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0일 ~ 14일
북쪽 베르흐얀스키 주를 다녀왔다.
야쿠티아 공화국에는 약 78개의 음악학교가 있는데 상급기관인 야쿠티아 국립음악원이 학교들을 도와준다.
도와준다기 보다는 지방 음악학교의 우수한 학생을 뽑아서 우리학교에서 교육시킨다.
보통은 담당교수들이 가지만 ... 북쪽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굼하여서 나도 따라갔다.
야쿠티아 공화국은 인구는 많지 않지만 영토는 남한의 33배 가량된다.
그래서 북쪽으로 가는 항공료가 한국 가는 항공료와 비슷하다.
학교 출장으로 갈 경우에는 항공료는 물론이고 북쪽은 비싼 숙박료와 식비까지 문화부에서 지원해준다.
또 출장비도 따로 입금해 주기에 돈받고 여행가는 셈이다.
사실 평교수가 가는 것이 맞고 또 아이들을 지도하는 전문가가 가는 것이 맞지만 야쿠티아는 조금 느슨하다.
그런데 이유를 붙이자면 외국에서 온 학교의 부총장이고 또 유명 지휘자기에 명분을 맞추면 되는 것이다.
야쿠티아(사하공화국)에는 35개 가량의 주가 있는데 하나의 주의 영토가 남한 영토와 비슷하게 넓다.
비행거리는 1.000km ~ 2.000km 지만 산이나 강으로 길이 막혀있기에 야쿠티아는 거의 비행기로 다녀야한다.
비행기는 낡았고 또 시끄러워서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행기는 짐칸이 따로 없고 그냥 앞자리에 승객들의 짐을 싣고(덮어두고) 승객들은 뒤로 앉힌다.
이 여자는 몇일전에 야쿠츠크 병원에서 아기를 낳고는 일주일도 안된 아기를 데리고 비행기를 탓다.
아기를 낳고 바로 외출을 하거나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시아 여자들에게는 위험한 듯 한데 ...
시베리아 북쪽은 큰 병원이 없기에 비행기를 타고 야쿠츠크로 나와서 ...
비행기는 문이나 창문등이 깨져서 조금은 불아해 보였다.
비행기가 낡아서 너무도 시끄러웠다.
돌아갈때도 이 비행기를 탓다는 것을 알게 된것은 깨진 문을 보면서다.
물론 여름에는 배를타고 또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위로 자동차가 다니지만 중간중간에 집들이나 호텔이 없기에
- 화물을 나르는 분들은 일주일을 강위로 이동하는데 - 트럭에서 숙식을 해결해야한다.
당연히 중간에 주유소가 없기에 기름은 넉넉히 준비해야하고 혹시 차가 고장나면 스스로 고쳐야한다.
겨울에는 영하 50도를 오르내리기에 시동은 계속 켜 놓아야하며, 씻는 것은 눈으로 해결해야한다.
스탈린이 기차역으로 사용하려던 건물이다.
1950년 부터 12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돈을 낼뿐만 아니라 일을 마치고나서
스스로 이곳으로 달려와서 돌을 하나씩 쌓아서 만든 건물이다.
공연장인데 사연이 있는 건물이다.
스탈린은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쁜일을 많이 했지만, 시베리아에 관심을 가진것은 칭찬할 만하다.
야쿠츠크에서 동북쪽 마가단까지 몇천키로의 도로를 닦았으며 북쪽산악지역에 길을 닦으려고 했다.
온통 돌로 돞여있는 산악지대에 도로를 닦고 또 기차까지 연결하는 구상을 하였다.
완성을 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계획은 정말 대단했고 환상적이었다.
스탈린은 시베리아에 도로를 닦는(많은 사람들이 죽음) 함난한 일에 죄수들을 투입했다.
그는 그냥 지도에 그림을 그린후에 줄을 치기만 하면 무조건 해야하는 식이었다.
요즘처럼 시베리아에 도로를 닦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것은 도져히 불가능 합니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이 워낙 무식하게 밀어 붙이니까 누구도 거역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탈린이 잘한 일은 예술과 외진곳을 배려한 정치 같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살기힘든 시베리아 지역사람들에게는 거의 3배의 월급을 주었기에 불평이 없었다고 한다.
도리어 시베리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야쿠티아 북쪽은 모든 물자나 생필품을 비행기로 날아오기에 비싸고 또 신선하지 못하다.
가끔 강길을 따라서 생필품을 날으지만 겨울의 험난한 산길도로는 위험하며
또 특히 4월이나 5월에는 강물이 얼기에 차들이 빠지기도 한다.
추운 베르흐얀스키 지역도 봄이오면 꽃이피고 열매가 열린다.
베르흐얀스키 주의 수도는 베르흐얀스키 였다.
그런데 역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옆으로 옮겼지만 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여서
중심도시를 바타가이로 옮겼다고 한다.
베르흐얀스크는 한때 영하 69도를 찍으면서 세계에서 최고로 추운 지역이었는데
어느날 야쿠티아 동북부 "오이미야콘"이 영하 71.2도를 찍으면서 최고롤 추운 지역 타이틀을 빠았겼다.
그러나 이 지역은 9월초순에 눈이 내릴만큼 추운 지역이다.
역사적인 사진들
포장된 길은 없고 ...
45km를 한시간 가량 달려가니 강이 나왔다.
완전무장을 하고아드으차에서 배를 타고 1시간 20분(50km) 정도 달려가니 집이 3채밖에 없는 외딴 마을이 나왔다.
말이 50km 지 진눈깨비가 날리는 차가운 강을 달리는 것은 전투였다.
배로 80분 걸리는 이길을 겨울에는 - 강이 얼기에 - 강위로 자동차를 달리기에 40분에 도착한단다.
작은 배에 4명이 탔는데 덮게도 없고 그냥 바람을 바로 맞으면서 달렸다.
(왜 그들이 두꺼운 외투와 모자를 준비해 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에서는 산을 오를때 아래와 같이 완전히 준비하고 출발한다.
불편하지만 따스해야하고 또 가다보면 물이 있는 곳을 지나가야하기에 장화를 신어야한다.
양말 두겹
그위에 또 두꺼운 양말
장화가 미끄러지지않게 하기위한 천으로 만든부드러운 신발.
마지막으로 장화를 신는다.
아래처럼 물이 흐르는 지역을 지말때도 신발이 젖지 않음으로 ...
사냥꾼 비탈리(집주인)
우리는 산을 오르기 전날에 우리를 안내하는 사르다나(미술교사)의 별장이 있는 작은마을 사일륵에서 하루를 묶었다.
사일륵은 작은 마을로 벳사공과 사냥꾼 두집이 살고있는 외딴 마을로 가끔 곰이 나타난다.
비탈리는 전화는 물론이고 수도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에는 물고기를 잡고 겨울에는 호수에서 오리나 짐승을 사냥한다.
예전에는 곰도 사냥했는데 곰은 가죽외에는 돈 되는 것이 아니라서 사냥을 꺼린단다.
이쪽 나무들은 차가운 억센 바람을 맞아서인지 앙상했다.
첫번째 세르게이는 우리학교 피아노 교수.
두번째 다나는 바타가이 음악학교 클라리넷 선생인데 음악전문대학 졸업후에 월급을 많이 주는 북쪽으로 왔단다.
다나는 20대 중반인데 벌써 아니가 둘이다.
우리일행은 첫번째 마을(사일륵)에서 10시 30분에 배를타고 11시 10분에 신성한 산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11시25분 산으로 올랐는데 12시 45분 부터 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12시 49분 부터 평지가 나와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다.
우리를 안내한 사르다나의 어머니는 5명의 아들과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은 25명의 손자와 38명의 증손자가 있단다.
산을 오른후에 11일 밤에 다시 사냥꾼 비탈리가 있는 사일륵으로 돌아오기로 했는데 문제가 생겨서 돌아오지 못했다.
사일륵은 전화도 안되기에 비탈리는 밤새도록 개와함께 강가를 오가면서 부인(우리를 안내한 사르다나)을 기다렸단다.
다음날 낮 12시경 우리가 도착했더니 비탈리는 그때까지 집과 강가를 오가면서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걱정햇다고한다.
사르다나(미술교사)는 남편 비탈리(사냥꾼)보다 6살이 많다.
여자가 귀한 시베리아에서는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보였다.
사람이 귀하기에 두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서로 챙겨주었다.
천지에 깔린 풀 코치카는 말들이 좋아한단다.
이곳의 길들은 사람이 다니기도 하지만 거의 말들이 다니는 길이다.
비탈리가 키우는 사냥개 부르가는 누치가 빠르고 용명해 보였다.(부르가는 시베리아의 눈보라를 동반한 돌풍 이란 뜻이다.)
한번은 사르다나가 버섯을 캐고 있는데 멀리서 곰이 사르다나 쪽으로 오고 있었단다.
그것을 본 부르가는 손살같이 달려가서 새끼곰을 공격하더란다. 그러니까 새끼곰은 달아나고 부르가는 계속 새끼곰을 좇아가면서
공격하니까 결국은 어미곰이 새끼곰을 데리고 달아나서 사르다나는 무사했다고 한다.
시베리아 사냥꾼들은 항상 개를 데리고 다니는데
만일 곰이 나타날때 꼬리를 내리고 겁먹는 개는 바로 총을 쏘아서 죽여 버린다고한다.
맹수에게 겁을 먹는 개는 더이상 사냥개로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
아드이차 강에서 고기도 잡고 손님을 실어나르는 아나톨리는 매스운 강바람과 싸워서인지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57세)
14시50분 사일륵을 출발하면서 비탈리에게 손을 흔들자 야쿠티아 사람들은 이별하는 의미라면서 손을 흔들지 말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을 오를때도 겸손해야 한다면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특히 신성한 산을 오를때는 큰 소리로 이야기 하지말고 오르기전에 빵을 바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살기가 어려울수록 샤마니즘(미신)은 강했는데 역시 인간의 고통은 신을 찾게 만드는 것같다.
엘레나 사진을 보면서 눈 부위가 꼭 예전 한국 여자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타가이에서 남쪽으로 558키로를 달리면 " 타팔리노에"가 나온다.
거기까지는 사람이 살지않는 동토의 땅이며 거기를 지나면 가끔 마을이 나온단다.
우리는 서쪽 62km 지점의 베르흐얀스크 음악학교를 방문했다.
학교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야쿠티아 식으로 음식을 한상 차려놓았다.
그리고 박물관과 베르흐얀스크 유명한 곳을 안내해 주었다.
말이 시찰과 지도하러 갔지 나는 그냥 여행만 하고 돌아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좀 더 채류하면서 학생들에게 유익한 이야기도 해주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미 돌아오는 티켓을 끊어 버려서 나는 잘 먹고 잘 놀다가 야쿠티아로 돌아왔다.
야쿠티아 북부 시베리아지역은 물이 귀하고 또 교통도 불편하여서 살기가 힘들다.
그런데도 이들은 손님 대접은 지극 정성으로 잘 해 주었다.
내가 배를 타고 움직일때 추울까봐 아래위로 외투를 새로 구입해서 준비해 놓았고 가는 곳 마다 식사를 잘 차려 주었다.
야쿠티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원수가 찾아와도 3일은 재워서 보내라"
왜 당신들은 싸우지 않고 서로 도우면서 잘 사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춥고 살기 힘든 곳에서 서로 도우지 않으면 함께 죽는다고" 하였다.
내가 야쿠티아 국립음악원으로 부임한지도 3년째다
그런데 누구도 나에게 찾아와서 동료를 험담하지 않았다.
가끔 일이 느려터져서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들에게서 여유있는 삶과 행복을 배우고 있다.
첫댓글 세상은 그래서 살만하다고 힘주어 말하는 거 아닐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