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스님의 명상수행 에세이] ⑮ 분명한 앎
분별 있는 앎과 없는 앎…
보완적 긴장관계 유지돼야
지난 번 ‘현재에 머물기’라는 주제와 관련 좋은 질문과 논의가 있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분명한 앎(知, sampajan~n~a)’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것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우선 ‘삼빠잔냐’에 관한 주의깊은 관찰로 일단 ‘형상이나 모양을 안다는 개념이 없다’는 반론이 있다.
이것은 필자와 조금 다른 견해다. 삼빠잔냐가 ‘주의깊은 관찰’과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형상이나 모양에 대한 앎이 없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이것의 확인을 위해서는 호흡명상을 기술하는 아래의 <염처경>의 사례를 다시 봐야 한다.
분별 있으면 집착 애착…
분별 없으면 현실서 유리(遊離)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무는가? 비구는 아란냐로 가고, 또는 나무 아래로 가고, 또는 텅 빈 장소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똑바로 세워 앉아서, 면전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그는 알아차림하면서(sato)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길게 숨을 마실 때는 ‘길게 숨을 들이 마신다’고 분명하게 알며(sampajanati), 길게 숨을 내쉴 때는 ‘길게 내신다’고 분명하게 안다.”
여기서 사용하는 ‘분명하게 알다(sampajanati)’는 명사형인 '분명한 앎 (sampajan~n~a)의 동사형으로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다. 삼빠잔냐,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행위에 ‘형상과 모양이 존재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위의 인용문을 보면 분명해진다.
‘숨이 길면 길다고 분명하게 알고, 숨이 짧으면 짧다고 분명하게 안다.’ 이 문장에서 분명하게 아는 행위로써 삼빠잔냐에는 분명하게 형상과 모양이 존재한다. 숨이 들어오고, 혹은 나감은 분명한 형상이고, 모양이 존재한다. 또한 숨의 길고 혹은 짧다는 인식에도 역시 모양과 형상이 존재한다.
먼저 호흡의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알아차리고(念, sati), 그럼 다음에 현재에서 그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숨이 긴지 짧은지 분명한 앎(知, sampajan~n~a)이 뒤따른다. 알아차림에는 개념적인 요소가 없다. 단지 호흡에 주의를 둔 지각의 일종이다. 반면에 분명한 앎은 알아차림에 기반하여 대상의 표상, 모양에 대한 명철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정념(正念) 정지(正知)의 순서로 반드시 함께 기술하고 있다.
두 번째 논의는 분별적 앎과 분별이 없는 앎의 구별이다. 숨이 들어오고 나감, 숨의 길고 짧음은 분명하게 모양과 형상이 있는 분별적인 앎이다. 반대로 분별이 없는 앎을 보통 지혜, 반야(prajna)라고 한다. 삼빠잔나(sampajan~n~a)는 성스런 앎(知)을 뜻하는 ‘n~a-na’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용어로 ‘이해’, ‘앎’, ‘지혜’ 등으로 번역한다.
곧 삼빠잔나는 무상(無常)과 같은 보편적인 특성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반드시 분별없는 지혜와 동의어는 아니다. 지혜로 다가가는 이전의 단계를 설명하는 술어이다.
그러면 반야, 곧 지혜를 어떻게 얻게 될까? 이 점에 대해서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모양과 형상에 대한 분별적인 앎을 통해서 그것들의 무상과 실체 없음을 자각하여 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모양과 형상이 모두 조건 지어진 인연의 결과로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통찰이다.
분별이 있는 앎은 ‘이것은 단지 이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분별없는 앎은 ‘이것은 이것이 아니다. 이때야 비로소 이것은 바로 이것이다’고 말한다. 분별이 있는 앎은 현실적인 집착과 자기 동일시의 애착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
반면에 분별없는 앎은 공허해지고 현실에서 유리되는 위험을 함께 가진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해야 하고, 보완적인 관계로 창조적인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분별이 있는 앎과 분별이 없는 앎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분별이 있는 앎이 분별없는 앎을 불러 일으켜 세운다. 반대로 분별없는 앎은 분별이 있는 앎을 보다 깊게 경험하도록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