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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상북도교육삼락회 원문보기 글쓴이: 아무따나
2012년 6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2년 6월15일(금)
장소 : 상주 일원
대구반월당(08:00 출발) - (96.6km.1시간30분) - 남장사(9:30도착.관람1시간.10:30출발) - (7.0km.20분) - 상주북천임난전적지(10:50도착.관람40분.11:30출발) - (2.1km.6분) - 왕산공원(산주복룡리석불좌상.위암장지연선생기념비.목사이후청간애민비.11:36도착.관람40분.12:16출발) -(점심.1시간. 9.2km.20분) - 충의사(1:36도착.관람40분.2:16출발) -(1.1km.4분) - 전 사벌왕릉.화달리삼층석탑(2:20도착.관람40분.3:00출발) - (3.3km.8분) - 상주박물관(3:08도착. 관람50분.3:58출발) - (0.8km.2분) - 경천대(4:00도착.관람1시간.5:00출발) - (2.4km.10분) - 상주자전거박물관(5:10도착.관람40분.5:50출발) - (93.8km.1시간23분) - 반월당(7:13분도착) * 상주자전거박물관 관람 후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상주보 관람
2012년 6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안내
남장사(南長寺)
남장사는 상주시 남장동 502번지에 소재하는 조계종 산하의 전통사찰로 상주 4장사(尙州 四長寺, 북장사, 갑장사, 승장사 - 현재는 없음)의 하나이다.830년(흥덕왕 5) 당나라에서 귀국한 진감국사가 개창하여 최초로 머문 사찰로 당시의 절 이름은 장백사(長栢寺)였다. 1186년(고려 명종16) 각원화상이 장백사를 남장사로 개칭하면서 중창하였다.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범패를 배워 830년인 57세 때 귀국하여 장백사에 머물면서 832년에는 무량전(현, 보광전)을 창건하고 범패(불교음악,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 노래)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급한 곳이다. 당시 의원에 환자가 모이듯이 구름같이 많이 모였다 하며, 이 범패는 판소리, 가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중의 하나이다.종전에는 경남 하동의 지리산에 있는 쌍계사가 최초 보급지로 알려 졌으나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 대공탑비(최치원이 지음)'의 비문에 상주 장백사로 되어 있어 상주 장백사가 범패의 최초 보급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주요 유물로, 철불 좌상(보물 990호)과 목각 후불탱화(보물 922호) 등의 불교 예술의 걸작품을 보존하고 있으며, 일주문은 지방문화재자료 442호(2003)로 지정되어 있어, 불교 예술의 보고라 일컬을 만하다.경내에는 1797년(정조 21)에 창건된 관음선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후불탱(보물 923호)을 보존하고 있다. 이는 화주승 '희선'이 1694년(숙종 20)에 북장사 뒤편 상연암에서 제작되었다가 181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북장사 사적기)당초 도지정문화재 58호로 지정되었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탱으로 평가를 받아 보물로 승격되었다. 이 목각탱도 종전까지는 1782년에 조각된 지리산 실상사의 '약수암 후불탱(보물 421호)'로 알려 졌으나 남장사 관음선원의 목각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노악산 기슭에는 1624년(인조 2)에 창건한 중궁암이 있다.
남장사 일주문(南長寺 一柱門.도지정 문화재자료 제442호.상주시 남장동 502)
남장사 입구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편액(扁額)에 ‘노악산 남장사(露嶽山 南長寺)’ ‘광서(光緖) 8년(1882, 고종 19),이라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양식은 일자형(一字形)에 정면 1칸(4m), 측면 1칸(2.6m) 형태로, 당초에는 자연석으로 낮게 쌓은 기단축대였으나, 근년에 장대석으로 다듬돌 쌓기를 하였고, 원기둥에 심방목(心枋木)을 받친 주심포(柱心包)에 3량가구를 걸고, 겹처마에 팔작합각(八作合角) 지붕을 한 건물로 금단청(金丹靑)을 하였다. 건물의 특색은 양쪽 둥구리 기둥 앞뒤로 방주(方柱)를 붙여 세우고, 다시 또 활주(活柱)를 고여서 중앙을 받치고 있는데, 그 주두(柱頭)가 용의 승천하는 형상이다. 전체적으로 건축 외형에서 균형감과 볼륨감이 있으며, 다포계(多包係) 건축수법도 매우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특히 보강재의 기능에 충실하면서 재치 있게 처리한 수법과 단면 결손을 없애기 위해 하나의 부재를 사용한 점이 돋보이는데, 마치 4마리의 승천하는 용이 지붕인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다. 조선후기의 건축수법과 조각기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후기 건축 및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상주 남장사 감로왕도(尙州 南長寺 甘露王圖.보물 제1641호.상주시 남장동 502)
1701년 탁휘(卓輝) 등의 화승이 그린 감로도로서 18세기의 감로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각 장면 옆에는 방제를 적어 내용을 밝히고 있어 감로도의 도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필치가 유려하며, 채색은 분홍색과 노란색 등 밝은 채색을 사용하여 화면 전체가 밝아 보이는 한편 금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화려한 느낌을 준다. 화면을 3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칠 여래와 인로왕보살, 지장보살, 관음보살을 배치하고, 중단에는 제단과 그 앞에서 의식을 행하는 승려들, 하단에는 고혼들의 다양한 모습을 질서정연하게 묘사한 이 감로도의 구성은 차후 18세기 감로도의 전형을 이루었다.남장사 감로왕도는 감로도 도상 변천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가가 그룹별 도상의 묘사도 뛰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감로탱 / 감로탱화 : 불교도라면 누구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의 직계 조상이 극락왕생 하기를 바란다. 헌데 사람이란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크고 작은 죄를 짓기 마련이므로 늘 마음 한 구석에는 죽어서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동안 지은 죄를 벌충하려고 선한 마음을 먹고 선한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나 그 윗대의 조상들이 지은 죄는 어떻게 해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지옥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마음이 편치 못하다. 자기는 부모와 조상들의 분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효성이 가장 큰 덕목이 되어왔다. 이러할 때 비록 살아 있을 때 지은 죄라 하더라도 뉘우치고 그에 합당한 참회의식을 하면 없어질 수 있다는 사상이 성립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각한 고민을 덜어주게 되었다. 참회의식은 바로 <불설우란분경(佛說于蘭盆經)>을 그 근본경전으로 삼아 나온 우란분재(于蘭盆齋)를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감로탱(甘露幀)이다. 어떤 학자들은 감로탱을 ‘조상숭배 신앙이나 영혼숭배 신앙의 내용이 그림으로 펼쳐진 그림’이라고 정의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한 수식어를 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래 우란분재는 중국에서 매우 성행하던 의식으로 음력 7월 15일 백중에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시방의 부처님과 스님께 음식을 공양하면 지옥에 떨어진 부모를 구제할 수 있다는 의식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자 고려와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대단히 유행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우란분재 때 <우란분경> 또는 감로탱을 그려 모시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자연히 매우 많은 그림이 그려지게 되었다. 감로탱의 구도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주된 이야기는 아귀도(餓鬼道)를 떠도는 죽은 영혼에게 감로왕이 ‘단이슬[甘露]’을 상징하는 음식물을 베풀어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달래주고, 마침내 극락에 왕생토록 하는 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감로를 내려주는 감로왕이다. 그래서 감로탱을 일명 감로왕도라고도 부른다. 감로왕은 바로 서방정토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말하기 때문에 감로탱의 맨 윗부분에 아미타불을 비롯한 일곱 부처님이 그려지게 된다. 구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구성이 대체로 상단·중단·하단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상단은 극락에 있는 아미타불 일행이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하러 오는 장면을 그렸으며, 그림 오른쪽에 지옥의 중생들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데려가는 보살인 인로왕(引露王) 보살이 그려져 있다. 이 부분만을 특히 극락접인도(極樂接引圖)라고 한다. 중단에는 중앙 정면에 음식을 성대하게 차리고 재를 올리는 성반(盛飯) 의식을 그렸는데, 경상북도 안동 봉정사(鳳停寺), 경상남도 하동 쌍계사(雙磎寺) 감로탱처럼 성반 의식이 없는 감로도도 있다. 성반 의식을 화면 중단에 그린 것은 극락왕생의 공덕을 표현한 것이다. 하단에는 각종 지옥도가 표현되고, 그 옆에 지옥문을 들어서는 중생들을 바라보고 서있는 지장 보살을 그렸다. 이 지옥 장면은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이른바 육도(六道)를 압축하여 묘사한 것으로서 육도에서 고통 받는 중생의 모습을 강조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지면 가게 되는 지옥의 험악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착한 마음을 먹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때때로 지옥장면 대신 죽은 사람들의 살아 있을 때의 생활상이 묘사된다. 노름을 한다든지, 술을 너무 마신다든지, 부모에 불효한다든지, 싸운다든지 하는 등등의 악행이 주로 그려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나쁜 일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되니 조심하고 명심하라는 의미다. 어쨌든 불화에서는 보기 드문 이러한 현실생활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인해 감로탱은 풍속화로서의 가치도 아울러 갖고 있다. (글 : 사찰문화연구원 신대현 박사)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尙州 南長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보물 제1635호.상주시 남장동 502)
남장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삼존좌상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원문에 따르면 순치 2년(조선 인조 23, 1645)에 수많은 사부 대중이 참여하고, 지희(智熙) 스님의 증명 아래 청허(淸虛), 영색(英), 현욱(玄旭), 천휘(天輝), 나흠(懶欽), 법찬(法燦) 등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상 제작의 수조각승 청허는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인 청헌(淸憲)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즉 양감이 강조된 방형의 큼직한 얼굴, 당당한 어깨, 넓고 안정된 무릎, 강직한 힘이 느껴지는 선묘를 추구하여 건장하면서도 평담한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어 청헌의 작품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 한편 이러한 형태미는 임진왜란 이후 자존심을 회복한 불교 재건사업과 맞물려 새롭게 대두된 양식적 경향으로 이해된다. 아미타․관음․대세지의 아미타삼존형식의 상으로 관음과 대세지 보살상의 착의형식에서 변화를 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례이다. 또한 17세기를 대표하는 청허 유파에 의해 조성된 작품 중에서 비교적 연대는 늦으나 조각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대표 작품으로 볼 수 있고, 조성 연대가 분명하여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의 기준자료가 되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므로 조성원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상주 남장사 보광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普光殿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보물 제922호.상주시 남장동 502번지)
이 목각탱은 보광전 주존본인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뒤편에 있는 후불탱(後佛幀)이다. 길쭉한 판목 일곱 장으로 연결하고 위에는 길게 1판석을 놓아 모두 여덟 장으로 구성하였으며, 사방 가장자리는 액(額)으로 고정 시켰다. 중앙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두고 좌우로는 관음(觀音)과 대세지를 비롯하여 4구씩 3열로 비천(飛天), 권속(眷屬)을 조각하고 있다. 중앙의 좌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아미타불인데, 수인(手印)은 설법인(設法印)이고 광배는 거신화염광(擧身火焰光)이다.관음과 대세지보살은 연화좌 위에 앉았고 다른 상들은 입상이거나 무릎을 꿇은 형태이다. 각 조각물 사이에는 보상화(寶相華)와 연화문, 연봉(蓮峰)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윗부분에는 중앙 본존의 두광에서 솟은 서운이 피어오르면서 두 줄기로 갈라져 천상계(天上界)를 구획하고 비천이 배치되어 있다.보광전 개금불사 인연록(普光殿 改金佛事 因緣錄)에 보면 1928년 개금한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가 없다. 전반적인 수법이나 양식경향이 대승사(大乘寺)의 목각탱과 유사하기 때문에 조선후기(19세기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尙州 南長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보물 제990호.상주시 남장동 502번지)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 비명(眞鑑禪師碑銘)>에 의하면, 한국에 불교 범패를 최초로 전파한 고승인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귀국(830년, 大和四年)하여, “처음 석장을 상주 노악산(露嶽山) 장백사(長栢寺)에 놓았는데, 의원에 환자가 모이듯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보면 남장사의 전신은 장백사이며, 830년 이전부터 있었던 고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남장사 보광전은 가장 먼저 건립된 불당으로 주존불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었는데 철로 불상을 조성하였으나 개금하여 전신이 금색으로 찬연하다. 철불은 고려 시대에 널리 유행되었으며, 본 철불상은 조선 초기의 불상으로 조선 철불상 연구에 귀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철불 좌상의 좌고는 133㎝, 머리높이 20㎝, 무릎 폭 102㎝이다. 『상산지』사찰조에 의하면, ‘천년이나 된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는 스스로 땀을 흘리는 영험함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불자들에게는 이 비로자나불 숭배가 어떠했던가를 추측할 만하다 하겠다.이 철불 좌상은 1974년 12월 10일, 지방 문화재 제57호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으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4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觀音禪院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보물 제923호.상주시 남장동 502번지)
이 목각탱은 관음전의 주존불인 관세음보살상 좌상 뒤편에 있는 후불탱이다. 다섯 장의 목판을 잇고 위아래로 다시 한 장씩 이어 붙였으며 전면에 금박을 하여 찬란하고 장엄하다.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네보살이, 그 주위로 2대 제자인 아난.가섭과 사천왕(四天王)을 새겼다. 그 위로는 과거3불(過去三佛)을 배치하였다. 목각탱 하단의 대좌는 연지(蓮枝) 형태로 굵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각 줄기 끝에 연꽃이 피어난 것처럼 조각되었는데 이 연꽃이 연화대좌를 이루고 있다. 연잎, 연봉, 줄기 등이 강한 릴리프로 조각되어 있고 중심부의 본존은 이중으로 된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사적기(寺蹟記)를 비롯한 관련 기록을 통해 1694년(숙종 20)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장사 석장승(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33호.상주시 남장동 산 63-3번지)
이 장승은 남장사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장승(石長丞)이다. 장승은 마을 수호신, 이정표의 기능을 가진 민속신앙 문화재이며 사찰입구에 세워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찰 성역내의 금지된 규제와 풍수비보를 지켜주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상이라 한다. 그 복부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하였고 임진구월립(壬辰九月立)이라는 명문(銘文)이 있는데 임진은 극락보전의 현판기록과 대조하여 1832년(순조 32) 혹은 1892년(고종 29) 중의 하나라 추측된다.처음부터 큰 바위를 다듬어 장승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형태의 바위를 골라 소박하게 손으로 다듬었다. 보통은 왕방울 같은 눈망울은 둥글게 하는 것이나 이 장승은 위로 치켜뜬 모양이며 콧날도 없이 펑퍼짐한 주먹코는 매우 크게 되어 있다.입은 야무지게 다물고 있지만 형식적인 표현이라도 송곳니의 표시가 있고 수염은 마치 옷주름을 다듬은 듯 하게 형태만 표현하였다. 머리는 상투라고는 보기 어려운 마치 불상의 육계와도 흡사하게 되어 있으며 귀는 표현하기는 했지만 모양만 나타나 잘 알아보기 힘들다. 얼굴전체는 바위 생긴 대로 다듬어서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다.다른 석장승과는 달리 균형도 잘 맞지 않고 구체화된 표현도 없으나 원초적인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높이는 1.86m로 민간신앙과 불교가 어우러진 신앙예술품이다
임란 북천 전적지(지방문화재 기념물 제77호.상주시 만산동 699번지)
1592년(임진왜란) 때 조선 중앙군과 왜병의 선봉주력부대가 최초로 싸운 장소로 900여 명이 순국한 호국성지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일(李鎰)을 순찰사로 임명하여 상주 북방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1만 7천여 명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였다.이곳에는 순국한 9위를 배향하고 있는데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과 무명용사 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1990년부터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임란북천전적비를 건립하는 등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임란북천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중앙군과 향군이 왜군의 주력부대와 회전하여 900여 명이 분연히 순국한 호국의 성지로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급히 남하하여 4월23일 상주에 도착한 조선의 중앙군 약 60여 명과 상주판관 권길, 호장 박걸이 밤 세워 소집한 장정 800여 명 등 900여 명이 17,000여 명이나 되는 왜병과 분전하여 전원이 순국한 곳이다.이로 인하여 선조대왕으로부터 상주 전역에 복호(復戶, 조세 부역의 면제)의 은전(恩典)을 입은 전국의 유일한 지방이기도 하다. 매년 양력 6월 4일 제향 행사를 거행하여 그 분들의 넋을 기리고 후세들의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주요시설(총 면적 27,193㎡)충렬사, 상산관(지방유형문화재 제157호), 침천정, 태평루 등이 있음.
상산관(지방유형문화재 제157호.상주시 만산동 699(임란북천전적지내))
일명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고을마다 설치되었다.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 지방 객사에 전자를 새겨 세워 그 곳 관원이 배례하던 나무 패)를 안치하고 목사가 부임하면 이 고을에 무사히 오래 근무하게 되기를 빌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대궐을 향하여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고 절을 하는 향궐망배 의식을 행하였고, 나라의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모든 관원이 여기에 모여 참배하였다.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던 곳이다.구조는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을 두고, 앞면에는 중문, 외문, 옆면에는 무랑 등이 부속되어 있으며, 정당은 기와 난 돌을 깔고 좌우 익실은 온돌로 만들었다. 이름하여 상산관(商山館)이라고 했다. 창건 연대는 상산지 2권 객관 조에 <본 고을 목사 홍세주가 창립하였고 제도가 크고 중앙에 전패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목선생 안에는 홍세주의 기록이 없는 즉 연대는 고증하기 어려우나 상산지 상권 동조에 <고을 아문 동쪽에 고려 때 김영후가 목사로 와서 다시 고쳐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1307년(고려 충렬왕 33)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목사 안축(安軸)이 1343년(충혜왕 4) 기문을 지었는데 그 기문이 상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1343년(지정 3. 계미)에 상주의 책임을 맡아 이 해 4월 고을(상주)에 부임하여 보니 근년에 모진 정치에 백성이 흩어지고, 고을에 있는 관사, 학교, 신사, 절 등이 모두 퇴폐 하였으나 오직 객사가 웅장하게 남아 있어 남쪽 지방에서 제일가는 규모이더라. 생각건대 이것은 속된 사람이 보통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 고을 사람에게 물으니 김영후(목사, 金永煦)가 지었다 하더라. 이 고을은 사면팔방으로 통하는 요긴한 곳이 되므로 객관이 완성된 뒤에 그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사신이 많이 오고 거처하기에 여유가 있더라.>위의 기문을 통해 보아 경상도 전 지역에서는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으리라 믿어진다.1526년(중종 21)화재를 당하였고, 목사 윤탕이 1500년(연산 6)경에 개축하였던 것이 그렇게 되었다. 1592년 임진란 때에 왜군이 모두 불태웠고, 목 선생안의 조계원조에 의하면 <1638년(인조 16) 2월에 도임하여 11월에 객사가 불이나 이듬 해(1639년) 봄에 객사를 왕산 남쪽에(현 경찰서 자리)에 옮겨 세우고 5월에 사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로 미루어 보면 객사를 처음 세운 곳은 확실치 못하다. 상산지에 의하면 목사 이송령(李松齡)이 1666년(현종 7)에 옛 자리에 개축하였다고 하였다. 1907년(고종황제 11)에 객사를 공립 보통학교로 쓰고, 1910년에 현재의 상주여자중학교 자리로 이전하여 상주여자 간이학교로 쓰게 되었다. 군수 김규연이 쓴(1940년) 객관기에 의하면 객관을 1907년에 이를 새로 고치고 소학교로 쓰다가 북정학교(현, 상산 초등학교)를 지어서 나가니 집이 비어서 허물어졌다.그래서 박인양, 조용연, 박인수, 박정소 네 사람이 읍의 오랜 건물을 없앨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많은 돈을 내어 관으로부터 샀다. 이것을 다시 군에 기부하였다. 그래서 옮겨 짓기로 생각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조각연이 기성의 책임을 맡아 많은 사람들의 돈으로 보조하여 완공되었다. 옛 모습 그대로 옮거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물건이 폐하고 흥하는 것은 깎고 회복하는 이치이고, 사람이 자선하면 사회에 복이 되는 것이다. 앞의 네 사람이 옛 물건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집이 상산 땅에 옛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겠는가? 1940년에 현 상주여자중학교내로 이건하였다가, 1991년 임란북천전적지인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상산관은, 조선시대에는 고을마다 세워 향궐망배의식 및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나 자연 이곳은 문회(文會), 시회(詩會)의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상산관에서 시를 읊은 이로 백운 이규보(1168-1241)는 1196년 2월, 당시 공검지를 수축한 사록 최정빈의 초청으로 상주목사를 비롯한 상산의 선비들과 성대한 주연(시회)을 베풀었다. 상산관에는 정구, 조준, 안성, 김종직, 윤탁연, 황준량, 오상, 이양원 등의 명관(名官)과 향토인으로서는 조원윤, 정상리 등의 시문이 걸려 명실 공히 상산(商山) 제일의 시회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장지연(張志淵.1864(고종 1) 경북 상주~ 1921 서울. 언론인)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 1894년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썼으며,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총무위원이 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 時事叢報〉 주필을 맡아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1901년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황성신문〉 사설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을 실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알렸고,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었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으나 이듬해 강제 해산되었고,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해조신문 海潮新聞〉의 주필을 맡았다가 신문이 폐간되자 각지를 방랑하다 귀국하여 1909년 진주의 경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했다. 이듬해 8월 29일 〈해조신문〉에 황현(簧炫)의 〈절명시 絶命詩〉를 게재함으로써 〈경남일보〉가 폐간 당했고 그 뒤 고향에서 칩거했다. 〈유교연원 儒敎淵源〉·〈대한신지지 大韓新地誌〉를 비롯한 수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상주 복룡동 석조여래좌상(尙州 伏龍洞 石造如來坐像.보물 제119호.상주시 서성동 163-48)
상주 시내 왕산 남쪽 기슭에 미륵전이 있어 석불 일구가 보존되어 있다. 이 석불은 원래 상주시 복용동에 있었던 것을 1975년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이다. 복룡동에 있는 당간지주와 복룡동 일대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는 옛 기와쪽 등으로 미루어 보아 중고대에 이곳에는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석불은 견고한 화강석 하나로 조성된 여래상으로 결가부좌하였는바 양쪽 무릎과 오른손, 그리고 양어깨와 머리 부분에 파손이 심하여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파손된 머리에는 나발(꼬불꼬불한 부처의 두발)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없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두 눈은 눈 고리가 길게 옆으로 흘렀으며, 콧마루는 파손이 심하나 형태는 뚜렷하여 입술과 같이 작게 조각된 것이 주의를 끈다.양쪽 볼은 비대한 듯하나 약간의 웃음을 담고 입술에도 미소가 어리어서 둔중함 보다는 오히려 풍려 한 인상을 주고 있다. 얼굴 모양은 원만하며 목에는 삼도(3개의 줄)가 돌려졌는데 그 선은 얼굴과 같이 매우 부드럽게 조각되었다. 어깨를 두른 법의는 두 팔에 걸쳐 밑으로 흘렀고 가슴 밑 배꼽 부분에서는 원호를 그리면서 두 무릎까지 흘렸는데 옷의 아름다움이 비단 같고 오른쪽 무릎 위에는 왼쪽 발바닥이 조각되어 있다.수인(그 깨달은 내용을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양)은 오른 손은 크게 파괴되고 왼손은 다섯 손가락이 모두 파손되었으나 양손의 위치로 보아 지권인(왼손 둘째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는 형상)을 맺은 것으로 추측되므로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이라 생각되며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정기룡 장군 유적(충의사)(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3호.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345번지)
이 사당은 임란의 호국 명장 정기룡(鄭起龍)장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장군은 조선 선조 때 무장(武將)으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초명이 무수(茂壽)이며, 관향은 진양(晉陽),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다.1562년(명조 17) 4월 24일 경남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출생하였고, 1581년(선조 14) 20세에 상주로 천거 1586년 무과에 급제한 후 왕명에 의하여 기룡(起龍)으로 개명하였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여 거창싸움에서 승전하는 등 전과를 올리자 갑장산 영수암에서 상주가판관으로 승진, 11월 23일에는 함락된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으로 탈환하였다. 그 후 11월말에는 화북면 용화동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하는 등 육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려 1593년에는 상주목사 겸 감사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시에도 토왜대장이 되어 고령, 함양 사근역 전투, 사천전투, 경주, 울산 수복 등 60여 차례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어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으며 1622년 61세를 일기로 경남 통영의 진중에서 순직, 공의 유언에 따라 이곳으로 안장되었다. 충의사(忠毅祠)는, 정부의 호국 선현 유적지 정화사업 계획에 따라 1977년 12월부터 이듬 해 4월까지 부지 6,524㎡을 매입하여 옛 사당을 헐고 민가 18동을 철거하였다. 이후 79년까지는 사당.유물관.내외삼문.기념비.담장.주차장 등을 조성하는 정화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이어서 관리 사무소 신축부지 3,120㎡의 매입과 세 가구의 민가가 철거되는 2차 사업이 추진되어 1980년 6월, 관리 사무소와 음수대, 급수정을 비롯한 조성 사업이 추진되었다.장군의 묘소와 신도비는 충의사로부터 동쪽 약 800m 지점의 낮은 산록에 있다. 신도비와 묘소는 서로 약 100m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유적 및 유물로는 보물 제669호로 5점(교서 2, 교지, 신패, 옥대 각 1점)과 도지정기념물 제13호인 충의사, 신도비, 장군의 묘소가 있고, 비지정 동산문화재로 매헌실기 판목 58점과 교지 19점이 있다.충의사는, 호국 영령의 충혼을 새기는 산 교육의 현장으로서, 국토 수호의 결의를 다지는 수련장으로서, 길이 상산(商山)을 지켜갈 것이다
정기룡 유물(鄭起龍 遺物.보물 제669호.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18-7번지내 상주박물관)
임진왜란 때 활약한 매헌 정기룡(1562∼1622) 장군이 남긴 유물들이다. 정기룡장군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다. 1580년 향시에 합격하고, 선조 19년(158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때 왕명에 의해 초명 무수(茂壽)에서 기룡(起龍)으로 개명하였다. 1591년 훈련원 봉사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의 벼슬로 거창싸움에서 왜적 500여 명을 격파하고, 곤양(현, 진주)의 성을 지키는 장이 되어서는 왜적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또, 상주가판관이 되어 10월에 상주 도임, 11월에 화공(火攻)으로 상주성 탈환의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 1594년에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또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어 성주, 합천, 초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주 울산을 수복하였다. 승록대부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의 직을 수행하다가 1622년 통영 진영에서 순직했다. 숙종 조에 충렬사(忠烈祠)에 상주 판관 권길과 함께 제향 되었으며, 묘소와 사당은 사벌면 금흔리에 있다. 1966년 경남 하동에 경충사(景忠祠)가, 1970년 말에 지금의 충의사가 건립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것은 옥대 1개, 신패 1폭, 유서 1매, 교서 2축, 교지 1매 등이다. 이 외에 『매헌실기(梅軒實記)』목판 58점과 그의 가족에게 내린 교지 19점 등이 유물로 남아 있다. 관련 유물은 충의사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2007년 9월부터 상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장군은 상주 태생은 아니나, 임란에 이미 모부인을 사벌 매호로 모셨고, 사후 묘소 및 충의사가 상주에 있어 장군의 위국충절은 상주사에서 확고한 지위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화달리 3층석탑(보물 제117호.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422번지)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사벌면 화달리(달천)에 석탑이 있는바 탑의 높이 20척, 기부 2간 사방의 3층석탑이다. 탑의 밑에는 높이 3척 어깨 넓이 1척 2촌의 석불좌상이 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벌면 화달리 둔진산 남쪽에 위치하고 부근의 지형으로 미루어 이곳에 남향사찰이 건립되었던 가람의 자리로 추측된다. 이 탑은 1972년 탑 전체를 해체 복원하였다.여덟 장의 마석 한 긴 돌로 얽어 짠 지대 돌 위에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기단부는 단층으로서 하층기단면석을 생략한 형식이다. 상층기단면석은 여덟 장의 돌로 조립되고 각 면에 양우석과 중앙 일장주가 정연하다. 상대갑석은 3장의 돌로 조성되고 갑석부연이 마련되고 상면은 경사로 합각이 뚜렷하며 중앙부에는 일단의 높직한 각형 받침이 각출되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 1매식으로 되었는바 각층 옥신에는 양 우주가 정연하다. 각 옥신석의 체율감은 통식을 따라 이루어졌다.초층과 2층의 옥개석은 옥석 받침이 5단이고 추녀에는 낙수면이 음각되지 않았으며 상면에는 일단의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그 위층의 옥신을 받고 있는데 3층 옥개석은 받침이 4단이며 상면에는 원호의 몰딩과 1단의 낮은 각형 받침으로 그 위의 노반을 받치게 되어있고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일부재도 남아 있지 않다.이 탑은 전체적으로 낙수면이 평박하고 사방 합각의 선이 예리하며 직선을 이룬 추녀에 사우전각의 반전이 강경하여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에 있어서 옥개 받침이 각 층이 동일하지 않고 삼층은 사단으로 줄어들었으며, 또 옥신 받침과 기단 갑석 상면의 탑신 받침도 1단으로 약화된 점은 8세기에 조영된 정연한 석탑형으로 시대가 하강된 9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라 추정된다.
전(傳) 사벌 왕릉(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산 44-1번지)
상주에 사는 사람으로 사벌왕릉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벌왕릉이 누구의 능이며 어느 시대의 무덤이냐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현재 경상북도의 지방문화재 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왕릉을 옛기록을 통하여 막연하나 알아보고 넘어가는 것이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여기에 기록상에 나타난 내용과 사벌왕릉 보존회가 출판한 <사벌국 약사>의 내용을 요약하고 능의 현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벌왕릉은 사벌면 화달리 둔진산 남쪽 기슭 보물 제 117호로 지정된 화달리 삼층석탑 동북편에 거대한 고분으로 유존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는 <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있어 사벌왕릉이라 전해오고 있다.> 라 기록되어 있고 상주군읍지 고적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위치를 <성의 북편 9리쯤 떨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일정 때 출판된 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는 <사벌면 화달리 달천 부락에 사벌왕릉이라 칭하는 능의 전면에 상석 망주석, 양마석, 등대석, 비석 등이 있다. 고분의 높이 9척 5촌, 직경 9간이며 사벌왕은 신라 경명왕의 둘째로써 상산 박씨의 비조이다. >라고 기록되어 이 무덤의 현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보겠다. 삼층석탑 옆에 왕릉에 속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석탑의 서북 편에는 상산 박씨가에서 건립한 재실이 있다. 현재 능 앞에 세워져 있는 모든 석물은 오래된 것이 아니며 신도비의 건립연대는 1954년이다. 참고로 사벌국약사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실들이 근세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산성에 관한 최고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도 <사벌국의 옛성이 병풍산에 있는데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지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성은 신라 말의 연대에서도 고성이라 했으니 수축된 연대를 상고하기 어렵다. 또 신도비의 기록에 탑 속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사벌왕묘 지석의 기록은 왕의 휘가 결여되고 또 탑의 성격으로 보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이 사벌 왕릉은 전설상 왕릉으로 전해오나 어느 분의 무덤인지는 역사가 흐르고 전기가 뚜렷하지 못하며 정사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 상고하기 어렵다. 전 사벌 왕능은 상주시가 정부지원을 받아 1981년 12월 능역을 확장하고 왕능, 영사각 등 주변을 보수 정화하였다
상주 석조천인상(尙州 石造天人像.보물 제661.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 18-7번지 상주박물관 전시실내)
상주 석각 천인상은 화강암 판석 두 장에 부조된 2구의 천인상이다. 한 상은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주악천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연꽃을 받들어 공양을 연주하는 공양천인상이다. 둥근 얼굴에 정제된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손 등에 나타나는 사실적인 묘사는 균형 잡힌 몸매와 세련된 자태 등과 함께 작품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측면으로 향하고 있는 얼굴이나 동감 있는 자세, 여기에 활달하고 구불거리며 휘날리는 천의의 묘사에서도 역시 운동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평판적으로 변한 모습이나 천의를 이루는 각 선에서 조금 경직된 면도 찾아진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들은 신라 하대에 조성된 불상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따라서 이 상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남산공원(신봉동 산2-1번지)에 있었으나 2007.06.20일자로 상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조정 임진란 기록(보물 제1003호.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18-7번지내 상주박물관)
조정(趙靖, 1555-1636)선생의 자는 안중(安仲), 호는 검간(黔澗)이며 본관은 풍양이다. 임란에 창의하여 국토수호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상주.함창은 물론 경상도, 충청도 지역의 의병 및 관료들의 활동, 백성들의 동향과 교통상, 왜적의 갖가지 만행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여 상주 임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 일기의 내용은, 1592년(임진) 4월 14일 일본군의 제1진 1만 8천명은 고니시를 대장으로 배를 타고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향해 북진하였다. 그 달 19일에는 왜군 제2진 2만 2천명이 가또오를 대장으로 하여 부산에 상륙하고 신령 방면으로 북진하였고, 같은 날 제3진 1만 1천명이 구로다를 대장으로 하여 김해 죽도에서 상륙하고 김해성 및 창원, 영산(靈山), 창녕을 점령하고, 한 패(우종대:右從隊)는 무계(茂溪) 성주를 거쳐 25일에 개령 금산(金山)에 당도하니 이 고장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다른 한 패(좌종대:左從隊)는 창녕에서 갈리어 초계(草溪) 합천 거창 지례(知禮)를 거쳐 금산에 당도하여 우종대와 합류하고, 금산(지금의 김천시 삼락동)에서 대열을 가다듬고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려 하였다.제3진에 뒤를 이어 제4진 1만 4천명 가운데 모리가 일대를 이끌고 금산에 들어와 제3진고 합류했는데 당시 이 지방(금산)에는 1만 5천의 왜군이 진을 치고 3일간을 머물고 있었다. 4월 28일에는, 방어사 조경, 조방장 양사준, 돌격장 정기룡, 비장 장지현 등이 방위하는 추풍령을 돌파하고 북진하였다.5월초에는 왜군 제6진이 1만 5천명이 고바야가와를 대장으로 제3진의 뒤를 이어 금산에 머물다가 곧 선산으로 옮아갔고, 금산에는 제6진의 일부인 2천 5백명(대장 다찌바나)과 또 다른 9백여 명이 왜군이 남아 있었다. 6월 12일에는 왜군 제7진 3만명을 이끌고 모오리가 대장으로 상주에 잠시 머물었다가 개령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개령의 왜군 진지는 지금의 개령면 동부동을 중심으로 주위 3km에 걸쳐 2중 목책으로 둘러싸고 목책 사이와 바깥에는 깊은 참호를 파서 아군의 공략을 막았다.금산과 선산에 머물러 있던 제6진 1만 5천의 고바야가와군은 원래 전라도 점령을 목적으로 한 부대로서 상륙하고 창원에 머물면서 남원을 거쳐 전라도로 침입하려다가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군에게 길이 막혀 성주를 거쳐 금산으로 들어 온 것이다. 금산 선산 성주 지례 등지에 흩어져 머물고 있으면서 전라도 침입을 노리고 있다가, 부대를 둘로 나누어 7월 10일에 1대는 지례를 거쳐 거창으로 가다가 우두령(牛頭嶺:김천시 대덕면과 거창군 웅양면 사이 고개)에서 의병대장 김면에게 패하여 금산으로 퇴각하였고, 1대는 무주를 거쳐 금산(錦山)에서 전주로 향하다가 도절제사 권율에게 패하고 도주한 왜졸은 금산에서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무주를 거쳐 지례에 당도한 고바야가와의 왜군을, 이 고장 충신 의병대장 여대로, 의병장 권응성, 김해부사 서예원, 중위장 황응남 등 의병에게 포위되어 전멸되었다.7월에서 9월에 걸쳐 개령에는 제3진과 3만군과 제6진 1만군의 4만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이를 본거지로 선산·성주·금산·지례·무주 등지에 출몰하면서 앞서 말한 추풍령전투, 우두령전투, 지례전투, 상좌원전투 등 규모 큰 전투 외에도 상좌원 하로(賀老)·부상고개(扶桑峴)등지에서 소규모 전투는 끊일 날이 없었다. 개령에 주둔한 일본군은 이듬 해 2월 12일 명나라 원군이 들어와 평양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면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하기까지 수시로 이 고장의 산간벽지까지 출몰하여 납치 방화 약탈 강간 등 가진 횡포를 부렸으며, 특히 그들에게 잡혀 욕보기에 앞서 자결하여 정절을 지킨 부녀들이 이 고장에만도 수 없이 많았다.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 14만이 재침했는데, 모오리를 대장, 가또오를 선봉장으로 한 5만군병의 소속 일부 부대가 9월 18일 성주를 거쳐 금산에 들어왔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보다 난폭하고 무자비하여 들 곡식에까지 불을 지르고 산골짜기에까지 찾아다니며 사람을 해치곤 했다. 봉계 사람은 응급길에 흑운산 밑에 숨었는데 정유한의 부인 영천 이씨도 여기에서 잡혀 욕보이려는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죽었다.
경천대(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영남인에게 낙동강은 온유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먼 옛날부터 낙동강 물을 끌어당겨 농사를 지었으며, 산업화가 시작되자 강물로 공장을 돌렸다. 언제나 한가롭게 굽이치며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던 낙동강. 그러나 낙동강도 상주에서만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동쪽 면이 깎아지른 듯 한 절벽을 이룬 천주봉과 만나 부딪히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이 아찔한 아름다움을 바라보노라면 여기서만은 생활 속의 낙동강이 아니라 환상 속의 이름 모를 물줄기라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낙동강의 아름다운 전경은 끊어질 듯 말 듯 하며 계속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경천대이다.
경천대에는 하늘로 우뚝 솟아오른 절벽 위로 송림이 우거져 있고, 반대편에는 금빛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푸르디푸른 강이 흐른다. 이 눈부신 절경을 경천대에서 내려다보면 이곳의 빼어난 경관에 대한 찬양과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수영장을 비롯한 전망대, 어린이 놀이시설, 야영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기 좋다.
뿐만 아니라 경천대에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 장군이 젊었을 때 이곳에서 용마와 더불어 수련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때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먹이통이 남아 있다. 또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이 있다.
상주시청 자료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