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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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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의 이야기들.'
6. 25 한국전쟁에서 국난극복으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맥아더 장군 *트루만 대통령 *덜레스 장관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75세 맥아더는 70세였다. 조선왕조 500 년의 임금들 평균수명이 47세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인간수명은 이미 한참 지났다.
이승만과 맥아더의 인간적 인연은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맥아더가 1915년 경 갓 소령으로 진급했을 무렵 조선독립을 외치고 주장하고 다니던 꼬레아 청년을 돕기 위해 미국의 유명인사 몇 분이 도움을 주었다.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프린스턴대학 총장(이승만 은사)을 비롯 맥아더소령의 장인도 그중의 한사람이었다. 장인의 소개로 이승만과 맥아더는 우연한 면식을 갖게 되었다.
그 후 맥아더는 승승장구하여 1932년 육군대장으로 승진, 참모총장을 5년간 수행했다.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었을까... 이승만 독립투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3년 상해 임시정부로 부터 제네바 특사 요청을 받게 된다.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의 주창으로 설립된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연맹"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리니 회의에 참석하여 한반도에 대한 일본제국의 식민지배는 부당하며 이를 전 세계에 알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미국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 재학시절 은사였으며 총장 재직 시 공관에 자주 초대되어 나라를 잃어버린 이승만의 처지를 위로하고 각별히 격려해주었다.
이들 사이가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윌슨 대통령의 영애가 결혼할 당시 동양인으로서 유일하게 초청장을 받았으며 더구나 하와이에서 초청장을 받은 유일한 인사로서 하와이 교민들 사이에서 크게 화자되기도 했다.
또한 프린스턴 졸업논문은 매우 유명한 논문으로 윌슨대통령이 미국의회 기조연설에 활용되었고 오늘날 모교인 프린스턴대학에 영구 보존되어있다.
대한민국 백성은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행운을 누린 셈이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장에는 일본제국의 반대로 직접 참석은 못하게 되었으나 당시 유명한 유럽의 언론신문사들을 모아 언론 인터뷰를 실시해 회의장에 직접 착석한 것보다 더 큰 반응을 일으켰고 일본제국은 마침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체포 현상금은 천정부지였다. 이후 이승만의 한반도 접근은 더욱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제연맹 회의참석차 제네바를 방문한 덕분에 평생의 반려 파란 눈의 오스트리아 처녀 프란체스카를 만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상해임시정부를 망명정부로 인정받기 위하여 미국 국무부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동양인으로써 와싱톤 대학 학사, 하버드 대학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는 이승만이 유일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장점도 많지만 미국처럼 인종차별 학벌차별 빈부차별이 보이지 않게 크게 작용하는 역설적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하이 쏘사이어티 속에서는 결혼조차도 아는 가문끼리 서로 가려서 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급스럽고 품위 있는 영어 실력 (한성감옥에서 사형무기수로 5년간 복역할 때 그의 미국인 배재학당 은사들 그리고 의사, 간호사들이 차입해준 미국 감리교단의 유명책자와 국제정치관련 논문문집을 아예 통째로 외웠던 덕분에 이승만이 구사했던 영어실력은 당대의 최고 수준이었다.)
6.25전쟁 당시에도 맥아더장군을 비롯해 모든 참전 고위 장성들도 이승만대통령이?구사했던 영어 실력에는 주눅이 들었다고 한다.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을 이승만이 한성감옥 투옥시절에 집필했다는 사실이다. 이 기간 동안에 유명한 "독립정신"이라는 책도 집필하여 오늘날에도 읽혀지고 놀라워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장형인 양녕대군의 26대 손(孫)이요 출중한 어학실력 등을 근거로 민영환 대신의 천거에 의해 1904년 말에 사면되어 미국 "데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26대) 밀사로 미국에 들어와 밀사협상은 실패하였으나 새로운 세계정세에 대한 목마름은 이승만을 동부지역의 명문 중에 명문 "아이비리그" 3개 대학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두루 섭렵하게 하였다.
한성감옥에 투옥기간 중에 세계적인 석학과 시대적 국제정세현황을 게재한 기사내용을 통째로 암기했던 실력이 크게 효력을 주었다고 전한다.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하늘의 섭리가 아니고는 도저히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루어 낼 수없는 것들이었다. 배재학당 창립자의 도움과 YMCA 그리고 미국의 감리교재단에서는 아예 조선의 파송 목회자로 점찍어 두어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에피소드 2]
잠시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193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미국의 국무성에는 대통령 "프팽크린 루즈벨트"(32대)의 법률 자문역, 하바드의 법률 천재로 불리우는 "히스"( 후일 오늘날의 U.N 기구를 입안 창설하는데 주역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라는 사나이가 극동아시아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내심 기뻐했다. 아이비리그 하버드와 프린스턴대학의 동문 후배라는 학벌이력을 내세워 조선독립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히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50년대 매카시 선풍(반공산주의 운동)시에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리차드 닉슨"의(후일 대통령이 됨) 고발에 의해 소련 "스타린"의 일급 첩자로 밝혀진 사람이었다.
히스는 실력이 워낙 출중하여 얄타회담을 비롯, 각종 주요 연합군 수뇌 비밀회담시 마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대신해 상당히 세밀한 잔무까지 처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의 앞날의 운명이 "스탈린"의 일급 첩자였던 "히스"라는 사회주의에 심취된 사람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히스는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한반도 조선독립에 공산주의 소련의 스탈린이 개입할 것을 염려해 당시 미국 내 유력인사들에게 일본제국의의 군국주의 못지않게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계속 경고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참고로 후일 1941년 6월에 이승만은 일본 제국주의를 경고하는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저술하여 출간하였다.
[에피소드 3]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의 예언이 적중했다. "일본 내막기" 출간 후 꼭 6개월 후의 일이었다. 유명한 책 한권으로 하룻밤 사이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셈이었다.
"대지"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여사도 극찬을 헀을 뿐 아니라, 당시 항일전을 펼치고 있었던 중국의 국부군을 이끌고 있었던 장개석 장군도 크게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런 연고로 1945년 8월15일 일본식민지로 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의 이승만을 더욱 신뢰하였고 6.25전쟁 후에는 대만 총통으로서 진해에 있는 이승만대통령의 별장도 방문하였고 회담도 하였다.
(당시 해군사관생도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오늘날에도 잘 계시 보존되어 있다. 또 다른 이승만과 장개석 총통 사이에 신뢰와 믿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에피소드 4]
1920년 당시 중국 상해에서 비밀리에 조선독립 추진을 위한 임시정부수립이 있었다.
임시정부 수반으로서는 하와이에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승만을 필두로?소련파 공산주의자인 이동휘 그리고 오늘의 국회의장 격에 손정도 목사 / 해군을 창설한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의 선친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국내외 독립 운동가 다수가 참여하였다.
이때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조직을 보호하는 오늘날의 경호실장에 가름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조직은 태생적으로 분란이 일어 날 수밖에 없었다. 조직 내의 80% 이상이 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추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에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도 이때와 무관하지 않는다.?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혐오했던 이승만은 크게 실망하였다. 결국 상해에 정착하지 못하고 하와이로 돌아온 이승만은 이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된다.
이때 와해된 상해임시 정부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돌보아 준 중국 국부군의 총수 장개석 총통의 도움이 컸다. 장개석은 작은 나라이지만 안중근과 윤봉길, 이봉창 같은 독립투사를 가진 조선을 매우 부러워했으며
중국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누차 말하여 왔다. 그로부터 장개석은 독립군 조직을 항일투쟁세력으로 생각하고 김구가 1945년 8.15 이후 귀국할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
[에피소드 5]
상해로 부터 충칭까지 일본군에 의해 쫓겨 도망 다닐 때 마다 모든 뒤를 돌보아 준 사람이 바로 장개석 총통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의식주는 물론 은신처와 김구의 가사 돌봄이 까지,
그리고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독립군의 봉급까지도 지급해 주었다.?당시에 도움을 받았던 회계장부가 존재 보관되고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은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장개석의 대만을 쉽게 버리고 공산사회주의 모택동을 실리를 위해 명분상 선택했다는 비정한 국제 냉엄주의를 느낄 뿐이다.?이와 같이 장개석과 깊은 내연을 갖고 있는 터라 1945. 8월 15일 부터 1948. 8월15일 대한민국이 새로이 건국될 때까지인
"해방정국" 시기에 한반도는 이념적 사상대립은 물론 미-소간의 냉전체제의 태동으로 국내정치가 매우 혼란하였고 남한 내에서는 김구를 비롯 김규식 등 "민족"이라는 기치아래 남한만이라도 우선 건국하려했던 이승만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장개석은 김구에게 밀사(유어만)를 보내 이승만과 뜻을 같이 하도록 권고하였으나 김구는 끝내 거절하였다. 결국 각자 운명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김구가 좀 더 국제정세를 알았더라면, 아니 긴 안목을 가졌더라면...,
못내 섭섭했을 장개석의 밀서는 영어로 작성되었으며 이승만대통령의 유품으로 오늘날 이화장에 보관되어있다.
[에피소드 6]
대서양 헌장에 이어서 카이로 선언에서 중국대표 장개석과 영부인 송미령 여사 (남편의 통역담당)는 장개석은 대한민국을 반드시 독립시켜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했으며 미국의 명문대를 유학한 송미령 여사에 의해 통역되어지고 강조되었다.
이때 상대 수뇌들은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그리고 철혈의 사나이 스탈린이었다.?후에 대한민국은 장개석과 송미령의 이런 은혜에 보답보다는 중공과 수교하면서 외교 단절이라는 배신을 안겨주었다.
앞에서 언급된 "히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별 법률자문역으로 한반도 통일과 일본의 북방영토 문제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한반도 분단과 오늘날 러-일 북방영토 분쟁문제는 카이로선언 및 얄타회담 이전에 이미 소련 외상 몰로토프와 루즈벨트의 보좌관 히스와의 내통으로 운명적 갈림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일본제국과의 태평양전쟁과 유럽의 독일 히틀러와 치루고 있는 두 곳의 전쟁은 미국으로서는 매우 힘든 전쟁이었다. 더구나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된 일본군의 잔혹성은 서양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태평양전쟁은 조기에 마무리하고 싶었다. 일본의 군사력을 만주로 유인 소련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자금과 군수물자지원 협상 그리고 필요하다면 부동항(不凍港) 확보를 위한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문제,
그리고 소련의 자존심이 걸린 일-러 전쟁 패배로 빼앗긴 북방도서의 탈환 등, 미국으로서 별것이 아니었지만 일본과 한국에는 매우 중요한 운명적 열쇄를 얄타회담 이전에 "몰로토프-히스" 라인을 통해 접수되고 말았다.
스타린은 그야말로 꽃놀이패를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1990년 소련이 붕괴 해체된 후 비밀문서가 공개됨으로 만천하에 밝혀졌다. 미국 최대의 간첩 "히스"는 이미 나이가 아흔이 넘은 고령으로 다음 해에 숨을 거두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승만은 서둘러 귀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요로를 통해 알고 보니 국무부 극동담당 "히스"가 길을 막아 선 것이다.
이승만은 1941년 6월에 유명한 태평양전쟁 예언서 "Japan Inside" (일본 내막기) 를 진주만 기습 6 개월 전에 발간하여 미국은 물론 유럽 영국 국방성에서도 이 책자를 구하려는 소동이 일어났었다.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히스"의 요주의 감시 인물로 표적되었고 815 광복 후 조국으로의 귀향은 철저하게 차단되어졌다. 타고 갈 비행기 값도 없었다. 이때는 이미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도 곁에 있었다.
맥아더에게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이자 일본 전역을 관할하는 군정관으로 국무부에 즉각 해제를 풀고 비자 발급은 물론 그가 즐겨 애용하는 군용수송기 바탄(Battan) 호를 내어 주었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조정하게 될 이승만의 인물됨을 보아 1945년 9월부터 남한지역 군정장관 임무를 수행중인 하지 장군을 도쿄까지 불러내 맥아더와 함께 하네다 공항에서 영접하는 등 최고의 예우를 갖추어 주었다.
2024.06.05.
🤲 박 의 재 모셔온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