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의 노익장(老益壯)
김성문
김유신 장군은 근력이 대단하다. 그 당시로는 평균 수명이 약 50세 정도였는데 79세까지 노익장을 과시한 것으로 보아 신라로 봐서는 큰 축복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노익장을 보자.
김유신 장군이 67세(661)가 되었다. 백제가 멸망 후 남은 군사들이 음력 2월에 사비성에 쳐들어왔다. 신라 태종무열왕은 백제의 무리가 남아 있어 멸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김품일 대당장군(大幢將軍)과 여러 장군을 보내어 멸하게 했으나 실패했다. 대당(大幢)은 서라벌 6부에 설치된 신라 최초, 최대의 군단이다. 진흥왕 5년(544년)에 편성한 전국의 6정은 보병 군단으로 대당(서라벌 6부 병사), 상주정(상주 지역), 한산정(경기 광주 지역), 우수정(춘천 지역), 하서정(강릉 지역), 완산정(창녕 지역)이 있었다. 태종무열왕은 김품일 장군 등의 군사가 실패하자, 김흠순, 진흠, 천존, 죽지 장군 등을 보내어 군대를 증원해 이겼다.
같은 해 음력 5월 19일 고구려와 말갈은 신라의 정예 장군들이 모두 백제에 가 있는 틈을 이용하여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와서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게 된다. 고구려군은 성의 서쪽에, 말갈군은 성의 동쪽에 진을 치고 10일이나 공격했다. 김유신 장군은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이 성을 포위했고,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의 힘은 이미 다했으니 신령의 음조를 빌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절에 나아가 제단을 만들어 기도했다. 갑자기 큰 별이 고구려와 말갈의 진영에 떨어지고 뇌성이 치고 비가 쏟아졌다. 적들은 달아났다. 소문을 들은 신라 군사들은 김유신 장군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응한 것이라 했다.
같은 해 음력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나오더니 김춘추 태종무열왕이 붕어했다. 대관사는 신라 시대 전북 익산에 있었던 사찰이고, 금마군은 전북 익산시 금마면 지역이다. 김법민 태자가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 문희(文姬)이다.
이때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시켜 고구려를 치도록 했다. 당나라에서 숙위(宿衛)하고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문무왕에게 알렸다. 소정방 군사가 먼저 수로(水路)로 대동강에 이르러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문무왕은 음력 8월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직접 여러 장수와 함께 시이곡정(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고 있었다. 시이곡정은 경기도 이천인 남천주(南川州)로 보기도 한다. 이때 사자(使者)가 와서,
“백제의 잔당들이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옹산성(甕山城)에 모여 길을 막는다.”
라는 말을 듣고 쳐들어가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음력 10월 29일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과 서라벌로 돌아왔다. 한편 평양 부근에 있는 소정방 군사는 군량미가 떨어지고 혹심한 추위가 몰아쳐 위기에 놓여 있었다. 평양 부근에 있는 소정방에게 군량미를 수송하라는 당나라 황제의 칙지가 음력 1월에 문무왕에게 전달되었다.
문무왕은 68세(662년)인 김유신 장군과 9명의 장군에게 군량미를 가지고 평양으로 가도록 했다. 황해도 수안에 이르니 길이 미끄럽고 험해 수레에 실은 것을 소와 말에 실었다. 군량미를 음력 2월 6일에 전하니, 소정방은 싸움을 그만두고 당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김유신 장군과 여러 장수가 서라벌로 돌아오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쫓아오자 김유신 장군은 북과 북채를 각각 여러 소의 허리와 꼬리에 묶어서 소들이 꼬리를 휘두르면 소리가 나게 했다. 또 땔감을 쌓아 불살라서 연기와 불길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이 사실을 안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 오자 모두 멸망시켰다.
김유신 장군이 69세(663년) 때는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 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倭)의 연합 세력이 있었다. 음력 8월에 문무왕은 김유신 장군과 여러 장수가 힘껏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서라벌에 돌아온 문무왕은 음력 11월 20일 김유신 장군에게는 밭 5백 결(약 234만 평)을 내리고 장수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김유신 장군의 나이 70세(664년)가 되자, 장군은 나이 들어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문무왕은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백제의 남은 무리가 음력 3월에 또 사비성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 도독이 담당한 군사로 여러 날 공격했다. 안개가 짙어 사람과 물건을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웅주 도독이 보낸 백산(伯山)에게 김유신 장군은 비밀스러운 꾀를 주어 이기게 했다. 비밀의 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나라 고종은 김유신 장군의 영향력이 커지자 장군의 나이 71세(665) 때 장군을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천 호’로 책봉했다. 봉상정경은 당나라 문관직으로 시호, 제례를 담당하는 태상부의 장관이다. 문무왕은 음력 8월에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김유신 장군의 나이 74세(668년)가 되었다. 음력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했다. 문무왕은 김흠순과 김인문을 인솔 장군으로 삼으니, 김흠순 장군은 문무왕에게,
“만약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공(公) 등 세 사람은 나라의 보배다. 만약 모두 전쟁터에서 유고가 있으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유신이 남아 나라를 지킨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다.”
이에 김유신 장군은 두 장군에게,
“가서 너희의 임무에 차질이 없도록 하여라.”
“말씀을 받들어 행동해 감히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윽고 문무왕은 당나라 영국공과 함께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때가 서기 668.9.21.로 705년간을 누린 고구려는 종말을 고했다. 문무왕은 여러 장수에게 관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김유신 장군에게는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太大角干)의 관위와 식읍 5백 호를 주고 덧붙여 수레와 지팡이를 내렸다.
신라는 김유신 장군의 노익장으로 고구려를 멸망하게 했다. 한 장수의 의지력이 나라를 지켰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김유신 장군이 오래 기억되고 있다. 작금의 우리나라를 볼 때 지도자는 김유신 장군의 노익장을 본받아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여 강한 나라로 만들기를 기원해 본다.
첫댓글 이쉽게도 요즈음 한국 사회는 안석과 지팡이, 수레를 하사받아 국가를 위해 충심을 다하는 지도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회장님!
잘 지내십니까?
바쁘신데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