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5일 SBS 라디오가 4월 봄 개편을 맞아 개그우먼 정선희(사진)를 새로운 진행자로 영입한다고 밝혔다. 낮 12시에 전파를 타는 프로그램이다. 구체적인 타이틀이나 포맷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정선희의 복귀를 알리는 뉴스 기사 밑에는 찬성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숱한 댓글이 남겨졌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지난해의 악재를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소망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냐 회의하며 특히 낮 12시 프로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깔깔대고 웃는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견딜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의혹’ 따위 연상될 만한 수사가 여전히 따라붙었다.
욕을 입에 문 사람들을 가부장주의 운운하며 재단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걸 반박하기 위해 동원할 만한 논리는 빤하고 해묵은 것이며, 어쩌면 실상과도 다른 것이다. 하늘 아래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자는 없다. 다만 그 모두를 자기 정의에 기대어 판단할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황스러울 수 있는 일이다. 합당한 자숙의 기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정오 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정선희를 ‘심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 보였던 눈물의 기억이 한 줌의 거짓말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요컨대, 불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다. 정선희는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겪었고, 심지어 그것을 공공의 스캔들로 소비당한 바 있다. 누가 보더라도 약자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약함이란, 연예인이라는 이름의 필터, 남편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검증되지 않은 환상의 필터를 거치면서 희석되거나 망실된다. 그러나 약자를 지키지 못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동정과 연대가 충분히 강한 자의 약함 앞에서만 작동되는 게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심정적 불편함을 내세워 타인의 권리를 짓밟을 수 없다. 천부적 당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사회는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사례 하나가 쌓일 때마다, 꼭 그만큼 ‘인간다움’의 정의를 확대 해석해 나간다. 남의 권리를 무시한 부메랑은 언제든지 내게 돌아올 수 있다. 결국 내 문제다. 내일을 위해 펀드와 보험을 챙기듯, 우리는 정선희의 먹고살 권리, 행복해질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마땅하다. 2008년 가장 불행한 인간 가운데 하나였던 그녀가 행복해지는 일이야말로, ’위기가 기회‘라는 누군가의 한심한 구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줄 거다. 틀림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