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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입교 50주년이라니 반백년이 훌쩍 흘러간거다. 반백년이라면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하였을 세월인데 변하는 강산을 어느 누구도 본 사람이 없는데 여기까지 온거다. 이제 우리들 그 누구도 거울 앞에서면 훌쩍 지나버린 세월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수 없으리라. 이제 이쯤에서 지난 추억들을 소환해서 곱씹어 보는건 남은 내일을 보람있게 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리라 생각된다.
군 생활하면서 여러 동기생들과 대화중에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중에 하나는 "너는 왜 보병에서 항공병과로 전과를 하게 되었니?"였다. 내가 그럴수 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이유를 이번 기회를 통해 밝힌다.
그 당시에 육군 항공이란 병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우리 동기생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던것 같다.
나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고 왜 전과를 하게 되었나?
지금의 육군항공은 아파치헬기에 블랙호크,수리온, 시누크등 신형헬기들로 편제 되어 가히 입체 기동전의 핵심전력으로 성장했지만 그 당시만해도 육군항공의 능력이라고 하는것이 고작 고정익 O-1기나 OH-23G 아니면 기껏해야 UH-1H 헬기를 이용해행정임무 내지는 정찰임무를 수행했던게 그 당시 육군항공의 모습이었다.
졸업과 함께 보병으로 임관후 OBC를 거쳐 배치 된 곳은 중동부 전선의 오지로 유명했던 전방15사단 00연대 2대대 1소대가 군생활의 첫 근무지였다. (누가 만들어낸 얘기인지 모르지만 15사단 지역은 하도 산속 깊이 박혀 있어 하늘의 별이 15개 밖에 보이지 않는곳이라서 15사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가보니 그건 거짓말이었다. 15개보단 훨씬 많았음)
그때만해도 정의감에 불타고 국가관이 투철했던 우리 동기생들은 첫 부임지를 가능하면 최전방으로 가서 근무하고 싶어 했던것이 동기생들의 期風이었지 않나 싶다. 혹시나 후방으로 배치 되면 그만큼 군진출이 처지는걸로 생각하는 동기생도 많았던걸로 기억된다.(나중에 보니 쓸데없는 기우였지만)
청량리역에서 집결하여 춘천역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후 2군단 예하사단으로 가게 된 00여명의 동기생들과 버스로 갈아 타고 전방으로 가면서 중간중간에 동기생들이 내렸다.나는 사창리,명월리,
단월리를 지나 대성산이 있는 삼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은 상황을 맞이 했지만 북측이 저지른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인해 전군이 비상상황이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FEBA"A"의 진지에 투입되어 차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다음날 대대장님께 전입신고와 동시에 진지에 투입되면서 나의 임무는 시작되었다.
모든 전투요원들이 완전 군장을 꾸린 상태로 손톱 발톱을 깎고 몇일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고 그런 엄중한 상황이 해제된 후 대성산 정상진지에서 통신선매설,산병호작업, 승암고개 전방의 지뢰제거작업등등을 수행하였다. 그렇게 FEBA생활을 보내고 대대가 전방 GOP를 맡게 되면서 대대의 유일한 GP장 임무를 부여 받고 ○○사단의 맨 오른쪽 GP를 맡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 그곳은 155마일 GP중에 가장 열악하기로 악명 높았던 적근산 앞의 ○○○GP 였다.
전기가 안들어오니 벙커내에서 호야불에 의존하고, 물이 없으니 매일 일조점호후에 나를 포함해 20명의 소대원이 5갤런 스페어캔을 등에 지고 내려가 샘물에서 물을 떠와서 하루의 용수로 사용할수 밖에 없었다. 100갤런으로 30명이 하루를 지내면서 그걸로 밥하고 식수로 쓸수 밖에 없었으니 샤워는 생각도 못하였다. 취사병이 덮혀주는 온수로 동절기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사타구니 정도나 씻는것이 고작이었다. 낮에는 GP경계를 포함하여 GP내 산병호공사,부식추진,수색정찰등 적은 병력으로 그야말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던것 같다.
야간에는 전체14개초소중에 8개를 세우라고 하는데 도저히 불감당이었다. 전부 다 졸면서 경계근무를 서기 보다는 초소를 조금 줄이되 눈뜨고 경계근무를 서게 하는게 합리적일것 같아 과감히 줄여 세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명령 불이행으로 감옥에 갈 일이었지만) 그러다보니 늦게 배운 담배를 엄청나게 피우게 되었다. 아침 일조 점호전에 가래를 뱉으면 시커멓게 나올 정도 였으니. (그렇게 피우던 담배를 25년 피우고 2001년 11월6일에 끊음)
한편 GOP통문에서부터 GP까지 오는 차량진입로가 없는 관계로 VIP들이 쉽게 올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같으면 생각도 할수 없는 일이겠지만 6개월 기간중에 군단장님은 적근산 정상까지 헬기로 오셔서 전화로만 한번 통화했고 사단장님,연대장님은 한번 들어오신 정도가 고작이었다. 솔직히 윗분들이 쉽게 올수 없는곳이니 불필요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편 그만큼 열악했던 환경은 소대원들과의 관계가 더욱 찐해 지게 되고 지금도 그 인연이 유지되고 있는건 내겐 또 다른 큰 자산이다.
6개월동안의 GP근무기간중에 크고 조그만 해프닝들이 있긴 했으나 대과 없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차기 근무지 명령을받았다. 적근산을 뒤로 한채 연대본부로 신고차 출발했다. 찌는 7월의 더위속에 몇개의 봉우리를 도보로 넘으며 말고개 연대본부에 겨우 도착했다. 도착후 확인된 나의 차기 근무지는 처음 GP를 나올때 통보 받은 3사관학교가 아니고 39사단 후방사 창설요원으로 바뀐것을 확인했다.
왜 바뀌었는지 바뀐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약간의 실망감도 들었다. 특별한 설명도 없이 원래의 명령이 바뀌다니.
결국 이런 상황변화가 앞으로 펼쳐칠 내 신상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었다.
39사단 ○○○연대에서 전입 신고하니 후방사창설요원이 아니고 경남 고성 대대의 인사과장겸 방위인사장교로 보직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고성대대는 4개郡 1개市를 관할하면서 향토예비군을 관리하고 지역 방위병도 사량도,욕지도등 도서지역을 포함하여 무려 4000여명을 관리하는 부대였다. 어림잡아 매주 100명 가까운 방위병 명령을 내야하는게 임무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역대 인사과장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방위병 인사에 얽힌 금전 비리와 관련되어 문책을 받고 자리를 떠나던가 군생활을 그만둔 상황이었다. 그런 비리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고성 대대가 창설된 이래 최초로 육사출신을 그 대대 인사과장으로 보냈던 것 이었다. 그러니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을 안느낄수가 없었다.
부임후 며칠간 살펴보니 부대에 보직될 방위병들의 부모님과의 면담이 주요 업무중 하나였다. 바다를 낀 지방이다보니 생업과 연관하여 방위병들이 자기에게 적합한 근무형태를 요구할수 밖에 없었다. 그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하면 절대로 공정한 인사가 이루어 질수 없는걸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부모들과 면담하고나면 어느틈에 놓아두고 갔는지 책상 한귀퉁이에 돈봉투가 보이기 일쑤였다. 발견하자마자 위병소 통과전에 돌려주고 돌려주고 하면서 오직 원칙에 입각해서 명령을 기안하고 발령했다.
얼마쯤 지나니 씨알도 안먹히는 장교가 인사과장으로 왔다고하는 소문이 여기저기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직속상관인 대대장님 조차 불편한 심기를 감출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과거에는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부대가 돌아갔는데 인사과장이 새로 오고나서는 부대가 지난날에 비해서 제대로 돌지도 않을 뿐 더러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을게다.
그런 금전들은 모르긴해도 부대의 모자라는 운영비로 일부 쓰였던가 혹은 휴양차 그 지역에 내려온 군 관련 손님들의 선물 접대비로 종종 쓰여 온듯 했다. 그러나 내가 보직된후엔 그런 관행이 중단 되었으니 대대장님이 불편 할수 밖엔 없었으리라. 심지어 대대장님께서도 방위병 보직과 관련하여 외부로부터 요청 받고 내게 은연중 지시하셨으나 결코 받아들일수 없는 지시들이었다. 그러니 윗분과 거리가 멀어질 수 밖에 없는건 불보듯 했다. 이미 앞에서 얘기된대로 나를 그곳에 보직시킨 이유가 비리를 끊고 제대로 잡기를 명령 받은 것이었으니 어떤것과도 타협할수 없는 문제와 개인적으로 고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대장님과 갈등을 가지면서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약 6개월이 지나면서 개인적 고민은 최고조에 달할수 밖에 없었다.비리를 방관하는건 범죄이고 직속상관과의 갈등은 군생활 진로에 문제가 커지는 것이니 무엇이 내가 택해야 할 길인가를 두고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절 보러 떠나랄수 없으니 중이 떠날수밖에 없겠구나"라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기서 떠난다면 남들로부터 현실도피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을까라는 또 다른 갈등이 생겼다. 그래서 남들이 가장 힘들고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지원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따라서 첫번째로 떠오른 곳이 특전사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특전사로 개인편지를 써서 의사표현을 했으나 하필 차출시기가 맞지않다는 통보를 받아 기회를 가질수가 없었다. 워낙 변방에 있어 정보가 어둡다보니 이미 위탁교육 신청시기도 지나 버렸다.
난감하던차에 일년전쯤 전방에서 같은 중대의 소대장 한명이 사고를 치고 육군항공에 시험을 치러간 기억이 떠올랐다.그 당시 육군항공에 관한 어떤 사전 지식도 없었으나 일단 빠른 시간내에 부대를 떠나고 싶었고 육군항공이라면 공중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다는면에서 적어도 현실도피의 비난은 받지 않을것이라 생각하고 시험을 치르기로 결심하였다.
무작정 육군본부 항공담당 장교 앞으로 개인편지를 써서 내 생각을 전하였더니 보름만에 육군본부 항공보직장교가 시험에 관한 정보가 포함된 답장이 왔다. 그분의 편지내용은 마침 육사출신들이 항공병과내에 많지 않으니 육사출신을 적극 환영한다면서 모월모시에 시험을 보라는거다. (나중에 알았던 일이지만 그 당시 육군항공의 육사출신은 17기부터 31기까지 모두 합쳐 7명정도에 불과했다)
78년 1월쯤의 어느 일요일에 용산 육군본부에서 시험을 치르고 슬며시 부대로 복귀하였다.(보고 없이 다녀왔으니 위수지구 이탈이었다) 시험도 어렵진 않았고 비교적 잘 본듯 하여 합격전선에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따라서 합격발표까지 아무일도 없었던듯이 최선을 다하여 부대근무를 하였다. 영문을 모르던 대대장님도 "저 친구가 요즘 왜 저렇거 바뀌었지?"라고 생각하셨을거다. 비리와 관련없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던거다.
그러던 차에 합격통지서를 받고 조치원에 있는 육군항공학교 조종훈련과정에 입교하게 되었다.육군 항공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그 당시 대대장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전혀 예상치 못하셨던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서로간의 앙금을 봉합하고 싶으신 모습이 역력히 보이셨다. 나 역시도 감정을 가지고 헤어지기 보다는 좋은 이미지로 헤어지는게 좋을 듯 하여 흔쾌히 여러가지 조언들을 받아 들이면서 부대를 떠나기로 했다. 특히 내가 떠난다고 전체의 부대 간부회식을 열어 주시고 회식후 별도의 둘만이 독대하는 술자리까지 만들어 주시기까지 하셨다.
항공학교에 입교해 보니 동기생 김광수도 와 있었다. 28주간의 헬리콥터 조종훈련 과정이었다.
전혀 사전 지식도 없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훈련에 임하면서 쉽지는 않은 기간이었지만 무난히 수료하고 항공장교가 된것이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모두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는 조종훈련을 하고 내려오면 잘했으면 그 감을 잊지말라고 맞아야되고 못타고 내려오면 못탔다고 맞아야하는 시기였다. 장교 과정중에 맞고 수료해야하는 몇안되는 훈련이 조종훈련이었다. 목숨과 관련된 안전이 중시되다보니 어쩔수 없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에 동기생 김광수와 함께 훈련을 받다보니 많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과정을 수료하였더니 공교롭게도 그 시기부터 육군항공이 행정위주의 임무에서 탈피하여 전투위주의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 완전히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500MD,코브라등의 전투헬기부대들이 창설하기 시작되었던것이다.
급기야 이제는 대한민국 육군에 아파치헬기대대,코브라헬기대대,블랙호크대대,시누크대대등이 주력이 된 명실공히 전투항공으로 크게 탈바꿈하게 된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방에 남지 않고 후방으로 가게 된것은 내가 항공으로 전과하게된 큰 계기가 된것 같다. 그때 전방에 남았더라면 어찌 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일 하느님께서 섭리 하시는 일이니 그저 매사에 감사드릴수 밖에.
특히 3000 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중 500시간 정도가 야간 비행시간이었다.
야간비행을 위한 충분한 성능의 장비가 개발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비행전에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마음 놓을수 없는 비행들이었다. 오직 비행중에 비행기에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많은 비행을 하는중에 헬기의 어떤 결함도 없이 안전하게 비행임무를 마칠수 있었던 일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것이다.
항공장교가 된 이후에도 많은 에피소드가 있으나 그 뒷이야기들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번엔 내가 항공병과를 택하게 된 이유를 밝히면서 이만 줄이겠다.
지루한 내용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백 병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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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0년전 일을 어젯일처럼 소상히 쓰셨네요.
대단한 기억력에 대단한 필력이시네요.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읽어주셨군요.감사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휘관과의 갈등도 피하셨네요. 위기탈출!
그리고 김낙흥동기와 미2사단에서 만났지요?
큰체격이 헬기조좋하는 데는 지장이 없나요? 위험한 때도 많았을텐데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백병기 동기는 어느길로 가든 군생활 잘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헬기 수당도 많이 받았나요?
하하, 미군들 조종사들중에는 저보다 큰친구들 많더군요. 그래서 그런건 아니지만 대한민국 시누크 1호 조종사가 되면서 시누크대대를 창설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