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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속프란치스코 야고바형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세베리노
고려궁궐 앞에 있는 강화본당입니다.
강화가 천주교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의 통로는 육로뿐이었다. 하지만 육로의 경비와 기찰(譏察)이 심해지자 해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1866년 병인(丙寅)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나 현재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진무영(鎭撫營)에서 최인서(崔仁瑞, 요한, 애오개 회장, 59세), 장치선(張致善,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세),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세) 등이다. 특히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0,000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중 한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으로 탈출시키고, 서양 배를 불러다가 신교(信敎)의 자유, 남은 교우들의 구출, 성교(聖敎 : 천주교) 전파 등의 목적으로 상해(上海)까지 다녀 왔다는 죄로 처형되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까지 성직자의 보호와 신교의 자유,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갑곶나루터(甲串津頭), 일명 '막구터'에서 목을 베어 말뚝에 올려 놓아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진무영(鎭撫營)은 조선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며, 동시에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이기도 하다. 1700년(숙종 26) 강화부(江華府)에 그 본영을 설치하고, 1779년(정조 3) 통어영(統禦營)을 병합하였다가 1789년(정조 13) 다시 분리하였다. 특히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외국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여 쇄국정책을 쓴 당시로서는 수도의 관문을 지키는 국방상 중요한 군영이었으므로, 그 유지를 위해 국가에서 포량미(砲糧米)라는 특별세를 설정, 군영의 경비에 충당하였다. 1887년(고종 24) 심영(沁營)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진무영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겸임하는 사(使:정2품) 1명, 중군(中軍:정3품) 1명, 진영장(鎭營將:정3품) 5명, 경력(經歷)이 겸하는 종사관(從事官) 1명, 총관(摠官) 4명, 파총(把摠) 10명, 초관(哨官) 63명, 교련관(敎鍊官) 10명, 기패관(旗牌官) 71명, 군관(軍官) 15명이 배치되었다.
일성록(日省錄, 1868년 5월22일자)에 "사학죄인 장치선, 최영준(일명 인서)이 진무영으로 압송되어 효수(梟首, 목을 베어 매달아 둠)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진무영은 지금은 고인이 된 성지 연구가 한종오(베드로)씨가 10여년 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성당 부근 농협 자리(현재 은혜교회 자리)를 진무영 터로 지목한 바 있다. 큰길에서 약 100m 성당 방향으로 올라오면 왼쪽에 은혜교회가 있고 이곳에 진무영 관련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서 약 200m 더 가서 있는 강화 성당 있는 곳까지 정도가 진무영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강화성당 구내에 이들 4명의 순교를 기념하는 현판과 아담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2004년부터 성지를 개발하기 시작해 아직 미흡하나 문헌 연구와 고증 작업을 하고 있다.
'좌우포청등록'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등에 따르면 장치선은 제천 배론 신학교 집주인이던 장주기(요셉) 성인의 조카다. 그리고 최인서는 서울 아현(애오개) 회장이다. 이들은 병인박해로 성직자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하자 생존자 리델 신부를 중국 천진으로 탈출시킨 데 이어 상해에서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했다. 리델 신부는 박해 참상을 프랑스 공사에게 알려 로즈 제독의 강화도 출병(병인양요)을 촉발한 장본인이다. 흥선대원군이 생각한 대로 천주교인들이 정말 서양배를 불러들여 국가를 위태롭게 하려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장치선이 중국에 다녀온 직후 재동에 사는 조주서와 나눈 대화록에 있다.
"서양배가 나라를 침범할 생각은 없나요?"(조주서)
"성교의 본뜻은 다른 사람의 나라를 빼앗는 법이 없고, 만일 성교가 널리 퍼지면 풍속 중 괴상한 것은 혹 바꿔지고 고쳐지는 법은 있소."(장치선)
한국 일만위 현양 동산
1. 취지와 목적
1)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 조형작업의 전개는 2000년대 환 태평양
시대를 맞아 한국 일만위 순교자들의 위대한 정신과 삶을 현양하
고 만방에 전함으로써 하느님과 선조 순교자들께 영광을 드리고자
위함이다.
2) 장한 선조들의 후예로서 그 얼을 이어받아 민족과 세계에 '동방의
빛"의 역할을 하는데 기여코자 함이다.
3)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주보 성인인 한국 일만위 순교자들을
본받아 미래의 성인이 되고 아울러 겨례와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 선
교사로써 양성되는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4) 그 정신을 특별히 조형작업화함은 인천 가톨릭대학교를 명실 상부
하게 교회의 심장과 겨례의 명소로 만드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2. 원칙
1) 유명과 무명의 벽을 헐기 위해 일만위 순교자들을 번호로 표상한
다.
2) 이 조형작업에는 1만명이 참석하며 1인이 일만위 순교자를 주보로
모신다.
3) 주보 성인은 봉헌 순서에 의해 정해진다.
3. 봉헌
1) 봉헌금은 각자 신앙과 정성에 따라 성의껏 봉헌하되 국내거주자는
100만원이상. 국외거주자는 미화 1천불이상으로 한다.
2) 봉헌자는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성인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
성덕의 길을 매진한다.
3) 본 사업의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이면 교구, 종교, 국가를 초월하여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4) 봉헌자는 게속 조형작업의 완성을 위해 , 또한 자신의 성화와 세꼐
복음화를 위해 기도한다
5) 이 조형작업에 관련된 모든일은 기도중에, 하느님과 순교 선조님
들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루어 지도록 한다.
이런 조건으로 건립된 일만위 현양 동산을 찾기 위하여 순례의 발길을 돌렸다. 지독한 폭염도 가라 앉는 일만위 순교 동산 , 명상의 숲에 앉아 각자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명주바람이 살풋하게 피부에 닺는 순간, 참으로 기분이 상쾌해 진다. 그리고 소나무 그늘 아래 나무판자 의자에 앉아 숲을 바라보니 금새 마음이 넉넉해 진다. 드러나지 않는 수 많은 순교자들 그들은 대부분 상반들이었다. 아니 그냥 백성이었으며 민초들이었다. 평생 주어진 운명대로 소박한 꿈을 지닌채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날 갑짜기 찾아든 사랑과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님의 목소리는 너무 근사하고 다정했다. 양반과 중인과 상반으로 짜여진 조선시대는 분명한 게급사회였으며 사대부와 중인과 상놈과 머슴이란 인간계급 구조는 불평등한 구조였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숨을 가진자는 누구든지 평등하며 그 평등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라 가르침은 인간계급의 혁명이었다. 진보적인 성향의 실학파들 이수광의 지봉유설 그리고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그 평등에 필요성에 대하여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며 정의와 진리 그리고 평등사상의 햇불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벽이란 걸출한 사람의 계획에 의하여 정약정, 권일신 등등 당대의 대학자들의 마음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천진암 강학을 통하여 한국의 천주교는 기초가 다져지기 시작 한다. 그리고 제국열강들의 강력한 통상개방 요구에 부딪치자 실권을 장악하고 했던 대원군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경복궁재건으로 궁핍해진 국가재정은 모든 것을 힘들게 하였다. 그리고 부동항을 위해 남진하려고 끈질기게 밀어 부치는 러시아는 대원군에게 커다란 골치꺼리였다.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정치적 관점으로 당시를 돌이켜 보면 박해의 단초는 남종삼 성인이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의 고민을 간파한 승지 남종삼은 대원군의 거처 운현궁을 찾는다. 그리고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프랑스나 영국을 끌어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프랑스제독과 만남을 주선 하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그 후 시정에는 고약한 소문만 떠돈다. 대원군이 외국 오랑케들과 야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던 그 사실은 결국 대원군 귀 까지 들린다.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리게된 대원군은 천주학쟁이들에게 철퇴를 내린다. 박해는 그래서 시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였다. 당시 모든 가치인 역사를 통하여 바른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추악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은 자꾸 사려속으로 자신을 몰아 넣고 있었다. 그 때 거친 모시 올처럼 거친 바람이 잣나무 밑등을 올려 부치고 달려왔다. 정신을 차린 후 다시 트레커들에게 순례의 시작을 알렸다.
민초들의 줄무덤 앞에서 일행은 깊고 깊은 숭고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올려 드렸다. 물고기 형상의 석물을 보면서 사부님께서 만드신 작은자 몫, 포르치운쿨라가 연상되었다. 떡갈나무숲에 있던 아주 작고 작은 경당 그 경당은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베네딕도 수도회 소유였던 작은 경당을 사부님께서는 물고기 한광주리를 주는 조건으로 빌리신 것이다. 무소유와 무 정주의자이신 사부님께서는 어느것 하나 소유를 하지 않으셨다. 경당소유자 수도회에서는 당시 빛과 바람과 공기마저도 타락했다하여 완전 봉쇄를 주장하며 수도원을 봉쇄적으로 운영하였지만 사부님께서는 달랐다. 봉쇄되었던 경당에 벽을 헐어 창문을 만든 후 자연과 소통을 중요시 여기신 것이다. 인간도 하느님의 반영이라면 자연의 온갖 것들 또한 하느님의 숨이 가득찬 반영이기 때문에 형제라 보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줄무덤 앞으로 자리를 옮겨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리를 옮겨 망나니 칼에 참수를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돌형상물 앞에 모여 사진을 찍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만난 십자가의 길, 오전 갑곶성지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은 관계로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간결하게 적어 놓은 각처마다 설명에 분명함이 좋아 앞 몇처를 찾아 읽어 보았다. 촌철살인처럼 적어 놓은 어휘가 생각의 폭을 넓게 잡아 준다. 언어란 때에 따라 신묘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면서 생각의 폭 또한 넓게해 주는 능력이 있다.
일만위 순교 현양탑 앞에 나란히 섰다. 정 끝을 날카롭게 다듬어 일만개를 쪼아 탑의 표면을 만들었다는 탑이다. 그 한점 한점이 민초의 신분으로서 평등과 천주의 사랑을 실현하고 자 했던 고단함과 붉은 순교피의 점 점인 것이다 우리는 행동이나 의식의 출발점을 찾을 때 한 점으로 시작하게 된다. 무엇인가 점에서 출발하면서 생각의 방향으로 임의 선을 긋게 된다. 그리고 잠시 쉬는 순간 또하나의 점이 생긴다. 점과 점 사이의 선을 우린 면이라 말 한다. 면과 면이 여러개 만나게 되면 비로서 공간이 생기게 되는데 그 공간이 바로 우리들의 삶에 공간인 것이다. 나의 삶 안에 천주님의 공간을 세우기 위한 결실로 가는 과정이 바로 순교의 역사였던 것이다. 현양탑 주변으로 석양 빛 찾아 든다. 조금은 느릿함을 느낄 수 있는 빛의 색채에서 분명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행들은 일만위 현양 성전으로 자리르 옮겼다.
여름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성전, 선홍빛 바닥 마감이 순교를 뜻하는 빛과 같다. 편안한대로 평화와 자유의 자세로 각자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추수렸다. 그리고 성당에 물러나와 일만위 현양순교 동산 솟을대문 앞까지 이어진 박해시기 내용들을 형상화하여 만들어 놓고 그 설명을 동판에 새겨 놓았다. 그 곳곳을 참관하며 서로 돌아가면서 읽고 기도를 함께 드리기 위하여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 황영진 세레자 요한 형제님께서 봉독하시고 다함께 기도를 ~~~
이어서 박순옥 수산나 자매님께서~~~~
김문규 도미나 자매님도 ~~~
내림 길에 만난 출렁다리, 동심은 어른들도 접근성이 가능한 마음이다. 즐거워 하는 모습에서 덩달아 동심이 출렁거린다.
일만위 순교 현양 동산 참례를 마친 후 주님의 품안에 안겨 안녕이란 제호를 마음에 새기며 웃음으로 단체사진을~~~~ 그리고 차에 올라 성직자도 결혼 할 수 있다는 것 빼고는 전례가 같은 온수리 성공회 천주성당을 찾았다. 그리고 영국의 국교가된 역사를 반추하며 사색의 길을 모색하였다. 국왕의 욕심이 일으킨 변형된 종교, 그러나 원류는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1900년도에 건축된 천주성당, 한옥의 짜맞춤의 형식을 빌려 건축되었다. 교회최초 미사는 마을회당에서 시작한 것이 종교의 역사다. 한옥성당 곳곳에 건축기법의 중심은 바실리카 기법이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온수리 천주성당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교회법에 따라 특정 교회 건물들에 붙이는 명예로운 이름. 특별히 역사가 오래된
교회이거나 위대한 성인, 중요한 역사적 사건, 또는 정교회에서 전국 총대주교 등과 관련을 갖고 있어 국제적인 예배 중심지
역할을 하는 교회에 그 이름을 붙인다.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붙은 교회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며, 특히 교황·추기경·총대주교를
위해 대제단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와 특별 사면권이 있고 이러한 특권들 때문에 바실리카는 지역 관할권을 넘어 국제적 지위를
갖기에 이른다.
건축학에서 보면 초기에는 '바실리카'라는 말이 고대 로마와 그리스도교 시대 이전 이탈리아의 시장, 관공서, 지붕이 덮인
야외극장, 강당 등 큰 지붕이 있는 공공건물을 가리키는 데 쓰였으나 점차 특정 형태를 지닌 건물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내부가
끝에서 끝까지 텅 빈 강당으로 되어 있는 직4각형 건물로서, 대개 늘어서 있는 기둥들로 구분되는 아일(側廊)들이 딸려 있고(큰
건물의 경우는 기둥들이 내부 가장자리를 빙 둘러 서 있음) 한쪽 또는 양쪽 끝에 올라설 수 있는 연단이 있다.
고색 창연한 100 년이 넘는 천주성당에서 잠시 머물면서 공식적인 성지순례는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 행보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바람처럼 자유롭게 자연속을 걷는 일 이다.
그리고 트레킹 목적으로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를 찾았다. 단군과 단군의 세 아들이 함께 쌓았다는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서 당시 절의 이름은 진종사 였습니다. 그러다 고려시대 충렬왕 왕비인 정화궁주가 경전과 옥등을 시주함으로서 전등사(傳燈寺)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옆 함허동천 가는 길에 정수란 절, 또한 오래된 절이다. 대웅전 문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통나무를 깍아 만든 화병과 꽃 줄기와 꽃으로 만들어진 문 살은 이름답기 그지 없다. 목수가 벌어 놓은 노임을 갖고 달아 난 여인 때문에 고통을 당한 목수는 그 여인에 대한 복수 목적으로 나무로 여인 전신을 만들어 추녀마루 사이에 끼어 넣었는데 그 추녀는 바로 전등사 대웅전 추녀다.
무거운 절 지붕을 받치는 고행을 만들어 여인의 악행에 앙갚음을 한 것이다. 또한 나부(裸婦)의 모양으로 추녀끝에 쪼구리고 앉아 불경을 듣으며 착해지기 바랬는지도 모른다. 전등사는 역시 고찰이었다. 수백년 역사를 지녔을 나무가 가람을 더욱 더 깊은 역사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감로수를 한 모금씩 마신 후 가람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오늘 순례 발걸음의 종착지인 동막으로 향했다.
죽림다원의 모습이 여유롭고 마당까지 퍼져 나오는 차향이 길손의 발걸음을 잡아 끈다. 정숙함과 여백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산사의 전체 분위기다. 산의 세력이 한풀 꺽인 아늑한 자리에 물이 있고 바람이 잘 드나 드는 곳이면 바로 절이 터를 잡았다.
풍광이 수려하다. 그리고 지붕의 선을 산능선과 일치 시켰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전과 채를 구별하여 높 낮이를 다 다르게 구성하면서 가람을 배치한 것이 우리나라 산사의 특징이다. 그리고 마당이 넓어 동선이 아름답다. 산사의 백미는 역시
자연속의 여백이란 점이다. 한문에 치(峙)란 단어가 있다. 산에 기대어 있는 곳이 절이란 상형문자다. 우뚝할 치자다. 우뚝한 산속에는 절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산사가 산을 누르는 적은 없다. 오히려 주제인 산을 돕는 부제의 역활을 하는 것이 바로 산속의 절 모습인 것이다. 충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순간이다. 부족함, 그 부족함이 바로 사색으로 이끄는 원동력이고 히느님께서 주신 인간가치의 중심 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족함으로부터 발생되는 고통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눔의 실천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에게 주는 사랑이다. 가끔 다가 감을 잠시 멈추고 한발 뒤로 물러서서 살피는 시간을 갖으며 종교적 사려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비로서 보이는 것이 많다. 혜안을 얻으려면 명상과 기도속에 자신을 머물도록 해야 한다. 비탈진 산사를 나오면서 얻은 마음이다. 동막으로 떠나면서 차창에 비친 정족산성 산그늘을 다시 찾았다. 쉼과 마음의 여백이 그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