다고 하였습니 다(요 10:28).
이렇게 선지자 미가는 선한 목 자, 능력의 목자, 구원의 목자, 생명 의 목자로서의 메시야적 통치시대를 내다보았습니다.
3) 그는 우주적 통치자라고 하였 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하반절에 「…그 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오실 메시야의 통치 영역을 말합니다.
여기 '창대하다'는 말은 '크게 자 라다', '크게 되다', '굳게 되다', '강 하게 되다'라는 뜻으로 메시야적 통 치 영역이 땅끝까지 미칠 영향을 나 타내는 예언입니다. 과연 그의 통치 영역은 예루살렘이었고, 온 유대였 고,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하였습 니다(행 1:8). 모든 족속이라고 하였 습니다(마 28:19). 온 천하만민이라 고 하였습니다(막 16:15). 모든 민족 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결국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로 부터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영 역이 되고 말았습니다(계 7:9). 그래 서 천사는 외치기를 「…온 백성에 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 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눅 2:10).
4) 평화의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5절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하였 습니다. 앗수르 사람의 침략을 받았 을 때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 져내리라」고 하였습니다(미 5:6b).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땅과 이 스라엘 궁을 짓밟을 때 하나님은 일 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 운 지도자, 권능있는 지도자들을 일 으켜 그를 격퇴할 것이라고 하였습 니다.
이러한 미가의 표현은 구약적입 니다. 신약에 오실 메시야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있는 지도자를 일으켜 교회가 당하는 모든 위험에서 영전 (靈戰)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하 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미가서 5장 5절의 「이 사람」은 그 뒤 6절 하반절에 「… 그가 우리를 그(원수)에게서 건져내 리라」고 예언된 사람과 같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야는 우리의 '평 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바울 은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였습 니다(엡 2:14).
5) 메시야적 통치는 남은 자, 곧 선택 자가 그 대상이라고 하였습니 다.
미가서 5장 7절에 「야곱의 남은 자」, 8절에도 「야곱의 남은 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에서 보여주는 '남은 자' 의 궁극적 의미는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을 의미하였습니다. 저들의 영 적 특질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습니 다.
(1) 그 하나가 이슬 같고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 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 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미 5:7).
① 즉 저들의 구원이 천적(天的)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호 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 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 다. 남은 자의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율주의적인 구원임을 알려줍니다 (요일 4:10).
② 그것은 공개적 비밀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슬과 단비 는 실로 고요합니다. 들레지 아니합 니다. 더욱이 이슬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고요히 하늘에서 내립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가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는 구원체험은 참으로 신비한 비밀 인 동시에 또한 결과적으로 드러나 고 마는 공개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사자와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8절에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 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 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 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 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 였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 는 소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열 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다'고 하 였습니다. 그럼에도 승리하는 자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승리의 표상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믿는 신자들도 이길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요 19:30), 부전승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그 부전승의 비결은 믿음이 라고 하였습니다(요일 5:4). 믿음으 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 귀를 이기고(요일 2:13), 사망을 이 긴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6-57).
말하자면 오실 메시야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는 신약시대 구원받을 신자들은 이슬 같고 단비 같은 고요 한 생명의 통치와, 사자 같은 능력 의 힘을 받아 살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6) 종말론적 구원역사 시대라고 하였습니다(미 5:10-15).
이 부분 중에서 나타나는 몇 가 지를 보면,
① 먼저 전쟁을 종결짓는다고 하 였습니다. '말'과 '병거'와 '성읍'들을 훼파하고 무너뜨린다고 하였습니다 (미 5:10-11).
② 각종 우상들과 여러 우상숭배 의 행위들을 끝장내어 버린다고 하 였습니다. '복술', '점장이', '새긴 우 상과 주상', '아세라 목상'들을 섬기 는 백성과 나라들을 하나님은 진노 와 분한으로 심판하겠다고 하였습니 다(미 5:12-15).
세상에 전쟁이 종식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없어지 고 마는 때는 종말의 때가 아닌가? 바로 그 시대는 예수 재림과 함께 성취될 완전 신권 통치시대가 아닌 가? 그렇다면 미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종말론적으로 보 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재림까지 내다보며 새 시대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선지자 미가는 오실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 다.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우주적 통 치자, 평화의 통치자, 선택받은 자의 메시야, 그리고 전쟁과 우상을 종식 시킬 공의로운 심판의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의 탄생(강 세)은 새 시대를 여는 축복의 관문 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밝아 오는 미래 즉 새 시대의 비전을 받 고, 그 세계를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그 미래의 새 시대를 예언하고 살았 습니다.
주전 8세기경, 미가 선지자도 예 외없이 이 예언 사명에 집중하고 있 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이신 예수께 서 유대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탄 생하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바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 헴 탄생과 함께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성탄과 함께 도래할 새 시 대는 어떤 성격의 시대입니까?
바로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 레헴 탄생(강세)과 함께 전 인류의 역사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하 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B.C.(주전)가 끝나고 A.D.(주후)의 역사가 기록되는 때였다는 사실입니 다. 그때부터 세계 역사의 연호가 시작되어 지금 1999년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새 나라, 새 복음이 반포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마가 복음 1장 14-15절에 「예수께서 갈 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 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 라'가 시작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 의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하 나님의 제국을 건설하러 오신 것입 니다.
그것은 결코 유대나라나 헬라제 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를 머리로,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하나님 백성(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운동이었습니다.
이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 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기 위 하여 세계와 역사는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 에 다 전파된 후에는, 이 세상 역사 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우주적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였습니다.
※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맞는 성 탄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 니다. 성탄은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됩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의 성탄에서 그 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탄은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의 시작이었습 니다. 예수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습니 다. 실로 인류가 받은 무한에의 선 물, 영광의 선물, 축복의 선물이 아 닌가? 바로 예수 성탄이 지닌 표적 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새 시대의 표적이 아닌가?
그는 바로 많은 사람 곧 잃어버 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에게로 되 돌리기(찾음) 위하여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그의 성탄은 실로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 포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성 탄은 위대한 새 시대의 출발이 된 것입니다. 성탄의 축복이 있기를 축 원합니다. - 아 멘 -
4.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본문| 사40장 1절 ~ 8절
>출 처| 곽선희목사
1978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1세가 서거하셨습니다. 취임한지 겨우 33일만의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장례절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황이 이 짧은 임기동안에 특별히 임종직전에 남긴 일기문이 공개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직장인들이여, 무직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건강한 자들이여, 병든 자를 기억해주십시오. 남을 위해서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기록입니다. 이 일기문이 온 세계에 공개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노벨평화상 위원회였습니다. 저들은 곧 반응을 나타내서 깊이 심사숙고한 끝에 인도의 빈민굴에서 한평생을 바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래는 중동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고한 카터 대통령에게 주기로 내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생각을 돌려서 테레사 수녀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기록을 보십시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해마다 성탄을 맞습니다. 성탄의 의미를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마음에 되새기고 있습니까? 성탄을 맞는다면 성탄의 의미를 내 마음에 기리고 그 성탄의 의미로 향해서 내 마음과 인격과 생활이 변화될 때에 거기서 성탄의 실존적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외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러분 어떻게 위로하며,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것이 빵입니까? 그것이 직장입니까? 아니면 건강입니까?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으며, 무엇을 통해 위로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요새 저는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이 나라에 실업자도 있고 기술자도 있고 또 그리고 정치가도 있고 학자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신바람을 넣어주고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지도자가 없습니다. 기술자는 넘쳐흐릅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들 많습니다. 소위 정치가들이라는 사람도 만원인데 그런데 정말 우리 국민 앞에 참으로 용기와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는 지도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적 대망입니다. 메시아의 나라, 메시아의 세대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그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미래의 문제요 메시지의 문제요 복음의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영광, 메시아의 세대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오늘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말라 기다립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미래를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것을 소위 Futurology 라고 합니다.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아주 비약을 해서 결정적 미래를 생각하고 그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을 Eschatology,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항상 종말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론적 신앙의 핵심은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복음이요, 복음의 핵심은 사죄입니다.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용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말합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 하나님의 진노가 여기서 멈추고 은총의 해, 은혜의 해가 앞에 온다고 외쳐라! 하고 말씀합니다. 결정적 미래, 밝은 소망의 메시아의 세대를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그건 바로 용서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의 임함은 바로 용서를 말합니다. 구제 받을 수 없는 용서. 우리는 많은 문제를 놓고 잘했느냐 못했느냐 어디까지 사실이냐 어지간히 그렇게 비판을 해봅니다마는 이 시시비비를 통해서는 절대로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를 청산해야 미래가 보인다고 하나 과거 청산할 길이 없으니 미래도 안보입니다. 언제까지 이 시비 속에 이 절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율법을 초월하여 죄인을 사랑함으로만이 다시 소생하는 길은 있는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모음집 중에 이런 짤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페인에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과 건건이 사사에서 충돌이 됩니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 아들이 하는 일은 못마땅합니다. 아버지가 볼 때는 그건 말도 안되고 사람도 아닙니다. 계속 충돌하는 나머지 이 아들은 집을 나가 버립니다. 가출을 해서 몇 해 동안 방황을 합니다. 아들을 내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괴롭습니다. 그래서 항상 가슴 아파합니다. 잘못이 있어서, 내보낼 수밖에 없어서, 사람답지 못해서, 소망도 없어서 내보냈지만 아들을 내보낸 아버지는 여전히 괴롭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들을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는 절대로 편안할 수가 없었어요. 마침내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짤막하게 "파코", 그 아들의 이름이 파코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예정한 시간, 정오에 호텔에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였더랍니다. 파코라는 이름이 아주 흔한 이름이라서 파코라는 이름으로 집나간 아이들이 이렇게 많다. 800명이 모였더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빠는 너를 용서했다.' 여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여기 무슨 시비가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고…. 아무 변론이 없습니다. 거저 용서했다. 내 사랑으로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 이거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문제는 이 복음에 대한 예비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맞아들이는 것, 그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 파코라는 청년이 아버지의 이 광고문을 보면서 '아버지 웃기누만' 이렇게 생각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아버지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그랬다면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믿음이올시다. 그도 함께 괴로워하던 중에 아버지가 다 용서했다는 말 한마디를 전적으로 믿고 감격하여 가슴을 활짝 열고 자기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뭐 얼마는 잘하고 얼마는 못했느니, 알 바가 아니요. 다 지워버리고 그대로 염치없이 아버지께 돌아오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요. 그것이 믿음이요 그것이 크리스마스의 의미올시다.
우리는 탕자 비유를 이제 늘 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옵니다. 이 돌아오는 일은 중요한 신앙이올시다. 그는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넓은 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찾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는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라고 부름받을 수도 없습니다. 머슴꾼의 하나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하지요! 머슴꾼의 하나만한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불구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 잔치를 하라!" 잔치를 배설합니다. 아들은 체면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 잔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염치가 없습니다. 뻔뻔합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기뻐하는 마음을 절대로 그렇게 무시할 수가 없고,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섭섭하게 할 수가 없어서 그는 부끄럽지마는 의젓하게, 형이 질투하는 것도 알면서 그 잔치에 앉아서 잔치를 받아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가끔 똑똑한 분들이 대개 이렇게 말하데요. "그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뻔뻔하고 체면이 없어요" 그래요. "왜요?" 그러니깐 "아니 죄지었다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다신 안그러겠다고 또 하고…. 아 그거 평생 그러구 있으니 그 사람들 그 뻔뻔한 거 아니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뻔뻔한 사람입니다. 제가 어찌 하나님의 딸이고 제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요. 제가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랑을 믿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약속이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그 엄청난 사랑을 영접하되 자 보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용서한 증거로 네 죄를 내가 대신 지노라." 그래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죠.
이제 예비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산은 낮아져야 되겠다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되겠다고, 첩경을 곧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시는 예수, 그 복음을 영접하려면 산이 낮아져야 됩니다. 바리새주의적인 교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교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 뭔가 자기가 이룬 것같이 생각하는 교만, 다 낮아져야 됩니다. 낮아지고 또 한번 또 한번,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낮아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오시는 주님을 바로 영접할 수가 없고 내가 네 죄를 사했느니라 하는 이 복음을 내가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는 겸손해야 되고 끝까지 겸손해야 됩니다. 깨끗하게 마음을 비워야됩니다. 그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됩니다. 마치 옛날 그 세리와 같고 창기와 같은 사람들, 천대받던 사람들 그 신분을 높여야겠습니다. 나는 소망이 없다 생각하지만 주님이 나를 사랑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면 나는 아들입니다. 그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면 나는 딸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확실한 주의 자녀입니다. 그런고로 내 천한 신분, 더러워진 과거, 씻을 수 없는 더러운 추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골짜기는 높아져야 됩니다. 주님과 만날 수 있을 만큼 자기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가서 첩경을 곧게 하라 그랬어요. 굽어진 마음, 갈고리같은 마음, 편견, 오해, 이런 이야기 다 지워버리고 순진한 마음, 깨끗하게 주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랑을 영접하는 자의 수용자세가 분명해야 됩니다. Acceptance가 필요합니다.
어느 중년남자가 일주일동안 해외 여행을 갔습니다. 해외 출장을 갔는데 갈 때 생각은 아침저녁으로 내가 전화를 걸어서 마누라한테 문안을 해야겠다 생각을 하긴 했는데 가서 처음에 도착하자마자 '잘왔습니다' 한마디 해놓고는 그만 이래저래 그 출장간 일이 바쁜 일이라서 그만 전화를 한번도 못 걸었어요. 아마 저 같았던가봐요 저는 뭐 전화 잘 안 거니깐. 그런데 이러다가 내일 돌아가게 되었어요. 일주일이 지나니까 좀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전화기를 손에 들고 전화를 걸면서 생각하기를 '당신이 보고 싶었소.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하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수화기를 딱 들고는 하는 말이 "집에 아무 일도 없어? 애들은 다 잘 있소? 강아지도 잘 있고? 난초에 물은 주었소?" 여기까지 얘기를 했어요. 잠시 후에 아내는 "당신, 해도 너무합니다!" 울먹울먹하면서 딸까닥 전화를 끊었어요. 자 여러분, 이 마누라가 듣고 싶은 말이 뭡니까? 우리가 뭐 강아지까지 챙기면서 제 마누라는 챙기지 않았대요. 뭐 뭐 다 챙기고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어요. 우리가 왜 힘듭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겁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어요.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거 같지 않아. 사랑 받을만한 존재도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참사랑은 모든 율법적 비판을 초월하는 것이에요. 이유 없어요. 절대적으로 사랑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받아 들여야 되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참 위로는 오로지 죄 사함에 있고 참사랑에 있고 그리고 만나 주심에 있습니다. 그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주십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제 이 위로를 받아들이는 길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새로운 소망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해마다 성탄을 지키지만 금년은 새로운 의미의 성탄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오늘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확정해 주시건만 어느새 우리는 이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고 스스로 사는 것처럼 교만하기도 하고 또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 메시아로 오시는 주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영접하게 하시고 그 크고 놀라운 뜻이 우리 인격에 우리 마음에 우리 생활에 그대로 다시 실현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메시아로 오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성경|시104장 24절 ~ 절
>출 처| 김인중목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참된 신앙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찬양하도록 권고하고서 스스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릇된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도록 요청 받을 때 게으름을 피운다면 우리는 어느 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로 알고 온 정성을 다해 찬양으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1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심히 광대하신 하나님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이란 크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보다도 크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큰 사랑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세계를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왜 성탄절에 이 세상을 찾아 오셨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더렵혀진 인간의 양심을 십자가의 피로 씻어 새로운 양심, 깨끗한 양심으로 창조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 더렵혀진 우리를 깨끗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을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깨끗케 하시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2. 온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27-29절). 모든 생물은 하나님의 보살핌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들을 위해 때를 정해 두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온 세상 만물들을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자상하신 경영자입니다. 만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운 일과 당황하는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새 한 마리도 정확한 계획을 가지고 돌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3. 성령으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절).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내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 나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에겐 성령 하나님이 그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자신의 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십니다.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회개하면 용서를 체험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절망과 좌절속에 살던 마음을 희망과 용기 가득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찬송가 493장에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기 쉬운 우리 마음을 고쳐주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온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으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입니다. 그 주님을 날마다 나의 구세주,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므로 승리하는 동산의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말씀이 육신이 되심
>성경|요1장 14절 ~ 절
>출 처| 임영수목사
한 때 서구와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을 비롯해 어른들에게 까지 널리 읽혀졌던 철학소설 '소피의 세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노르웨이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요슈타인 가아더가 청소년들에게 생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갖게하고 거기에 대해 해답을 주기위해 쓰여진 철학사에 관한 소설입니다.
그 책의 주인공 소피 아문젠은 열 네 살난 소녀입니다. 어느날 소피에게 작은 편지 한 통이 날아듭니다. 편지 봉투엔 클레버 바이엔 3번지, 소피 아문젠양이라고 만 적혀있고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소피는 편지 봉투를 뜯어 보았습니다. 그 안에 쪽지가 들어있고,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있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다른 말은 없습니다. 인사말로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이 손수 정성스럽게 쓴 이 글 만이 그 뒤에 물음표를 달고 있었습니다. 소피는 다시 한번 겉봉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리 뜯어봐도 틀림 없이 자기에게 온 편지인데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지은이 요슈타인 가아더는 소피에게 '너는 누구니?'라는 물음을 시작으로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어디에서 생겼는가?
우주에는 신이 존재하는가?
세계는 스스로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의식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내가 감각을 통해 보는것과 똑같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 뒤에도 삶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중요한 '삶과 존재'에 관한 질문에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책의 주인공 소피는 가상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주인공 소피와의 만남은 잊혀졌던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떠 올리게 하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추구해가게 합니다. 지은이 요슈타인 가아더는 소피를 '삶과 존재'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깨달아 가는 학생으로 한편 독자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해 가는 안내자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말씀에 대한 찬가로 시작됩니다. 그 찬가의 내용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뜻과 감추어진 지혜를 깨닫게 하는 한 인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인격은 가상적이 아닌 실제적인 인물입니다. 이 인격과 만남을 가질 때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철학적이 아닌 신앙적인 해답을 얻게됩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여기에는 이성,법칙, 생각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 철학에서 널리 사용된 개념입니다. 특별히 헬라의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것을 우주에 적용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신의 이성, 또는 만물의 이성적 원리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로고스를 종교적인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로고스는 창조의 대행자, 하나님의 메시지의 근원,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비밀을 알게하는 지혜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히브리의 지혜자들은 재물보다 지혜를 더 깊이 사모하고 얻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이 지혜를 의인화시켜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을 초청하는 초청자로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잠언에는 이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을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주께서 구름 떠도는 궁창을
저 위 높이 달아 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 분의 명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나는 그 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 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 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잠8:27-30)
여기서 '나'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이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 사역에 참여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감추어진 우주와 생의 비밀을 깨달아 알게 합니다. 이 지혜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 치유의 말씀, 깨달음을 주는 말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말씀이 육신(인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 즉 로고스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모든 만물이 그로인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인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감추인 지혜를 알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입니다.
말씀이 인격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은혜는 당연히 받아야할 대가를 받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사랑, 용서, 자비,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알게 되는 것은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도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되고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참 인간됨의 길은 하나님과 화해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 어떤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가능케 하시고, 자유케하실 뿐만 아니라 자유케하는 영을 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을 뿐만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그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삶과 존재'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인격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에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시기 전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역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군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출애굽 할 때 그들보다 앞서 가시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더욱더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실 때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입니다. 말씀과 하나님, 하나님과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며 매우 말접한 관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 가운데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 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됩니다.
이 말씀이 인격이되신 내용을 기록한 책이 성서입니다. 성서는 말씀이 인격이 되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말씀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의 본질적 차원인 역사, 생물학, 종교, 문화, 차원에 모두 참여하셨습니다. 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그 시대의 역사, 종교, 문화로 가득차 있고, 예수 자신이 유대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거나 연구할 때에는 문자에 집착하거나 오늘의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제일 많이 접하는 것이 성당과 예배당입니다. 고풍한 성당 유리창은 모두 스테인 글라스입니다. 성당안의 스테인 글라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햇빛이 비취지 않는 날에는 그림의 윤곽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랜기간 동안 먼지, 거미줄, 같은 것들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 스테인 글라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에는 그 시대 종교, 정치, 문화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는 빛을 주실 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시는 곳이 우리의 체험입니다. 체험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매우 다양한 체험을 하며 살아갑니다.
슬픔, 비애, 고통, 좌절, 아픔, 기쁨, 희망, 미움등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체험은 하나님 체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의 체험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 생애에 지워질 수 없는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체험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하나님 보다는 우리에게 깊고, 역동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그 체험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에서 지워질 수 없는 아름답고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체험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1.생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성경본문| 요1장 1절 ~ 5절
>출 처| 이종윤목사
성경에서 말하길 천하보다 귀한 것이 바로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숨을 잃어버리면 천하를 얻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너무 함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바로 빛과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우리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생명을 주신 것일까요?
1. 육신적인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적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의 생명이 부모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 육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셨다고 말합니다. 육신은 피조된 것이며 그 분이 없이 만들어진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할 수 있고 그런만큼 각자의 생명은 귀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히 받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조성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돌아가야 합니다. 흙으로 빚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하나님께서 돌려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지에 가까운 흙으로 만들어지고 그 속에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영인 생기를 받음으로 우리는 먼지에 불과하면서도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생명을 주셨습니다.
영적 생명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생깁니다. 육신적 생명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영적 생명의 원천도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허물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범해 영적인 생명은 이미 죽은 우리들의 영혼이었으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극한 사랑으로 우리롤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새 생명이 필요하였고, 거듭나는 것은 새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생명이란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거듭나는 삶을 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영생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난 사람은 영생이 없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부족함 없이 만족한 삶을 살도록 해주십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풍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심으로서 그 풍성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