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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 대한 변론 ‘매변(寐辨)’, 인간의 첫 번째 쾌락이 달콤한 잠(寐)이다>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조선후기 시인 동번(東樊) 이만용(李晩用 1792~1863)의 문집 『동번집(東樊集)』 권4(卷四)에 수록되어 전하는 <매변(寐辨)>이라는 산문(散文)을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 천하의 즐거움(天下之樂)이란? 오직 몸(身)을 편안히 하고 마음(心)은 한가롭게 하여, 충분히 잔 잠(寐)이 보약이자,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또 저자 이만용(李晩用)은 인간 세상 속에 ‘첫 번째 쾌락(一快樂)이 바로 달콤한 잠(寐)’라면서 잠을 줄여서 수명을 늘리는 게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꿀잠을 즐기며 사는 것, 그것이 수명을 건강하게 늘리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도 잠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푹 자고 볼 일이다.
○ 이 글의 주제는 「매변(寐辨)」, 즉 ‘잠에 대한 변론’이다. 19세기 양주(楊州) 땅에 살던 이생(李生)이란 젊은이에게 해당(海堂) 조병황(趙秉璜)이라는 사람이 시도(詩道)를 전수해 주니, 아름다운 시어(佳語)를 지어낸다. 어느 날 해당은 늦잠을 자는 이생에게 ‘잠을 경계(寐戒)하는 한 편의 글을 지어 풍자하였다. ‘죽음은 천년의 잠이요, 잠은 하루의 죽음이다.(死千年之寐, 寐一日之死)’ 고로 ‘백년 인생이라는 것은 오십년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이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잠을 거의 자지 않고 몸이 상하도록 학문에 힘썼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생(李生)은 듬직하고 훌륭한 청년인 것 같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한 미혹된 것이다(亦惑矣).”라고 저자가 말한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고, 기름을 태워 등잔불을 밝히거나 경침(警枕)을 쓰면서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생(生)을 해치는 큰 병’이라는 것이다. 천하 제일의 즐거움이 잠인데, 잠을 자지 않으려는 것은 즐거움을 없애는 길일 뿐이다. 이를 보다 못한 저자가 이생을 위해 한 번 변론코자(一辨之) 「매변(寐辨)」이란 글을 짓는다고 서문에 썼다.
◉ 얼마 전에 ‘KB금융그룹 KB경영연구소’가 독립적 경제 활동을 하는 25~69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2024 한국 웰니스 보고서’에 따르면 정신 건강과 수면의 문제를 경험한 것으로 답한 응답자가 10명 중 6명에 달했다. 또 수면의 질에 대해 ‘꿀잠’을 잔다고 응답한 비율은 25.2%에 그쳤고, 수면 문제를 경험한 비율은 59.2%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현대 한국인의 많은 분들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얼마 전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수면장애로 진료받은 환자가 12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고 한 해 동안 지출된 진료비도 3220억원대를 기록했다면서 모두 최근 5년래 최고 수준이라고 밝혔다. 특히 50대 이상 중장년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아침 TV 방송에서 건강엔 ‘잠이 보약인 이유’ 6가지를 어느 의사가 말했다. ①집중력, 기억력 향상 ②비만 및 당뇨를 예방 ③안전사고 예방 ④행복감 증가 ⑤고혈압 심장질환 예방 ⑥면역력 강화랍니다.^^
○ 저자 이만용(李晩用 1792~1863)이 이 글에서 상념으로 인한 꿈을 꾸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느긋한 것이 중요하고, 만고의 성현(聖賢)과 백세의 영웅(英雄)이 필부(匹夫)보다 못한 것은 근심과 즐거움의 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사는 것, 그것이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라 말한다. 어쩌면 이만용의 말대로 시인(詩人)인 이백(李白), 왕순(王珣) 같은 문인들은 잠을 자는 동안 문장이 진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도 잠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 무조건 푹 자고 볼 일이다. 건강 유지에 필수적인 꿀잠이야말로 천국이자 낙원이다.
○ 잠을 줄여서 하고자 하는 일에 매진한다고 하여 사람이 즐겁고 행복해질까?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근심만 더 생길 것이다. 저자 이만용(李晩用)은 자신을 ‘갈수한(渴睡漢)’, 곧 ‘실컷 잠잘 수 있기를 바라는 사나이’라 하면서 조병황(趙秉璜)의 말을 부정하였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하지 않다면 ‘오십년 인생이 백년 인생의 근심을 가지게 될 것이요 백 년 인생이 천년 근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만용은 "사람은 근심과 더불어 살아간다. 근심 없이 죽은 자는 거의 없고 죽은 다음에야 근심이 없어지는 법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한가하고 몸이 편안하고 평범한 사람이 오히려 그 삶이 행복하다면서, “나는 천하의 즐거움이 오직 몸(身)을 편안히 하고 마음(心)은 한가롭게 하여, 충분히 자고 난 잠(寐)이 보약이자, 인생의 즐거움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만용이 '매변(寐辨)'이라는 글에서 제시한 답이었다. 바로 ‘꿀잠만이 제일의 행복이다.’고 강조한 것이다.
● 다음 ‘잠에 대한 변론’ <매변(寐辨)>은 조선후기 시인 동번(東樊) 이만용(李晩用 1792~1863)의 작품이다. 저자 이만용(李晩用)은 부친 박옹(泊翁) 이명오(李明五), 조부 우념(雨念) 이봉환(李鳳煥)과 함께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도 당대의 쟁쟁한 명사들과 교유(交遊)하였던 조선의 시인이었다. 이 한문 수필은 먼저 짤막한 병서(竝序)를 기술하고 그 다음 장문의 본문(本文)을 서술해 놓았다. 이 글에서 천하의 즐거움(天下之樂)이란? 오직 몸(身)을 편안히 하고 마음(心)은 한가롭게 하여, 충분히 자고 난 잠(寐)이 보약이자,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글은 대략 4단락으로 나눌 수가 있다.
먼저 서문(序文)에서 19세기 양주(楊州) 땅에 살던 이생(李生)이란 젊은이에게 해당(海堂) 조병황(趙秉璜)이라는 사람이 시도(詩道)를 전수해 주고, 잠을 경계하는 한 편의 글을 지어 풍자하니 이생이 잠을 거의 자지 않고 학문에 힘쓰기에, 보다 못한 저자가 이생을 위해 한 번 변론코자(一辨之) 「매변(寐辨)」이란 글을 짓는다고 소개했다.
첫 번째 단락에선, 천하의 즐거움(天下之樂)이란? 오직 몸(身)을 편안히 하고 마음(心)은 한가롭게 하여, 충분히 자고 난 잠(寐)이 보약이자,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걱정 없이 죽는 사람은 드물고 죽은 후에야 걱정이 없어진다. 인간세상 속에 첫 번째 쾌락(一快樂)이 바로 달콤한 잠이다. 두 번째 단락에선, ‘죽음은 천년의 잠이요, 잠은 하루의 죽음이다.(死千年之寐, 寐一日之死)’ 고로 ‘백년 인생이라는 것은 오십년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당(海堂)의 이 말에 이생(李生)이 세월의 빠름이 서글퍼져, 촌음을 아끼고자 잠을 줄여 장수를 하고자 했다. 이생의 성실함은 인정하나 이는 옳지 않다. 옛날의 성현(聖賢)들은 모두 충분한 잠을 자고도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세 번째 단락에선, 잠을 자는 시간이 아까워 잠을 줄이면 생명을 상하게 하는 큰 병이 생긴다. 그리고 결국 50년을 사는 사람은 100년의 근심을 가지고 백년을 사는 이는 천 년의 근심을 가지기에, 장수와 즐거움 또한 어렵게 된다. 네 번째 단락에선, 천하의 즐거움인 잠은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로워야 한다. 세상의 많은 성현(聖賢)들도 충분히 편안한 잠을 잤기에 장수하며 행복할 수 있었다며, 저자 또한 잠자는 것을 즐기겠다면서 끝맺었다.
*<잠에 대한 변론 ‘매변(寐辨)’ 꿀잠의 힘>* 이만용(李晩用 1792~1863)
[서문(序文)] 19세기 해당(海堂) 조병황(趙秉璜)의 손님으로 경기도 양주(楊州)의 이생(李生)이란 이는 나이는 어리지만 재주가 뛰어났다. 해당이 시도(詩道)를 전수해 주자, 이따금 아름다운 시어(佳語)를 지어내니 해당은 이를 보고 대번에 칭찬하면서 배움에 근면하길 권했다. 하루는 이생이 잠에 깊이 빠져 신시(申時, 오후3~5시)에 이르도록 일어나지 않으니 해당이 「매계(寐戒)」 한 편 글을 지어 풍자하였다. 그 문장(文)의 말은 확 트였고 이치가 전달 되어져 사람을 경계하고 감격시키기 충분했다. 나는 본래 잠에 목마른 사나이일 뿐이기에 이에 이생(李生)을 위해 한 번 변론코자(一辨之) 한다.[海堂之客 有楊州李生者 年少而才銳 海堂以詩道授之 往往作佳語 海堂見輒歎賞 因勸其勤學 一日李生困於寐 至晡不起 海堂作寐戒 一則諷之 其文辭暢而理達 足警人而感之矣 余本渴睡漢耳 玆爲李生一辨之]
[본문(本文)] (1) 나는 천하의 즐거움(天下之樂)이란 오직 몸(身)을 편안히 하고 마음(心)은 한가롭게 하는 것임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관점으로 본다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수고롭고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의 관점으로 본다면 공부자(孔夫子)께선 곤경에 처한 것이며, 기리계(綺里季)와 녹리 선생(甪里先生)의 관점으로 본다면 진나라와 초나라는 겁박한 것이다. 만고의 성인이나 100세대의 영웅이 오히려 보통 사람(匹夫)에게 겸손한 건 왜인가? 이들은 걱정했지만 저들은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에 걱정과 함께 사는데 살면서 그 수명을 소유하다가 걱정 없이 죽는 이는 드물고 죽은 후에야 걱정이 없어진다. 나는 잠에 대해 또한 알건대, “대체로 하루 사이에 어떤 때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눈물 나거나 웃거나 놀랍거나 두려운 일도, 잠들면 곧 편안해진다. 그러나 지인(至人, 達士, 통달한 사람眞人)이 아니라면 잠듦에 평소의 생각대로 꿈을 꾸니 어부는 물고기 꿈을 꾸고 나무꾼은 땔나무 꿈을 꾸며 굶주린 이는 밥 먹는 꿈을 꾸고 부자는 재물을 얻는 꿈을 꾸고 귀한 이는 좋은 수레를 타는 꿈을 꾸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는 고향집에 돌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이 모두가 즐거움을 탐하는 것이지만 끝내 걱정에서 떠나지 못한다. 오직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로운 사람만이 꿈 또한 심신일여(心身一如, 몸과 마음은 하나)해서 정(情)에 따른 욕심도 없고 마음이 육체에 지배 받지도(形役) 않으니 담백하고도 여유롭고(悠悠) 아득하고도 평탄하다(蕩蕩). 기(氣)가 오르고 정신이 행해져 맡겨진 대로 자연스러운 대로 하니 이것이 어찌 인간세상 속에 첫 번째 쾌락(一快樂)이 아니겠는가?”
(2) 아! 죽음은 천년의 잠이요,(死千年之寐) 잠은 하루의 죽음이다.(寐一日之死)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로서 미루어본다면 백년 인생이라는 것은 오십년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잠잘 수 있으면서 자지 않는다면 50년을 사는 사람이 100년을 갑작스레 얻은 것이니 이 이치가 있는데 잠자는 걸 어찌 하겠는가(何爲哉)? 이것은 해당(海堂) 거사(居士)의 말인데, 이생(李生)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서글퍼져 배우길 게을리 않았고 세월이 빨리 갈까 겁을 내고 학업이 무너질까 두려워하였다. 낮에는 촌음을 아끼고 밤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잠자려 하지 않아 장수를 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실함과 독실함은 공경할만 하더라도 또한 미혹스럽다.
옛날에 황제(黃帝)가 잠을 자니 현명한 임금이 일어났고 은(殷)나라 고종(殷宗寐)이 자니 좋은 신하(傅說)를 얻었으며, 촉한의 제갈공명(孔明)이 자고 나와선 충신이 되었고 원량(元亮)은 자고 은거하고선 절개 있는 선비(節士)가 되었다. 잠듦이 장주(莊周)와 같으면 나비로 변하고 잠듦이 희이(希夷)와 같으면 신선이 되며 또 잠듦이 강엄(江淹)과 이백(李白)과 왕순(王珣)의 무리와 같다면 문장이 날로 나아진다.
(3) 이로부터 그걸 본다면 잠이 어찌 배움을 져버리는 것이겠는가? 허벅지를 찌르고 알을 삼키며 기름을 태우고 경침(警枕, 나무 베개)을 베며 밤이 다하도록 자지 않는 경우에 이르면 이것은 생명을 상하게 하는 큰 병이니 배움에 장차 무엇이 유익하리오? 또 시간이 한밤인데 사방이 고요한 듯하여 들리고 보이는 것이라곤 등불의 빛남과 닭 울음에 불과하다. 그대는 여기에서 부처가 아니면 귀신이니 누가 알아 아껴주리오? 이런 삶은 즐겁기에 부족하다. 나 한 사람이 잠들지 않음으로 나이를 더하는 방법이 있다면 천 명이나 만 명이 또한 장차 잠들지 않는 방법으로 100가지 계책을 내놓으리라. 그러하다면(然則) 쉬는 이나 길을 떠난 이나 명성과 이익을 따르는 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이 가운데, 50년을 사는 사람은 100년의 근심을 가지고 100년을 사는 이는 천 년의 근심을 가지니 이런 장수함 또한 즐겁기에 부족하다.
(4) 앞서(曩) 말한 천하의 즐거움은 장차 잠이 아닌가?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한가로운 것이 또한 잠이 아닌가? 죽은 이는 반드시 꿈꾸지 않으니, 이게 지인(至人, 통달한 사람眞人)의 잠이로다. 저 고고한 소보(巢父)와 허유(許由)가 잠과는 조금도 관계없이 산에서 은거했고 장저(長沮)와 걸익(桀溺)도 잠과는 조금도 관계없이 밭을 갈았으며 기리계(綺里季)와 녹리(甪里) 선생도 잠에는 조금도 관계없이 바둑을 뒀으니 또한 모두 살기를 좋아하고 목숨을 연장한 이들이다! 나는 장차 ‘잠자는 것을 꿈꾸는 무리들(睡鄕之徒)’과 돌아가서 즐기겠다.
[吾知天下之樂 惟身逸而心閒者耳 故以巢 由視之 堯 舜勞矣 以沮 溺視之 夫子厄矣 以綺 甪視之 秦 楚㥘矣 以萬古之聖 百世之雄 猶有遜於匹夫者何 此憂而彼樂也 人於世 與憂俱生 生有其年 則無憂而死者幾希 死而後無憂焉 吾於寐 又知之 夫一日之內 或悲或喜 或啼或笑 或驚或懼之事 寐便休矣 然非至人 則方其寐也 因想生夢 漁者夢魚 樵者夢蕉 飢夢飯 富夢財 貴夢車 羇人遷客之夢家鄕者 皆艶其樂 而終不離於憂也 惟身逸心閒者 夢亦如身心焉 無情慾無形役 泊焉悠悠 漠乎蕩蕩 氣昇神行 任之而已 自然而已 此豈非人界中一快樂哉
噫 死千年之寐也 寐一日之死也 以此推之 百年之人 亦不過五十之生人 可以寐而不寐 則以五十之人 橫得百年也 有是理而寐何爲哉 此海堂居士語也 李生聞甚怵然 乃就學不懈 懼年月之往邁 恐志業之頹墮 晝惜分陰 而夜之刻亦如焉 欲以不寐爲壽 其誠篤可敬 然亦惑矣 昔黃帝寐而作治君 殷宗寐而得良弼 孔明之寐 出而爲忠臣 元亮之寐 處而爲節士 寐如莊周則化 寐如希夷則仙 又寐如江淹 李白 王珣之倫 則文章日進
由是觀之 寐何負於學哉 至若刺股而呑丸 焚膏而警枕 窮宵而不寐 是傷生之大病也 學將何有 且時夜將半 四境閴若 所聞見者 燈之光鷄之鳴而止 子於是非佛則鬼 其誰知而愛之 此生不足樂也 我一人能不寐 有增年之道 則千人萬人 亦將以不寐之方 百計出矣 然則其居息者 其行路者 其名利者 其產業者 五十之人 有百歲之憂 百之人 有千歲之憂矣 此長生又不足樂也
曩所謂天下之樂 將非寐乎 身逸心閒者 亦非寐乎 死者必無夢 其至人之寐乎 彼巢由之不於寐而山 沮溺之不於寐而耕 綺甪之不於寐而棊者 亦皆其好生而延壽者耶 吾將與睡鄕之徒 歸而樂歟]
[주1] 시도(詩道) : 시(詩)의 도(道). 시를 짓는 올바른 이치 혹은 방법
[주2] 갈수한(渴睡漢) : 잠에 목마른 사나이. 실컷 잠잘 수 있기를 바라는 사나이
[주3] 소(巢)와 유(由) : 요임금 때의 고고한 선비들 소보(巢父)와 허유(許由), 소부는 속세를 떠나 나무 위에 살았기에 소부라 하며 요임금이 천하를 맡기려 해도 받지 않았다. 허유는 요임금이 천하를 물려준다하자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주4]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 성군(聖君), 덕(德)으로 천하를 다스리던 태평(太平)한 시대의 임금. 치세(治世)의 모범으로 삼는다.
[주5] 저(沮)와 익(溺): 춘추시대 초나라의 은자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말한다. 공자 외전 미자(微子)편에 밭갈이 하는 은자(隱者)들이다.
[주6] 기(綺)와 녹(甪) : 전국시대 진(秦)나라 말년에 전란(戰亂)을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은거한 사호(四皓,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중의 기리계와 녹리 선생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뒤에 모두 한 혜제(漢惠帝)의 스승이 되었다.
[주7] 형역(形役) : ‘마음이 육체(肉體)의 부리는 바가 된다.’는 뜻으로, ‘정신(精神)이 물질(物質)의 지배(支配)를 받음.’을 이름.
[주8] 원량(元亮) :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眀)의 또 다른 자가 원량(元亮)이다.
[주9] 장주(莊周) :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의 본 이름. 장주지몽(莊周之夢)이 유명하다.
[주10] 은나라 고종(殷宗寐) : 고종(高宗)이 성인(聖人)을 얻는 꿈을 꾸고서 초상화로 그린 뒤 인재 부열(傅說)을 부암(傅巖)에서 찾아내어 재상에 임명하였다.
[주11] 희이(希夷) : 진단(陳摶). 오대(五代)와 송(宋) 초기의 저명한 도교 학자이자 은사(隱士)로서 자는 도남(圖南), 호는 부요자(扶搖子), 사호(賜號)는 희이선생(希夷先生).
[주12] 강엄(江淹) : 중국 남조(南朝) 시대의 문인(文人). 자(字)는 문통(文通). 저술에 ≪강문통집(江文通集)≫이 있음.
[주13] 이백(李白)과 왕순(王珣) : 이백은 당나라 시선(詩仙). 자(字)는 태백(太白), 호(號)는 청련(靑蓮), 취선옹(醉仙翁). 두보(杜甫)와 더불어 시의 양대 산맥을 이룸. 왕순은 동진시대 호방한 필체로 유명한 문장가로 백원첩(伯遠帖)이 전한다.
[주14] 수향지도(睡鄕之徒) : 잠자는 것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어두울 때 쉬어야(잠)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