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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삼성초등학교49회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 - 박완서 -
유병수 추천 0 조회 51 18.05.02 19:1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上典이 되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분단문학分斷文學과 모계문학母系文學의 대표 작가이신 박완서朴婉緖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아래 글은 어른 노릇 사람 노릇(펴낸 곳 <작가 정신>, 1998년 출간)이라는 책 속의 에세이(수필)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옮긴다. 나 역시 70즈음의 나이가 되니, 내 나이 즈음에 쓰신 이 글의 많은 것에 공감하게 된다일제치하와 해방, 전쟁과 쿠데타 등 온갖 난국亂局을 따라 수많은 풍파를 겪으셨으나, 수수하고 단아端雅한 모습처럼 담담하면서도 뜻 깊게 죽음과 죽음의 고통 그리고 가진 것들(, , )에 대한 생각을 평이平易하게 서술하고 있다. 잠시 작가의 개인적 고난에 대해 살펴보면, 1931개성 변두리에서 태어나 4살에 부친을 여의고,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홀어머니 밑에서 극도의 궁핍을 겪었다. 어머니의 열렬한 교육열에 힘입어 8살 때 서울로 이사 왔고, 20세 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6.25 한국전쟁이 터져 오빠 숙부 등 수없이 많은 애통한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1988년에는 3개월을 전후로 남편을 암으로,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26세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40세에 뒤늦게 <나목裸木>으로 등단하여 100여 편의 소설을 쓰셨고, 201180세에 암으로 별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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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



  

I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해 얼마나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해낼 수는 없다. 아마 막연한 공포감이 전부였을 것이다. 사춘기 때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스물아홉까지만 살고 싶었고 그보다 나이가 더 먹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나가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젊은 죽음, 꽃 같은 죽음은 그 시절의 나의 꿈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만은 안 죽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늙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 같아서 그렇게 동경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이 먹는다는 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다. 드물지 않게 동갑내기나 나보다 어린 사람, 심지어 자식의 죽음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나이 먹는다는 것은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요즈음의 나의 하루의 사고思考 내용을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반 이상이 된다. 내가 어떻게 죽을지가 그렇게 걱정이 된다. 요새는 왜 그렇게 암이 많은지 남편도 그랬지만, 친지들의 죽음이 거의가 다 암으로 죽었거나 죽어간다. 그 과정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치료를 받아들일 것인가, 치료를 거부하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도 지금부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이다.

 

죽음보다도 죽을 때 받을 고통을 생각하면 죽음은 역시 무섭다. 그러나 장수해서 치매가 되는 것은 더 무섭다. 내가 사랑하던 이들로부터 그런 방법으로 정을 떼고 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오래 안 죽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나보다 나중 죽어야 할 사람이 먼저 죽는 걸 보는 일이다. 그런 일을 또다시 겪지 않도록 어서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고통도 없이 노망도 안 들고 죽을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으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슴을 에이는 비통 중에서도 꽃 피는 계절은 아름다웠고, 새로 태어난 손자를 안아보는 기쁨은 황홀했고, 자식들을 위해 맛있는 것을 만들 때는 신바람도 났건만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 그러나 완전한 무가 바로 무한無限이란 생각도 든다. 죽음과 동시에 느낄 수 없게 되더라도 살아 있는 이들에게 느낌을 일으킬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것, 무한한 것의 일부로 환원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피는 꽃을 보고 즐거워하는 대신 꽃을 피우는 대자연의 섭리攝理의 일부가 될 테고, 육신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대신 무심한 바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게 될 터이다. 또 자식들은 가끔 내 생각을 하며 그리워도 하고, 나를 닮은 목소리로 제 자식을 나무라고, 나를 닮아 잘 웃으며, 열심히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죽은 에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식들이 이 에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자국을 혐오하지 말고 따뜻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게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미련 중의 하나이다.

 

 

I I

 

그밖엔 어떤 자취도 남기고 싶지 않다. 특히 내가 소유하고 있던 물건이 내가 죽은 후에도 남아 있을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잠 안 오는 밤이면 부시시 일어나 옷장이나 서재를 뒤져 버릴 것이나 남 줄 것을 찾는다. 가진 것을 줄여야지, 최소한도만 가져야지 벼르건만 가진 것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가구를 집에 새로 들이지 않은 지는 오래됐지만 옷은 없앤 만큼 사게 된다.

 

우리나라는 흔히 계절季節의 변화가 뚜렷하다고들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너무 섬세하고 미묘하다. 같은 섭씨 이십 도라도 봄의 이십 도와 가을의 이십 도가 다르다. 밤낮의 길이가 같다고 해도 춘분의 햇빛과 추분의 햇빛은 그 밝음, 부피가 완연히 다르다. 멋을 낼 생각이 없다고 해도 스스로 편안하고 튀지 않기 위해서만도 옷이 많이 필요한 나라이다. 아무리 없애고 나도 결국은 기본적인 것은 또 장만을 해야 한다. 소유를 줄이기 위해 없앤 게 아니라, 새것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없앴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다.

 

책만 해도 그렇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내가 필요한 정도나 관리 능력에 벅찬 양이다. 장서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고 희귀본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다. 고 좋았던 책, 앞으로 읽어야지 싶은 책, 두고두고 다시 보는 책, 사전류, 참고로 할 필요가 있는 책만 가지고 있으려 해도 그게 여의치 않다. 정성스러운 서명이 든 책도 버리게 되지 않고, 장정이 견고한 전집류도 꽂아놓은 게 그럴 듯해서 못 버린다.

 

결국은 잡지류를 제일 먼저 솎아내게 되는데, 나중에 찾아볼 일이 가장 많이 생기는 것도 사실은 잡지류이다. 같은 작품이 중복돼서 나온 걸 갖고 있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최근의 것을 남기고 예전 것을 처분하는데 그건 요새 나온 것일수록 활자가 크기 때문이다. 장서로서의 가치 같은 것은 처음부터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제고 읽을 것을 전제로 한 책 아니면 내 서재에서 남아나지를 못한다. 그렇게 수시로 책을 솎아내건만 서재가 넘쳐 딴방까지 책이 널려 있다.

 

이사할 때난 여행할 때 책이 제일 무겁고 부피가 나가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을 생각하면 나 죽은 후에 그게 자식들에게 굉장한 부담을 줄 것 같아 책 더미 사이에 망연히 서 있을 적이 종종 있다. 내 딴엔 옷가지고, 그릇이고, 책이고 제때제때 없애느라고 중노동도 불사하건만 나 죽은 후까지도 남아 있을 내 소유물은 이렇게 결코 적다고 할 수가 없다.

 

부피가 안 나가는 소유所有라고 해서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얼마간의 돈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만 해도 그렇다. 앓지 않고, 아프지 않고, 너무 오래 살지도 말고, 남들이 조금은 아깝다고 여길 나이에 죽고 싶은 게 나의 마지막 허영이지만, 나라고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몇 년씩 병석에 있다가 죽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랴.

 

예금통장은 그럴 때에 대비한 약간의 목돈이지만, 그걸로 남을지 모자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자라면 자식들에게 미안한 노릇이지만 남거나, 천복天福으로 앓지 않고 죽어 고스란히 남는다고 해서 자식들에게 복이 될까? 서로 우애가 그만이던 자식들이 약간의 불로소득 때문에 행여 가 상할까봐 그것도 걱정이 되지만,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제 분수에 맞게 잘들 사는 자식들에게 불로소득이란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더할지도 모르지 않나.

 

만일 내가 재산을 남기고 죽으면 어디다 아무도 모르게 기부를 하라고 미리 유서를 써놓을까, 그런 생각까지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죽으면 이미 나는 이 세상 아무것도 내 게 아니다. 일생 동안 그렇게 애지중지 봉사하던 내 육신에 대한 권리까지도 포기하는 마당에 그까짓 푼돈에 대한 권리 주장을 왜 하랴. 재산에 대한 유언은 결국은 죽어서도 내 것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권리 주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렇다고 미리 없애자니 역시 노후 걱정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모르지만 내가 죽는 날은 미래 어느 시점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시점이 가까워지는 것과 비례해서 내 안의 생명력도 착실하게 소진되고 있을 것이다. 생명력이 소진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내가 소유한 모든 것도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다가 죽음과 동시에 소실돼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꿈꾸는 죽음은 고작 그 정도다. 그러면서도 꿈도 크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블로그 메뉴 [참고자료] <노년기의 삶><자살에 대하여>에는 삶과 죽음에 관한 글이 몇 개 소개되어 있다.

몸을 돌보면, 몸도 당신을 돌본다. 하지만 몸을 돌보지 않으면 몸은 반란을 일으킨다몸을 돌보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인 동시에 남을 위한 일이다.”

 

아시다시피, 현재 북한 땅인 <개성>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위 38도선 이남으로 남한 땅이었다.

상전 : 上典 상대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주인의 뜻으로 의 반대말.

에이다 : ‘에다의 비표준어. 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

섭리 : 攝理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에미 : 어미(어머니)를 홀하게(대수롭지 않게) 이르는 말.

부시시 : ‘부스스’(미닫이나 장지문 따위를 슬그머니 여닫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의 비표준어.

제때제때 : 일이 생기는 바로 그때마다

: 사귀어 친해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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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8.05.02 23:08

    첫댓글 "매일 매일, 깨어날 때 생각하라! 오늘은 내가 살아
    있어서 행운이고, 나는 소중한 인생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 달라이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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