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이 오곡백과를 냈으니,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시편 67:6]
시편 67편은 풍요로운 추수에 대한 감사 기도다.
시인은 아론의 축복기도를 인용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4~27]
시인은 이러한 복이 우리라는 테두리를 넘어 온 땅까지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눈으로 보이는 풍요로운 소출은 온누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6)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복을 넘어서는 복은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구원을 아는 것(2)'이다.
주님의 뜻을 알고, 구원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풍요로운 소출을 통해 온 누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까지 나아가길 바라는 시인의 기도는,
온 누리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의식이 깨어나길 간구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생독본>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서 신을 의식할 수 있다.
이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다.'라고 말한다.
시편과 복음서를 연결시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지만,
부활의 삶이라는 것을 '죽음을 죽이고 깨어남'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는 것(2)이 바로 부활의 삶인 것이다.
'우리라는 테두리',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갇혀있다.
'울타리'에 갇혀있는 '우리'는 끼리끼리요, 다분히 배타적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만 구원하시고 복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온 누리)이 구원하시고 복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는 이것을 망각하고 '우리'에 갇혀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고 계신다.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다.
우리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돌아오라'가 아니라 '돌아가야'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얼굴을 한국교회를 향해 돌리실 것이다.
수확의 계절 가을이다.
아직도 우리가 풍요로운 단을 거둘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기 전에 회개하고 그에게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