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存을 確認하는 感動
아침에 잠에서 깨면 그때가 바로 생존을 확인하는 감동의 순간일 것이다. 이때의 정황을 묘사한 시구가 하나 머리에 떠오른다.
'아! 기쁘다.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라는.
이것은 내가 중학교 5학년 때 공민과목(公民科目)을 담당하셨던 니이가키라는 일본인 교유가 지은 '하이쿠이다.
다 잘 아는 것처럼 하이쿠는 5.7.5의 17자로 된 단시(短詩)로서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시의 하나다. 앞의 시구는 일본말로 된 것을 우리말로 옮겨본 것이다. 짧고 평이한 가운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선생님은 강조하셨다.
이 하이쿠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니이가키 선생님의 프로필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내가 중학교 학창시절 일본인 교유가 6~7명 재직했었는데 나이가끼 선생님은 다른 일본인 교유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출신지는 오키나와인데 오키나와는 지난날의 류큐(琉球)왕국이었다. 1870년대 중엽에 일본이 강압적으로 병탄한 사정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분과 우리 학생들 사이에는 정서적으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다들 생각하는 것 같았다.사제지간의 정은 교사로서의 덕망과 자질이 문제인 듯하며 민족감정은 별로 관계가 없었던 듯싶다. 스승님은 민족은 달랐지만 모범교육자의 표본 같은 분이었다. 그분은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내외분만의 단출한 생활이었다.
그래서 가끔 친구나 동료들이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분은 "학교에 가면 900 명 학생들이 다 내 아들들인데 고적할 일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8.15 해방 후에 일본인들이 그들의 본국으로 철수할 때 우리 선배들이 그분을 부산 부두까지 안전하게 모셨다는 미담도 남아 있다.
그분이 담당한 과목은 일본어문법과 일본고어 그리고 공민과목이었다. 어느 과목이나 열의가 대단하고 학습지도법이 뛰어났지만 특히 공민시간의 인상이 깊이 남는다. '공민'은 오늘날의 ‘사회생활과’와 비슷할 듯싶은데 나이가끼 스승님은 공민과목을 통해서 학생들의 인성함양에 힘을 기울이셨던 것 같다.
학창시절에 한 분이라도 이런 스승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옆길로 많이 흘렀는데 모두(冒頭)의 '하이쿠'는 학생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주입시키기 위해서 직접 당신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때의 스승님의 설명을 기억나는 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듯싶다.
잠자는 동안은 어떻게 보면 생명의 일시적인 정지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나서 다시 생존을 확인하는 순간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것이다. 그 감동을 체감하지 못하면 그날그날의 생활을 힘차고 보람있게 이어나갈 수가 없다. 하루하루의 축적이 일생이고 인생인데 그 하루는 '생존'의 확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생존'의 확인은 '생명'의 존중하고도 통하는 말이다.
그때부터 치면 어언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가끔 사건이나 돌발사고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잠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타계하는 사례를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사례가 비일비재라는 것도.
우리의 아침인사인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도 그런데서 연유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번 특집의 주제를 '아침잠에서 깨어 5분'으로 정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기획인 듯싶다. 그런데 노생은 그동안 스승님의 교훈을 귓전으로 흘리고 나이만 주어먹은 듯싶어서 면구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인생을 깊이 있게 생각 못하고 알차게 살지 못한 셈이다.
그동안은 잠에서 깨면 간밤의 꿈부터 챙긴 편이라고나 할까. 나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고 언제부터인지 꿈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젊은 교사시절 나는 등굣길에서 생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꿈을 꾸었다. 그런데 실지로 그날 아침 출근하는 도중에 꿈속의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럴 수가……. 텔레파시설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밝힌 나이가끼 선생님은 과학적 사고(科學的 思考)에 투철한 분이었다. 그런데 학창시절 같은 방을 쓰고 있던 하숙생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꿈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고 한다. 지난번에 고향에 갔을 때 아우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는데 그 아우가 죽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스승님이 꿈이 무슨 대수냐고 위로하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우 사망'의 전보가 날라 오더라는 것이다. 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꿈'이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밝힌 대로 나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 편이고 또 꿈에 대한 매력도 잃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잠에서 깨면 생존의 감동은 저점이고 우선 기억을 더듬어서 꿈부터 챙긴다.돼지꿈이면 복권방을 찾고 용꿈이면 큰일 한번 못 낼 것도 없는데 거의 시덥잖은 개꿈뿐이다.
'꿈많은 젊은이' 소리 듣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꿈많은 늙은이' 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 아닌가. 꿈의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개꿈이면 어떻고 곰꿈이면 대수랴 싶다.
아무리 꿈이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에 앞설 수는 없을 듯싶다. 내가 어려서부터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는 말은 다른 글에서도 밝힌바 있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을 생각하면 명운 하나는 나쁘지 않게 타고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잠에서 깨면 꿈에 집착하기보다는 먼저 생존의 감동을 확인하는 일이 앞서야할 듯싶다. 황혼인생에서나마 알차고 만절에 흠이 가지 않기 위해서도.
(2007.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