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Date 2020. 6. 28
Text Acts 7,55-60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목숨입니다. 세상을 오래 산 노인이라 할지라도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생이 극심하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만 그건 아직 죽음의 문턱에 가보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일 뿐, 오죽하면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마16,26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셨듯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신앙에서 최고의 충성은 ‘순교’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이니까요.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기독교 역사상 첫 순교자인 스데반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스데반의 아름다운 모습은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비처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비를 흡수하는 땅처럼 우리 모두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충만하게 받으시기를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보다 앞에 나와 있는 스데반의 모습을 소개해 드립니다. 행6,15에 스데반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반대자들에게 매수당한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세워진 거짓 증인들에 의해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스데반의 모습을 표현한 말씀이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입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표현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일말의 어떤 두려움이나 노여움도 없었음을 알려 줍니다. 동요되지 않는 고요와 담대한 용기와 또한 부드러움과 위엄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의 얼굴 전체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모습은 마치 우리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셨을 때의 모습과 같았고 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의 모습 같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보고서 느낀 모습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영화인 ‘쿼바디스’를 보면 성도들이 큰 운동장에 강제로 끌려나옵니다. 그리고 곧 굶주린 사자들이 그 운동장에 나타납니다. 성도들은 일순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때 갑자기 회중석에 머리가 허연 베드로 사도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칩니다. ‘형제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시오. 주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당신들은 곧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고. 베드로는 성도들의 간곡한 권면으로 간신히 위험지역을 벗어나 도피하다가 ‘나는 네가 두고 온 양들에게로 간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공포에 떨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사지로 되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순간 공포에 떨던 성도들은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권면과 찬송을 할 때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그들은 모두 평안한 모습으로 사자의 먹이가 되어 죽습니다. 박해를 하던 로마 시민들과 네로 황제는 그런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되레 불안에 떠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남미 에콰도르 아우카 족 선교에 나섰다가 죽은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순교한 기사가 나갔을 때 미국 사회는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며 비판 일색이었지만 그 순교자들의 유족들은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에게 그들의 죽음을 모독하지 말라며, 비록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이 한 일은 결코 바보짓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때 죽은 다섯 선교사의 다섯 부인들은 남편들이 순교한 부족을 다시 찾아가서, 자신은 당신들이 죽인 선교사의 아내라고 밝히고 죽은 남편도 자신도 당신들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마침내 그토록 이방인들의 접촉을 거절하던 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합니다.
순교가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들의 그런 모습 때문입니다. 순교가 기독교신앙의 최고충성이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목적달성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열정이나, 고집, 담대함, 의지력, 혹은 의리 그런 것들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는, 누구에게나 천사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는 순수함과 순전함이 가득한 마음과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순교가 가능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순교는 열정이나 강한 의지력의 결과라기보다는 흠 없고 순전한 사랑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순교자 기념주일에 천사의 느낌을 풍길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하며 사랑이 가득한 믿음으로 충만하기를 함께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3. 둘째로 본문이 보여주는 순교자 스데반의 모습은 55절,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누가 순교합니까? 첫째는 흠 없고 순전한 믿음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둘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바라볼 때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행6-7장은 여러 곳에서 스데반이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 안에 일꾼을 세울 필요성을 느낀 사도들이 내건 조건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는데 온 성도들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1번부터 7번까지 뽑아서 세웠는데 그 1번이 바로 스데반이었다고 행6,5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행6,8에 보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하였고요, 이어지는 행6,10에서는 스데반이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는데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당시 백성들의 얼굴은 점점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귀를 틀어막고 발악을 하듯 돌을 들로 치기 직전일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마비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얼굴이 얼마나 무서웠겠으며 그 분위기 또한 얼마나 험악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군중들의 그런 모습이 스데반을 조금도 두려움에 떨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55절)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다가 힘든 순간을 만나면 사람을 바라보거나, 악한 사람들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확신에 넘쳐 조용하지만 단호한 태도와 말로 말씀을 전합니다.(56절)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것 같지만 성령으로 충만하여 확신이 있는 사람이 이깁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 어떤 위협이 있는 순간에도 평안합니다.(59절) 금요일 기도집회 시간에 강사 목사님이 많이 강조하신 말씀이 있지요.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돈이 인생에게 평강을 주지 못합니다. 부귀영화도 인생에게 평간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 충만한 것만이 인생에 답인 줄 깨달으셔야 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진정으로 용서하게 됩니다.(60절) 용서는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해야 합니다. 미움과 원망, 원한이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얼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하니까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 대하여서도 전혀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더니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서 미움과 원한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하였더니 아름다운 순교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순교의 꽃이 될 수 있습니다.
4. 세 번째로, 순교한 스데반의 모습은 주님을 향해 부르짖는 모습(59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끈질긴 요구를 의미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도 또 중요한 것은 간절함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지속성입니다. 당연히 믿음이 중요하고 진실된 간절함이 중요합니다만 못지않게 이 지속성, 끈질김이 중요하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눅18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지속적인 기도가 중요한 것을 비유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아주 불의한 재판관, 뇌물을 밝히고 이득을 따져 편파적으로 판결하는 재판관인데 그 동네에 아무 힘없는 여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여 이 재판관에게 호소했지만 들은 척 만척했다고. 그런데 이 여인이 하두 끈질기게 밤이고 낮이고 그 집 대문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난리를 쳤더니 눅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라 했다고.
끈질긴 기도가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끈질기고 지속적인 기도는 감동을 가져와 확신하게 합니다.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가 안 될 것 같은 일도 되게 하는 응답을 불러옵니다. 계속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사람이 신비한 세계를 맛봅니다. 끈질긴 기도가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순교의 꽃으로도 피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순교는 결코 어느 한 순간의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믿음의 선한싸움 끝에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순교인 것입니다.
평상시부터 기도하고 기도하던 사람이라야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스데반처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기도할 수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기도하며 살아온 사람이라야,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기도를 많이,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하는 사람이 되어, 급박하고 고통스러우며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순간에 순결한 순교 제물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