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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3부 - 둘째 아담, 기업 무르는 자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담은 창조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고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범죄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산 영이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산 영일 뿐더러 죄를 지은 인간들을 살려주는 영이시다. 우리의 시조인 첫째 아담 때문에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름답던 지구에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사망이 생겼으며, 산 영이었던 인간이 죄인의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이 계명을 어기므로 죄를 범하여 이 지구 땅을 잃어버리게 되고, 지구의 찬탈자인 마귀에게 땅뿐만 아니라 지구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빼앗기게 되자, 이 땅은 온통 사단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죄 때문에 지구의 인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고 지구가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자, 우리 인간들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구의 땅을 인류에게 도로 돌려주시기 위하여, 살려주는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1) 예수 그리스도 - 기업 무르는 자
유대인의 풍습 중에 영적으로 아주 깊은 의미를 주는 풍습이 있다. 그 풍습의 이야기는 룻기서에 나오는데, 룻기서에는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이스라엘의 풍습 중에 땅 무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업인 땅을 잃어버린 사람을 위해, 가난해서 땅을 판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대신 땅을 찾아서 돌려주는 기업을 무르는 풍습이었는데, 땅을 도로 찾아 기업을 물러 주는 친족을 기업 무르는 자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가 있는 단어가 곧, Redeemer(구속주, 구세주)이다.
이방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여 이스라엘로 따라왔다. 가난한 룻은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먹고 살게 되었다. 가난과 기근으로 기업이었던 땅을 다 팔았던 나오미와 룻은 기업을 물러 줄 누군가가 필요하였다. 그 당시 기업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 물러 주어야 했는데, 선한 보아스가 그들의 기업을 물러 주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더 가까운 친족이 권리를 양보했음).
보아스의 기업 무르는 일로 그들은 다시 땅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 룻이 하나님의 자손이 되었고,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이새가 태어나고, 다윗이 태어나고,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므로 룻이 예수님의 조상이 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주, 기업을 무르는 자이시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류가 죄 때문에 잃어버린 이 땅을 도로 찾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첫째 아담이 범죄하므로 빼앗기게 된 이 땅의 통치권을 사단으로부터 찾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땅을 물러 주는 자, 기업을 무르는 자 둘째 아담이 되신 것이다.
2) 기업 무르는 자가 되려고
1.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심
룻기서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업을 무르는 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은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어야 하였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주로서 우리의 빼앗긴 땅을 찾아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오셨는데, 예수께서 구속주, 기업 무르는 자가 되시려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셔야 했다.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관계는 형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혈육을 가지신 인성을 쓰시고 성육신 하신 것이며, 우리와 같은 한혈육을 가지신 형제가 되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다음의 성경 절은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2장 14~18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쓰시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께는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지 4,000여 년 후,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쓰시고 성육신 해서 오심으로 우리와 한형제가 되셨다. 곧, 인간의 타락한 영향과 인간의 유전 법칙의 영향과 인간의 연약성을 그대로 다 받으신 채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창조주이신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어떻게 도와주실 줄 아시기 위하여 우리와 한형제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한 번도 범죄하지 않으신 성령이 충만한 생애를 사심으로 우리의 모본이 되신 것이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 5:2).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렇게 예수께서 우리의 피와 살을 나누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기업을 물러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둘째 아담이 되신 것이며, 바울은 히브리 1장에 예수께서 다윗 자손의 혈통에서 나시고 우리와 한 혈통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2. 한혈육에 속하심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인성을 쓰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 성육신의 사랑을 명상할 때에 우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신비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그래서 바울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고 말했던 것이다.
로마서 1장 3절은 그의 조상들을 통하여 예수의 본성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한혈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히브리서 2장 16절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킹 제임스 한글 성경에는 이 구절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혹자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탈만 살짝 쓰신 것이고 그 속은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완전히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 인성을 쓰시고 오신 것도 사실이다. 한모양과 혈육을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언급하는 것이지 신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인성의 면에서 100% 인간이셨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할 수 있는 육신을 가지신, 그런 정서를 가지신 분이셨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또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인간의 모양만 가지셨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모양만 돌아가신 것인가? 고통의 모양만 있었고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으셨는가? 그런 사상은 도세티즘(Docetism)의 사상인데, 이것은 초대 기독교 당시의 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형상적이었고, 부활하신 후에는 영적인 몸, 즉 실제적인 몸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때 당시 이설로서 취급되었던 교리이며 사상이다.
성경에는 죄 자체가 되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겪으신 겟세마네와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속속들이 인간이 당해야 하는 죽음과 죄를 대신 지시는 고통을 당하셨고, 몸에 죄를 지셨다. 죄를 대신 진다는 뜻은 죄 자체가 되셨다는 뜻이다. 그 의미는 죄를 지었을 때 당하고 느끼는 죄책감,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불행한 마음, 죄를 지었을 때 갖는 소망이 없어지는 마음, 죄지었을 때 은혜가 없이 완전히 정죄 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정말 죄 자체가 되신 것이며, 정말 인간이 되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3. 한모양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가 숙고하고 연구하며 명상해야 할 신비한 주제이다. 우리가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와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신앙생활이 열렬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귀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인성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얼마나 많은 점에서 같았는가? 범사에서이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범사라는 말은 영어로 in every way인데, 이것은 모든 면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거론하는 것 말고 인성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으셨다. 신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감정 - 슬픔, 기쁨, 고뇌, 행복 - 을 느끼시고, 또 우리와 똑같이 육체적인 상황 - 배고프고 피곤하신 - 을 겪으셨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범사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느낌과 경험을 체험하셔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줄을 아시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우리도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한모양으로
히브리서 2장 14절의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는 구절에서 한모양이라는 단어에 관해 생각해 보자. 한모양이라는 단어를 연구하기 위해 신약에 언급된 다른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쓰인 성경 구절 중, 가장 명백하며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로마서 8장 3절이다. 성육신 하신 이유와 어떠한 육신을 취하셨는지를 이 성경 절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씀은 없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초기의 신학자들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표현된 킹 제임스 성경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때 예수의 육신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자연스럽게 해석하였다. 저명한 신학자인 카알 바드(Karl Barth) 그리고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J.A.T. 로빈슨(J.A.T. Robinson)과 같은 20세기 후반의 유명한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가지셨으며,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은, 우리와 같은 유전 법칙의 영향을 받은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인성을 공공연하게 지지했는데, 특히 쿨만과 볼트만은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에 대하여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양이라는 말을 빌립보서 2장 7절에 나타난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성경 절은 예수께서 신의 형상과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곧,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의 겉모습만 가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바울이 로마서 8장 3절(KJV)에 말한 대로 죄된 육체(sarkos hamartias)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의미도 아니며,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어떠한 인간의 죄에 참여하셨다는 의미도 아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쿨만은 종의 형체를 가져라는 뜻에 대하여 그의 주석에서, 종의 형체를 취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형체, 곧 인간의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의 형체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빌립보 2장 7절의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에서 사용된 likeness는 원어 Homoiomati라는 뜻으로서, 겉모양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4, 5절에 기록된 성경 구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실제적이고 완전하게 타락한 후의 인성에 참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많이 인용됐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 아래 나셨다는 말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것을 가리킨다. 또, 고린도후서 5장 21절도 그렇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를 비롯한 다른 바울의 편지서들을 이용하여 결론을 내리고 나서, 카알 바드(Barth)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본성은, 타락에 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본성과 동등한 것이었다는 구원의 진리를 연약하게 만들거나 불분명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처럼 되실 수 있었겠으며, 우리와 그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된 특징을 가지고 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잃어버리신 바 되었고 저주받은 상태 아래 있는 우리의 본성의 구체적인 형상 속으로 임하셨다. 그는 이 형상을 우리의 것과 다르게 만들거나 세우지 않았으며, 결백한 자로서 죄지은 것으로 되셨고, 죄 없으셨으나 죄가 되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그가 우리와 연합한 상태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이유로 그를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해서도 안 된다.
에밀 부루너(Emil Brunner)는 그의 Dogmatic에서 이와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는 그가 여자로부터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그가 진실로 인간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성공회 감독 J.A.T. Robinso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이러한 말씀들을 강조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한 복음의 위력을 소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대담한 문구들을 이상하게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방정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믿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 말의 뜻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지만, 예수님 속에는 신성의 충만하심이 함께 거하시므로 어떤 악한 감정이나 일과도 관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죄를 이기신 순결한 생애를 사셨다는 뜻이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기업 무르는 자로 이 땅에 오셨다.
인류의 조상 첫째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이 지구의 기업을 도로 찾으시기 위해, 주님께서 구속주(redeemer)로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인 형제가 되어 오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신성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은 우리를 놀라고 감격하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