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이 잦아진 골에 …
- 목은 이색 -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이색은 이성계와는 막역한 친구였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색이 이를 규탄하다 장단 ․ 함창 ․ 청주 ․ 한주 ․ 금주 등지로 유배당했다.
장자 종덕은 액살 당하고 나머지 아들들도 유배되었다.
문생이었던 정도전 ․ 조준 등도 이색에게 등을 돌렸고 정도전은
이색의 탄핵에 앞장까지 섰다. 세상 인심은 그를 떠났고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는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운명 앞에 그는 풍전등화였고 외로운 매화 한 송이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붓을 꺾었다. 그렇게도 좋아했던 시도 던졌다.
이색은 시만도 6000여수에 달했던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그에게 시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으며 제자를 가르칠 때도 시로 강론했고,
정사를 말할 때도 시로 행했다. 참으로 시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붓도 던지고 시도 던졌으니 조선의 건국은 그에게는 죽음과도 같았다.
이름도 쓰지 않겠다는 참담한 심정이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있다.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여 무슨 말을 하리오.
한 때 같이 죽지 못하였음이 한 이었고, 이 몸도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백이 ․ 숙제와 같이 수양산에서 고사리나 캐 먹 고 싶으나
그것도 무슨 심정으로 주나라(조선) 곡식을 먹으리오.
나머지는 다 쓰지 못하겠고 망국의 죄인이니 이름을 쓰지 않겠소.
-『목은선생연보』65세조
태조는 이색에게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그는 거절했다.
망국의 사대부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으며 해골을 고향 산천에 묻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충절에도 태조는 끝까지 그를 친구의 예로 극진히 대접했다.
색이 나아가 뵙고 하는 말이
"개국하는 날 어찌 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만약 나에게 알렸 다면 읍양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말 장수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을 두고 풍자한 것이었다.
남은이 옆에 있다가 "어찌 그 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은을 꾸짖어 다시는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태조실록』권 9
이색(1328~1396)은 고려말 성리학의 대학자이다.
부는 문효공 이곡으로, 자는 영숙, 호는 목은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충숙왕 15년(1328)에 경상도 영해부에서 출생했으며 14세에 성균시에 합격,
20세에 원에서 국자감 생원으로 3년간 수학했다.
귀국해서 26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공민왕 14년(1365)에는 첨서밀직사사,
40살에 성균대사성을 지냈다.
우왕의 사부로 우왕 14년(1377)에 문하시중 ․ 한산부원군 등 최고의 직을 받았다.
『목은시고』,『목은문고』가 저서로 남아있다.
그는 포은과 더불어 고려 사직을 위해 끝까지 사투했으나
거대한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태조 5년 신륵사로 가는 도중 병을 얻어 6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주 강가에서 정도전 등 반대파들이 보낸 독주에 사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후세 사인의 의혹에 씁쓸함을 남겼다.
이색은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산사에 출입하면서 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다.
8세 때 서천 기산의 숭정산에서 공부했으며,
강화 교동의 화개산, 한양의 삼각산, 견주의 감악산과 청룡산, 서주의 대둔산,
평주의 모란산 등도 그가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이색의 학문은 이제현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문익점, 이존오 등과 교류했고 고려 삼은 길재는
스승 이색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았다.
조준, 하륜, 권근, 황희, 변계량, 맹사성 등 많은 지식인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그는 당대 제일의 정치가였고 문장가였으며 대석학이었고 위대한 교육자였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정을 쇄신하고자 사투했으나 이성계와 맞서다
끝내 조선 건국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사림 정신의 거두 길재가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그는 조선 학맥의 근원이 되었다.
훗날 불교 신봉자라 하여 다소 폄하되기도 했으나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절의 사표였다.
충청도 서천 기산의 문헌 서원, 청주의 신항 서원에 배향되었다.
충절, 선비의 고장 충청도.
이제는 함께 이색의 고향 서천의 문헌서원에 가보야야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잘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인지 한 번쯤 물어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시조는 역사이다.
면면이 내려왔던 사림의 선비 정신이 서원에는 남아 있을 것이다.
600여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들을 일깨워주는 죽비가 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서천군 기산면 소재 문헌서원
이색 영정
<시조시인 ․ 평론가 ․ 중부대교수>
- 대전일보 2009.7.9-신웅순의
우리 시조를 찾아서
[출처] 제 2 화.백설이 잦아진 골에...-목은이색편|작성자 석야
[출처] 제 2 화.백설이 잦아진 골에...-목은이색편|작성자 석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