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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봄을 넘어 활기차게 여름으로 넘어 가는 데
내 몸만은 자꾸 시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 들어
훌쩍 떠나 온 여행.
그 여행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봄
아니 당신
아니 봄.
그렇게 당신인 듯
봄인 듯
우리는 스쳐 지나 가다
동시에 뒤돌아 보았다.
그 때부터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 운명적인 지독한 사랑의 시작과 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그 일상은 언제나 그리움과 함께 시작 되곤 했다.
간절기.
봄과 여름의 그 어느 교차점에서 부터.
날이 밝고 다시 여행이 시작 되었다.
이 번 여행의 마무리인 듯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인 듯.
그 무엇이 되었던
그냥 가긴 너무 아쉬워 잠시 화엄사로 발길을 향했다.
순천 국가 정원을 보고 난 후 구례 화엄사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쉽다.
더구나 우리의 많은 추억이 함께 했던 곳이라
지나치고 나면 더더욱 미련이 한가득 남을 것 같아
차마 지나칠 수가 없다.
화엄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작은 카페 하나.
몇 번 이길을 지났음에도 왜 이 카페가 한 번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지 하는
궁금증이 일게 하는 아담한 카페.
마치 길가에 갓 피어 난 민들레 같은 카페다.
어떤 때는 눈에 전혀 들어 오지 않고
어떤 때는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 오는 샛노란 민들레 같은.
황토로 다듬고 한지로 꾸며 놓은 카페.
이런 곳은 그 어느 화려하고 달달한 서양 차보다
은은한 향이 우려 나오는 우리 전통차가 어울리는 것 같다.
다육이도 곳곳에 꽤 많다.
이처럼 많은 다육이를 보게 될 때는 늘
강원도 동해에 살 때 기르던 다육이가 생각이 난다.
거실과 베란다
그리고 정원에 가득 채워졌던 다육이들.
그 중에서도 지금도 유난히 생각 나는 귀여웠던 아이 둘.
리툽스와 고노피티움.
얼마나 앙증맞게 잘 자라 주었던 지.
다행히 차 맛도 참 좋다.
찻집을 나와 드디어 도착한 화엄사 입구.
초파일을 앞 두고 각양각색의 연등이 화려하다.
이 곳은 이제 막 봄이 피어 나는 듯 하다.
아마도 그늘진 탓이리라.
드디어 들어 선 경내.
사위가 호젓 하다.
사람의 냄새 대신에 자연의 내음이 사방 곳곳에서
풍겨 나온다.
이제 맛 햇빛이 들기 시작한 탓일가
방마다 돗자리 가리개가 쳐져 있다.
그 또한 산사의 운치가 풍겨 난다.
한적한 경내를 돌고 돌아 드디어 도착한 대웅전 앞 마당.
사람들이 제법 따가운 햇살을 피해 그늘이 내린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그 모습 또한 정겹고 평화롭다.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되어 긴 시간 함께 하고 싶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머물 시간은 허락 되지 않을 것 같아
약간 서둘러 경내 여기 저기를 둘러 보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층암으로 가는 길.
빛깔고운 장끼 한 마리가 사람의 기척에 고개를 돌려 무심히 쳐다 본다.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고
도망을 가거나 바쁘게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내 쪽을 힐긋 한 번 쳐다 본 것
그 게 다 다.
그리고는 뒤돌아 성큼 성큼 가더니만
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작은 장끼에게로 다가 가고 있다.
설마?
아니 겠지.ㅎ
그런데 그 옆의 까투리는 어쩐 지 외로워 보인다.
이 녀석도 사람의 기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어쩌면 사람보다 제 짝이 더 그리운 데
원망스럽게도 장끼는 자기보다 다른 장끼에게 더 관심을 주니
그게 더 서러워 보이는 것 같다.
나도 짐짓 그녀를 모른 채 하고 갈 길을 간다.
드디어 도착한 구층암.
외진 곳에 자리한 탓인 지
더욱 외로워 보인다.
외로운 나그네는 더욱 외로움을 탈 듯 하다.
숨결 하나 들리지 않는 작은 산사의 정적.
그 와중에도 눈에 들어 오는 오래된 목조 건물의 오래된 나무 기둥,
사람의 손길을 전혀 보태지 않은 기둥의 모습이 더욱 기이 하다.
나무의 처음 모양 그대로 기둥을 삼았다.
그 나무 기둥이 하도 세월을 먹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하다.
조심스레 발길을 뒤로 돌린다.
내 발길에 놀라 기둥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올라오는 길에 무심히 지나쳤던 꽃.
모양도 색깔도 오묘하고 기이하다.
귀한 수반에 솜씨좋게 꽃꽂이를 하여도 이토록 아름답지는 못할 것 같다.
누가 감히 이 모양을 흉내 낼 것인가.
그리고 경내 전체를 환히 밝혀 주는 커다란 영산홍 한 그루.
화엄사 연등을 다 밝혀도 이처럼 밝지는 못하리라.
오늘의 화엄사 방문
호젓해서 더욱 좋았던 방문이다.
화엄사를 나와 길을 떠나기 전에 들른 작은 식당.
산채 비빔밥과 모주 한 잔.
전주 한옥마을에서 마시지 못한 모주를 이 곳에서
만났다.
목마름에 우선 모주 한 잔부터 벌컥 들이켰다.
이 시원함이 주는 짜릿함.
이 또한 여행길이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는
한 잔의 생명수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