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꼭대기 외딴 집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6-07-25 22:10:06
“산꼭대기에 외딴 집 한 채가 있는데 거기 한번 가보도록 하지요. 지인이 살다 나한테 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중인데”
날이 새자 백당나무님이 들뫼풀 회원들에게 함께 가보자고 했던 산위의 외딴집을 찾아가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어젯밤 물안뜰을 빠져 나갔다 돌아온 떡갈나무님 가족과 강선생 가족, 억새님, 백당나무님, 쑥부쟁이님, 이렇게 11명이 이동을 했습니다. 외딴집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산위에 외딴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산위의 외딴집, 상상만으로도 산자락을 들썩거리만치 요란스럽게 우는 뻐꾸기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뜨락앞에서 다소곳이 고개 숙인 보랏빛 뻐꾹채 한 쌍이 일행을 맞이할 듯했습니다. 졸졸 흐르는 산골짝의 개울물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산길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온통 싱그러운 냄새뿐이었습니다. 비바람에 부대낀 잡목들과 몇 해를 견디며 썩고 썩은 낙엽이 뿜어내는 냄새에 숨이 막혔습니다.
산길에서 만난 들꽃들, 노루오줌과 까치수영
산길 곳곳엔 가끔가다 때깔 고운 얼굴을 선보이는 들꽃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노루오줌과 까치수영, 비록 이름은 희환하지만 처음 본 들꽃들이 이렇게 마음을 설레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노루오줌
노루오줌은 노루가 오줌을 싸고 간 곳에서 꽃이 잘 피거나 뿌리에서 노루오줌 같은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아주 오랜동안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까치수영은 카이젤수염처럼 보여 수염으로 부르다가 "수영"으로 변했고 까치 깃털처럼 희어 까치수영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데 개꼬리를 닮아 “개꼬리풀”이란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들꽃 이름을 두고봐도 들꽃에 이름을 붙이게 된 연유는 그리 간단치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까치수영
나와 함께 함께 올라오던 억새님은 마치 들뫼풀 회원답게 붉나무를 붙잡고 옻나무와 구별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옻나무와 붉나무는 비슷한데 구별하는 법이 있어요. 줄기 날개 부분과 잎이 가을이 되면 붉게 물이 들고 또한 꽃대가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 맛을 보면 소금처럼 짠데 바로 그 나무가 붉나무입니다”
붉나무는 가을에 장작불처럼 잎이 붉어 '불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수수알같은 열매에 덮혀 있는 흰가루가 소금처럼 짜서 '염부목'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옛날 소금이 귀하던 시절에는 이 열매로 간수를 짜서 두부를 제조했다고 하니 나무에서 나는 소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억새님이 회원들에게 붉나무와 옻나무를 구별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억새님은 나에게만 설명하는 것이 아쉬웠던지 아이들과 올라오는 몇몇 회원들을 세워놓고 똑같은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언뜻봐도 적막한 산속에서 풀꽃 강좌를 연 기분이 들었습니다. 회원들 모두 억새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두 눈을 반짝거렸습니다. 아주 유익한 시간입니다. 주변에 흩어져있는 들꽃이나 나무를 그냥 눈길로만 스치며 오르는 것보다 가끔씩 그것에 관한 상식을 알려준다면 모임에 달려왔던 길이 헛되지는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자구만 멀어지는 억새님의 설명을 한 귀로 들으며 몇 발짝 올라갔더니 저 멀리서 백당나무님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습니다. 백당나무님은 우후죽순 산길을 뒤덮었던 잡목들을 낫으로 쳐내며 어렴풋이 산길을 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잡목들이 고꾸라지며 뿜어내는 수액냄새에 숨이 막혔습니다. 산길 주변으로는 한무더기 별들을 뿌린듯한 개망초꽃들이 지천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드문드문 달개비꽃 몇 개도 보였습니다. 무더운 햇살과 후덥지근한 바람이 숙성시켜 만든 냄새가 개망초꽃들과 달개비꽃들에 달라붙어 후끈 올라왔습니다. 민중의 꽃과도 같은 개망초꽃, 남이 돌보지 않아도 있는 듯 없는 듯 꽃을 피우다가 한 해를 마감하는 그 의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탁의 벼슬처럼 성난 듯 꽃잎을 펴들고 있는 보라빛 달개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외딴집 부근에서 내려다본 방동저수지
닭장 옆 눅눅하고 습기가 찬 곳에서 꽃을 잘 피운다 하여 ‘닭의 장풀’ 이라고도 하는 달개비는 그 척박한 환경을 뚫고서도 앙증맞은 꽃을 피운다니 새삼 그 의지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백당나무님이 만든 산길을 따라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올랐더니 대나무숲에 가린 외딴집 한 채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백당나무님이 어제저녁 회원들에게 알려준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돌배나무와 산나리꽃이 한 가족을 이룬 외딴집 마당
외딴집은 대나무밭과 소나무밭 그리고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적막한 산에서 오직 바람소리와 햇살만을 벗으로 삼아 자란 탓인지 산새들이 슬쩍 앉아도 나무들은 푸르른 잎새소리를 냈습니다.
오랜 세월에 부대낀 탓으로 외 외딴집은 돌풍만 몰아쳐도 폭삭 내려앉을 것 처럼 위태롭다
낡고 허름한 외딴집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돌풍만 몰아쳐도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쓰레트 지붕과 그것을 이고 있는 기둥, 오랜 세월에 뒤틀린 문짝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채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이 외딴집은 '물안뜰'의 쓰레트집보다 더 낡고 오래돼 보였습니다. 이것을 봐도 자연을 친구로 삼고 유유자적하고 싶은 백당나무님의 여유로운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외모부터 그런 면을 풍겼습니다. 희끗희끗 턱을 뒤덮은 턱수염과 느릿한 말투, 털털맞은 웃음이 세련되고 깔끔한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아보였습니다. 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외딴집 구석구석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만 아니리면 집을 조금 더 손보고 사는데는 하등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외딴집이 움막처럼 보이지만 유유자적하기엔 제격이다
시끄러운 차 소리와 번잡한 문명에 시달리다 보니 이 적막한 외딴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확 트였습니다. 잡풀들이 우후죽순 솟구친 좁은 마당가엔 돌배 몇 개가 열려있는 돌배나무가 서있고 키가 컹충한 산나리꽃대가 길쭉한 꽃봉오리를 앙다물고 터질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뜨락엔 아직 꽃을 피우지 않는 개당귀도 몇 포기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람 한줄기 조차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꽉 들어찬 대숲이 집을 두르고 있어 너무나 아늑했습니다.
자주달개비
문명과 차단된 이 외딴집에서 잠시나마 유유자적하고 싶었습니다. 직장이 없다면 딸린 식솔이 없다면 홀로 이 외딴집에서 시를 읆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외딴집 풍경을 마음속에 집어넣고 바깥에 나가 멀리 아른대는 방동저수지를 굽어보고 있었더니 들뫼풀 회원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대숲을 타고 흘러넘쳤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갔더니 바로 마당가에서 마를 캐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마뿌리를 캐며 화합을 다지다
백제의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에 반해 서울의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동요를 부르개 했다는 바로 그 마였습니다. 한없이 넝쿨을 뻗어 나무를 타고 오른 마뿌리를 캐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땅속 깊이 묻혀 있는 탓에 외딴집 뜨락에 놓여있는 괭이까지 동원하여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한참을 파 들어가자 고구마처럼 길쭉한 마뿌리들이 주렁주렁 박혀있었습니다. 뿌리가 다칠까 흙을 파내는 회원들의 손길이 떨리는 듯했습니다.
땀을 흘리며 마뿌리를 캐는 억새님과 강선생
마를 하나씩 캐낼 때마다 번들번들 땀에 젖은 얼굴을 한 채 환히 웃는 회원들의 얼굴에는 뿌듯함의 미소가 흘러넘쳤습니다. 그러나 맛은 생각보다 거북했습니다. 하산을 하다가 산골짝의 맑은 물에 마뿌리를 씻는둥 마는둥 하다가 한 입씩 깨무는 회원들, 나도 한 입 깨물었더니 혀가 달아날 듯 입천장이 미끌거렸습니다. 맛 또한 비릿했습니다. 이런 마가 어디에 좋은지 남자회원들은 맛나게 깨물어 먹었습니다. 수많은 효능 중에서도 유독 정력에 좋다는 것만 알고 있는 듯햇습니다.
“여보 많이 먹어 밤에 자지 않고 기다릴게”
훤히 벗겨진 앞이마에 그나마 몇 가닥뿐이 없는 머리칼을 새꼬리처럼 뒤로 넘긴채 정신없이 마뿌리를 깨물어먹는 떡갈나무에게 툭 던지는 진달래님의 말이 꿀물처럼 달콤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