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곧 성사다 ― 지금, 여기 계신 하느님
-조광호 신부님(인천교구, 은퇴신부)
13세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의 답은 단순했지만 깊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800년을 넘어 울려오는 이 말은, 20세기를 관통한 신학자들의 고백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칼 라너는 일상의 순간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고, 테야르 드 샤르댕은 우주 전체를 하느님의 몸으로 보았습니다. 다석 유영모는 모든 존재 속에 하느님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서로 다른 말과 언어로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전한 진리는 하나였습니다.
하느님은 저 먼 하늘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 조용히 머물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성당의 제단 위, 혹은 특별한 의식 속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사는 삶 그 자체 속에서 피어납니다. 아침, 가족과 나누는 작은 인사. 출근길, 스쳐가는 이웃의 미소. 저녁, 식탁 위 소소한 대화. 이 모든 순간이 이미 하느님이 우리에게 건네는 성사의 언어입니다.
성사란 본래 *성스럽게 만드는 것(sacra-facere)*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성스럽게 만드는 가장 작은 방법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하느님의 현존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버스에서 만난 노인의 눈빛, 길에서 스친 강아지, 창밖 흔들리는 나무 ―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숨결이라 느낄 수 있다면, 평범했던 순간은 이미 거룩한 성사가 됩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이 노래했듯, 자연은 하느님이 쓰신 가장 아름다운 성서입니다. 봄꽃은 부활을, 여름 숲은 생명을, 가을 낙엽은 내어놓음을, 겨울의 침묵은 기다림을 이야기합니다. 두미트루 스타닐로아가 말한 ‘우주적 전례’는 바로 이런 자연의 찬양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새들의 지저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흘러가는 구름 ― 우리가 귀 기울일 때,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하느님과 만나는 성소가 됩니다.
하지만 지금만 붙잡고 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수많은 과거의 켜켜이 쌓인 시간 위에 서 있습니다. 부모와 조상들의 눈물과 웃음, 사랑과 희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칼 바르트가 말했듯, 하느님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 역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은 단순히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 사건입니다.
라이문도 파니카가 말한 종교 간 대화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옆에 앉은 동료, 길에서 스쳐간 낯선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이조차, 모두 하느님께서 보내신 존재일 수 있습니다. 칼 라너가 말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기독교를 알지 못해도,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따르는 모든 이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빛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빛을 알아보고 존중할 때, 그 만남은 자연스러운 성사가 됩니다.
다석 유영모가 말했듯, 참된 신앙은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삶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일할 때는 정직하게, 쉴 때는 감사하며, 만날 때는 진심으로, 헤어질 때는 아름답게.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이미 하느님께 드려진 예배가 됩니다.
테야르 드 샤르댕이 꿈꾼 ‘신화된 우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스며드는 순간입니다.
성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앉아 있는 자리, 숨 쉬는 공간, 마음속 떠오르는 생각 ― 모두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오늘 저녁, 가족과 나누는 식사도 성사입니다. 친구와 나누는 진솔한 대화도 성사입니다. 혼자 바라보는 저녁노을도 성사입니다. 심지어 속상한 일로 흘리는 눈물, 하나님께 털어놓는 한숨조차 성사가 됩니다.
20세기 신학자들이 남긴 가장 귀한 유산은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 속에 숨 쉬고 계시다는 것. 우리의 평범한 삶 자체가 이미 거룩한 성사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 겸허한 깨달음의 출발은 모두가 당신 사유의 출발에 달려있습니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저 너머로의 시적사고*를 지닐 때 만이 그 성사는 주님의 은혜로 피어 날 것입니다
그 은혜로운 순간은 오로지 향기로운 은총의 꽃으로 당신의 삶은 향가릅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삶이 얼마나 깊고 은총으로 가득한지 당신이 깨달을 수 만 있다면 당신의 일상은 언제나 황홀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평범한 매 순간을 지나면 다시 찾을수없는 이 지상에서의 소중한 나의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남몰래 가슴설래는 마을으로 당신은 시인이되어야 합니다.
이제 당신이 이러한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면 당신은 지루하고 단조로운, 지극히 평범한 당신의 일상을 향기로운 의미로 가득한 성사(Sacrament)로 바꿔야 할 것입니다
*단 한순간 만이라도 온전히 당신 자신을 놓아 줄 수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ㅡ마이스트 에크하르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4세기 초 독일 신비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그는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현재를 온전히 살아갈 때, 신과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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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교리 신학원 다닐때 손희송 신부님(지금은 주교님이시만)의 성사론이 생각납니다.
'성사론' 교수님이셨는데 아주 쉽게 재밋게 강의를 하셨던 가톨릭 신학대와 교리신학원 교수신부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던 소중한 물건들,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이 '성사'라고
말씀 하셨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