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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관중과 포숙 (2)
옛날 옛적 요(堯)임금 시절,
허유(許由)라는 어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요 임금의 귀에까지 전해져 요(堯)는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리라 마음먹었다.
허유는 요 임금의 제안을 듣고 귀가 더러워졌다며 도읍을 떠나 영수(潁水)가로 와서 그 강물에 귀를 씻었다. 그런 일화를 지니고 있는 곳이 영수(潁水)이다.
회수(淮水)와의 합류점에서 서북쪽으로 120리 정도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영수 (潁水)가에 제법 잘 정돈된 포실한 마을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영상(潁上).
잘 발달된 수운으로 각지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작은 상업도시라고 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치수를 하기 전에는 주변 일대가 온통 늪지대였으나, 주나라 여러 대에 걸쳐 물줄기를 바로잡은 후에는 강 서편으로 드넓은 하남평야갸 끝간 곳 모르게 펼쳐지기도 했다.
춘추시대 초기, 그 곳은 정(鄭), 송(宋), 진(陳), 채(蔡)나라의 접경지대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관중의 성(姓)씨이다.
당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하게 구별되고 있던 시대였다.
피지배층에 해당하는 평민은 성(姓)도 씨(氏)도 없다.
있긴 있었으되 지배층에 의해 무시되었을 것이고, 기록 또한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오로지 제후, 경, 대부, 사족 - 즉 지배층들만이 자신들의 가계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오늘날과 비교하면 매우 불투명하고 임의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래 성(姓)은 혈족이요, 씨(氏)는 부족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라명이나 지역, 혹은 관직명이 성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 관중의 성이 '관(管)'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관씨의 뿌리는 멀리 주(周)나라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도 얘기했듯, 주나라 무왕(武王)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주나라를 중원 통치국으로 세웠다. 그런 다음 형제 및 친척들과 개국공신들을 각 지역의 제후로 봉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봉건제도를 채택했다. 제(齊)나라니, 송(宋)나라니, 노(魯)나라니 하는 것들의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주무왕(周武王)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다. 그 중 동생인 숙선을 관(管)나라 제후에, 숙탁을 채(蔡)나라 제후에 봉했다.
나머지 동생들과 친척들도 각기 다른 지역의 제후에 봉했음은 물론이다. 이때부터 숙선은 관숙(管叔)이라 불리었고, 숙탁은 채숙(蔡叔)이라 불리었다.
주무왕이 죽고 그 아들인 주성왕이 천자의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관나라 제후인 관숙 선(管叔 鮮)이 채숙 탁(蔡叔 度)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동생 무경(武庚)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관숙 선과 무경은 살해당하고 채숙 탁은 추방되었다.
이로써 관(管)나라는 170여 개 봉국 중 가장 먼저 멸망당하는 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관숙 선(管叔 鮮)의 후예가 살아남지 않았을까.
관중의 성이 바로 관(管)이요, 관나라 영토가 영수 유역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관숙 선과 관중의 가계(家系)는 뭔가 깊은 관계가 있을 듯도 싶다. 아니면 단순히 관(管)나라 땅에 살았던 보잘것 없는 백성이었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관중의 가계나 선조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질 않다. 가족관계나 어릴 적 일화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아버지 이름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사마천의 <사기>에,
- 어릴 적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또
- 노모가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관중하면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이름 하나가 있다.
포숙(鮑叔)이란 사람이 바로 그 인물이다.
본 이름은 숙아(叔牙), 숙(叔)은 자(子)이다. 셋째 아들이라는 뜻이다.
관중(管仲)이 포숙을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관중의 집안은 관중이 유년기나 소년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송나라나 채나라의 영토였을 영상을 떠나 제(齊)나라 수도 임치성으로 이주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때 관중과 포숙이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통하고 급격히 친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열국지>의 저자는 관중(管仲)의 재능과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걸출하고 총명이 출중했다. 널리 고금 서적에 통달하고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세상을 바로잡고 시대를 구제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사마천도 <사기열전>을 통해 관중(管仲)의 재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관중은 젊었을 적에 항상 포숙아(鮑叔牙)와 어울려 지냈는데, 포숙만이 그의 재덕(才德)을 잘 알아주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관중은 소싯적부터 매우 총명하고 영특하면서도 포부가 컸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로 특출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포숙만이 그의 재덕(才德)을 잘 알아주었다....'라는 대목은 관중의 재능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다지 신통치 않게 비쳤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관중(管仲)의 집안이 가난에 쪼들리는 형편이었던 반면, 포숙(鮑叔)의 집안은 상당히 유복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늘 함께 다녔고, 말년에까지 변하지 않는 우정을 간직하였다.
당(唐)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의 작품 중 <빈교행>이라는 시가 있다.
두보는 평생 불우한 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안으로 진출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으나 뜻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했고, 특히 굳게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는 이만저만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빈교행>은 이러할 때 지어진 시이다.
손바닥 위로 하면 구름이 되고 아래로 뒤집으면 비.
얄팍하고 가벼운 인심, 새삼 헤아릴 필요가 있을까.
그대는 아는가, 관중과 포숙의 빈시지교(貧時之交)를.
이러한 마음, 오늘날 사람들은 흙덩이 버리듯 하는구나.
이 시에 나타나고 있는 관중과 포숙의 빈시지교(貧時之交)를 두보는 몹시도 부러워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부러워함이 어찌 두보뿐이겠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초과학시대의 오늘날에도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보여준 우정은 변함없이 커다란 감동과 교훈으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