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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하나님의 손가락
The Voice of the Spirit
바다로 향하라는 음성
2004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백 년에 한 번 있을 법하는 엄청난 자연 재해가 발생했다. 인도양에서 발생한 강력한 해저 지진으로 인한 거대한 쓰나미가 인도네시아에서 아프리카 동부 해안의 마을들을 휩쓸고 지나간 것을 뉴스나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시청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전 지역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것 같았다.
2011년 3월에 이러한 광경이 재현되고 말았다. 그와 유사한 파급력을 지닌 지진이 발생했고,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다. 인도양 지진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난 다음,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와 딸 스테파니는 인도 남동쪽에 있는 항구도시 첸나이 Chennai 로 날아갔다. 벵갈 만을 따라 형성된 도시의 남쪽으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폐허로 변해 버린 시멘트 바닥이 길게 이어지는 것을 주목하였다.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느 목회자가 대답했다. "아,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파도가 덮치기 전에 저곳에는 집들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거의 2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재앙이 있은 뒤 몇 달 후에, 영국의 지진학자들은 그 현상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모든 재난을 촉발시킨 수마트라-안다만 지진은 리히터 지진계로 9.1에서 9.3이 측정되었다. 그야말로 몇 센티미터가 움직일 정도로 지구가 통째로 흔들린 것이다. 이 지진은 역사상 가장 길게 흔들린 지진으로 1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대양의 해저면에 1,000킬로미터가량의 균열이 생겼다. 그 지진은 100기가 톤 10억톤의 폭탄에 상당하는 위력을 지녔다. 나에게 그것이 어느 정도였느냐고 묻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인류가 경험했던 가장 큰 '폭발'이었다.
그러한 대재앙 속에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크리스티안 아만푸어 Christianne Amanpour 와 앤더슨 쿠퍼 Anderson Cooper 와 같은 언론인에 의해 소개되었다. 스리랑카의 해변에 위치한 '사마리아 아이들의 집' The Samaritan Children's Home 의 설립자 딜런 샌더스 Dylan Sanders 는 미국에서 돌아와 버려진 아이들이 다시 인생의 기회를 찾도록 돕고 있었다. 아침 8시 45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미친 듯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바닷물이 덮치고 있어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샌더스 목사는 열여덟 명의 아이들과 직원들 모두에게 소리를 질러 해안의 배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모두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모터를 떼어 안에 들여놓지 않고 밤새 배에 그대로 둔 것이 아닌가. 명백히 '실수'였다. 10미터에 육박하는 해일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개는 본능적으로 반대편을 향해 무조건 뛰라고 소리를 질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샌더스는 배의 시동을 걸고 파도를 정면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 평소 사랑하는 흠정역 성경의 한 구절이 마음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원수가 홍수처럼 올 때에 주의 영이 그를 대적하여 깃발을 올리시리라." 사 59:19 한글킹제임스
"거대한 물의 벽, 그것이 우뚝 서 있었다. 과장하지 않고, 마치 무언가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힘 아니면 손이었다. 물이 그대로 서 있었다."
나무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 생존한 목격자들은 그 작은 보트가 어떻게, 놀랍게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거대한 물의 장벽을 쉽게 올라타고 건너갔는지 후일 증언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 아니면 울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과 또한 그분의 말씀과 그런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경험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에게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기록된 말씀과 동화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유롭게 그 말씀이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곳에서 적용될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난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가락
제15장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있을 사악한 삼중 연합의 계획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오순절교회가 한때 성경의 말씀을 매우 존중하였으나 거짓 선지자로 변질될 것을 알고 있다. 로마 가톨릭이 말로 권세를 부리는 짐승임을 또한 강신술이 불을 내리는 용으로서 기적적인 말로 세상을 미혹할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감정적인 신앙에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살펴보았다. 그로 인해 세상을 하나로 묶는 사탄의 접착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
그렇지만 여전히 이런 의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감각적인 체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이라면 그 부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원수에게서 온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마태복음 7장이 우리에게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준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성경의 "그날"이라는 표현은 심판의 날 또는 주님의 임하심을 나타낸다. "그날에"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강력한 증거들을 내세울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왜 그런가? 주님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흠정역은"부정" iniquity 을 저질렀다고 번역했다. 헬라어 원문은 '아노미아'인데, 문자적으로 '무법' lawlessness 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속지않기 위해 율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무법'이란 실제로 예수님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와 관련이 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너희는 누구일까? 바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무법' 혹은 '불법'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사실 모든 점에서 관련이 있다. 제자들에게 오실 성령님을 소개하셨던 그밤에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4 이 말씀은 필요 이상으로 냉혹하게 들린다. 그 이면에 있는 개념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완전한 사랑이요, 지혜요, 능력이시다. 그분은 나와 나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나를 위하여 무엇이든 다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신다. 이것을 알고도 내가 무관심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한 사랑에 나는 순종으로 굴복한다.
그리스도의 법과 그분 자신 사이에는 깊은 관련이 존재한다. 그분의 생애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이야기에서 쉽게 그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을 받으신 적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에게 바알세불은 시리아 사람들의 신인마귀였고 바리새인들에게는 사탄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탄이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답변이었다. 이 이야기는 두 복음서에서 발견되는데, 예수님은 각각 특별한 표현으로 교훈하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약간 다른 표현이 나오는 누가복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원어는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 11:20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손가락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단순히 받아들이면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을 언급한 곳이 떠오르는가? 당연히 하나님이 그의 손가락으로 십계명을 기록하셨다는 것이 생각날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주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이야기를 마치셨을 때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쓰신 두 증거판인 돌들을 모세에게 주시니라." 출31:18 한글킹제임스
그러므로 십계명을 돌비에 기록한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령이셨다.
누가 율법을 기록하시는가?
누가 성경의 저자인가라는 것은 성령을 연구함에 있어서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마지막 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은사주의자들은 대부분 신앙생활에서 율법을 너무도 쉽게 걷어치우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을 한 번 경험한다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은사주의 교회의 배경을 가진 사람과 성경 연구를 한 기억이 있다. 몇 주에 걸쳐서 성경적 안식일을 연구한 후에, 그는 안식일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그 문제를 정중하게 제시하였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말했다. "아, 나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성령님이 이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
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즉시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도님, 무엇을 해야 할지 성경에서 말씀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대답해 주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은 선지자들이 말한 것으로서]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1
성경은 성령님이 저자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따르게 되면 우리는 항상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 육체대로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음 맥락에서 바울은 예레미야를 인용하였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3
언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가? 성령님이 그분의 품성인 그분의 율법을 우리의 심령에 기록하실 때이다.
핵심을 깨달았는가?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이 기적적인 능력과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께 속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은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이 마음에서 반사되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것이 성령님의 참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은사나 놀라운 기적이 아니다.
이것이 사탄의 문제였다. 루시퍼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고자 했다.
"루시퍼가 진실로 지극히 높은 분과 같이 되기를 바랐다면 하늘에 지정된 자기의 자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극히 높은 분의 정신은 이기심 없는 봉사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원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지 그분의 품성이 아니었다." 소망, 435 하나님의 능력을 원했지 하나님의 품성은 아니었다고 엘렌 화잇은 기록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모든 사람이 거룩하다고 주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직접 하고 있는 일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그럴싸한 교리와 신앙적인 열심에 기초할 때 만족해한다. 영혼들을 속이는 데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일을 돕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히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감정에 관해 많은 말을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사랑을 알아볼 수가 없으시다. 그것은 원수의 기만이기 때문이다." 리뷰 앤드 헤럴드, 1909년 6월 26일
이것이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이다. 바벨론은 하늘의 능력을 사용한다고 주장하면서 가짜 영의 운동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하늘의 법, 곧 자아 희생적 사랑의 법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 나는 재림교인들도 쉽게 넘어갈까 두렵다. 그 이유는 말씀의 권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인가
나는 14년 동안 어느 재림교회 대학에서 학부생들을 가르치는 특권을 가졌다. 나는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수업을 70명에서 110명 정도 되는 1학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재림교회 청년들의 상태를 진맥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18~19세가량의 이학생들 중 다수가 훌륭한 재림교회 가정 출신인 것을 보고 나는 고무되었다. 그들은 많은 부분에 대하여 선한 가치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 건전한 태도,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15년 동안, 나는 쇠락의 흐름도 보았다. 성경의 이해도가 감소하였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어떤 학생들은 옳고 그름에 관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견고한 기초가 사라졌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 연구에서 오는 능력과 기쁨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경의 한 장 한 장이 지혜의 보물 상자이다. 내가 공중전도회를 인도할 때면 참석자들은 이삼 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듣고 있는 말씀이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강사 때문이 아니라 말씀 때문이다. 나는 보통 말을 천천히 하는 편이다. 게다가 길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은 쟁반에 금사과 잠 25:11 처럼, 책에서 튀어나와 강하게 역사한다. 집회를 마치고 문에서 인사를 나눌 때에 나는 청중들의 얼굴에서 특별한 충만감과 만족감을 보게 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늘 이 감동이 밤새 지속될 것 같아요. 아침까지 간직하고 싶네요." 그 후에도 사람들은 말씀을 더 듣기 원하여 참석하고, 말씀의 저자에게 굴복한다.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전도회를 할 때마다 기존의 우리 교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의 독특한 진리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줄을 몰랐어요." 그렇다. 수십 년 동안 재림교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개인 연구를 통해서 조금씩 깨달음을 얻던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게 되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밝은 빛이 그들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알려 주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교가 형식으로 그칠 때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갈망하는 감각적인 경험보다도 훨씬 강력한 실재가 될 수 있다. 확신에 찬 베드로의 말을 들어 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벧후 1:19
이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자. 예언의 말씀인 성경은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점점 늘어나는 빛으로 비유되었다. 눈앞에 있는 손조차도 볼 수 없는 완전한 암흑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데 문틈 아래로 희미한 빛이 비추인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명암의 대조를 보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빛이 들어오면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전체 형태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침내 방 안 가득 태양빛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묘사는 사도 베드로의 과장법일까? 전체 문맥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벧후 1:16~18
베드로는 물론 이 구절에서 변화산의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마17:1~6 베드로는 그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눈으로 본 목격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난 것"을 귀로 들었다고 말한다. 상상이 가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니! 정오의 태양처럼 빛나는 그리스도를 보다니!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19절로 돌아가 보자.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이 구절은 비교를 하고 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더 확실하였는가? 베드로가 그날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하늘의 소리를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실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말씀이 능력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당신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교훈과 [무엇이 잘못인지에 대한 책망과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함과 [옳은 상태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우리는 견고한 건물이 되기까지 하나씩 하나씩 뼈대가 완성되어 가는 것과 같은 굉장한 인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일을 한다. '능력을 갖추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엑사르티조이다. 이 단어는 탈구된 골격을 똑바로 맞추는 것,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하였다. 즉 말씀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믿음은 선물
이제 한 가지를 더 다루려고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능력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 17:8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는 그 이상임을 기억하라. 안식일이 어느 날인지 아는 것이나,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의 구주이시며,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벌어지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한 신약 성경의 단어이다.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엡 2:8 다시말해, 예수님이 이루신 것, 곧 은혜에 의해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기회, 곧 믿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씀에 노출됨으로 그 일이 일어나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이해하고 있는가?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모든 실패는 그들의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조, 657 라고 했다. 바울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 롬 14:23 라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을 행사하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이다. 그리고 믿음을 얻는 것은 성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문제이다.
CD와 MP3 플레이어나 아이팟이 우리 삶의 필수품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카세트테이프로 듣곤 하였다. 나는 매일 일을 하러가고 오는 길에 운전을 하면서 혹은 아침에 달리기를 하면서 말씀을 들었다. 대략 30~40분 매일 말씀을 들었더니 성경 전체를 석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런 후에 나는 다시 성경을 테이프로 듣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집중하여 주의 깊이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습관을 통해 사물에 대하여 조망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내 생애에 이처럼 복된 일이 또 있었을까! 내 마음은 마치 매일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흠뻑 젖은 듯하였다. 나는 그 결과로 인해 놀랐고 기뻐하였다. 하나님 안에서 나의 확신은 훨씬 더 강해졌다. 마치 성난 파도에도 꿈쩍 않는 바위처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나의 확신은 견고해졌다. 어느 날 나는 예레미야33장 3절을 들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 우주의 왕이신 분이 나같이 초라한 인생을 위하여 기꺼이 응답하시겠다니. 나 같은 사람에게 정말로 위대한 일을 알려 주시겠다니! 또 다른 날이었다. 열왕기하 17장 7~41절의 말씀을 들은 후에 나는 매우 슬퍼졌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방황하던 이스라엘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돌보셨고 나를 위해 베푸셨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저버리고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는 용서를 구하고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서 살아 역사하시던 변함없으신 사랑의 하나님께 다시금 굴복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나를 항상 노출시켰더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나의 생애를 완전하게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 또한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이것을 바라신다. 그리하여 그분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하신다. 이 놀라운발전은 오직 말씀을 섭취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요6:63. 오늘날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변질되어 버렸지만 우리가 살기 위하여 먹을 때, 우리는 일할 수 있는 육체적인 힘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우리는 믿음, 곧 죄악의 세상을 이기는 데 필요한 영적 에너지"를 받게 된다. 이것이 왜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식물처럼 꼼짝도 않고 무위도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헤리 음한도 Herry Mhando 는 짐바브웨 출신의 유능한 전도자이다.그는 믿음으로 살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을예수님에게 인도하는 것이 '무릎학' kneeology 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구함으로 일을 시작하고, 단호한 결심으로 찾으며, 행동으로 “두드린다" 마 7:7 그는 아프리카에서 전도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돈도 없으면서 축구 경기장을 빌리기로 계약한다. 그리고 전도회 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그 지역의 부유한 사업가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 중에는 예전에 재림교회를 다니던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능하신분의 심부름꾼이라는 그의 믿음에 감동을 받는다. 확실히 그의 믿음은 전염성이 있다. 예전에 나에게 수업을 들었던 학생 하나가 몇 시간정도 그를 만난 후에 그가 받은 인상을 짤막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믿음을 가진 겸손한 사람입니다.”
음한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목표를 정한 후에 그것을 이루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결국에는 내가 영광을 받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노력에 축복하실 것이고, 나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코시야 즈반다사라, <헤리 음한도 : 전도의 사람〉, 33그가 세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라니! 대개 그의 집회는 처음에 천 명 정도 모인다. 넓은 경기장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그러나 매일 밤, 입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린다. 첫날 "불과" 이천 명으로 시작한 집회가 마칠 때에는 이만 명이 되곤 한다. 그의 전기 작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좀처럼 다른 사람들이 인용하지 않는 성경 구절을 선택함으로 음한도가 [집회에서 설교하는 성경에서 캐낸 엄청난 보화는 그 위력을 증명한다" <헤리 음한도 : 전도의 사람〉, 21
그처럼 성공적인 전도회는 이 시대에 아주 드문 일이다. 일례로, 그는 앤드루스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듣는 학생 신분임에도 학위를 마치기까지 5년 동안 17차례의 전도회 헌신적으로 인도하였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25,000명 이상이 침례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음한도의 삶에는 성공의 비결이 되는 은밀한 부르짖음이 있다. 그것은 매일 새벽 3시에서 7시 사이에 그가 하는 어떤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시간에 연구한다.
당신은 매일 새벽 4시간 동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이라도 말씀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날의 나머지 시간을 위해 필요한 강력한 아침 식사가 될 것이다. 일, 활동, 다른 필요한 것들을 시작하기 전, 이른 아침에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신다. 목표를 끝까지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의 양식이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외부의 어떤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이다.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우리와 얼굴을 대면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날이 서늘할 때에 창 3:8, 개역 거니셨다. 첫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신뢰하기로 선택했을 때, 하나님으로 향하던 그들의 본성적인 성향은 그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본성적인 기질로 바뀌었다. 그들은 벗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가려 주시지 않는 지금 우리와 동일한 상태이다. 그들은 의의 옷을 벗어 버리고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64:6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없게 되었고,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살게 되었다. 출33:20 죄는 피조물이 창조주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특권을 강탈해 버렸다. 하지만 몇몇 예외적인 일이 선지자들과 같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은 선지자들 앞에서 그들이 즉시 소멸되지 않도록 그분의 영광을 가리셨다. 선지자들이 일반적으로 보인 반응은 "화로다 나여!" 사 6:1~5 였다. 어느 죄인이 완전히 거룩하신 분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특권을 빼앗겼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가까이하신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귀에 이렇게 속삭이신다.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가라" 사 30:21 그러나 그것조차도 마귀는 우리의 귀에 모조품을 들려주려고 한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일은 매우 단순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을 일생토록 실천한 사람들, 다시 말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우리를 위해 사랑과 교훈과 경고의 기별을 나누어 주셨다. 그 기별들을 기록한 것을 우리는 성경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령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당신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절대로 눈을 감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중얼 거리지말라. 눈을 뜨고, 그분의 말씀을 읽고, 깊이 생각하고, 씨름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의 매 구절을 통하여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시도록 선택하였다면 운전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삶을 즐기는 순간과 같이 성경이 곁에 없어도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내재화시키는 노력과 그 말씀을 당신의 삶에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기도의 삶을 산 조지 뮬러 George Muller 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전능하신 공급자가 그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실 것을 신뢰함으로 모든 필요를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아뢰었다. 그가 영국 브리스톨 Bristol 에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을 때, 그는 기도로 그들을 부양하였다. 그의 사역으로 아이들만 2천 명이 넘고 직원이 수백 명으로 늘고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큰 건물이 몇 채가 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은 기도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뮬러는 자선 단체를 조직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구하지도 않았다. 매일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결의할 교회나 선교 위원회도 없었다. 그는 모든 필요를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엡 3:16 공급하실 능력이 많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과 뮬러의 동행은 참으로 실제적이었다. 그는 사역의 초기에이 모든 것을 관점을 가지고 보는 법을 배웠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지금보다 이전, 적어도 10년 전부터 나는 아침에 옷을 입은 후 기도에 자신을 바치는 일을 하나의 습관으로 삼았다. 이제 나는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 자신을 바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함으로 내 마음이 평안과 용기를 얻고, 경고와 책망과 교훈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묵상하는 내내 나의마음은 주님과 실제적으로 교통할 수 있었다. 종종 이런 경험을 할때면 내가 신앙생활의 초기에 성경 묵상의 중요성을 어찌 몰랐는지 깜짝 놀라곤 한다. 겉사람이 양식을 취하지 않으면 잠시라도 일을 할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속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속사람의 양식은 무엇인가? 기도가 아니라 말씀이다. 그렇다고 성경을 그저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읽은 것을 깊이 생각하고, 숙고하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약할수록 우리는 속사람을 강하게 할 말씀 묵상이 더 필요하다" <조지 뮬러의 전기〉, 139~140…
기도와 믿음의 생애로 전 세계에 알려진 사람이 실제로는 말씀의사람이었다. 이것이 그의 성공의 이유였다. 그는 말씀의 사람이 됨으로 성령님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 적용과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샌더스가 살아남은 이야기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는 그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할 수 있는 관계인가?
2. 예수님을 아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에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3. 하나님의 율법이 성령님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생활 양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4. 하늘에서 루시퍼가 만난 문제는 하나님의 품성이 아닌 그분의 능력을 갖고자 열망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문제이지 않는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5.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감각적인 체험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던 때가 있었다면 그 경험을 함께 나누어 보라.
6.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것이라면 왜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데 그토록 시간을 내지 않는 것일까?
7.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을 다시 읽어 보라. 당신의 삶에서 “능력을 갖추게" 혹은 “온전케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라.
8. 헤리 음한도처럼 매일 아침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9. 오늘날 조지 뮬러처럼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