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반송마을>
조선후기 관아에서 제수를 지급하던 사당, 삼절사
반송(盤松) 마을은 해운대구 반송2동 일대로 아파트로 둘러싸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반송 마을은 반송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하여 본동(本洞), 본리(本里) 마을이라고도 하고 웃 반송이라 한다. 1740년에 간행된『동래부지(東萊府誌)』방리조에 의하면, 지경리(地境里)라고 나오는데, “동면(東面) 관내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지경리가 오늘날 반송지역으로 기장현(機張縣)과 동래부(東萊府)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지경리라는 지명은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란 뜻이다. 1871년에 간행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방리조를 보면, “반송리로 기록되어 있고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반송이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밑 둥에서 굵은 가지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옆으로 퍼지고 잎이 짧은 소나무인데, 이 소나무가 많아 따온 지명이다. 이 지역에는 반석이 널리 깔려 송림이 울창한 곳이다. 지금 운봉초등학교(반송2동 229번지) 일대는 아름드리 소나무(수령 200여 년) 숲이 터널을 이루어 한 낮에도 촛불을 켜고 지날 정도여서 반송굴이라 하였다.
반송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운봉마을 다음으로 생겼음은 알 수 있다. 당시 두 마을의 경계는 석대 천을 따라 소리길(소로길)이 나 있었고, 그 길이 마을의 경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민씨들이 오래 전부터 살았다고 전해지며, 다음으로 순흥 안씨들이 들어와 살았다. 현재는 남원 양씨(南原 梁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1904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 에 의하면, “동상면(東上面) 관내에 반송동이 있다. 당시 반송동의 호수는 24호이다. 양씨, 김씨 등 성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양씨가 15호로 반 수 이상 차지하고 있었다. 현재 반송에서 기장방면으로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동래에서 기장으로 갈 때는 반송 마을 뒷산 기슭의 오솔길을 따라 안평과 고촌을 경유하여 기장으로 갔다. 이 길의 안평과 고촌을 넘어가는 골짜기인 도둑골에는 도둑들이 길가는 행인을 급습하여 약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이 마을에 울창했던 소나무들이 한국전쟁 이후 남벌로 인하여 태반이 사라졌다. 1950년대 초기엔 부산지방 땔감 시장의 나무 공급을 거의 반송 마을에서 도맡다 시피 하였다고 한다.
마을 내에는 삼절사가 있다. 조선 후기 관아에서 제수를 지급하던 사당으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인 삼절사(三節祠, 반송2동 143번지)는 임진왜란(1592년) 때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순절한 남원 양씨 일문 3인(梁誌, 梁朝漢,梁通漢)의 충혼을 함께 모시고 기리는 곳이다.
반송2동시장은 1976년 8월 11일에 정식 재래시장으로 등록되었다. 부산은행 반송2동지점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상가주택 복합형 시장이다. 옛날 운봉장터 시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반송은 부산시에서 1968년부터 부산시내 철거 이주민을 정착시킨 정책이주 지역으로 반송1동에는 동구 수정동 고지대 철거민 2,924세대 중 반송2동으로 2,100세대가 이주해 오면서 인구가 급증되어 도시처럼 변하여갔다. 1993년부터 반송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기슭과 연못까지 매립하여 주공·삼환·남흥 등의 아파트가 신축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옛날 전통마을은 아파트 공간에 파묻힌 마을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