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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4-5절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죽음을 앞두시고 자신과 제자들과 참된 교회를 이루게 될 주의 택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즉 아버지의 영광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는 것이고, 그의 죽음과 함께 부활과 승천, 심판주로서의 재림을 통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광은 특별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영생은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과 영생을 위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셔서 저들에게 주신 구원과 영생이 보존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구원 혹은 영생이란 무엇인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는 것은 단순히 정보 차원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과 그런 만남 가운데 깊은 교제가 있는 것을 뜻합니다. 참된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앎이요 지식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앎은 결코 단회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나는 것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지만, 그렇게 시작된 믿음은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고 성장할 것까지 요구하신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알아가야 한다는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하지만, 마지막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알아감으로 완성된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고, 그 권세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 과정에는 무엇이 있는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게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영생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지식을 구하고, 또 그 지식을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함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일단 4절과 5절의 내용은 1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1절에 나온 기도 내용을 보시면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차이가 있다면 1절은 때가 이르렀다는 말로, 다시 말해 조금 있으면 지게 될 십자가를 통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는 것이고, 오늘 본문인 4절과 5절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기 때문에 이제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절은 앞으로 있게 될 일이 나로 하여금 영광의 내용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고, 4절과 5절은 이미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되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광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모든 사명을 다 완수했다는 뜻으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비록 그의 사역의 핵심인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 다시 말해 택자의 죄를 속할 그의 죽음의 제사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고 그 죽음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포함하여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는 것이고,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되 창세전부터 가졌던 그 영광을 주시도록 기도하시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단지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심이 되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달리 말하면 택하신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죄 사함은 그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결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만 중요한지 마태복음 16장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밝히셨을 때 그것을 만류하는 사도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정도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그런데 이 말씀 앞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마16:14).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고백이 나오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용입니다(마16:16). 이 고백을 들은 후 곧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만류함으로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입니다. 즉 그의 죽음은 결코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부활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사건이 중요하다고 해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그의 생애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들, 특별히 공생애 기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르치시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 모든 일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모든 일에 순종함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 일을 하셨는가? 지상 생애 가운데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모든 생애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일로 있다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포함되지만 죽음에 앞서 그의 모든 사역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사실 성경은 예수님의 모든 생애를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장성하기 전 열 두 살 되었을 때의 일 정도만 기록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공생애 기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있는가? 요한복음 21장 25절에 의하면 기록된 말씀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생애, 특히 공생애 기간에 행하셨던 모든 일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가? 마태복음 4장을 먼저 보시면 17절에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 전파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모으시고 구원하고자 하시는데,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회개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역을 전체적으로 요약해 주는 것이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즉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천국 복음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어디 있느냐?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인데, 그것을 가르침으로 또한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하심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천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과 병을 고치시는 일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가깝게는 마태복음 1장 21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사역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오늘 본문이 그 목적으로 있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시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시는데, 구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 안에 무엇이 있느냐? 회개가 있습니다. 이때 회개는 단지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만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외쳤던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거기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요청합니다(마3:2,8).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할 때 이 모든 것이 천국 복음의 내용으로 가르쳐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성부께서 성자에게 하라고 주신 일은 한 마디로 구원과 관련된 일이고, 그 구원을 위해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거기에 생명의 시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생명의 시작만 있는가? 시작된 생명은 자라남이 있고 풍성함까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가르치셨다는 내용과 함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하나이지만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육체의 병을 고쳐주시는 게 주된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에서부터 알리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치신 것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병을 고치시면서도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알리십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9:1-6)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면 기적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시지만, 무엇이 드러나길 원하시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이 드러나길 원하십니다. 병을 고치는 것과 죄를 사하는 것, 어느 것이 더 쉬운가?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은 일반적으로 의사도 고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정도만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병을 고치신 겁니다.
특히 서기관들은 죄 사함의 권세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예수라는 사람은 신성모독을 행하고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는 것만으로도 비범하다는 것을 보이시지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병 고치는 것을 통해 더욱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면서 무리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면서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는데(마9:8), 서기관보다는 나으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 가지 못하는 수준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역사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병을 고치는 은사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하는데, 방금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등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능력은 때로 사도들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 의하면 사도의 표라고 말씀합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물론 사도들만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 교사들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이런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그래서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늘날 병 고치는 은사가 교회 가운데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표로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때 성경의 완성과 함께 더 이상 사도라는 직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라는 직분이 없다는 것은 사도의 표로 주신 그런 은사들도 그쳤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도를 중심으로 신약이 기록되었다고 할 때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된 성경과 함께 사도라는 직분은 더 이상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의 표인 표적과 기사와 능력도 종결되었다는 것이 개혁주의 입장입니다.
다만 병을 고치는 은사로서의 기적은 사라졌지만, 기적 자체가 사라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기적 자체가 없는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베푸는 은사는 종결되었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때로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적의 은사가 여전히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기적을 베푸셨는지를 정확하게 모를 뿐만 아니라, 이미 그렇게 주장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있다는 것으로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일들이 있는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올 때 모든 율법의 내용이 연속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법과 재판법은 종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방식으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또한 구약의 재판법에 따라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럼 신약에 나오면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 행할 수 있는 일인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도라는 직분이 있다고 해서 오늘날 사도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일곱 집사로 임명된 사람 중 빌립은 세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사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빌립은 집사이면서 복음을 전파는 비상직분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씀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자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 없이 성경에 나오니까 그대로 한다는 것은 성경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주의 쪽에서는 그런 은사를 통해 분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식으로 말하겠지만,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는 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외에 다른 말은 듣지 못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러이러하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행한 모든 사역을 모든 성도들이 그대로 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속적인 것도 있고 종결되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의 이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뜻에 따라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까지 고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겠지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럼 천국 복음을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았는가? 모두가 이것을 위해 부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사도들로 이어지고, 사도라는 직분은 사라지지만 항존직분으로서 교회 안에 말씀 사역자를 두셔서 지금도 이 사역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이 사역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역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4장 11절 이하에 그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1-15)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교회의 유일한 교사이시지만, 승천하시기에 비상직분을 세우시고 또한 그들을 통해 항존직분을 세워 계속해서 말씀 사역이 교회 안에 나타나게 하시는데, 그 목적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12절에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고 되어 있어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지만, 말씀 사역자들의 소명이 무엇이냐?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말씀으로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사역자들의 마땅한 본문은 말씀으로 봉사하여 그 말씀으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말씀 사역자를 비롯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 4절 그대로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 내용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잘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잘 되어야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분으로 사셨습니다(마8:20).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되 회당에서 자주 가르치셨지만 모두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성모독으로까지 여겨 죽이기로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병을 고치시는 등 자신의 능력으로 나타내셨지만,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마12:24).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실패요 저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시겠습니까! 5장에서 7장은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그 시작은 8복에 대한 내용인데, 복의 개념이 세상과 다릅니다. 3절부터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3-12)
우리는 우리 마음에 뭔가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기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됩니다. 심령이 가난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난하다는 것은 내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할 때 우리 스스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뭔가로 가득 차서 누구도 필요 없는, 자신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만큼 우리는 가난한 자임을 아는 것, 이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때서야 비로소 천국을 우리의 소유로 주실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뭔가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소위 자심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애통할 일이 없습니다. 물론 때로 울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우는 것은 세상적인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웁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우는 자들, 자신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우는 자들을 하나님은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8복의 내용은 결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복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은 복에 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도덕적인 사람들을 보게 되지만, 그래서 악인들의 꾀를 싫어하고 죄인들의 길을 좋아하지 않고 오만한 자들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여호와의 율법 때문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자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으로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된 자도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좋아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는 것, 순종하는 것, 그것이 복이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8복과 함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빛에 대하여 16절에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빛으로서의 삶, 착한 행실은 무엇인가? 17절로 가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20절에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율법 해석과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쭉 설명되는데, 구약 성경을 말하고 있지만 그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이지만 해석이 달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그럼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무엇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르침을 요약하시되 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왜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알아가야 합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말씀 사역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도록 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로 이끌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이미 심령이 가난하게 될 때 받습니다.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가야 할 모든 길의 방향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온전함이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으로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있고, 그래서 자기 소견대로 행하고자 하는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기도 하고 교훈을 받아 교정하여 나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제로 온전함을 덧입게 되데,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전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게 하셔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되 가르침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기사를 베푸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을 따라 선하심을 나타내신 것이고, 선하심만이 아니라 때로는 공의로우심으로, 때로는 긍휼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5절에서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사역이 완전히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지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죽음으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부활로, 승천으로 그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이 감소한 것은 아니지만 인성을 취하심으로 영광의 빛을 한동안 감추어두셨다면, 모든 지상 사역을 완성하시고 난 뒤 본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라고 할 때 지체된 우리에게는 약속으로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가다 보면 결국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그의 지체인 우리도 결국에는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서 주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영광을 소망하면서!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렇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장차 있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으로 말씀하시는데, 이 땅에서는 고난의 삶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비록 고난이지만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이루는 삶, 말씀에 순종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그런 삶의 끝이 영광이고, 영화의 자리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성경 해석에 따른 순종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순종,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신 본을 따라 순종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나는 싫을 수 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란 겁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 앞에서 우리를 비춰보면 누가 감히 주의 뜻에 순종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한 예지만 누군가 나를 조금만 자극해도 우리 안에는 온갖 살인이 일어납니다. 음란과 관련된 것이 눈으로 들어오면 우리 안에는 간음이 일어납니다. 거짓은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은 일상생활에 가깝습니다. 탐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리의 본성을 말씀에 순종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알아주는 사람, 뭔가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외적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는 데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게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쓰고 자신을 죽이는 데 힘쓰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인생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아무런 유혹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 이후에는 아무런 유혹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인성의 연약함이 드러나기도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겁니다. 말씀으로 시험하는 사단에 대하여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이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떠한 길이겠습니까? 오직 말씀의 길이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질 때까지 그 길만을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