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인류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선각자가 많이 있다. 물론 다양하게 그가 추구한 길은 달랐을지라도 인간의 고유한 가치인 탁월한 창의성을 발휘하여 인간의 지성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과학의 탐구로 전혀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아인슈타인」과 직접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오펜하이머」의 몇 가지 숨은 에피소드를 살펴보았다.
지난 2015년에 미국에 갔다가 당시 유치원에 다니는 외손이 태양계(Solar System)에 관심을 갖고 책과 동영상, 우주 비행선, 장난감과 그림그리기 등을 취미로 하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말을 배우면서 TV대신 과학 동영상을 시청시키다보니 친구들이 같은 취미를 붙이게 되고, 선생님의 배려로 교실에도 우주와 관련한 자료들이 부착되어 구경하기도 하였다. 이 때 적어도 현대인으로서 우주의 기본지식을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귀국하여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구조』, 『시간의 탄생과 연대기』, 『블랙홀과 시간 여행』, 『빛의 물리학』, 『양자공부』 등과 「아인슈타인」·「페르미」·「스티븐 호킹」·「파인먼」과 「오펜하이머」 평전을 두루 읽어 보았다. 「아인슈타인」 평전은 2004년도 판으로 중고서점을 뒤져 구하였다. 물론 개략적인 이해에 불과했지만 우주의 신비에 대한 의문해소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당시 고려대학교 「이 종필」 교수의 ‘중력장 방정식’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는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이 있다. 전자는 등속으로 운동하는 좌표계들 사이의 물리적 관계를 다룬 이론이고 후자는 ‘중력이론’이다. 이 ‘중력이론’을 나타내는 ‘장 방정식’ 하나에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당히 어려운 과정이라 나름 고생을 하였다. 강의 이해에 바탕이 되는 기본수학은 회사 내의 수학의 고수에게 배웠다. 과정을 마친 수료증에 남다른 보람을 느꼈는데 이미 10년 전의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라고 부른다. 그가 남긴 업적은 20세기가 형성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부동의 ‘절대 시, 공간’의 「뉴턴」의 이론을 뛰어 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은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또한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나오는 유명한 E=mc²라는 공식이 있다. 이는 질량을 가진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훗날에 원자폭탄 개발의 기폭제가 되어 인류 문명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처럼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기도 드문 일이다. 연구에 몰두하는 바쁜 중에도 여러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무엇보다 자신의 자녀에게는 소홀했으나 주위의 낯선 아이들에게는 사랑의 정을 주었다. 특히,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핵무기의 개발에 단초를 주었으면서도 이 무기의 확산과 전쟁에 반대하는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침실에서 급히 욕실로 가다가 넘어져 병원에서 복부 대동맥 파열로 사망하였다. 유언장에 화장을 한 후 유골을 바람에 날려 보내라고 하여 『델라웨어 강』에 뿌렸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의 천재성을 밝혀 낼 단서가 되기를 바라며, 의학연구를 위해 보존해 두었다. 부검을 맡은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가 화장 전에 적출하여 자기 집 지하실에 보관했다. 나중에 이중 일부가 중국, 독일, 일본 등의 연구자들에게 보내졌다. 그 중 한 해부학교수가 좌측 뇌는 수학과 언어를 다루는데 「아인슈타인」의 좌측 뇌에서 ‘뉴런’을 지탱하고 보호하는 ‘글리아 세포’가 평균보다 많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뇌의 크기는 지능과는 전혀 별개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비」는 1996년에 남은 뇌를 당초 부검을 했던 프린스턴 병원에 기증하였다.
그런데 부검 당시에 안과의사인 「헨리 에이브럼스」가 「아인슈타인」의 두 눈을 적출하여 보관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그는 존경심의 발로에서 두 눈을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두 눈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다.
2만 달러와 집, 가재도구는 딸인 「마르고트」에게 물려주었다. 평생 동안의 비서였던 「헬렌 두카스」에게는 2만 달러와 옷가지와 개인 사물을 물려주고, 두 아들에게도 2만 5천 달러를 남겼다. 애용하던 바이올린은 손자에게 돌아갔다. 「두카스」는 「아인슈타인」의 친구들에게 기념이 될 만한 물건들(파이프와 책)을 나누어 주었다.
큰 아들인 「한스 알베르트」는 캘리포니아공대의 토목 공학교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둘째인 「에두아르트」는 20년 동안 입원해 있던 스위스의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후손 중 물리학자가 된 사람은 없었다. 「마르고트」와 「헬렌 두카스」는 함께 거주하면서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쓰는 작가들을 도와주고, 각 종 기록물을 수집, 보관하였다.
천문학자인 「노리스 러셀(1877~1957)」은 『불확정성 원리』(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는 원리)를 ‘인간의 측량 한계원리’로 바꿔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은 ‘신은 노회하지만 심술궂지는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은 ‘자연의 법칙은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는 의미이다. 즉 ‘자연이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고하기 때문이지 무슨 술책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 숨겨진 신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신념으로 그는 ‘양자역학’에 대한 회의를 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차이는 『양자물리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물리학』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밝힐 수 있는가에 계속 부정적이었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끝까지 「보어」의 이론을 지지하는 편에 섰다.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의 사후에 추모 글을 썼다.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소박하고 친절하며, 따뜻한 유머를 구사하는 허례허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 원리』(원자를 구성하는 양성자나 전자와 같은 입자는 파동과 입자와 같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성질을 가지지만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과 관계된 현상을 완전히 기술해 내는 데에는 두 가지 성질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를 추종했던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의 통합 프로그램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폄하하였다. 25년간 프린스턴대학의 고등연구소가 「아인슈타인」의 연구비를 댔지만 연구 결과가 없다고도 하였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특별한 강의를 맞지 않았으며 체계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이 모든 눈부신 발전과 업적들은 공동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지식계를 이끄는 특정한 인물이 항상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공통적으로 탁월한 소통기술을 보유하였다.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은 자신의 물리학 업적을 일반 과학자나 대중들과 소통하여 시대의 우상이 되었다. 이들은 각각 『상대성 이론』과 『양자물리학』에 대한 자신들만의 기발한 접근법과 수학적 통찰력을 통해 과학계에 기여했다. 특히 이들은 익살꾼의 기질을 다분히 가지고 있어서 인간적인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고, 이는 더욱 대중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과학계에 그만한 기여를 하거나 내세울만한 성과물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도록 구심점이 되어 관리자로서 특별한 능력과 통솔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태도는 핵무기 개발의 산실인 『로스앨러모스』에서 공동체와 협동적 삶에 갖은 노력으로 성공했다. 이후 『프린스턴대학의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지식 기반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 엄청난 힘과 노력을 바쳐 역시 시대의 우상이 되었다.
이들은 유태인에 속했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통합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평생을 ‘전자기장’과 ‘중력’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여 ‘중력장 방정식’을 통해 해결하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실증주의자였으며, 「보어」의 『양자물리학』을 익힌 「오펜하이머」는 이런 통합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이 정통 ‘시오니즘’에 심취하여 이스라엘에 『히브리 대학』을 설립하고, 미국에는 『브랜다이스 대학』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스라엘의 대통령으로 권고를 뿌리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다소 유대인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미국에 헌신하는 애국심을 우선적으로 발휘하였다. 그를 괴롭힌 「매카시」 열풍에 의거 공직에서 강제로 물러나 개인의 고통을 감수하면 서도 다른 분야에서 미국의 이익에 기여하였다. 젊은 시절에 힌두교 경전인 『기타』에 심취하여 ‘의무, 운명, 신념’이라는 힌두교의 세 가지 사상에 심취하였다. 원폭실험에 성공한 후 “나는 죽음이 되었고, 온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말한 것은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 이었다.
공통적으로 이 둘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세계정부의 수립과 평화유지를 위한 각국 간의 협력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위대한 인물일수록 하나같이 어린 시절에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이 수반되었다. 무엇보다 각종 ‘고전 교육’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배양하는 역할에 충실하였다. 아울러 자녀들에게 종교의 믿음과 음악 혹은 스포츠에 몰두하게 하여 일종의 여가시간을 즐기면서 긴장을 풀도록 유도하였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교육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아 참고할 일이다.
덧붙여 남은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어떤 기념선물을 남길 것인가도 생각해둘 일이다. 동시에 우리사회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의사를 선호하여 순수과학자가 되길 꺼린다면 나라의 미래가 밝지 못함은 불문가지의 진실이다.
(2024.1.10.작성/4.3.발표)
※다소 난해하고 딱딱하지만 참고하시고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