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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실감의 경계선 넓히기>의 줄거리: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했던 예수님을 부인하고, 또 다시 맹세하여 부인하고, 마지막으로는 저주하며 부인합니다. 닭 우는 소리에 자기가 이렇게 부인할 것을 예수님께서 예고하셨던 사실을 기억해 내며 베드로는 통곡을 합니다. 그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저립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의 현실감의 경계가 너무 좁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실감의 경계선 넓히기
(마태복음 26:69~75)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현실감의 경계선 넓히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현실감의 경계선 넓히기’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되는 가슴 아픈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 우리는 74~75절에서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구절에 집중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첫 번째는 단순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심히 통곡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어렵잖게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현실감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사실이 존재하지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실은 나의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현실로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현실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이 가족이나 주변에서 나왔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나의 현실이 됩니다. 한편 뉴스에서 계속 언급은 될지라도 가족이나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온 적이 없다면 여전히 현실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말씀드렸듯이 현실감은 사실들 중에서 생겨나지만 모든 사실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실이 현실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가서 닿아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 관심을 갖게 되는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놓고 보면 ‘현실감의 경계선 넓히기’라는 오늘 제목의 의미 또한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 이유 또한 바로 이 현실감의 문제였습니다. 현실감의 경계선에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시는 현실감의 경계선과 베드로가 느낀 현실감의 경계선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현실감의 경계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문화권은 서양문명의 뿌리라고 불립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화권이었기에 로마에서는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는 뜻의 ‘마레 노트스룸(Mare Nostr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에게는 지중해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바다였던 셈입니다.
한편 지중해의 동쪽 끝에는 팔레스타인이 있었고, 서쪽 끝에는 아프리카의 북단과 유럽대륙의 남단이 14km까지 근접하는 지브롤터 해협이 나타납니다. 지브롤터 해협 바깥쪽에는 고대로부터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었던 두 바위산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 두 바위산의 경계를 넘어가면 육지가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경계 너머를 ‘무지의 바다’라는 뜻의 ‘마레 이그노툼(Mare Ignot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선을 넘어서 계속 나아가면 어딘가에서 바다도 끊어지고 낭떠러지로 추락하고야 말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대 지중해 문화권의 사람에게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은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이었습니다. 이 선은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의 ‘넌 플루스 울트라(Non plus ultra)’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무려 1492년에야 콜럼버스가 금과 향료를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이 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대서양을 지나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의 카리브 해에 도착합니다. 계획대로 인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이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16세기 중반이 되어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 국왕이 왕실 문장에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의 ‘플루스 울트라(Plus Ultra)’를 새겼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스페인의 국장에 여전히 새겨져있습니다. 이러한 현실감의 경계선에 대한 개념이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좋아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고 있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기쁘고 만족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에 맞서 싸우시려는 모습을 보였다면 베드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과 함께 싸웠을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51절에서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대제사장의 종위 귀를 자른 인물을 베드로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공격을 명하셨다면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똑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붙잡히시고 십자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시는 선택을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더 이상 투지를 발휘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의지를 불태울 기회와 목표를 제거해버리신 셈입니다. 베드로는 결코 보통 사람들보다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용기를 내게 만드는 것은 목표와 명분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저항도 하시지 않고 자발적으로 붙잡히셨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용기를 낼 목표와 명분이 사라지게 되자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걷기 시작하신 예수님은 목표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베드로의 목표와 예수님의 목표가 서로 달랐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목에 맞추어보자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현실감의 경계선과 베드로가 가진 현실감의 경계선이 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지브롤터 해협 너머에 존재하는 땅을 목표로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 너머에 있는 목표에 대한 현실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대 로마 사람들이 지중해에 갇혀있었던 것처럼 죽음이라는 경계선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지신 목표를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무지의 바다(Mare Ignotum) 밖에 몰랐던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지브롤터 해협 끝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따를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육체의 죽음이라는 현실감의 경계는 넘어가서는 안 되는 지브롤터 해협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육체로 접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목표와 꿈과 이상은 육체의 죽음이라는 경계 안쪽에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고 다윗 왕국의 전성기를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제자들과 동일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싸우셨다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이 현실감의 경계선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현실감을 따를 수 없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도 따라갈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감의 경계선은 예수님이 느끼신 현실감의 경계선까지 넓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서 천국과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지금 거울로 보고 있는 육체나 육체로 만나는 세상처럼 생생한 현실로 느낄 수 없다면 베드로와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위치에 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실감의 경계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보좌를 펼치고 계시는 천국에 닿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현실감의 경계가 지브롤터 해협을 넘고 무지의 바다를 넘어 인도를 향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현실감의 경계선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와 보좌가 펼쳐진 천국에 닿아계셨습니다. 눈앞에 있었던 제자들이나 산헤드린공회의 재판자리보다도 천국이 더 우선적인 현실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과 같은 현실감을 가질 수 없었고 육체의 죽음을 현실감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승천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과 동일한 경계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베드로의 마음을 가지고 천국으로 올라가셔서 천국에 닿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전서에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현실감의 경계선을 갖게 된 베드로는 더 이상 인간 세상을 마음이 정착할 곳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육체의 죽음을 떨어지면 죽는 절벽이 존재하는 무지의 바다로 여기지 않게 되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통해 베드로의 현실감의 경계선은 예수님처럼 넓혀지게 되었습니다. 신대륙에 도달한 콜럼버스와 같은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땅에서의 삶을 나그네와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못하기에 일시적이며 마음을 둘 수 없는 대상들로 가득 차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실감의 경계선의 확장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겠습니다. 부부관계나 직장생활에서도 예수님은 부인될 수 있습니다. 천국을 현실감의 경계선으로 삼을 때와 육체의 죽음을 현실감의 경계선으로 삼을 때에 부부관계나 직장생활의 내용은 전혀 달라집니다. 즉 지정의와 그로부터 비롯된 언행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 없다면 예수님은 부인됩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현실감의 경계선까지 우리의 경계선이 넓혀질 수 없다면 부부관계나 직장생활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죽음이라는 현실감의 경계선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도 그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예수님과 같은 현실감의 경계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어지는 무지의 바다는 바로 육신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의 죽음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천국에 닿고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면 삶의 내용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까지나 육신의 죽음이라는 현실감의 경계선 안에서 세상을 현실로 삼기를 고집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다가 좋아했던 것은 나라의 독립이었고 다윗 왕국의 재현이었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은 본래 어부나 세리와 같은 무지하고 천대받던 출신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심으로써 비로소 자신들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열심당원으로써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애초에 나라의 독립과 다윗 왕국의 재현을 꿈꾸던 상태에서 예수님을 이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발견한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유다는 제자들 중에서 육체의 죽음이라는 현실감의 경계선에 강하게 갇혀있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육체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잘되어보겠다는 것이었고 그 계획이 무산되자 예수님을 팔아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파는 것은 비단 유다만이 아닌 육신의 죽음이라는 현실감의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현실감을 예수님과 같이 넓힐 수 없다면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거나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나 직장의 문제보다 더 우선적인 현실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녀들이나 심지어 거울에 비치는 몸보다도 더 우선적인 현실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길을 반드시 따라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어코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 어떤 사건 어떤 대상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최우선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육체가 살아있음으로 마주하는 인간 세상에 대해서만 현실감을 국한시킨 채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설령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를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같이 반복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된다면 결국은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현실감의 경계선을 천국까지 넓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고 보좌 우편까지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마음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경계선입니다. 기존에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의 넌 플러스 울트라(Non plus ultra)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감의 경계선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의 플러스 울트라(Plus Ultra)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동선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날마다 외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현실감의 경계선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까지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감이 인간 세상이라는 지브롤터 해협 안쪽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갇힌 현실감은 곧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까지 닿는 현실감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현실감의 경계선을 넓히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든지 지금 마음에 가장 우선적인 현실이 되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에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육체의 죽음 안쪽만을 현실로 느끼는 사람들을 천국이라는 신대륙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만남과 일은 전혀 다른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고 함께 하심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갈리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주제에 맞추어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체의 죽음이라는 현실감의 경계선 안에 갇혀있는 세계를 벗어나니, 이제 나는 마음으로는 천국을 느끼고 나의 삶의 현장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현실로 느끼시며 살아가실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며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현실감의 경계선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까지 넓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내가 만나는 모든 관계와 일들을 하늘까지가 현실인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서 마주대하고 대처하면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