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성삼일, 부활성야, 부활대축일 미사는 우리 수도원이 생기고 처음 거행하는 예절인데요.
조촐하게 그 나름대로 교회의 오랜 전례를 따라가는데, 많은 수는 아니지만 함께 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정하상바오로 회관 관장으로 계신 이상규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수녀님들과 함께 와 주셔서 저희 수도원이 꽉 찬 느낌이 들게 해 주셨어요.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강생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들도 전혀 그럴 법 하지 않은 사람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목동들이었고요,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소식을 받은 사람들도 그 당시에 남자들에 비해서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자들이예요. 지금은 그런 시절을 좀 벗어나고 있지만...
사도들에 앞서서 여자들이 제일 먼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아직 어두울 때 새벽 일찍 무덤으로 달려간 이유는 향료를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던거죠. 예수님을 향한 평소 그들의 사랑이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공경하고 흠숭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 갔는데 복음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나서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 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아주 많은 경우에 이 여인들과 비슷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열심이 있고, 나름대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서 어떤 때 남들이 하기 힘든 그런 정성과 열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언제나 그런 열심만으로, 그런 열정만으로, 그런 성실함만으로 주님의 부활을 알아 뵙고 주님을 참되게 흠숭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 신앙에 대한 생각에 갇혀서 그 테두리 안에서 열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열심’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늘 '테두리를 좀 벗어나라'고 초대하십니다. “여기 없다”는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그 한계 안에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무덤에 안계시면 어디에 계실까요? 도대체 어디 계실까요? 거기 안계시면 도대체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가 성주간 전례를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넘겨 주시는, 당신 숨을, 피를, 몸을, 주님의 몸을 잘 넘겨받았다면 지금 이 순간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어디 계시느냐 하면 (손을 가슴에 대며) 여기 계시는거예요. 잘 안 느껴지는 분도 계실거예요. 안 느껴져도 괜찮아요. 여기 계시는 겁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촛불을 켰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예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충만히 임하시는 장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이야기는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장 그럴 법하지 않게 생긴 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별로 친절하지도 않고 나만 보면 고개를 돌리고... 그런 사람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이라는 게 아닙니다.
보세요.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럴 법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늘 그럴 법 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동산지기의 모습으로, 어부의 모습으로 그리고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늘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놓치지 않고 생각의 폭을 넓혀 드리는 훈련을 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부활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하나의 훈련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훈련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좀 놀랄 준비를 하면서 사는 거예요. 내가 믿는 것이, 눈으로 보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알아차릴 때에 내 마음 속에는 여백이 생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여백 안으로만 들어 오십니다. 부활체험은 이 여백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추종하고 있던 편견이나 신념이나 고집스러움이나 이런 것들을 놓아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때 우리는 늘 '도둑처럼 오시는 분'의 현존을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여자들의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그들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무덤을 들여다 보았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 혼자만 달려가서 보고 놀라와할 줄 알았어요. ‘아, 헛소리가 아니네. 아, 세상이 정말 내 눈으로 본 그게 전부가 아니네’ 이런 태도를 지닐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 중 베드로만 믿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것도 제가 이번에 새삼스럽게 느껴본 지점입니다.
베드로가 사도단의 으뜸이어서 이런 일이 생겼던 것은 아닌 거 같아요. 베드로는 사도들 중 - 유다를 제외하고 -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스승을 바로 곁에 두고도 그 분을 세 번 부인한, 배신한 그 밤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예수님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런 다음 슬피 우는데, 시선이 마주 치는 순간 자기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예수님의 사랑을, 자비를 체험했던 것이지요.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죄가 많았고,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불충실했고,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오만했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졌는데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용서받은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도 작은 사람, 겸손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작고 낮고 겸손한 곳에 주님 부활의 소식이 닿았고 제일 먼저 달려가서 접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부활기간 내내 더 작고 더 겸손하고 더 가난한 주님의 아들 딸로서 곳곳에서, 그럴 법 하지 않은 곳에서 다시 부활하신 분을 더 깊게 알아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서로 나누고 이웃에게 전하는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이 성야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합시다.
첫댓글 부활축하 드립니다.
시은님 덕분에 멀리서도 수도원에 가있는듯합니다.
부활 축하합니다. 아마 이 분위기를 이미 잘 알고 계시기에 사진이나 녹취만으로도 함께 계신 듯 느끼시는 거겠지요? 수도원에 있는 동안 시간이 깊은 강물처럼 소리없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어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단순함을 잊을 수 없네요.
시은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살아계신 주님 사랑이 더욱더 커지기를 바래 봅니다.
수도원의 가족 모두가 사랑안에 가득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