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q5QT7dX_aUs?si=SfHRq5Sho_SmO7x4
안녕하세요 화정입니다
소박한 제 시와수필낭독방을 찾아와주시고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시간 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백서른일곱 번째 글은 그 냇물 이라는 수필입니다. 동탄 고향에 동창들을 만나러 나선 길에서 예전 그 냇물을 만났습니다. 고향을 만났습니다. 들어보세요.
그 냇물
Gtx를 타고 동탄으로 간다. 고향으로 간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원역에서 내려서 다시 동탄버스를 타고 동탄으로 갔다. 두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Gtx는 수서에서 동탄까지 네 정류장이고 21분 거리다, 옆 동네다. 초등 동창들을 만나러 간다. 설레임이 저만치 앞장을 선다.
고향 동탄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변모하였다. 신도시인 만큼 아파트 숲이다. 구불구불하던 옛 길들과 고만고만하던 집들은 사라졌다. 뒷산도 앞산도 논두렁길도 사라졌다. 옛 고향의 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천행으로 내가 살던 동네 옥골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빼곡한 빌딩 사이에 남아있다. 80여 년 전 큰오빠가 태어난 기념으로 아버지가 심으셨던 나무다. 여기가 우리 집 저기쯤이 정주네 저기쯤이 툇마당 고개 등 옛 모습을 가늠해 볼 수는 있다. 그래봤자 고향을 잃은 서운함은 어쩔 수가 없다.
지하 육 층 땅속을 달려 동탄역에 도착하였다. 옛날 청계리가 있던 자리다. 옛날에도 동탄역이 있는 자리쯤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주변은 온통 논과 밭이었고 띄엄띄엄 마을들이 자리했다. 십여 개 마을에서 살아가는 석우리 사람들이 산길을 걸어 내려와 오산천을 건너 청계리에 가서 오산이나 수원행 버스를 기다렸다. 물론 청계리 사람들도 있었다. 정류장 옆에 허름한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석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간쯤에 있었다. 눈깔사탕을 비롯하여 우리를 힐끔거리게 하는 달달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삼십여 분 걸어오느라 배가 출출해진 우리들은 그곳을 기웃거렸다. 눈깔사탕 한 개면 집까지 삼십여 분 더 걸어가야 하는 길이 멀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초등동창 모임의 약속 장소가 반송리에 있다는데 반송리는 청계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다. 눈을 감으면 눈앞에 훤하게 떠오른다. 청계리에서 신작로를 따라 동탄초등학교 방향으로 이십여 분 걸어가다가, 오른쪽길로 접어들면 오산천이 나오고 그 건너편 마을이었다. 순옥이가 생각난다. 작고 희고 통통하면서 귀여웠던 친구다. 고 쬐끄만 순옥이가 나한테 바락바락 대든 적이 있단다. 보고 싶네. 늙으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멀리 도망을 쳤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다. 청도에 살고 있단다. 매실 농사를 시작했단다. 이삼 년 뒤면 안정이 되니 선생님과 함께 놀러 오란다. 무심하게 십여 년이 흘러갔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들려왔다.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단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던가.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고 버스 시간은 멀었다. 택시를 타고 반송리 약속 장소로 간다. 혹시나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싶어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긴 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잡풀들이 여기저기 수북하게 자라나는 냇물이지만 넓다. 많지 않은 물이 이쪽으로 저쪽으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순간 떠올랐다. 아! 그 냇물! 그 냇물! 석우리에 살던 내가 학교에 가려면 건너가던 그 냇물, 오산천! 택시기사 아저씨도 말씀하셨다. 맞아요 고매리 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 맞아요.
고매리 저수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은 영천리를 지나 석우리를 지나 반송리를 지나 금곡리를 거쳐 오산 쪽으로 흘러갔다. 오산천이라 불리었다. 냇물이라고 하기에는 폭이 꽤 넓었다. 평소에는 물의 양이 많지 않고 가운데 정도만 물이 흘러가서 돌다리로 건너다닐 만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자 아이들은 팬티만 입고 물장구를 쳤다. 여자 아이들은 발을 담그고 놀았다. 장마가 지면 흙탕물이 세상을 휩쓸고 내려갈 듯한 기세로 빠르게 흘러 내려갔다. 고매리 저수지에서 수위를 조절하느라 물을 한꺼번에 내보내기 때문이었다. 소나 돼지가 물살에 빠르게 떠내려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석우리에 살던 우리들은 냇물을 건너야 초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불어난 물을 건널 수는 없었다. 그런 날은 동네 어른들이 모두 개울가로 나왔다. 내 아버지도 거기 계셨다. 내 아버지의 음성은 호랑이 울음 소리만큼 거칠고 우렁찼다. 부지런하셨다. 새벽이면 둥글레통을 발로 밟아 타작을 하셨는데 우렁우렁 우리를 깨우셨다. 뭐하냐 얼른 얼른 일어나거라. 잠이 많은 나이였으니 아버지의 호령은 듣기 싫었다. 그런 아버지도 거기에 계셨다. 등을 내미셨다. 쭈뼛거리다가 아버지의 등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의 베잠방이 등은 땀에 젖어 있었고 담배를 피우셨으므로 퀴퀴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든든했다 안전했다. 사랑이 느껴졌다. 어린 나는 장마가 지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였다. 나는 막내였고 젖을 늦게까지 먹었다. 어머니의 젖이나 살을 만져야 잠이 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엄마가 집에 없으면 눈물이 나는 아이였다. 그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학교에 갈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개울이 넘칠 만큼 물이 흘러 내려갔다. 개울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은 집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계리에 사시는 어느 선생님 집에 석우리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하룻밤을 거기에서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4학년인 넷째 언니가 함께 있었다. 괜찮다고 하룻밤만 자면 된다고 나를 달랬지만 나는 자꾸 눈물이 나왔다. 정주도 진주도 다른 애들도 아무도 울지 않았다.
오산천, 냇물을 떠올리면 천렵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칠십이 넘은 세대나 기억하는 말일 것이다. 뜨거운 여름이 계속되고 농부들이 지쳐갈 무렵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삼십분 거리의 냇가에 몰려서 갔다. 마차에 가마솥과 땔감과 양념들과 수박과 참외를 싣고 영천리 쪽 냇가로 갔다. 어른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 어머니들은 솥을 걸고 매운탕을 끓일 준비를 하였다. 아이들은 너럭바위에 올라가 물 속으로 첨벙 첨벙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배가 출출해질 무렵이면 가마솥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민물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는 냄새와 밥솥에서 풍기던 밥 냄새를 떠올리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냇가에 물도 많았고 물고기도 많았다. 아이들도 많았다.
오산천의 근원지인 고매리 저수지로 꽤 여러 번 소풍을 갔었다. 학교에서 걸어서 십리도 넘는 길이었다. 수문을 닫으면 냇물에 물이 적어지고 수문을 열면 물이 많아집니다. 장마 기간에는 저수지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차니까 수문을 열어 물을 내려보내게 되고 냇물이 넘치는 것입니다. 또한 가뭄에도 물을 내려보내 농사용 물을 공급합니다. 저수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에서 밥을 먹고 보물찾기를 하였다. 합창 대회가 있었다. 우리들은 이 노래를 연습하였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파랗게 파랗게 부분부터 낮은음과 높은음으로 나뉘어 불렀는데 담임은 자꾸 고개를 저었다. 백번은 연습 했을 것이다. 나는 낮은음을 불렀다. 지금도 그 노래를 부르면 뒷 부분에서 낮은 음으로 불러댄다.
영천리로 향하는 오산천을 건너면 부모님의 넓은 밭이 있었다. 또한 서울에서 사시다가 고향으로 내려 오신 큰아버지댁이 산자락에 있었다. 박씨 문중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학교에 가기 위해 청계리뿐만 아니라 영천리 쪽에서도 수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오산천을 건너다닐 일이 많았다.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가 노환으로 아프셨고 어머니는 농사일로 바빠서 돌봐드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 마차에 할머니를 싣고 큰어머니댁으로 가야 했다. 할머니 뒤에서 내가 할머니를 끌어 안았다. 덜컹거리는 마차를 타고 오산천을 건너갔다. 할머니가 오산천을 다시는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수업 중에 들었다. 울면서 냇물을 건너 큰아버지 댁에 갔었다. 울면서 냇물을 건너 집으로 돌아왔었다. 둥글넓적한 나를 늘 보름달처럼 이쁘다고 칭찬해 주시던 할머니의 눈빛은 아직도 생생하다.
금곡리도 오산천을 건너는 마을이었다. 학교에서도 다시 삼십 분은 걸어가야 했다. 그곳에는 이종사촌이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 살고 있었다. 큰이모는 일찍 돌아가셨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혈육이었다. 내 어머니를 어머니처럼 극진하게 대접하는 조카네였다. 토마토 대농이었다. 석우리에서 금곡리까지 어린 내 걸음으로 한 시간 삼십 분은 족히 걸렸다. 일 년에 한두 번 심부름을 다녀왔다. 그곳에 가면 마당에 커다란 고무다라가 있었고 토마토를 썰어 넣고 설탕물을 부어놓았다. 품질이 좋은 토마토는 팔고 부실한 것들을 잘라 놓은 것이었다. 배불리 달달한 토마토를 먹고 한 보따리 토마토를 들고 금곡리 오산천을 건너서 다시 청계리 쪽 오산천을 건너 산길을 따라 석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동탄, 고향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하고 서러워하였는데, 오오 냇물이 있다. 오산천이 있다. 여전히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꿈틀꿈틀 살아있는 고향이다. 공원이며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고 벚나무도 울울창창 자라있지만 오산천에 가면 석우리가 있고 영천리가 있고 반송리가 있고 금곡리도 있다. 청계리도 있다. 동탄이 있다. 추억이 있다. 오산천!! 그 냇가 그 냇물, 오 내 고향!
첫댓글 고향이란 의미는 변함이 없고 항상 머리 속에 그려지는 산천초목이었지만 삶 속에 고향을 가만히 놓아 두지를 않는다. 나는 그 고향의 두메산골 거쳐 가는 길을 기억하곤 한다. 그러나 우연인지 인연의 끈이 있는지 나는 고향을 되새기게 만들어 주었다.
유년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서울로 상경하여 학교를 나오고는 사회에 일원으로 살면서 고향과 인접한 곳에서 근무하고 연을 이어 가면서 고향의 환경과 주변 변화를 지켜보면서 옛 추억이 지워져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는 나는 이수를 넘어 고희를 지나면서 문중행사로 일년에 한번은 옥골을 다녀오기도 하고 또한 적어도 두달에 한번은 그곳인 고매리, 영천리, 청계리, 반송리, 옛 동탄면사무소 지나쳐 가기도하곤 한다. 아니 맛집을 찾아가서 아들내외와 손자와 식사를 하곤하면서 고향산천의 변화된 모습에 씁쓸하다. 옛 기억의 추억을 그려낼려면 끝이 안 보일것 같아서 이만 줄이면서 미련을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