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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에이징하지 말고 러브에이징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할 텐데요. 우리 말씀 전하기 전에 우리 옆에 있는 분들한테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손을 들고 흔들면서 크게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가 이게 평소에 쓰던 단어가 아니라 영어라서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또 큰 목소리로 한번 가정에 옆에 있는 식구들한테 메리 크리스마스 크게 한 분 인사하겠습니다. 시작
메리 크리스마스 손도 흔드시고
감사합니다. 의학 전문 기자이자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 예방센터장인 황세희 씨가 모 일간지에 2019년도에 실은 글 중에 나이 들면 내 친구 안티에이징만 외치지 말라는 주제의 글이 있습니다. 한 번쯤 고민해 봐야 될 인생의 주제라고 생각이 돼서 스크랩해 놓았다가 마침 성탄절과 잘 어울리는 주제라서 말씀의 제목을 잡고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당연히 그분의 글들이 설교 서론에 조금씩 언급될 것입니다. 영어로 에이징은 우리 말로 하면 노화입니다. 우리가 아주 싫어하는 노화는 다른 말로 하면 늙어감입니다. 노화는 본능적으로 싫어해요. 그래서 늙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서 염색을 하고 또 새치를 뽑습니다. 주름을 제거하기 위해서 주름 제거술을 하고, 머리카락이 빠져 있는 것을 예방하려고 미녹시델과 같은 약을 먹고 바로 기도합니다.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서 시력 교정술을 하고 검버섯이 피면 심지어 피부 박피수술까지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노화를 불편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러나 노화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되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일단 성경도 노화를 되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말합니다. 자언 16장 31절 우리 같이 한번 큰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백발은 영화의 면류가 아니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백발을 영화로운 면류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길을 걸을 때 얻는 것이기 때문에 백발은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입니다. 그러니까 늙어감은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늙음이 늙어감이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젊음과 청춘의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늙음과 노년의 가치를 부여하던 전통사회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들어서면서 청춘과 젊음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인구의 노령화라고 합니다. 노령 인구가 많아지면서 생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 이후 노령 인구가 급증하면서 안티에이징 열풍이 대한민국에 불었다고 합니다.
근데 박피 수술을 하고 머리 염색을 하면 우리의 신체가 젊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젊게 보이는 것이지 다시 20대의 몸과 다시 20대의 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젊게 보이는 것, 나이가 들었지만 젊게 사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건강에도 좋고 가정에도 좋고 모든 면에서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 든 세대들이 노년을 잘 보내기 위해서 안티에이징에 열정을 쏟을 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세희 기자는 그래서 안티에이징 하지 말고 러브에이징하라고 합니다. 노년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안티에이징이 아니라 러브 에이징을 하라는 것입니다. 노화는 100세 시대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에 노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노년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다듬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소다가 마지막 때에 성도들의 믿음의 자세,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좀 더 축약하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외형이 아닌 본질에 더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도 백투더베이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가 좀 더 기본으로 근본으로 본질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회와 성도의 외적인 영역을 다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가 오래될수록 외형이 아닌 본질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신앙이 오래될수록 외형이 아닌 본질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이 우리 신앙생활의 외형적인 것들을 언급했다면 교회가 오래될수록 신앙이 오래될수록 외형적인 것에 집중해도 되지만, 오늘 본문은 외형적인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오래될수록 외형이 아닌 본질에 추구할 수 있어야 된다는 의미이고, 신앙이 오래될수록 외형이 아닌 본질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신앙이 오래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그게 신앙이 오래된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고, 역사가 오래된 교회에 보여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본문 중에서 8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말은 마지막 때가 될수록 러브에이징하라는 거예요. 이제는 외형에 치중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종말의 교회가 교회로 남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할 때이지 교회가 외형에 치중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체질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예요. 성도의 노년은 사랑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할 때 성도로서의 나이 듦, 늙음이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는 아주 어렵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먼저는 나이가 들면 성격이 온순해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기력이 떨어져서 온순해 보이는 거지, 실제로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람의 성격이 온순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뇌 세포가 노화가 되어서 뇌의 모든 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의존해서 판단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더 고집불통이 되고 더 배타적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노년의 러브에이징하며 살기가 어려운 거예요.
두 번째로는 뇌 세포의 노화로 욕망과 충돌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쉽게 분노하고 극단적으로 가족들끼리 또 동료들끼리 대립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보면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람이 온순해지거나 내면이 성숙해지거나 관계가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고,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력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달라요. 하나님은 본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과 결정은 다 사랑을 배경으로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사랑이 배경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실 때도 사랑이 배경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맺으라 하실 때도 사랑이 배경이에요.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뜨겁게 사랑하고 권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뜨겁게라는 단어는 쉬지 않고 사랑하라 꾸준하게 사랑하라, 성실하게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이 마지막 때에 성도와 교회를 견디게 한다는 거예요.
사랑이 마지막 때에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의 환란 가운데서 성도를 성도로 살게 하고, 환란 가운데서 교회를 교회로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인생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도 뜨겁게 사랑하고 하며 살아야 하지만, 신앙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인생 노년 나이가 드는 걸 말하고 신앙 노년, 신앙의 연수가 더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인생 노년을 아름답게 하고, 사랑이 신앙 노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허다한이라는 의미는 많은 수 가득 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많은 죄를 가득 찬 죄를 돕는다는 거예요. 죄는 범죄, 그리고 관역을 벗어난 것 위반, 특별히 집단적인 범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거죠. 사랑이 과녁을 벗어나서 살아온 삶을 덮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인생이 관역을 벗어나 산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불의를 행하고 악을 행하며 평생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간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아요.
내 사랑이 그런 사람을 덮을 수 있다는 거예요. 관역을 벗어난 산 인생들을 덮을 수 있다는 겁니다. 철학만이 권력이나 집단이 행한 집단적인 범죄를 덮을 수 있어요.
여러분 이 시대에 이 시대에 집단이 범한 범죄가 얼마나 많아요. 나라가 범한 죄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 모든 걸 덮을 수 있는 것도 사랑이에요. 우리가 왜 갈등이 있냐 하면 이 집단적인 범죄를 이 민족이 덮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시대와 시대가 충돌을 하고 계층과 계층이 충돌하고, 이념과 이념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스템으로 재를 덮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스템을 잘 만들어도 우리나라가 참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는데, 법을 만들면 사회가 건강해질거라 생각하는 법치 만능주의에 빠져 갔어요.
그래서 매일 법을 만드느라고 온갖 애를 다 써요. 이 법이 때로는 해결 기능도 있지만 오히려 그 법들이 더 큰 충돌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시스템으로도 죄를 덮을 수 없고요. 복지로도 죄를 덮을 수 없고요. 지식으로도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AI로도 죄를 덮을 수 없어요. 기계문명이 극대적으로 발달한다 하더라도 죄는 덮어지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죄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교회의 죄를 덮을 수 있는 것도 사랑입니다. 인생 노년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신앙 노년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종말을 견디게 하고 종말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러브에이징해야 하는 겁니다. 먼저 교회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교회의 외형에 집중해야 하는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실, 교회의 내면, 교회의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교회는 사랑이에요. 함께 한번 따라합니다.
교회는 사랑입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사랑이에요. 하나님도 사랑이고, 예수님도 사랑이고, 십자가도 사랑이고, 말씀도 사랑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사랑해야 될 때라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가 사랑받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본질인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됩니다.
이런 의미가 아니래요 아니에요. 사랑받는 일에 사랑받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게 아니에요. 나는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누가 나를 더 사랑해주라 이런 의미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거예요. 교회는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는 자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사랑의 본질이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어요.
근데 우리는 우리의 사랑은 온전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어요. 교회도 마찬가지 이 땅의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교회의 미래를 밝게 하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교회는 창립 연수가 커짐에 따라서 건물이 커져가고 사역이 커져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사랑이 커져야 가는 거예요.
큰 교회가 러브에이징을 제대로 했다면 크기만큼 도시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교회는 해가 지날수록 연수가 지날수록 창립 연수가 쌓여져 갈수록 형편없는 교회로 변해갈 것입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에 익숙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교회가 큰데 사랑에 익숙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본질을 놓치고 산 거예요. 외형에 교회의 크기를 키우기에 집중했고, 성가대의 규모를 규에 집중했고, 음향 일을 좋게 하고 시설을 좋게 하는 데 집중했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본질은 사랑하는 일에 치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교회인데 사랑을 못하는 거예요.
구미에서 가장 큰 교회는 구미를 가장 많이 사랑해야 돼요. 구미에서 가장 큰 교회는 구미의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사랑해야 돼요. 이게 정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도 자랑할 건 없어요.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죠.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은 사랑에 익숙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러브에이징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랑에 익숙해야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세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이거는 성도를 향한 메시지기도 하지만 이 편지가 교회를 향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교회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큰 교회가 사랑의 명령에 빨리 순종해야 하고요. 오래 믿은 성도가 사랑의 명령에 빨리 순종해야 됩니다.
직분을 가진 사람이 사랑의 명령에 더 빨리 순종해야 됩니다. 이게 바른 신앙이에요.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 덮지 못한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교회가 오래됐는데 사랑이 없다. 그건 지독스럽게 잘못된 거예요. 왜요? 본질을 추구하지 못했습니까? 큰 교회일수록 더 많이 도시와 영혼과 시대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고요. 오래 예수 믿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시대와 민족과 도시를 사랑해야 하고요. 교회 직분이 더 높을수록 사랑이 더 많아야 돼. 목회자가 사랑이 없다. 이건 치명적인 거예요.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이보다 더 치명적인 독약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요즘은 모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강단에 설교해도 제가 사랑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성도들이 모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교사들이 아이 앞에서 말씀을 가르쳐도 그 아이들이 자기를 교사가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를 다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학교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청년부가 안 되는 거예요.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 청년부들은 이제 찬양단만 남았어요. 그 교회 찬양단이 그게 청년부인 교회가 부지기수라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청년들이 교회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봤거든요. 교회 직분자들이 교회 목회자들이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 걸 봤어요. 그래서 그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생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 신앙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인생 노년을 아름답게 하는 방법도 사랑하는 겁니다. 안티에이징 하는 것이 아니라 러브에이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사랑에 익숙해져야 돼요. 나이가 80일수록 나이가 90일수록, 나이가 100세일수록 사랑에도 익숙해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움에 더 익숙하고 다툼에도 익숙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노인 노년들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때로는 분쟁의 씨앗이 돼요. 나이 많은 어머니 때문에, 나이 많은 할머니 때문에 분쟁의 씨앗이 돼요. 왜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예요. 러브에이징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러브에이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는데도 권력은 가졌는데도 돈은 가졌는데도 문제가 덮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인생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얼굴을 펼 것이 아니라 마음을 펴야 돼요. 주름을 펼 것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골드를 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인생 노년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시력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교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허물이 덮어지고 인생 문제들이 부각되지 않는 거예요.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 문제가 계속 부각되는 것은 젊게 살려고 외형적으로 젊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 노년이 아름다우려면 자신의 문제를 품을 수 있는 가정의 문제를 품을 수 있는 주변의 문제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사랑하기 위해서 더 많이 애를 써야 돼요. 나이가 들수록 지갑이 더 자주 열려야 되고요. 나이가 들수록 칭찬의 입술이 더 자주 열려야 되고요. 나이가 들수록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이 더 자주 열려야 돼요. 나이가 드는데 입술이 뾰족한 것은 치명적인 인생입니다.
성탄절인데 조금 말씀이 세죠. 이게 참 성탄이 아닐까요? 나이가 들어가는데 사랑이 없어요. 예수 잘못 믿은 겁니다. 부부가 결혼을 오래 했는데 사랑이 없어요. 잘못 산 거예요. 위안하지 마세요. 나이 들면 다 그렇습니다. 나이 들면 부부는 다 그렇고 나이 들면 인생이 다 그런 거예요.
목사님이 뭘 몰라서 아직 젊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목사님 뭐 모르는 거예요? 이렇게 마음 먹는 교인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회개하세요. 지금 회개하세요. 그건 말씀이 아닙니다. 왜곡이에요. 왜곡 사단이 여러분의 지위를 왜곡하고, 사단이 여러분의 경험을 왜곡하고 자라더니 사단이 여러분의 상처로 여러분을 왜곡한 것입니다.
인생 노년뿐만 아니라 신앙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도 사랑해야 됩니다. 인생 노년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신앙 노년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신앙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더 뜨겁게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 노년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은 문제가 제거되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은 문제가 덮어져서 아름다운 거예요.
여러분 누가 아름답다는 것은 문제가 덮어져서 아름다운 거예요.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문제가 덮어져서 아름다운 거고요. 가정이 아름다운 것은 문제가 덮어져서 아름다운 거예요. 어떤 가정이 아름답지 않느냐 문제가 덮어지지 않는 가정이 아름답지 않은 거예요. 남편의 문제가 덮어지지 않고 아내의 문제가 덮어지지 않고, 자녀의 문제가 덮어지지 않으니까 그 가정이 아름답지 않은 거예요.
신앙 노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 제거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인생의 문제는 제거되지 않아요. 유일한 길은 덮는 거죠. 덮는 것 인생의 문제는 어떤 위소도 제거되지 않지만 덮으면 보이지 않고 덮으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사랑하라는 말도 되지만 교회를 사랑하라는 말이 돼요. 예수 고리 믿은 우리들에게 신앙이 점점 나이 들어간 우리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라는 거예요.
뜨겁게 사랑하라는 거예요. 왜요? 그래야 덮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더 아름다워지고 따지고 보면 노년층이 많은 교회는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돼요. 제대로 러브에이징하고 살았다면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자랐다면 나이 많은 성도가 권사님들이 많은 교회가 가장 아름다워야 되는데 권사님들이 많은 교회가 가장 많이 싸워요.
나이 든 성도가 많은 교회가 더 싸워요. 왜요? 러브에이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아름다움은 끝까지 교회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을 때 아름답고요. 신앙의 아름다움은 영혼을 향한 사랑이 끝까지 남아 있을 때 아름답고요. 신앙의 아름다움은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럴 때 허물이 덮어져서 신앙 노년이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어떤 인생 노년도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허물이 덮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어떤 신앙도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허물이 덮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육자 가정과 또 은사님 청년 한두 명 외에는 없잖아요. 가정에는 많이 계시지만 좀 이제는 우리가 그렇죠 교회를 오히려 섬겼다는 아는 건 사랑이 그만큼 익숙해 졌다는 것도 같아야 돼요.
제가 가끔 제 목회 연수를 자랑하잖아요. 저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20살 때부터 개척교회를 섬겨서 지금 이제 312년, 이제 내년에 33년이에요. 제 나이가 아직 55세도 안 됐는데 벌써 33년을 제가 목회 현장에 서 있었어요. 그러면 저는 가장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요. 현실이 그런가요? 아니죠. 왜냐하면 러브에이징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놓치고 살았기 때문인 거죠.
그러면 저는 저는 이 땅에서 자녀들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여야 돼요. 내가 예수를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저는 모태 신앙이에요. 예수 믿은 지가 52년이에요. 그럼 저는 제 아내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되고, 내 아들과 딸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돼요.
근데 현실은 그런가요? 예수 안 믿어도요. 저보다 자식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예수 안 믿어도 저보다 부모 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예수 안 믿어도 저보다도 사랑이 더 많은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절기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시다가 이 땅의 생애를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 인생이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요? 아름다워질 수 없었어요. 예수님이 없었다면 제 인생도 취했을 거고 여러분의 인생도 취했을 거예요. 우리의 죄가 사해지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곳이 어디 있겠어요?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 죄가 사해지지 않았으면 우리 인생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할 수 있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기 때문에 그분 앞에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을 높일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셨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듯 우리도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가 아름다워지고요. 성도를 사랑하면 성도가 아름다워져요. 교회를 욕하면 미운 교회가 되고요. 성도를 미워하면 미운 성자가 돼요. 가족을 미워하면 미운 가족이 되고, 가족을 사랑하면 사랑스러운 가족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어떻게 사랑하셨어요?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노년에도 이 끝까지 사랑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60 70 80 90 100세가 되었을 때도 사랑이 여러분의 인생에 더 큰 주제가 되어서 남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생 노년도 마찬가지예요. 신앙 노년도 나이가 들수록 교회를 향한 사랑이 더 커져가고 그다음에 웹은 우리 가족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좀 그렇겠지만 일단은 저희 부모님은 다 현재 살아계시고 또 장로님도 다 살아계셔요. 그래서 아직 이제 좀 더 시간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믿음을 평가할 수 있으니까 일단 저희 외할머니를 보면 저는 저희 집의 장남이라서 어려서부터 친척들 집에 잘 좀 보내졌어요. 인사차 보내기도 하고 또 제가 저희 가문에서 가장 그래도 남자로서는 앞에 있어서 외할머니 집에 가 있기도 하고 뭐 이렇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노년에 본 저희 외할머니는 기도가 전부였어요. 기도가 기도가 전부였어요. 새벽에도 2~3시쯤 교회를 가셔서 새벽 기도가 한참 끝나고 제가 자면서 일어날 때쯤 되면 교회에서 돌아오셨어요. 그리고 저를 아침밥을 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물론 집에서도 말씀 읽다가 또 교회에 가셔서 한참 뒤에 또 오시고 또 마을 좀 이렇게 다니시다가 이제 연루하시니까 그렇게 노년을 보내셨어요.
그냥 뭔가 하려하지 않는데 큰 돈을 헌금하거나 막 사람들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셔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시는구나. 그때 제가 신학생이었거든요. 신학생인데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신학생이 새벽 기도 안 하고 권사인 본인은 이제 나이가 연로하신 본인은 새벽 기도 하는데 신학생이라는 외손주가 와서는 새벽 기도도 안 가고 자고 있으니까 근데도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제가 일어나면 아침에 밥을 해주셨어요.
돌아보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애쓰셨던 것 같아요. 교회를 평생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 꼭 말씀으로 성탄절날 이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좀 슬픈 성탄이잖아요. 찬양하는 사람들도 올 수 없어서 저희 아들이 찬양을 하고 슬퍼요. 그래서 저 오늘만큼은 제가 어느 때 성탄보다 찬 마음으로 말씀 전하고 싶어요.
여러분 인생 노년 끝까지 사랑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신앙 노년 끝까지 사랑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