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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
(The Good and Beautiful Community)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
► 들어가는 말: 날마다 삶 속에서 사랑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법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5)
-마음, 실천, 은혜
우리는 가장 헌신적인 섬김과 희생을 실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의 정신으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은 자칫하면 과시하려고 하거나 자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이 땅에 살아 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그 영광을 가로챌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개인의 경건생활(기도생활, 성경읽기,…) 또한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으려는 목적으로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행위나, 금식과 구제 자체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런 것들을 실천하는 태도에 대해 꾸짖으시는 것이다. (마6:5) 즉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인 것이다.
은혜(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신뢰와 확신)을 통해 경험하게 되며,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요일4:10)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의 시작이다. 그 사랑은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모습으로 다시 표현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엡2:8-10). 행함과 믿음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며, 그런 까닭에 행함은 믿음이 있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약2:14-17)
-개인의 경건과 사회참여
믿음에는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이 있Viewer다. 죽은 믿음은 개인주의적 경건이나 교리적 통설 같은 것인데, 물론 개인의 실천이나 신조에도 믿음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죽은 믿음으로,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마치 바깥으로 아무것도 흘러 보내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는 사해(dead sea)와 같다.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갈5:6). 산 믿음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확신과 신뢰가 서로의 관계와 만남 속에서 사랑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흔한 실수(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는 실수와 개인의 믿음에만 집중하는 실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는 실수는 사회 참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들은 개인의 경건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인의 경건 훈련 없는 사회 참여는 쉽게 자기 의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무감각해지기 쉽고, 때로는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실천가들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친절을 강요하기도 한다.
또한 개인의 믿음에만 집중하는 실수는 개인의 경건이나 믿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은 사회 참여나 사회 정의에 지속적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참여 없는 개인의 경건 훈련 또한 스스로를 너무 의롭게 여기고, 무감각해지며, 영적 침체로 이끌기도 하여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둔감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양 극단에 치우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는 같다. 그들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특성은 마치 이혼한 부부처럼 서로 완벽하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이 두 덕목을 결혼시키려고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묵상과 실천, 경건과 자비, 개인의 경건과 사회 참여 사이의 행복한 결혼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경건의 훈련과 자비의 실천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요한 웨슬레
-진정한 사회 운동가
“진정한 사회 운동가는 지극히 평범한 관계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달라스 윌라드
윌라드는 사회 운동은 ‘행함’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섬기는 일, 시위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일 등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마음이나 성품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모든 관계와 모든 행동이 우리의 제자도에서 흘러 나와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여기저기에서 선행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제자도는 직장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두려움이나 욕심에 지배 받지 않는다는Viewer 사실은 개인이 속한 가정이나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행위에서 마음으로, 외면에서 내면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사회 참여의 실천을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일이나 단기 선교를 가는 것처럼 어딘가를 방문하는 일쯤으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김의 영역에서 더 많은 나눔을 실천했다고 느낀다. 물론 그러한 일들도 선하기는 하지만 만일 사람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친절한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파트타임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가끔 진리를 말하거나, 가끔 희생적인 삶을 살고, 어쩌다 한번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끊임없이 접속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 내면속에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머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거하는 사람
제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정체성과 지위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는 내면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이며, 이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란 우리의 행위가 어떠하건 상관없이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우리의 정체성은 행동을 결정하게 한다. 우리는 행동이 정체성을 결정하는 거꾸로 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고정되어 있다. (골3:1-2)
“엄청나고 절대로 복제될 수 없는 은혜의 이야기” –유진 피터슨
우리는 그리스도가 내면에 거하는 사람인 동시에, 엄청난 은혜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특별하며,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능력과 동일한 능력으로 힘입은 존재라는 것이다.(롬6:3-4, 빌4:13, 요일4:4)
예수님과 그분의 가치관을 거절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Viewer 핵심이다. 비록 타락하고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보호와 능력과 공급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살고 있는가를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고, 축복하며, 나누며, 용기를 주고, 격려하며, 연합하고, 인내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그 일들을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친히 보여주신 모범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능력 덕분에 우리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그분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분이 공급하시는 능력에 힘입어서 말이다.
토니 캠폴로는 왜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준 적이 있다. 그는 매일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갈2:20, 골1:27)
“내 안에 거하시며 나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깨닫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해준다. 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만일 이러한 바탕이 없었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동정에 불과하며, 아무도 이러한 동정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나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내가 하는 일들을 하는 이유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할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에게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 조직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가정이라는 곳은 사실은 제일 힘든 장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조직이 갖는 관계의 깊이와 무게가 크기 때문이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로 직장이다. 이 직장에서의 생활이야말로 우리의 제자도를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다. 또 다른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는 클럽이나 모임,... 이러한 공공 장소들 에서는 우리의 행동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마구 섞이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행동거지가 매우 중요하다.
-충동이냐 연결이냐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의 성공 여부는 우리의 내면 상태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또 친히 예수님께서 드러내셨던 바로 ‘그’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은 최상을 향해 변화하기 시작한다. 만일 위선, 분노, 염려와 같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씨름에 진전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 또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삶이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된다. 때로는 사랑함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실제 용서를 통해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섬김을 통해 섬기는 방법을 배운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의 핵심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내면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마7:16-20)
우리가 날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맺는 관계Viewer가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시는 영역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나는 특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우리는 특별할 뿐 아니라 독특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은 영원하고 강력한 하나님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으며, 미래지향적이고, 다양함 가운데 하나됨을 소원하고, 용서하기 어려울 때 용서하며, 기준을 높게 잡으며, 너그러운 삶을 살며,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기를 갈망하며,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를 갈망할 수 있게 하는 … 내 삶의 뿌리가 바로 내게 이러한 힘을 공급해 주는 안전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주며,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의 소유인지, 또한 그러한 사실들이 내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기억하도록 격려해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 책은 우리 주변의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되는 방법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왜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지, 왜 그것이 어려운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영역들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과 오해와 편견들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이전에 갖고 있던 잘못된 생각들을 바로잡고, 새롭게 배운 바른 생각들이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다스리도록 돕는 영혼의 훈련법들을 제시할 것이다.
Chapter 1 하나님의 공동체는 독특하다
-기독교인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항상 진실만을 말하고, 화내지 않고 살며, 자신을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도덕적 덕목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도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는 Viewer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과 뭔가 다른 독특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선생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며, 우리의 능력과 위로가 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강력하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인들과 비 기독교인들의 차이는 국적의 문제도 아니고, 언어나 문화의 차이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자신들만의 도시를 건설해서 그곳에서 따로 사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자신들만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주 괴팍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곳의 생활 방식을 따르고 그들의 문화와 습관들을 지키며 산다. 그런데도 그들의 공동체는 아주 주목할 만하고 놀라운 특성들을 보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자신의 나라인 고향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그네처럼 행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운명이지만, 육신을 좇아 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도 시민권은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주어진 법을 준수하지만, 법을 초월하는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을 핍박한다. 그들은 종종 오해를 받으며, 정죄를 당한다. 하지만 그러한 죽음과도 같은 고난 때문에 삶에 더욱 활력이 넘쳐난다. 자신들은 가난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부요케 하며, 부족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에 풍성함을 누릴 줄 안다. 자신들을 향한 저주를 축복으로 갚으며, 핍박을 친절로 되갚는다. 선행을 베풀었는데도 악인으로 몰려 채찍질을 당한다”
이 글은 ‘디어게네투스에게 쓴편지’라는 초대 교회의 문서인데, 이 문서를 통하여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같은지, 또한 어떤 면에서 독특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어떤 목적 없이 선행을 베푸는 것은 독특한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음에도 기독교는 겨우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번성했다.
-하나님은 독특하시다.
기독교인들이 왜 독특한 것일까? (아니 왜 독특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독특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Viewer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7-12)
원리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그분의 백성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독특한 사람이 참 많이 있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기노아의 캐서린(Catherine of Genoa, 1447-1510),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8c 미국에 살았던 퀘이커 교도들, 쉐인 클레이본(Shane Claiborne), …
이들 모두의 그 독특함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세상의 방법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부적응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난 우리가 어떤 면에서 세상의 부적응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불의, 욕심, 물질 만능주의, 인종 차별과 같은 것들에 타협하지 않는 부적응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선, 즉 독특한 하나님처럼 살아가고,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받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이곳이 아닌 또 다른 세상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성령님의 이끄심을 의지하라
나는 퀘이커의 지도자였던 조지 폭스(George Fox, 17c 영국에서 비롯된 기독교 운동의 한 줄기인 퀘이커의 창시자)와 윌리엄 펜(William Penn, 미국으로 건너가 퀘이커 공동체 설립, 노예제도에 맞서는 싸움을 주도함.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No Cross, No Crown의 저자)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퀘이커 교파의 지대한 공헌 중에 대표적인 두 가지는 평화(비 폭력주의)와 평등(차별 없는 사회)에 대한 가르침이다.
상류층으로써 최고의 혜택을 받았고 23살에 퀘이케 교도가 된 펜은 그 당시 상류층 신분을 나타내는 칼을 차고 다녔다. 펜은 이것에 대해 옳은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멘토인 폭스에게 찾아가서 그것에 대해 물었다. 조지 폭스는 펜에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칼을 차고 다니고 있을 때 까지는 차고 다니게, 윌리엄!” 이 조지 폭스의 대답은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중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즉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행동에 있어서, 어떤 규정이나 법칙을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폭스가 펜에게 어떻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했더라면, 펜이 성령님의 음성에 직접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되었을 것이며, 융통성 없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나중에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율법주의도 아니고 방종도 아닌 균형
우리가 우리의 부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삶에서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훈련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등의 문제들을 다룰 때, 조지 폭스의 지혜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수많은 삶의 방식에 대한 질문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성령님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현명하게 생각해야 Viewer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규칙과 규범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성령님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길 때 발견하게 되는 선함과 확신과 유쾌함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인 삶의 방식에 있어서, 질문하는 과정과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둘 다 필요하다. 우리는 게으르고 또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해 분별하는 일에 귀찮아하기 때문에 흑백 논리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면, 우리 삶 속의 다른 것들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변화는 하루 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율법주의나 방종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바로 영혼의 훈련을 연습하는 것이다.
-영혼의 훈련 : ‘둘 넷’ 훈련
1.’둘’ 훈련: 두 시간 동안을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훈련(개인적인 시간, 예배시간 포함) 방법(8가지): 홀로 보낼 수 있는 조용한 공간 찾기→숨쉬기(집중)→기도→찬양→묵상하며 성경 읽기→깊은 묵상→질문하고 듣기→일기 쓰기
2.’넷’ 훈련: 일주일에 네 개씩 선행을 베푸는 일. 친절과 넉넉한 나눔은 독특한 삶의 최고봉이다.
Chapter 2 하나님의 공동체는 소망이 넘친다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어떤 모양으로든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한 가지는 우리의 ‘삶’으로 나누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로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행동을 통해 전도도 하지만, 가끔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가 주어진다.
-모든 기독교인은 자신의 믿음을 나눈다.
아직도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그들을 만난다. 한 번도 성경을 펼쳐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에 대한 유일한 접촉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다. 도전이 되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분명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는 항상 개선의 여지가 있고 발전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믿음을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항상 잘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모두 이미 우리의 믿음을 나누고 있다. 그런 까닭에 더 잘할 수 있도록 개선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나누는 말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방법 밑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우리의 관심을 잠시 돌려보고 싶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그 Viewer이야기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더욱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갈수록, 그것은 더더욱 우리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된다.
-소망을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
“너희를 위하여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1:5) “뿌리는 미래에 내리고, 가지들은 현재에”둔 기독교 공동체. –존 D.지지울라스
“기독교인들의 미래의 소망에 대한 확고한 사실은 현재의 지속적 믿음과 큰 대가를 치르는 사랑의 강력한 동기이다”
“사명이 이끄는 교회는 그 사명이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둔 그 순수한 기독교 소망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이며, 온 우주를 주님의 사랑과 은혜, 능력과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런 종류의 사명을 정말로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 가운데 순전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N.T.라이트
믿음과 사랑은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망의 정의는 ‘좋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믿음에 대한 근거가 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하늘에 있다. 소망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며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소망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동일한 소망을 공유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묶으며, 서로를 향한 사랑이 커지게 만든다.
예수님의 에클레시아(교회, 공동체)는 미래에서 그 근본을 찾으며, 그 미래는 예수님과 그 분이 성취하신 일 때문에 밝고 확실하고 흔들림이 없다. 소망은 현재와 미래를 있는 다리이고, 소망은 믿음과 사람을 연결하는 나뭇가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힘을 내야 할 진정한 이유가 있다. 그 이야기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기뻐할 수 있다.
-소망의 네 가지 요소
기독교 이야기의 진수인 복음은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Viewer
1.죽음 :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 졌음이라”(골3:3)
내가 하나님과 살아있는 사람과 신뢰의 관계를 맺기 전에는, 자신만을 위해 살았고 이 세상의 원칙과 힘의 논리를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부르신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아닌 자신에 대해서 죽을 것을 초대하시는 것이다(눅9:23). 옛 삶의 방식, 경쟁과 허영 위에 세워진 삶의 방식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새 생명이다.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고 확실하여 안전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다.
2.부활 :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았느니라”(골2:12).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나, 새로운 자아가 생겼다. 지속적으로 새로워지는 새 사람을 입은 것이다(골3:10). 나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다. 그리스도가 거하시며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내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다시 살아난 존재로서 매일 그 능력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새로운 이야기다.
3. 승천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만주의 주로서 지금 보좌에 앉아 계신다. 예수님은 다스리고 계신다. 언젠가 모두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위에 것’에 맞추라는 의미는 우리의 소망과 능력의 원천, 즉 예수님이 마치신 일(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승리)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공통의 비전에서 하나됨을 발견한다.
월터 브르그만(Walter Brueggerman)은 승리가 우리의 새 생명처럼 우리에게서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그것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말했다. “지독한 우상 숭배에 빠진 이 시대에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가 우리에게서 감추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감추어졌다.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그 승리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약한 이웃을 향한 사랑 속에 감추어져 있고, 자비의 바보스러움에 감추어져 있으며, 잔인함과 절망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하는 용서와 넉넉함이라는 파격적인 대안 속에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억누르는 것들을 물리치셨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의 이유가 된다. 이웃들이 서로를 섬기는 모습 속에서 또한 용서하는 모습을 볼 때, 또는 친절을 베풀거나 나누는 모습 속에서Viewer 우리는 소망의 이유를 본다. 우리가 직접 그러한 일들을 실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것이다.
4.재림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로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3:4).
교회는 “그리스도가 죽으셨다, 그리스도가 살아 나셨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한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치유와 정의에 대한 궁극적인 약속이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승리로 임하실 때 모든 잘못된 것들이 바로 잡힐 것이고, 모든 고통이 그칠 것이며, 우리의 기쁨이 온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이 하나님의 모략의 최후의 완성을 기다리는 동안 그 소망이 기독교 공동체를 하나되게 한다.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게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더 큰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그 이야기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내며, 그 새로운 정체성은 새롭게 행동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며, 그때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거한다는 것이 내 행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우리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이야기가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나의 진실성과 인격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비로소 내 영혼 안에 얼마나 폭력적인 모습이 감추어져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 폭력성은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평화로운 하나님 나라」(The Peaceable Kingdom) -스탠리 하우어워스-
그가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이야기의 진실성이 우리의 부정직함과 부딪친다. 하우어워스에게는 그의 영혼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폭력성이었다면,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에게는 엘리트라는 교만이었다. 우리 각자도 모두 다른 요소를 감춰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정체성이 우리의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야지, 행동의 변화가 정체성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되다’(indicative-who we are)가 ‘하다’(imperative-how we should live)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들이 뿌리를 다른 세상에 내린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왜 그처럼 우리가 독특한 사람인가를 잘 설명해준다.
-실천 속에 담긴 소망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Viewer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0-18)
새로운 자아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 사람들이 먼저 냄새를 맡고 보고 느낀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그에 걸맞게 살아 낸다면, 우리의 폐와 입술과 온 몸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의 향기를 맡을 때, 그들은 우리의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소망 안에서 기뻐하는 공동체
사랑으로 인내하는 공동체
신실하게 기도하는 공동체
어려움에 처한 하나님의 사람들과 나누며, 친절을 베푸는 공동체❞
-우리 말 속에 담긴 소망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3:15-16)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한 개인의 사연)를 나누고, 어떻게 더 큰 예수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며, 어떻게 자신이 예수님의 이야기에 한 부분이 될 수 있었으며,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 사람 개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간증이다. 이것이 온유한 방법이다. 또한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일 때 그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타이밍이 중요하며, 인내심도 필요로 한다.
프랭크 루박(Frank Laubach)은 필리핀에 선교하러 가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전에 일년 동안을 기다렸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아주 성실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은 위에 것에 두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무슬림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도 좋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진짜 아는 사람이다.’ 그는 인내로 기다렸고 온유했다. 사람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쳐주며 돌봐 주었다. 루박은 소망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소망에서 믿음과 사랑이 흘러나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영혼의 훈련 : 믿음을 나누기(7가지)
1.기도하라(전도 대상자를 보내 달라고…) 2.관찰하라. 3.찾아가라. 4.경청하라. 5.연결하라(복음의 메시지와 그 사람의 상황을 연결) 6.나누라(복음의 메시지가 자신의 삶과 교차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설명하여 자신의 이야기 나누기) 7.초대하라
Chapter 3 하나님의 공동체는 섬긴다
매일 우리는 수천 가지의 결정을 내린다. 그 결정의 대부분은 우리 영혼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그 수많은 결정이 우리 영혼의 상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의 대답에는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세상의 사상과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대부분 자기 자존심을 지키고 개인의 행복과 자신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데 중점을 두고, 그 생각에 지배를 당한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한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어 하고, 그 공동체가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러나 그 공동체가 그 자체의 성공에만 머무르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라면 그것은 문제이다. 삶의 전부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면, 그 사람의 삶은 자아도취에 빠지며 자기중심적이며 비효율적이고 궁극적으로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일 이러한 일이 공동체에 벌어지면, 그 구성원들의 영혼은 망가지고, 그 공동체를 존재하게 했던 이유, 즉 더 큰 비전은 상실되고 공동체는 원래의 사명을 달성하기보다는 겨우 생존에 급급해져 버린다. 대개 이러한 단계를 거쳐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며, 결국에는 공동체가 소멸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을까?” 이러한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현실에 흠뻑 젖어 있으면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의 필요 중심에서 다른 사람의 필요 중심으로 바뀐다. 그것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혔을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가 확신과 안전함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의 초점이 우리 자신에서 다른 사람들로 옮겨질 수 있다.
-타인 필요 중심적인 공동체
예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생명력과 능력을 우리의 선생이 되실 뿐 아니라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님 안에서 찾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종이셨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셨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사셨다. 주님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다.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 가치 있는 최고의 삶이다. 다른 Viewer사람들의 섬김을 받고 싶어하고 받아야 하는 인생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삶이 아니라 영혼을 파괴하는 삶이다.
우리가 발견한 복된 소식에는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상태가 좋을 수밖에 없다. 위대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 안에서 허락하시지 않고 선을 이루실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우리는 안다. 우리는 안전하고 안녕하다(safe and secure).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한다.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그분의 나라에 살게 되면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진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채워주신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필요가 공급된다. 심지어는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가치 있고 소중하며, 목숨을 내놓을 만큼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 진리들을 인정할 때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로 바꿀 수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사상에 흠뻑 젖어들 때야 비로소 공동체가 타인 중심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가 은혜를 말하고, 그 은혜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라는 사실을 안다. 교회의 가치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느냐에 달려 있으며, 교회의 성공 여부는 크기가 아니라 사람들과 공동체를 어떻게 섬기느냐에 달려 있다.
내 필요가 먼저인가, 다른 사람의 필요가 먼저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과의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의 필요는 물론이고 때로는 가족들의 필요를 무시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상태를 잘 파악해야 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Viewer 기본적인 필요부터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편안하고 쉼을 경험한 후에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섬김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정작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도 가끔 문제를 일으킨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는 사람들의 의견에도 마음을 열고 듣는다면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영혼의 훈련: 우리의 보물을 소중하게 여기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루는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태도는 참 독특한 태도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럴 때 우리 가족이든지 고속도로에서 만난 사람이든지, 이들의 우리 행복의 장애 요소로 볼 것인지 또는 기회로 볼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쉬워진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고 그리스도가 그 사람을 보시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보물처럼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고 그 사람들의 필요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질것이다.
Chapter 4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제껏 수많은 파멸로 분열되어 왔다. 한 주님과 한 믿음과 한 세례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고립과 판단과 불신과 정죄 대문에 한 교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아주 슬프고 끔찍한 상황이며,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잘못된 생각 뒤에 숨겨진 두려움
우리는 동기가 순수하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행동을 제한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이기고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과 주님 앞에 모두가 무릎 꿇고 모든 입술이 주님을 고백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의 열정이 지옥을 흔든다.
두려움의 중심에는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다. 배타성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거짓 교사들이 들어오지 못Viewer하게 지켰고,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을 우리의 모임에서 몰아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안정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교리의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것은 더 깊은 문제를 가리기 위한 연막이다. 만일 모든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인종과 성별 차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의 행동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어떻게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스탠리 하어워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 나리의 특징은 사랑이라. 이 사랑은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된다.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들만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오직 내 자신과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바로 잡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로 인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우리 모두가 확실하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28:19)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모든 민족과 열방으로부터 나올 것을 아셨고, 유대교를 벗어나 뻗어 나가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인종,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교제권으로 묶으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를 통해 하나됨이 이루어진다. 삼위일체의 이름 안에서 많은 것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열방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넉넉히 공급하시는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 속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0-21)
주님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에클레시아’ 안에서의 하나됨을 기도하신 것이다. 우리의 다름이 우리를 서로 갈라 놓을 수 없다고 믿으셨다. 예수님이라는 단 하나의 근원을 통해 하나됨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내면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골3:11, 갈3:20).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 우리의 다름은 한 몸이 되는데 방해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롬12:5).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잔, 한 떡을 나눈 몸이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후13:11, 고전1:10).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본질적인 것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비본질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 본질에는 사랑을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주라” –성 어거스틴-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교회가 하나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본질과 비 본질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비본질적인 문제들이 우리의 공통적인 믿음의 본질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본질이라고 믿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비 본질적인 것이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런 것들이 우리를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고, 다를 것이다. 어떤 예배 형식을 좋아하든지, 어떤 세례의 방법을 선호하는지 기호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본질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고동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인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요소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책망하는 세 가지 분열의 이유는 인종, 성별, 계층의 차이다(골3:11, 갈3:28). ‘에클레시아’(교회)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 즉 하늘 나라에 뿌리를 둔 독특한 공동체이다. 공동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사람들은 이 세상과 분열의 양상에서 벗어나 하나됨을 이루는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설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안에 계셔서 우리의 본질적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사람들이다. 이 사실이 우리가 가진 서로 다른 점들을 뿌리째 없애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로 모였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성별, 인종, 계층적 분열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차이를 중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18세기 미국의 오순절파 성령 운동은 충격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했다. 그들은 남자들이나 여자들, 백인들과 흑인들,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모두 같은 성령을 전달하는 매개체였을 뿐이다. 평등의식은 다름을 부인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 가운데 하나됨을 발견하려고 할 때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양성 속의 일치”의 근본은 삼위일체다. 삼위의 신성은 구별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됨으로 존재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된다. 그리고 그 차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으신다.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시다. 서로가 서로 안에 존재하시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존재하신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분명하게 Viewer구별되고 하나되는 이유이다.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성별과 인종의 차이가 하찮게 여겨져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 밖에서 이러한 서로 다른 차이와 다른 요소들은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를 이끄는데 장벽이 된다. 하지만 이 분열의 요소가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환영해주고 확인해 주는 것이 된다. 다름과 차이들은 사랑 앞에서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차이를 견뎌내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도 아니고, 평등주의 역시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는 사랑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이다.
-교회를 향한 리차드 포스터의 꿈
“…지금 현재 교회는 뿔뿔이 흩어진 채로 남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처럼 분열된 상태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한번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곳의 일원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비록 아직은 희미하게 보이지만, 나는 그런 공동체를 꿈꿉니다. 나는 인디애나 주의 시골에서 온 목사와 뉴저지의 도시 목사가 함께 부둥켜안고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켄터키 주의 언덕에서 온 카톨릭 수사와 로스엔젤레스의 길거리 출신의 복음주의자가 함께 희생의 찬양을 올려드리는 모습을, 홍콩의 도시 속에서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과 상파울로의 도시에서 사역하는 오순절 계열의 설교자가 함께 영적으로 잃어버린 영혼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으로 인해 함께 우는 모습을, 남아프리카의 작은 마을 소웨트의 소작농과 수도인 프레토리아의 주인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는 모습을,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시족이, 세르비아 사람들과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몽골 사람들과 한족들이, 미국의 흑인들과 백인들이, 남미 사람들과 인디언 원주민들이 모두 함께 나누고 돌보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배운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들과, 특권층들이 소외된 계층들과,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꿈꿉니다. 나는 그런 공동체를 꿈꿉니다.”
바로 이 비전이 그와 몇몇 동역자들로 하여금 1988년에 교회를 새롭게 하는 영성 운동인 ‘레노바레’를 탄생시켰다. 비전은 강력하고 위대하다. 왜냐하면 비전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향해 꾸신 꿈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훈련: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요한 웨슬리가 제시한 5가지 방법)
1.동료 의식을 가지고 대하라
2.그 사람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거나 나쁘게 Viewer말하지 말라: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기
3.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4.선한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격려하라
5.사역에서 동역하라
(그 밖의 다른 훈련들)
1.교회의 일치됨을 위해 기도하라
2.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Chapter 5 하나님의 공동체는 서로 화목하다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알 때 치유되고 용서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과에 따라 우리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것을 확실히 아는가?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강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어떠한 죄도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용서 받았다는 깨달음을 가질 때, 그리고 우리가 강하고 안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바로서 용서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만 용서를 경험할 수 있다?
“너희는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주기도문)
여기서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실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의 용서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거나, 용서가 마치 거래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Viewer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범죄하는 한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불합리함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는 영광 속에서 우리에게 해를 입힌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모순이다. 일단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용서 받은 더 큰 이야기에 굳건히 서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시간이 걸린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의 능력과 모범을 배운다. “서로 용납하라”, “서로에게 친절 하라”고 명령한다. 용서함으로써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한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 전에 이것이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님을 먼저 인식해야만 한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다.
-용서할 때 지켜야 할 것들
용서와 화해에 대해 두 가지 원칙을 논하고자 한다. 첫째는 적당한 경계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삶 속에는 엄청난 고통과 폭력과 비극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감사함과 신실함으로 우리의 친절에 반응하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용서를 통해 사랑해야 하지만, 어떻게 언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서로의 짐을 져야 하지만, 일방적으로 우리를 이용하고 헤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지속적으로 해를 당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둘째는 용서받고 싶어하거나 용서하고 싶은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켜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용서와 화해를 가장한 공격인 것이다. 용서를 가장한 개인적인 인신공격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하기 원한다면 상대방에게 그 사실을 꼭 알릴 필요는 없다. 만일 당신의 고백으로 상대방의 행동이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화해가 아니라 책망이다. 만일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기 원한다면, 만나서 건전한 대화를 나눈다든지, 또는 서로를 축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모습은 진정한 용서의 모습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축복된 상황에 처한다면, 하나님과 자신만의 비밀로 하는 게 좋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다(벧전4:8).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에게 화목케 하신 것이다(고후5:18-19). 우리의 화해를 실천하는 첫 번째 영역은 서로서로의 관계이다. 영성은 우리가 받는 선물이고 또 주는 선물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조금 더 닮아 갈 것이다.
Chapter 6 하나님의 공동체는 격려한다
-공동체가 내 삶을 빚어간다.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편안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Viewer 새로운 생각과 성경적인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공동체가 가져야 하는 권리와 책임에 관한 올바른 생각은 이렇다. ‘공동체는 내 영혼을 인도하고 빚어가기 위해 존재한다. 공동체는 내게 특정한 행동을 기대할 권리가 있고, 내게 필요한 격려를 제공하고 상호 책임을 행사할 수 있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에클레시아’(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 영혼을 가꾸는 훈련들을 해왔다. 공동체 예배, 함께 떡을 떼는 일, 사도들의 가르침, 공동체 금식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책임을 지는 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가 교회의 목표이며 책임이었다(히10:24-25). 만일 교회가 그러한 책임을 지고 있다면, 성도들에게 어떤 행동들을 권하고 격려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갖고 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찾는 사람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제공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또한 깨지고 망가진 사람들을 받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용한다는 것이 공동체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죄에 맞서라고 요구하고 기도 생활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요구하기를 망설인다. 또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냥 불편을 감수한다. 물론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조종하거나 권력을 남용하지 않을까 하는 건강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있다. 이 염려들이 실제적이기는 하지만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들을 권면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면해 줄 수는 없다.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온전함과 경건함에 이르도록 이끌 권리도 있다.
교회의 영혼을 가꾸는 역할은 우리 영혼의 성장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전도 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Viewer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그 자리에서 구약 시대 우리 조상들의 언어를 배우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전하고, 우리의 경건한 순간들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설교와 찬양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홀로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공동체를 이룬다. 하지만 그 후에 우리는 보냄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와 서로가 연결이 되고, 하나님의 오래된 이야기에 연결이 되는 것에 감동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예배의 자리를 떠난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임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향기이기 때문에, 죽음만 알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우리는 세상과는 다르게, 이기적이지 않게, 관대하게 행동한다. 말이 아닌 삶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될 때, 알맞은 말로 우리의 소망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준비되어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역할 중에서 하나만 가질 수는 없다.
나는 내 개인의 안녕에 관심을 갖는 공동체를 원한다. 내 영적 성장과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을 위해 헌신을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동체를 원한다. 또한 변화를 위해 훈련 과제를 담대하게 제시하며 헌신을 지키기 위해 상호 책임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공동체를 원한다. 나는 내게 그리스도가 거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 세상의 빛과 소금, 죽어가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것을 도전해 주는 공동체를 원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나게 해주는 공동체, 내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편안함 뿐만 아니라 때로는 책망하며 경고해 줄 수 있는 사랑으로 돌봐주는 공동체를 원한다.
율법적이거나 정죄하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던 상관없이 용서하시고 화목케 해주시는 그분의 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격려와 책망을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우리가 누구인지를 서로서로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서로에 대해 서로가 책임져야 한다.
1.우리가 누구인지 기억나게 해주는 공동체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로 하나가 되었다. 사랑 받고, 용서받고, 깨끗함을 받았으며, 다시 살게 되었으며, 영원한 기쁨을 우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떠올린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으로 거룩해진 공동체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방식과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에클레시아’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거룩해졌다. 우리는 타락했고 깨어졌으며 길을 잃고,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존재다 (롬3:23). 우리의 정체성은 “거룩하지만 깨어진” 존재이다. 어떠한 교회나 공동체도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깨어진 틈을 타고 세상을 비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려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때, 바로 그 깨어짐으로 주님의 빛이 세상으로 비춰지는 그때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거룩하지만 깨어져 있는 상태, 깨어졌지만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가지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선하고 아름다운 이 공동체는 이 균형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공동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준다. 공동체는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준다.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만이 우리가 꼭 들어야 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2.공동체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내도록 도전 받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려면 격려와 책망과 서로를 사랑으로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걸 맞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규칙적으로 구체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서로간에 높은 기대치를 설정한다는 의미이다. 각 멤버들은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는 시간부터 자신이 편하게 여기는 영역을 넘어 다른 곳에서 사람들을 사귀는 일과 매 달 한 번씩 자신을 ‘격려’해주는 영적인 동반자를 만나는 일에 이르기까지, 성장을 가져오는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도록 요구 받는다.
교회는 이미 자신들 안에 있는 영광을 드러내도록 성도들에게 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접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힘을 얻는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독특한 능력을 다른 제자들을 위한 선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힘으로 서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 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법칙이 아니라 기회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일들이다. 우리들은 새로운 능력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기독교이건 아니건,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기쁨을 소유한다.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며(벧후1:4),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를 따라 산다. 우리가 나누어 주는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삶은 의무가 아니라 부르심을 따라 살라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삶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는 확신하노라”(롬15:1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9히10:24-25)
3.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동체
격려는 서로가 책임을 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생에는 우리를 실망시키고 맥 빠지게 하는 일들이 많다. 그렇기Viewer 때문에 우리 서로는 어느 정도의 격려기 필요하다. 우리가 위대하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전적으로 믿어주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각자 우리가 성공할 때 박수 쳐주고 실패할 때 손잡아 일으켜 줄 수 있는 믿음의 동지가 필요하다. 격려는 또한 책망을 수반한다. 책망하는 것은 경고하고, 주의를 주며,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롬3:16). 우리는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각자의 삶을 열어 보일 때, 상대방이 자유롭게 경고의 말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5;14)
다른 사람과 상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분별력이 필요하다. 권계하며, 격려하고, 붙들어 주며, 참으라! 이것이 공동체의 문법이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인내하는 데는 확실히 격려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예수님 제자들의 특성이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오직 공동체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아주 극단적인 방법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훈련하고 각성시키지 않으면 사도처럼 설교한다 해도 살인자들의 자식들을 낳는 것 밖에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이 펨브로크셔 지역에 얼마나 많은 설교가 선포되었던가? 하지만 정기적인 신도회도 없고, 제자 훈련도 없고, 아무런 후속 조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깨어났던 10명 중 9명이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잠들어 버렸다.” –요한 웨슬리
이것은 요한 웨슬리가 얼마나 삶 속에서의 제자 훈련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우리들도 역시 그것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준비된 사람들을 도전하기
나는 경험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안다. 첫째는, 사람들은 기대한 만큼만 자란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상호 책임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들은 모든 게 수월하다Viewer면 그 과정에서 그다지 좋은 것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안다. 우리는 기대치를 낮추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도 그 사실을 금새 알아차린다. 셋째는, 비록 각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변화에 헌신할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도 도전 받아 본적이 없다.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데 까지는 엄청난 관심을 갖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삶을 배고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80퍼센트의 교회 사역은 20퍼센트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떤 부르심에도 순종으로 응답할 섬김을 타고 난 사람, 타고 난 일꾼들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그런 사람들을 탈진하게 만든다. 모든 공동체는 구성원 모두가 동참하도록 도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각 사람에게 충분히 요청하지 않는다. 그 결과 어떤 요청에도 거절하지 못하는 소수만이 집중적으로 섬김과 헌신을 요구 받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지나치게 일하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80대20 이론을 뛰어 넘어 모든 구성원이 동참할 수 있는 균형 잡히고 총체적인 제자도에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Chapter 7 하나님의 공동체는 넉넉하게 나눈다
성경은 우리가 죄로 인하여 깨어진 존재임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시편은 우리가 타락하고, 깨어지고, 다루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솔직하다면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고 집을 사고 먹을 것을 위해 열심히 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우리중 자기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모두 절망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도우신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갈 때 하나님은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다. 저장할 수 없었던 이 만나의 공급을 통하여 그들은 매일매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오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취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방식으로 모두가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이 진리에 넉넉함의 통찰이 들어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거두려고 하는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질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을 때 많이 거두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핍절의식이다. 하지만 이 핍절의식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를 깨닫게 될 때 나눔의식으로 바뀔 수 있다. 오멜의 원리는 우리가 공평하게 배분할 때,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 거둘 수 있는 충분한 양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기아 문제 전문가들은 지구상에 있는 음식의 총합은 지구촌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가 Viewer자신들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확보하고 있어서 나머지 나라들이 부족 현상을 겪는다는 것이다.
물론 오멜의 원리가 강요되면 안 된다(그러면 공산주의가 될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오멜의 결정들(ex.”이걸 사지 않았더라면 좀 더 기부할 수 있었는데…)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애초에 계획하셨던 이 세상은 우리가 필요한 만큼만 취한다면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세상이었다.
“내가 가진 것은 다 내 소유다” 라는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소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사고방식이다. 내가 가진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몸과 재능과 돈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그것들로 선한 일을 많이 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제게 허락하신 이 선물들을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주님께 물어야 한다. 이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영향을 끼친다. 너그러움은 내면에 스며들어 있는 기질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자기희생의 행동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만드는 태도이다.
-충분함의 신학
오늘날 사람들은 돈과 소유에 대해 양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그 양 극단은 번영신앙(좋은 삶이란 우리의 돈과 소유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이 물질은 우리가 옳은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과, 가난(진정으로 영적인 삶은 가난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예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극단적이고 위험하다. 번영과 빈곤은 둘 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이 아니다. 저자이며 의사인 쉐인 클레이본은 또 다른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우리는 번영의 신학도 아니고 빈곤의 신학도 아닌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풍요의 복음은 충분함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풍요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가 필요할 때 얻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특별한 인출기와 같다. 필요가 있는 곳에 필요를 채워 줄 사람이 있다면 공급은 Viewer절대로 끊기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미국이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안주하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가치관이 무너진 풍요로운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성령님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시며, 공동체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분별력을 요구한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문화 속에서 ‘충분함의 신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누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결정하는가? 만일 우리의 문화적 기준으로 그것을 결정한다면, 오멜이 아니라 큰 양동이를 사용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하나님께서 내 재정을 어떻게 사용하시길 원하실까?” 더 나아가 “하나님은 나와 예수님의 제자도를 추구하는 내 동료들이 이러한 문화 속에서 물질과 소유에 대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의 다섯 가지 영역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마음, 몸, 재능, 시간, 보물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기준으로 이 영역을 사용해야 한다.
-넉넉하게 나누는 공동체
주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활동 또는 어떤 특별한 단체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교회들도 이 나눔의 기쁨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많은 교회들이 나눔과 베풂을 통해 누리는 축복을 깨달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 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누고 베푸는 삶이 자연스러운 공동체이다.
너그러움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계획으로 두 가지가 있다.
1.여유를 만드는 법을 배우라: 넉넉하게 나누려면 반드시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유를 만들어야 한다. 여유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절약이다. 절약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적당한 경계선을 그으며, 우리의 물질과 시간을 사용할 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는 말이다. 절약은 결코 인색함과 같은 말이 아니며, 싸구려 인생을 산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만을 사는 것이다.
“절약(검소함)을 실천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선한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의 범주 안에서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달라스 윌라드
검소한 소비는 빚을 줄이고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해준다. 우리 시대의 절약은 불필요한 것이 대해 ‘아니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경제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는 한, 넉넉하게 나누고 베푸는 일은 할 수 없다.
2.나누는 법을 배우라
많은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사람들에게 기부하고 나누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만 한다.
-딱 한 번밖에 없는 기회
우리에게 부여된 놀라운 자원들의 청지기 노릇은 Viewer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다. 우리가 죽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능력과 소유라고 하는 선물은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19-26)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같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마25:32-46).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그룹(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사람들과, 돕지 않았던 사람들)으로 나누실 것이다. 우리가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이 비유들은 의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부르심 만으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지만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그리고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섬기고 싶도록 감동을 준다. 만일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나누고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넉넉한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루지 않을 것이다.
Chapter 8 하나님의 공동체는 예배한다
-예배에 대한 생각
유대교부터 초대교회인 예수님 에클레시아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예배는 항상 공동체 활동이었다. 우리는 미래에 뿌리를 둔 독특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배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의 독특한 언어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임재 속에서 삶을 찾는다. 우리는 교회에 훈련을 받으러 간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나아오는 초청이다. 우리가 예배할 때 우리 삶이 진리에 조율되고, 진리에 젖어 들어야 우리 영혼이 제대로 기능을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예배는 우리가 와서 그분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누리라고 부르시는 은혜로운 초청Viewer이다. 예배는 모든 준비 과정을 포함해서 독특한 언어와 활동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빚으시는 강력한 방법이다. 예배는 선물이다. 예배는 축복이며, 한 번 경험하면 다시 갈망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종교란 자신이 홀로 있음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홀로 하는 것은 종교 행위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케 하셨다는 소식이다. 종교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노력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거기에 걸 맞는 만큼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에 반응한다.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다.” 예배는 ‘개인적인 채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연합’이다.
-예배는 가치 있는 일이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에서 자랐다. 유대교의 예배 형식들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새로운 신앙에 맞춘 것이다. 수백 년에 걸쳐서 기독교의 예배가 응집된 예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초대 교회의 예배 형식을 모방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지난 수 세기 동안의 예배가 형성되어 온 과정이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거라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은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모범으로 따라야 할 어떤 정해진 형식의 예배를 소개하지 않는다. 예배의 형식에는 엄청난 자유가 있다. 사실 수 세기 동안 예배의 형식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수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변형되어 왔다. 예를 들면, 챈팅(chanting)에서부터 찬송가로, 찬송가에서 복음성가로 발전되고 변형되어 온 것이다.
예배의 형식이 핵심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다. 형식도 중요하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깊어지도록 돕는데 필요한 기독교 예배의 요소들이 있다. 이제 이 예배의 요소들이 우리의 영성 개발에 각각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Viewer
1.환영과 인사
우리는 모두 누가 자신을 알아 주고 다른 사람에 대해 알아 가는 것에 대해 목말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바깥 세상은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말 환영 받는 곳에 가는 걸 좋아한다. 문 앞에서 웃으며 맞이해 주는 사람, 커피를 권하는 마음씨 좋은 아줌마 … 등, 어느 도시에 있든, 어느 나라에 있든 만일 교회의 예배 공동체에 가면 누군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며, 편안한 우리의 집이 되어 주는 것이다.
2.고백과 죄 사함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다면, 우리의 실패를 고백할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죄 사함의 고백의 예식은 우리가 정직하게 되고, 경건함을 추구하게 하며, 제자도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위로의 말을 나누게 해준다. 죄를 짓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을 받는 것이며, 사죄의 확신은 우리가 모두 절박하게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3.신앙고백, 십계명, 주기도문
초대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모아서 짧은 형식의 문서로 표현하는 신조를 만들었다. 사도신경에서 니케아신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이단의 신앙을 경계하며 거부하는 의미로 축약된 믿음의 고백을 암송해오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앙 고백을 암송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됨을 확인해 준다. 모든 공동체가 신앙고백을 암송하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신앙고백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의 신앙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4.성경과 설교
우리의 인생은 한 편의 이야기이다. 예배 공동체는 예배 중에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공동의 교과서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의 진리를 선포한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때로는 기쁨을 주기도 하는 은혜의 방편이기도 하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10:15)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52:7)
우리 가운데 찾아 온 복음 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5.성찬식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것을 의미하는 모든 축복을 기억하는 과정이다. 성찬식 참여는 우리가 사랑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모든 것을 상징화한 순간이다.
1)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영원한 공동체임을 기억하게 해준다(고전10:16).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기적의 사건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통해 체Viewer험되는 것이다.
2)초대교회 사람들은 이기적이지 않고 넉넉하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훈련했다. 주님의 성찬은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 마실 것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3)성찬은 우리가 하나된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10:17)
4)잔은 우리가 화해의 공동체임을 기억하게 해준다.(“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이니라”마26:28). 성찬은 우리의 죄 사함을 기억하게 해주는 동시에 우리가 서로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하는 것을 기억나게 해준다. 또한 이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준다.
6.노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여 찬송하며”(엡5:19)
교회사를 통틀어 노래는 중요할 뿐 아니라 삶을 드리는 행위였다. 노래를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찬양을 올리고 음악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소리와 리듬을 통해 감동받고 동기를 부여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음악은 우리의 정서와 육신을 함께 만지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질 때는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도록 도와준다.
7.침묵
우리의 영혼이 쉼을 경험하거나 하나님과의 접속을Viewer 경험하고 싶을 때는 침묵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잠잠히 침묵할 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가 있다. 예배중의 침묵이나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8.헌금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선물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확장되는 것을 위해 드리는 헌금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9.축도 또는 파송
대개 예배의 마지막은 축도(파송)으로 마무리되며, 목사님이나 지도자가 축복을 해서 즉 회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파송 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준다. 즉 예배로 부름 받았다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일상 속에서 영원을 맛보기
웬델 베리라는 소설가는 자신의 역작 「포트윌리엄의 이발사」라는 책에서 목회자가 되려는 소명을 거스르고 이발사가 된 한 남자, 제이버 크로우를 소개한다. 그는 비록 목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교회를 향한 사랑을 잊은 적이 없다. 하루는 자신이 자란 교회를 청소하다가 예배를 드릴 때 교회가 영원의 세계에 도달하는 모습을 보는 꿈을 꾼다. 소설 속에서 제이버 크로우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이고, 깨어지고, 교만한 모습의 교회가 영원의 관점으로 보였던 그 순간을 생생히 묘사한다.
“하루는 내가 그 곳이 일하러 갔을 때였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긴 의자 뒤에 마룻바닥에 낮잠을 자기 위해 몸을 눕혔다. 아직 잠결이었는지 깨어 있었는지 교회에서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보였다. 예배당 뒤쪽 의자에 오디 아저씨와 내가 함께 앉아 있었고, 코디 아줌마가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분들을 평소에도 주일마디 교회에서 본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분들의 과거와 미래가 다 보였다. 어찌된 일인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다 보였다. 열심히 일하고 노래하는 아주머니들, 조용하고 망설이는 건지 수줍은 건지 아니면 피곤한 건지 모르겠지만 지친 영혼들도 보였다. 병든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 절박한 사림들, 죽어가는 사람들, 어른들 옆에 끼어 앉은 어린아이들, 비전으로 가득한 젊은 부부들, 꿈을 간직한 노인들, 자녀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모님들, 눈에 눈물이 가득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상의 끝에서 오직 배우자만 보이는 사랑스러운 젊은 부부들, 슬픔에 찬 미망인들, 자녀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엄마와 아빠의 표정, 교만한 사람들, 겸손한 사람들, 경청하는 사람들, 산만한 사람들 …, 이 모든 게 다 보였다. 남자들의 목뒤살의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보였고, 일하느라 두꺼워진 굳은 살 잡힌 손이 보였고, 하도 빨아서 닳아진 주일에만 입고 오는Viewer 그들의 옷이 보였다. 그들이 그저 거기에 서있었다. 그들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것 같다. 나와 함께 한 이들, 그들을 향한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사랑의 감정이 올라왔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좋다. 왜냐하면 교회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망설이고, 힘들어 하고, 산만한)과 영원한 모습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주님”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nm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