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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김광영
고독(孤獨)의 공감(共感)
윤오영 작가론
박 장 원
윤오영은 수필을 고독의 소산이라 하였다.
따라서, 그의 수필 창작과 이론도 고독의 결정이다. 그는 수필을 수록이 아니라 창작으로서의 문학이라 단정하며, 문학작품이라 한다면 에세이 수필이라 해도 좋다는 입장이며, 가장 오래된 가장 새로운 아직도 미래의 문학 형태로 규정하면서 한국 정서에 맞는 한국적인 문학작품으로서의 자유로운 산문이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윤오영은 수필은 탈장르를 꾀하면서 본래의 원숙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신문학은 일본서 삶아 온 서구 문학을 재탕한 것이다. 이런 토양 위에서 자라 순수한 자기 몸을 가꾸기도 전에 새로운 서구 문예 사조에 휩쓸리고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우리 어문의 소양도 없이 일본 가서 서양어를 공부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에 의해 한국 수필의 토양이 오염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의 수필은 현대 수필문학의 잣대라고 할 수 있다.
윤오영(尹五榮 : 1907-1976)은 59년 9월 『현대문학』에 「측상락(鬪上樂)」을 발표하면서 수필계와 인연을 맺었고, 72년 3월 창간된 『수필문학』 4월∼10월호까지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라는 필명으로 「수필문학 강론」을, 72년 5월부터 「수필문학의 첫걸음」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양잠설(養蠶說)」을 게재하였고, 이 두 편이 75년 『수필문학 입문』으로 출간된다. 그리고 73년 4월호에 「파회기(波駑記)」 「박꽃」 「정야(靜夜」 3편, 73년 7월호에 「방망이 깎던 노인」, 73년 11월부터 74년 11월까지 「동매실산고(桐梅室散稿)」 49편, 74년 3월에는 관동출판사에서 출간된 『고독의 반추』에 80편을 상재하였고, 75년 9월부터 76년 1월까지 「속동매실산고(續桐梅室散稿)」 8편, 76년에 발간된 편저『한국수필정선(韓國隨筆精選)』에 7편을 수록하였으며, 식도암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다듬었던 「와병 수감(臥病隨感)」을 마지막으로 151편의 수필을 남겼다.
그의 수필이력은 비교적 만년인 53세에 시작하여 타세한 70세까지이다. 그는 소설을 넘보지도 시 세계를 기웃거리지도 않고, 수필에서 시작하여 수필로 끝을 맺었던 수필인이다.
“스스로 분투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고독의 길만이 스스로 자기를 키워 나가는 길이다. 원래 수필은 고독의 소산이다.”
고독과 윤오영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 고독의 탐구와 이해가 이 작업의 주제이다.
2
윤오영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중학 1학년 때에 피천득을 만난다.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가세가 기울어 의정부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해방 후 보성고교에서 18년간 교편 생활을 하였다. 그의 아호는 치옹(癡翁)과 동매실주인(桐梅室主人)이다.
고향은 서울이지만 용문산이 우뚝 솟은 양평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에게 많은 수필 소재를 부여하는 순수의 기회였다. 그리고 독서를 통한 본원적 자산을 축적하였다.
독서는 그의 또 다른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내 독서의 의의를 묻는다면 첫째, 자아의 발견이요, 둘째 사색의 소재요, 셋째 곡소(哭笑)의 광장이다. 다시 말하면 곧 생의 파악이요, 내 생의 방편일 뿐이다.”
그의 독서 세계는 광범하면서도 치밀하다. 수필의 남상으로 『장자』를 서슴없이 추천하고, 그의 웅혼한 심상을 유려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독서의 질량이 두텁기만 하다. 윤오영은 독서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중에서도 두 사람이 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요, 도암(陶庵) 장대(張岱)이다.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빠른 길은 우선 그의 아호에 대한 접근이다. 동매실주인이라는 당호의 유래는 그 자신이 출전을 밝힌다.
桐千年老恒藏曲 오동은 천 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시구의 선택이 더욱 좋아 쓴 이의 인품을 들려주는 듯했다. 봐도 봐도 싫지 않은 글씨요, 읊어도 읊어도 다하지 않는 시구이다. 툇마루 앞의 작은 길, 쌍창으로 들어오는 무한한 야색(野色). 흰 책상, 검은 연상, 작은 고비, 큰 재떨이, 그 장의 글씨와 그 시, 그 방에 앉은 주인공, 이것들이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단아한 정취와 선명한 생명감이 도는 리듬을 이루고 있다. 내가 그 후 스스로 동매실이라는 당호를 갖게 된 연유도 여기 있다.
― 「촌가(村家)의 사랑방(舍廊房)」중에서
오동과 매화는 지조와 절개이다. 천 년을 굽히지 않고 외로움을 지키는 그 정천(頂天)의 입지(立地)에서 동매실은 긍지와 위안을 찾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으려 하였다.
고독의 입김과 손때는 바로 고전이었고, 독서를 통해 동매실은 옛사람의 기상을 읽었고, 그 외로움은 다시 동매실의 고독으로 체화된 것이다. 치옹이라는 아호의 이해는 심층적이면서도 다소 주관적인 접근을 요한다. 치옹의 심연에는 스승의 손때와 입김에 다름없었던 연암과 장대의 문학적 배경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먼저, 그는 연암의 문장을 이렇게 평한다.
“연암의 문장이 우리를 끌고 항상 읽혀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느 글에서나 일관되어 흐르는 그의 산문정신에 있다. 평소에 쌓인 온축(蘊蓄)과 박학(博學)이 완전히 융화하여 체질이 되고 생활이 되어, 사물을 볼 때마다 자기의 독특한 리듬을 타고 위트와 유머를 풍기며 퍼져, 혹은 풍자도 되고, 혹은 우화도 되며, 고비마다 새로운 기축을 열되, 어느 때 어느 줄을 퉁겨도 거문고는 거문고 소리, 비파는 비파 소리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산문정신의 가장 높은 경지다. 연암 문장의 진가는 여기서 찾아야 한다. … 그의 문장론의 핵심은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이라는 데 있다. 옛 법을 체득하되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하고, 새것을 창조하되 전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승우(金承禹)의 연암 접근도 진솔하다.
“박연암이 살았을 적에 열 살도 안 되었던 찰스 램을 연암이 또한 알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연암과 램은 너무도 비슷한 데가 많다. 이는 다 같이 인생의 한계를 깨달은 그들이 슬픈 운명을 희화화하고 고독과 슬픔을 풍자하여 아이러니로 뒤바꾸어 놓은 기경(奇警)한 비평 감각의 소유자들이었다는 데서 온 우연한 일치점일 것이다.”
재미있는 발견은 찰스 램(1775-1834)을 지향하였던 사람이 금아라면, 박지원(1737-1805)을 추종하였던 수필가는 동매실이다.
18세기는 주자주의와 민중의식의 두 차원이 빚어내는 괴리 또는 모순의 공존, 여기가 연암의 사상 공간이다. 연암은 그 자신 화주현벌(華胄顯閥) 출신이면서도 주로 서얼들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 등을 제자 내지 지우(知友)로 상종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책들은 청(淸)에서도 금서(禁書)로 지목한 이지(李贄)·고염무(顧炎武)·모기령(毛奇齡) 등 반주자주의자(反朱子主義者)들의 것이었고, 문학관에 있어서도 전후칠자(前後七子 : 명대 1488-1521년 활동한 이몽양·하경명·이반룡·왕세정 등)의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문학관을 부정하고 독서성령(獨抒性靈 : 오로지 마음만을 서술한다)을 주창한 원굉도(袁宏道)로 대표되는 공안파(公安派)의 문학관에 접맥되어 있다. 북학파(北學派)의 신체문(新體文)이란 “문필진한(文必秦漢 : 文章은 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 : 詩는 盛唐)”에 얽매인 전·후칠자들의 ‘귀고천금(貴古賤今)’을 극복하고 ‘독서성령’을 내세운 문체상의 한 경향을 말한다. 북학파의 신체문은 ‘사의(寫意)’와 모사진경(模寫眞境)에 전력하였으나 당시 성행되던 패관소품류(稗官小品類)의 초살(僉殺)한 문장이 성세(盛世)의 의순사달(意順辭達)의 문장이 아니라고 판단한 정조(正祖)의 문체반정책(文體反政策)으로 인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과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국문학사상 연암의 대략적인 평가이다.
동매실도 “연암의 불행은 한국 문학의 불행이요, 현대 산문문학의 불행이다. 그와 같은 천품, 그와 같은 재질로 시대와 환경이 국한됨이 이와 같은 것인가. … 창신을 부르짖되 그 구각을 탈피하려 함이 삼원(三袁)에 못 미치고 한국적인 것의 구사와 이속(俚俗)을 꺼리지 않고 진실에 충실하려 하되, 기왕의 서포(西浦)의 견해에 못 미침이 또한 연암 문학의 불행이 아닌가. 이것이 또한 한국 문학의 불행이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의 연암 사랑은 투철하다.
그는 연암의 문장을 천하기문(天下奇文)이요, 한국 문학 수천 년의 결정이라고 했다. 추사(秋史)의 서(書), 단원(檀園)의 화(畵), 연암(燕岩)의 문(文)을 예원삼절(藝苑三節)이라 치켜세우면서도, 연암의 성과가 서포가 추구했던 안일한 귀족주의 문학을 압도하지 못한 것을 한국 문학의 불행이라 했으니, 추호의 오차도 없이 연암의 허실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연암 문학에서 「백영숙을 보내며[贈白永淑入麒麟峽序]」를 백미로 꼽고 있다.
백 년도 못 되는 인생, 답답하게 산협 속에서 꿩 토끼와 시들 건가 하며 나를 보고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이제 영숙은 송아지 한 마리 끌고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길러서 밭을 갈겠다는 것이다. 그 고장에는 소금도 없다. 산아가위를 짓찧어서 장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전날 연암보다 몇 갑절이나 깊은 산협인가. 그는 갈림길에 서서, 나를 돌아보며 머뭇머뭇 배회하고 차마 떠나기가 어려운 듯했다. 누가 감히 그의 길을 막으랴? 나는 그 뜻을 장히 여기고 그 궁함을 슬퍼하지 아니하련다.
― 연암의 「백영숙을 보내며」 중에서
동매실은 이 글을 이렇게 감상한다.
“그의 글은 너무나 크다. 보라, 이 일 편만으로도 족히 웅시(雄示)할 수 있지 아니한가. 인품과 교분과 처지와 추억이 생생하다. 박력 있는 굴곡과 억양 있는 격조가 스스로 강개한 여운을 남기며 결미 자못 비장하다. … 명청소품(明淸小品), 아니 현대 세계 수필문학 어디에 비해도 그 존재는 뚜렷하다.”
김승우도 연암의 이 글에 깊은 애정을 보이면서 동매실의 고독에 동조한다.
“‘백 년도 못 되는 인생을 답답하게 산골 속에서 꿩 토끼와 시들다니.’하며 껄껄 웃은 사람도 결국은 작자 자신이었다. 영숙은 의중의 상상의 인물, 즉 작자 자신의 분신일 뿐이요, 그로 해서 작자의 인품과 처지가 선명하게 부각되고 방만한 정서, 통창한 기개가 아울러 하나의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박력 있는 굴곡과 억양 있는 격조가 스스로 강개한 여운을 남기며 결미 자못 비장하다는 동매실의 음미와, 방만한 정서와 통창한 기개가 하나의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는 김승우의 이해는 고독의 공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매실은 연암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다.
“연암이 명청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인 듯하나 만명소품 작가들의 발랄한 낭만 사조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독서성령(獨抒性靈 : 오직 마음만을 서술한다)·불구격투(不拘格套 :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의 창신이 아쉬웠다.”
그는 이 아쉬움을 중국의 장대에서 찾아낸다.
“명청 소품을 개관하면 청신한 것을 취한 나머지 함축미를 잃은 것이 원중랑(袁中朗) 일파의 글이요, 이미지에 치중한 나머지 유려한 맛을 잃은 것이 담원춘(譚元春) 일파의 글이요, 두 점을 다 살려서 새로운 문장을 성취한 것이 장대(張垈)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장대는 원중랑과 담원춘을 극복하는 데 17년이 걸린다. 동매실은 이 17년 아니 그의 일생을 감내한 장대의 고독과 그 문학 성과에 지독한 애정을 표시한다.
그는 장대의 소품문 중에서 단연 「호심정 소기(湖心亭小記)」를 앞세운다.
숭정 5년 십이월에 나는 서호에 있었다. 큰눈이 사흘이나 퍼부어 호중에는 사람의 발자취도 새소리도 다 그쳐졌다. 이날 밤도 깊어서 나는 작은 거루를 하나 잡아탔다. 털옷에 화롯불을 안고 혼자 호심정의 눈을 보러 가는 것이다. 성에가 하얗게 서려 하늘도 구름도 산도 물도 모두가 희다. 호상에 그림자라곤 긴 둑의 흔적과 호심정 한 곳, 그리고 내 배와 배 안의 인영 두셋뿐이다. 정자 위에 가 보니 웬 사람 둘이 담요를 깔고 마주 앉았고 한 아이놈이 술을 데우고 있었는데 이제 막 끓고 있었다. 나를 보고 반색을 해 놀라면서 “여기도 이런 분이 있느냐”고 붙잡아 술을 권한다. 억지로 큰 잔으로 석 잔을 먹고 일어섰다. 성씨를 물어봤더니 금릉서 온 손이었다. 배에서 내리자 사공들이 넌지시 하는 말이 “바보가 한 분인 줄 알았더니 또 있더라”고.
崇禎五年十二月, 余往西湖. 大雪三日, 湖中人鳥聲俱絶. 是日, 更定矣, 余拏一小舟, 擁腿衣爐火, 獨往湖心亭看雪. 霧淞沆峴, 天與雪, 與山, 上下一白. 湖上影子, 惟長殞一痕, 湖心亭一點, 與余舟一芥, 舟中人兩三粒而矣. 到亭上, 有兩人鋪氈對坐, 一童子燒酒, 吾正沸. 見余, 大驚, 喜曰“湖上焉得更有此人!”拉余同飮, 余强飮三大白面別. 問其姓氏, 是金陵人客此. 及下船, 舟子潽潽曰”莫說相公癡, 更有癡似相公者.”
― 해석 윤오영, 원문 허세욱의 『중국수필 소사』
동매실은 이 글을 이렇게 평가한다.
“한 문단으로 되어 있고, 전문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구성되었고, 첫 자에서 끝 자까지 정열과 호흡이 일관되어 있으며, 올찬 실사(實辭)로 되어 있어 글이 올차며, 알알이 장대의 글이며, 문장의 농도와 밀도가 농염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묘사나 기사(記事)로 계속되어지고, 음조에는 억양이 있고, 표현에는 농담이 있으며, 사건과 묘사로 밀집해 있어 한 마디 한 마디 예측할 수 없으며, 순 객관적 수법을 쓴 까닭에 작자가 정면에 나서지 않으며, 그래서 글을 다 읽고 나면 글 뒤에서 인품이 떠오르게 되고, 장면 장면이 이미지로 떠오르고, 끝에 가서 소설의 클라이맥스와 같이 경이가 있어 여운이 감돈다.”
그리고 눈길을 모으는 것이, 이 짧은 글에서 두 마디의 절묘한 앙상블이다.
“여기도 이런 분이 있느냐[湖上焉得更有此人]”와 “바보가 한 분인 줄 알았더니 또 있더라[莫說相公癡, 更有癡似相公者]”가 그것이다.
장대를 반갑게 맞아 술을 억지로라도 권하는 사람은 이런 분이라며 놀라지만, 사공들은 그들 모두를 바보라 비웃는다. 이것이 장대의 여운이며, 이 고독의 향기에 그가 흠뻑 빠져 든 것이다.
윤오영의 또 다른 호는 치옹이며, 그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수필집이 바로『고독의 반추』이다. 뱃사공이 중얼거린, “손님이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보다 더 돈 사람이 또 있구려[莫說相公癡, 更有癡似相公者]”에서 치옹의 고독이 묻어난다.
윤오영은 「동매실 산고」8회에 「성탄(聖嘆)의 문장(文章)」을 발표한다. 이 발표문에서 그는 두보(杜甫)를 두옹(杜翁)이라 부른다. 즉 그는 두보를 김성탄식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성탄은 당시(唐詩) 육백 여수를 선평(選評)하면서 두보의 시는 싣지 않았다. 두시(杜詩)는 나의 경모 숭배하는 시다. 내 감히 여기 실어 평론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두시를 오재자서(五才子書)의 하나라 하여 이백보다 훨씬 위에 놓았다. 그리고 별도로 일반의 감상 해석과는 엉뚱하게 다른 『두시흔상(杜詩欣賞)』을 엮었다.”
그는 이 『두시흔상』의 여백에 낙서를 해 놓았는데, “因聖嘆 疊讀杜翁 是大幸也[성탄을 인연으로 두보를 읽으니 이것은 큰 행운이다]”라 하였다.
“雨中百草秋爛死, 階下決明顔色鮮[우중에 백초가 가을 들어 다 졌다마는, 뜰 앞에 결명화는 안색도 고운지고]”
송죽(松竹)이나 국매(菊梅)는 모르는 이 없지마는 뜰 앞의 결명초(決明草)는 아는 이가 드물다. 바람 속에 서서 향기를 맡아 보며 눈물 흘린 사람은 오직 두자미(杜子美)가 아니었던가. “임풍삼후형향읍(臨風三嗅馨香泣)”이란 낙구(落句)가 그것이다.
― 「목중노인(牧中老人)」 중에서
그는 연암을 통해 장대로 접근하였고, 또 다른 존재는 두옹(杜翁)이었다. 동매실의 치옹은 결국 장대와 두보의 일치이다. ‘고독한 노인’이 바로 윤오영이었다. 치옹이란 아호에 대해 그는 상론을 피했다. 그러나 윤오영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그의 수필관이 모호해질 수도 있다. 치옹은 어린이나 젊은이보다는 오랜 세월 고독을 감내한 노인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던 작가이다. 그는 73년 7월 『수필문학』에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작품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 평론가에 의해 지적을 받게 된다.
“첫째로 수필에도 허구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윤오영 씨의 「방망이 깎던 노인」에는 다듬잇방망이를 다 깎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대문 추녀를 바라보고 섰더라는 얘기가 있다. …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실화가 아닌 픽션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워 봤다. 그리고 이것이 만일 픽션이라면 소설의 경우와는 달리 수필에선 이 같은 허구 설정은 사실을 배반한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수필 작법의 통설로선 이런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둘째로 나는 이 작품에서 ‘작품의 의도’라는 것을 생각해 봤다. 작자는 처음부터 고집쟁이 노인에 대한 욕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그를 도연명의 경지에까지 승격시켰다. 그런데 나는 처음 몇 줄 읽다가 벌써 작품이 그렇게 나가리라는 의도를 짐작해 버린 것이다. 비밀을 미리 알아 버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필도 좀 더 욕심을 부려서 이 같은 ‘의도’의 문제도 작법상 고려해 봄 직하지 않을까.”
수필에서 허구를 수용했으며, 작품의 의도가 설익었다는 것이다.
치옹은 이러한 지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방망이 깎던 노인」(수필문학지 7월호)의 모습은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잊혀지지 않는 인상이었다. 그는 나의 뇌리에서 몇 번이고 거듭 거듭 나타났다. 비문을 새기고 있는 노인의 뒷모습에서도, 질항아리를 만들다가 쉬는 노인의 허연 뱃둘레에서도 까닭 없이 이 노인을 연상하기도 했다. 겉치레만 한 물건을 속아서 샀을 때도 이 노인을 생각했고, 고려자기나 이조백자, 이조 목공품, 도공(陶工)의 영화(映畵), 에밀레종 전설(傳說)의 영화(映畵), 무명천공(無名賤工)들의 민속공예품 혹은 구족반(狗足盤) 등 옛것을 볼 때마다 그 노인의 모습이 뇌리에서 재생되고 했다. 때로는 그들의 모습이 거룩하게도 나타나고, 때로는 불쌍한 노인의 모습으로도 나타났다. 이것이 내가 그 글을 쓰게 된 근본 동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글을 쓸 때 끝에서 도연명으로까지 승화시킬 예정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를 회고할 때,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음을 느꼈고, 내가 이런 사실을 알 사람도, 또 믿을 사람도, 느껴 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고 애수가 깊어 갔다. 그런 심정에서 그 노인의 이야기를 써 나가다가 거의 끝에 와서, 많은 이름 모를 예술가들, 무명의 천공(賤工)들,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던 가난한 기술자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나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 노인을 이를 대표하는 그림자로, 그리고 과거의 우리 문화유산을 끼쳐 준 무명의 공로자들, 다시 나타날 수 없는 사라진 그림자들,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나는 내 글에 스스로 흥분하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며 ‘그들은 누구보다도 거룩했다’ ‘순박한 시민들!’ 감분(感憤)의 격동을 느꼈다. 여기서 나는 그를 도연명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지 않고는 못 배겼다. … 그 노인이 허리를 펴고(실상은 늙은이라 허리가 아파서 폈는지도 모른다) 동대문을 바라보던 유연한 모습이 허구가 아닌가 의심하는 평자가 다시 나를 슬프게 한다. 시인으로 미화시킨 것은 허구가 아니다. 그리고 구름을 바라보는 시인, 도연명의 모습은 필자 자신의 심경의 투영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수필은 항상 모든 것을 자기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시화(詩化)된 자기를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을 자기 응시의 문학이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치옹은 시를 읽을 때는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달리 작가의 세계 즉 그 시 세계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시와는 인연이 끊어진다며, 시인으로 미화시킨 것을 허구라 지적한 평자를 개탄한다.
치옹은 평론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평론이란 작품의 점고(點考)가 아니며, 감상과 음미를 거쳐서 독자가 보지 못하는 점을 밝혀 주고 필자가 미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그윽이 숨어 있는 비밀을 천명(闡明)하기도 하고, 덮여 있는 속기(俗氣)를 뚫어내기도 하며 올바른 문학관과 예안(銳眼)으로 조류(潮流)의 동태(動態)를 살펴 정도(正道)를 개척하는 데 있다.”
평자가 시 세계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내면의 고독을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말과도 일치한다. 그는 방망이 깎던 노인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노인들을 상기시킨다. 모든 이름 모를 예술가들을 굳이 노인에게 한정시키는 것도 그의 고집이다.
마지막으로, 치옹을 이해하기 위해서 연암과 장대가 거론되었지만,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도 하나의 지표였다. 금아는 치옹을 외우라 하였지만, 그에게 금아는 언덕이었다.
금아 너무 염려 마오. 나보다 금아가 더 초조해 하는구려. 우리 생사에 초조하지 맙시다. 그것은 우리 권한 밖의 일이 아니겠소. 최후의 그 순간까지 여유 있는 유머를 잃지 맙시다. 나는 그 순간까지 낭만을 버리지 않겠소. ‘그날의 젊음을 되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소. 그렇지 못할 바에야 누님, 이 값비싼 고도자기(古陶瓷器)를 보며 즐깁시다.’ 이것이 수필가로서의 ‘찰스 램’의 진면목이 아니겠소. 우리의 소시(少時)를 되찾을 수 없고 우리들이 같이 머물러 있지 못할 바에야, 질화로를 놓고 싶어 하는 금아의 마음, 그것을 큰 보물같이 구해 놓고 기뻐하는 내 마음, 세속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오. 초조와 번뇌를 버리고 이 흙화로를 앞에 놓고 즐겨 보지 아니하려오. 달관과 해탈이 필요하오. 금아.
― 「와병 수감(臥病隨感」 중에서
치옹의 금아에 대한 우정이 빛난다. 타계하는 그 순간까지 병상에서 다듬었던 마지막 수필 최후의 문장에서 치옹은 금아를 불렀다.
치옹은 금아를 고독한 정인(情人)으로 사랑하였다. 고독하였지만 다감하고 순수한 수필가로서 흠모하였다. 금아 있어 치옹은 진정으로 고독하였다.
저승에 가서도 고독하고 싶다던 치옹이다.
그 고독이 한 원숙한 인간의, 한 치열한 작가의 높은 절의와 기개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의 삶은 결국 고독의 반추였고, 자신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독한 노인[癡翁]이기를 소망했다.
3
치옹의 수필론은 무엇인가. 그는 수필의 문학적 정의를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다. 격정과 불행과 관대가 발효되어 자연히 유로된 문학이다. 소설로 쓴 시, 시로 쓴 철학이다. 대문호의 글이 아니면, 깨끗한 순정과 지조를 지닌 문인의 생활 모습이다.
1972년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문예비평가 R. M. 알베레스(Alberes)의 20세기 후반 세계 문학의 전망은 수필계에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신적 상황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 수필이라고 했을 때, 수필 그 자체는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비유컨대 흔들리는 구슬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그윽한 불꽃이랄까. 수필- 급속한 사색을 태우고, 회전하며 반짝이는 태양은 그 특유의 성격으로써 모든 구실이 허용되어 있고, 따라서 그 영역은 놀라우리 만큼 광대한 것이다. 발상(發想)의 출발점으로서의 그것이 문학이었건 정치였건 혹은 개인적인 경험이었건 일절 상관할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수필이란 불만과 격정과 관용의 유로인 고로 ‘문학 연구’의 응용이나 정치적 개입이나, 더욱 사실의 고백이 포함하고 있는 설화적 규칙 따위에서는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말할 수 없이 부정형하면서 요구하는 바 크고 따라서 가장 자유스런 이 장르는 정신적 상황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치옹은 우리 국문은 진작부터 사대부가의 내간체에서 세련에 세련을 쌓아 맥맥히 이어져 왔으며, 연암의 문자에 와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수필적 경향을 농후하게 풍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학 형태를 빌어서 현대 사상을 추구 수용하고 새로운 문학을 모색해 보려는 것이 수필문학의 움직임이며, 이것이 정착되고 활성화되면 수필이 미래 문학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알베레스가 미래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조망하자, 치옹은 그의 이론에 전적인 동의를 표한다.
“수필문학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수필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는 알베레스의 말이라 생각합니다. 폭넓고 깊이 있는 학식과 사색과 비판력과 통찰력이 없으면 지성적 기반은 서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정서의 흐름이 없으면 문학은 되지 않습니다. 환상적 수법의 신비로운 붓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 수필문학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 산문에서 기교적으로 가장 발달된 것이 단편입니다. 지나치게 기교적으로. 여기서 단편이 예술적으로 승화되면 수필이 된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알베레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필은 불평과 불만과 격정과 관대가 발효되어 자연히 유로된 문학’이라고. 전자는 수필의 예술성을 후자는 수필의 내용의 또 한 면을 지적한 것인 듯합니다. 그리고 보다 동양 수필적 성격에 맞는 듯합니다. 나는 항상 수필문학은 위대한 문호의 글이 아니면 깨끗한 문인의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로 쓴 철학, 소설로 쓴 시, 산문문학의 극치는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옹의 수필 이론을 종합해 보면, 알베레스의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 수필의 성격을 가장 잘 지적한 것이라면서 지성과 정서의 혼연일체를 거듭 강조한다. 치옹은 수필이란 평론적 소설적 시적 수법을 포용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데서 우러나는 진지한 감정의 자연스런 표로가 있어야 된다고 피력하였고, 진정한 수필은 모든 장르를 포용하면서도 불평과 불만과 관대가 드러나야 위대한 수필이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수필 형식인 ‘소설로 쓴 시, 시로 쓴 철학’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수필이 그 범위가 광대하고 활용이 자유로운 까닭에 때로는 시도 될 수 있고 때로는 소설도 될 수 있고 평론적일 수도 있고 철학적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각종 문학의 총화적 운용이라는 데 그 묘가 있다. 동시에 비문학적 문자의 혼입이 가능하다. 시는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소설이나 평론도 다 같다. 그러나 수필은 비문학적인 문자도 전체적인 조화에서 살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된다.”
수필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를 쓸 수는 있어도,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필을 쓸 수는 없다. 소설이 더욱 승화되면 수필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그의 수필에 대한 애착은 결국 지성과 정서의 자연스런 유로가 하나의 철학으로까지 도달되어야 비로소 수필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고집이다.
마지막으로, 수필은 안개처럼 와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서정수필의 높은 기량과 예술적인 방향이라 규정한다.
“수필의 정신은 어디까지나 산문정신이다. 평소에 쌓인 온축과 박학이 완전히 융화되고 체질화되고 생활이 되어 사물을 접할 때마다 자기의 독특한 리듬을 타고 흘러 혹은 유머도 풍기고 혹은 위트도 빛내며, 혹은 풍자도 되고 혹은 우화도 되며 굽이마다 새로운 기축을 열되 어느 때 어느 줄을 퉁겨도 거문고는 거문고 소리 비파는 비파 소리를 잃지 않는 것이 산문정신의 높은 경지이다. 이런 정신의 소유자만이 위대한 수필을 쓸 수 있다. 필자는 감명 깊은 수필을 읽은 뒤엔 항상 다음과 같이 느낀다. ‘수필이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구나. 세계에서 명작이 드문 것도 무리가 아니다. 크게는 위대한 문호의 글이요, 작게는 깨끗한 문사의 글이다.’”
이제까지 거론된 다소 장황하기까지 한 치옹 수필의 문학적 정의를 간추린다면, 수필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정열적인 유로였으며, 수필 형식론으로 거론된 ‘소설로 쓴 시, 시로 쓴 철학’이라는 주장도 철학이 하나의 장르로 구분되지 못할 바엔 결국 4가지 정의 모두가 수필의 내용에 국한됨을 알 수 있다. 결국 수필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용이하게 접근되어지기를 거부하는 지고 난해 청순한 문학이라 이해된다.
치옹의 수필론은 일거에 축적된 것이 아니다. 그의 연대기에서도 밝혔듯이 만년인 53세 현대문학에 「측상락」을 발표하면서 수필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거의 인생의 말년인 72년 수필 이론을 펼치게 된 여정을 감안한다면, 모든 인생을 수필에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거론하였지만, 아무튼 그의 수필론이 정착된 동기는 72년 알베레스의 한국 방문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수필을 미래 문학의 형태로 규정한다”는 내용도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 1844-1924)의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 버릴 것이다. 오늘이 그 현실의 초기 단계이다”의 변용이라 한다면 그만의 독특한 이론은 무엇인가.
치옹의 수필론은 두 가지이다.
“창작이란 모방에서 비롯하여 탈피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라고 본다. 장대(張垈) 자신의 글이 나오기까지 17년간의 고심의 모방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자기를 성장시켜 부단히 탈피해 왔던, 공안파(公安派) 원중랑(袁中朗)의 글을 10년 동안, 경릉파(竟陵派) 담원춘(譚元春)의 글을 7년 동안 애독하다가 나는 내 자의에서만 글을 쓰고 내가 창조한 글만이 내 법이 되었다. 지금 내 글은 오직 장대의 글일 뿐이라는 술회는 그의 승리였다. 윤오영은 장대의 모방에 근거한 철저한 창작 정신을 흠모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정이 글을 낳지 글이 정을 낳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정이 없으면 글도 없다. … 제도도 변하고, 문물, 학문도 변한다. 풍속, 생활, 윤리도 때와 곳에 따라 같지가 않다. 그러나 오직 인간의 감정만은 변함이 없다. … 인생의 밑바닥에는 순수한 감정의 대양이 흐르고 있다. 가장 인간적인 문학으로서 서정수필의 귀한 소이가 여기에 있다. … 안개처럼 와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수법이 있다. 이것이 서정수필의 높은 기량이요, 예술적인 방향이다.”
하나는 모방의 탈피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이며, 다른 하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흐르는 순수한 감정의 대양이 안개처럼 와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예술적 향기이다. 즉, 수필이란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지성은 모방에서 탈피하여 얻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요, 정서는 인생의 밑바닥에 흐르는 순수한 감정의 대양이며 안개처럼 와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신비스러운 예술적 향기라는 것이다.
결국, 고심의 모방에만 머무르지 않고 부단하게 탈피를 추구하는 원동력과 앙금은 고독의 소산이며, 이 고독을 전하는 정서는 인생의 밑바닥에 흐르는 순수한 감정의 대양이다. 이 너른 바다에 이르러서야 위대한 수필문학은 순항을 예고한다는 것이 그의 수필론이다.
치옹 수필의 첫 이정표는 독서를 통한 고독과의 만남이었다.
한국은 물론 특히 중국 문학에 대한 치옹의 천착은 각별하다.
「구지가(龜旨歌)」를 새롭게 해석하여 비범한 문학적 감상과 높은 평안(評眼)을 과시하였고, 백제 가요인 「정읍사(井邑詞)」 고려가요 「사모곡」 「청산별곡」 그리고 「정과정(鄭瓜亭)」에서 한국 전통의 문학적 향기를 흠향하였으며, 민요 「아리랑」의 어의적 접근으로 한국인의 회상과 애수를 재현하였으며, 누항(陋巷)의 궁유(窮儒)였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한국 목소리를 재인식시켜 주었으며, 연암을 최고의 지성으로 치켜세웠고, 절명시(絶命詩)로 일제에 항거한 황매천(黃梅泉)을 그리워하였고, 한국인 호흡으로 일관된 정열을 풍미한 단재 신채호의 문장을 높이 추앙하였다.
특히 그의 중국 문학에 대한 이해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천하를 마다한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기개로 시작해서, 『시경』 『초사』·공자·노자·장자·순자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고, 궁형(宮刑)의 치욕을 구우일모(九牛一毛)의 하찮은 일로 여기면서 중국을 서술하였던 고독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죽림칠현의 맏형 완적(阮籍), 물외(物外)에 초연한 도연명(陶淵明)의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누구도 부정 못 하는 최고의 문예비평가인 유협(劉塊)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숭상하였고, 삼척동자도 입에 달고 다니던 시선(詩仙) 이백을 제치고 두보(杜甫)와 최호(崔顥)를 거론하였고,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을 아꼈고, 전통주의에 반기를 들고 순수예술성을 강조한 이탁오(李卓吾)의 동심설(童心說), 명청(明淸) 소품문(小品文)의 총아(寵兒)인 장대(張垈) 담원춘(譚元春) 임사환(林嗣環)에 정통했고, 이단적 문학비평가이기를 감수하면서 문학의 독립성과 서민문학의 가치를 고양하려 했던 김성탄(金聖嘆) 이어(李漁) 원매(袁枚) 그리고 『배영(背影)』의 작가 주자청(朱自淸)까지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종횡무진 섭렵하였다.
그의 독서 편력은 비범하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순수 예술의 정통성과 문인의 자존심 앞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던 고독한 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여기서 그의 문학관은 싹텄다. 그리고 그의 독서 사랑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작품을 읽고 굳이 작자를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 글을 내 글이라 해도 도용될 것이 없고, 내 글은 연암의 글이라 해도 허위 될 것이 없다. 옛사람의 글을 읽으면 내 속에 있는 글이요, 내 친구의 글이다. 그것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가. …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요. 내 프리즘을 통하여 재생된 자연인 까닭에 새롭고, 자신은 주관적인 자신이 아니요,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일 때 하나의 인간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감정은 여과된 감정이라야 아름답고, 사색은 발효된 사색이라야 정이 서리나니, 여기서 비로소 사소하고 잡다한 모든 것이 모두 다 글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창작이란 모방에서 비롯하여 탈피해서 얻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라고 본다.”
그는 모방에도 품격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니, 내 프리즘을 통해 응시해서 얻은 객관적인 자신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독창력이란 사려 깊은 모방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치옹의 수필론은 정(情)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수필은 원래, 같은 수준의 지식인끼리의 심사의 교류였던 까닭에 그 출발이 지성이요, 기반이 지성이니 만치 정서적인 낭만과 신비적인 환상의 세계를 고조함으로써만 그 예술성을 독립시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심정이 부딪치는 곳마다 수필의 꽃이 피기 때문에 경물을 그리는 법은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태양 아래의 세계라기보다는 달밤의 정경 같아야 하며, 서사 논리의 요체는 불만과 격정과 관용의 표출이기에 먼 데서 몰려오는 조수와 같이 감정이 말없이 전편을 물들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맥(文脈)이니 문세(文勢)라는 것도 결국 문정(文情)이 도도하게 흐르는가 그렇지 않느냐의 하부 구조에 다름 아니다. 막히면 동맥경화증이고, 터지면 뇌일혈로 처치 곤란의 증세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안개같이 시작해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글을 가장 높은 글이라 하였는데, 정이란 것이 안개처럼 퍼지면 수필은 최고의 문학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푸른 청배자(靑褙子)가 군중 속으로 사라진 2년 전의 그 뒷모습에서도 주자청은 그 아버지를 생각하고 울었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 미묘한지라 왁자지껄 떠들 것이 아니다. 안개처럼 와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수법이 있다.”
정이란 어디에서 가장 잘 포착되나. 그는 이 포커스를 뒷모습에 맞춘다.
어느 날 저녁, 어느 술집 골목을 지날 때, 웬 친구가 내 등을 탁 치며, “야! 이 자식 참 반갑다. 한잔 하자.” 하기에 쳐다보니 생면부지의 사람이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다. 그도 미안한 듯, 사과하기에 바빴다. 나는 웃으며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의 경솔을 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반가운 친구를 헛짚고 혼자 가는 그 뒷모습이 한없이 고적해 보였다.
-「다연(茶煙) 속에서」 중에서
그들의 짐 뒤에 빠짐없이 매달려 가던 바가지짝은 슬펐다. 그들이 반만년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고국의 유산이 오직 이 바가지짝이요, 만리이역에서 어루만지며 마음을 달랠 것이 오직 이 바가지짝이었다. 새벽 바람에 지새는 별을 보며, 덜거덕거리는 바가지짝을 소중히 메고 차에 실려 가던 뒷모습은 슬펐다. 뼈에 사무치는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동구 안에 들어설 때 반기던 그 허연 박꽃을 회상하면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하다.
-「박꽃」 중에서
그런데 오늘은 별나게도 대화를 잃은 그 여인이, 고개 너머로 사라지는 그 여인의 모습이, 가로수 선 길로 걸어가던 그 모습이, 내 옆에 같이 있다 없어졌던 그 자리가 아쉽기만 하다. 그는 말없이 걸어가 버리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세월의 아쉬움을 본 것이다.
-「해를 보내는 아쉬움」 중에서
치옹이 포착한 뒷모습은 주자청의 배영과는 별개이다. 작품으로서의 성공은 주자청이 거두었을지 몰라도, 그는 한국 산문의 순수한 예술적 방향을 고적하고, 슬프고, 서글프고, 아쉬운 뒷모습에 기탁한 것이다.
“수필에는 버려야 할 평범이 없다. 평범이 그대로 수필인 까닭이다. 그러자면 수필가는 그 자신이 수필이어야 하며 생활 그 자체가 글이어야 한다. 글을 떠나서 생활이 따로 없고 생활을 떠나서 글이 따로 있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수필가요, 또 문사의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생활이 곧 글이 못 되는 까닭에 수필이 모두 문학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시인, 소설가는 많아도 수필가는 드물다.”
완고한 수필가 치옹이 수필가로서의 자존심을 십분 발휘한 대목이다.
그는 수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문학수필 그리고 일반수필이다. 문학수필만이 그가 지향한 목표이고, 일반수필은 속문이나 잡문 정도의 허섭스레기로 여겼다.
“소설을 밤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枾]에 비유될 것이다. …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못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되면 문학이요, 잘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 감이 곧 곶감이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문장기(氣)를 벗겨야 참 글이 된다는 원중랑의 말이 옳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坵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싸인 신비로운 정서이다.”
치옹의 수필론이 바로 이것이다.
한 그루의 감나무가 있어 감이 자라고, 익고, 껍질을 벗기고, 말리고, 시설이 앉고 그리고 접는 것까지 마쳐야 비로소 곶감이 되듯이 산문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문학수필로 탄생된다는 것이다.
수필에서의 허구 운운은 밤이나 복숭아를 곶감으로 바꾼다는 억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만, 표현의 허구는 지적 정적이며 지적인 허구는 의식적이요 소설적이며 정적인 허구는 상상적 환상적이며 시적인데, 수필이 단순히 기록이 아닌 문학이라면 상상의 세계에 서 있어야 하며 그 허구는 예술적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아무나 맛있는 곶감을 못 만든다. 기다림과 보살핌 그리고 정성은 기본이고, 곶감에 대한 긍지와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곶감에 대한 애정이며, 수필에 대한 사랑이다. 치옹은 수필이 빛 좋은 잘 접은 곶감이기를 원했다.
4
버릴 수 없는 인생의 향기 같은 고귀한 수필과 함께한 치옹은 결코 고독하지 않았다.
이론과 실제를 병행한다는 것은 물 건너 물 있고 산 넘어 산 있는 것같이 어렵고도 외로운 문학 여정이다. 먼 산은 푸르게만 보일 뿐이다. 그의 고독한 쉼터였던 그 산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전망 좋고 햇살 밝은 잔디밭에도 앉아 보고 자갈과 황토가 섞인 거친 능선을 타고 땀 흘리며 올라 보는 것이 이 장에서의 소박한 바람이다.
치옹의 문학은 외로움에서 출발하였다. 그 정서에서 우러난 곱고 깨끗한 것이 부드럽게 손에 쥐어지는 수필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과 애틋한 정취가 충만해 있다. 그는 수필 전편에 한국의 정회를 흠뻑 적시기를 간구하였다.
역시 바람은 솔바람이다. 첫째 솔은 그 줄기가 곧고 가지가 길다. 그리고 가지가 쩍쩍 벌어졌다. 그런 까닭에 바람 소리가 높고 층층으로 받아, 막힌 데가 없이 어울려져 퍼져 나간다. 그 잎이 바늘같이 가늘되 또 강직하다. 그러므로 활엽수같이 바람이 채는 데가 없고 갈대같이 바람이 부석거리지 아니한다. 강한 바람이 일 때는 늙은 줄기를 치고는 늘어진 가지를 흔들어 소리 자못 웅장하다.
-「송석정(松石亭)의 바람 소리」 중에서
치옹만이 그릴 수 있는 솔바람이다. 그는 우리를 바람 부는 소나무 숲으로 금세 데려다 놓고야 만다. 어느 한 글자 자리를 어긴 것이 없다. 그리고 순수 우리말과 한자가 어우러졌는데도 성긴 데가 전혀 없다. 짧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나무를 빼어나게 그리는 화가의 경쾌한 손놀림과 날렵한 터치에서도 잡히지 않은 그의 솔바람이다.
금아는 치옹의 수필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옥같이 고루 다듬어진 수필들이 참으로 많다. 「염소」 「비원(秘苑)의 가을」 「찰밥」 「달밤」 「소녀(少女)」 「소창(素窓)」 「봄」 「방망이 깎던 노인」 「산」 「생활의 정」 「나의(我的) 독서론(讀書論)」 등은 그 중에도 걸작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부정한다.
나는 일찍이 몇 편의 소품을 써 본 적이 있다. 어느 것이나 나대로는 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영상들이 있었다. 「소녀」 「순아」 「농촌」 「달밤」 「촌부」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 용렬했던 표현에 얼굴이 붉어진다. 거기에 무엇이 나타나 있는가. 누가 그것을 읽고 그 영상의 깊이 있는 생명감을 혹은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를 상기해 줄 것인가. 내가 밀레였다면 답답하고 우둔한 그런 글을 쓰지 아니했을 것이요, 한 폭의 화면을 빌어 머물게 했을 것이다. 그의 화필이 부럽다.
-「원작화중인(願作畵中人)」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교만한 겸손이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자기 작품에 대한 칼질이 예리하였다. 치옹은 『수필문학』에 「마고자」라는 작품을 게재하고, 그다음엔 스스로 냉정한 평자가 되어 메스를 들이댄다.
“필자 또한 여러 편 써냈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니 소루(疏漏)가 눈에 띈다. 마고자 같은 것은 내 딴에는 음미할 만한 시사성을 지니도록 쓴 것인데, 책이 온 뒤에 다시 읽어 보니 후단의 장황한 사족이 전문의 효과를 뭉개어 딴 것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른바 자살적 서술법의 과오를 범한 것이다. 스스로도 아연했다. 분망에 몰리고 자기도취에 쓰다 보면, 이런 것이 뒤늦게 눈에 띈다.”
수필을 곶감이라 했던 그다.
치옹은 독서(讀書)와 습작(習作), 습작과 수련(修鍊), 소재의 선택과 서두(書頭) 이 세 항목에서 수필 출발의 기초를 삼았고, 문맥 문세 문정의 세 항목에서 행문(行文)의 정서를 기렸고, 서정(抒情) 서사(敍事) 설리(說理) 사경(寫景) 네 항목에서 행문의 내용을 파악하였으며, 문장과 표현에서는 간결 평이 정밀 솔직한 글을 써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아직도 그가 바라는 수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쇠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이 될 정도로 한 자 한 자 쪼고 쪼아서 정밀하게 다듬는 퇴고의 단계를 거쳐야 되며, 다시 또 비평 듣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된다고 한다. 만일 칭찬하는 이가 있으면 두 번 찾아갈 필요가 없지만, 결함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약석(藥石)으로 알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의 단계가 거쳐져야 비로소 한 편의 수필로 탄생되는 것이며, 곶감으로서의 수필이 생명력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금아는 자신이 읽은 10대 명수필 중에서 치옹의 달밤을 꼽는다.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았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됐소. 농주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 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달밤」 전문
한적한 농촌에서의 달밤의 정경과 풋풋한 정서가 안개같이 녹아든 작품이다.
굳게 잠겨 있는 대문을 흔들지 않고 돌아서는 작가의 뒷모습에는 달밤의 정적이 깨지지 않았고, 노인과 탁주를 큰 사발로 들이켠 후 헤어지는 장면이 소탈하고, 얼마쯤 가자 돌아보니 사랑 툇마루엔 달빛이 휘황한데 그대로 앉아 있는 노인에게서 고독한 적막이 듬뿍 묻어나는 작품이다.
작품은 짧지만 여운은 유장하다.
문장이 세련되면 육칠 매를 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 했듯이 압축시켰다. 그렇지만 부러 결함의 미를 추구한 작가의 계획된 의도인지는 몰라도, 우선 초입의 발걸음이 경쾌하지 못하다. 가장 훌륭한 시작으로 안개같이 시작해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글을 추천하지만, 이 달밤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경한 것도 보이지 않고 또 평범에서도 빠진다.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보다는 “잠시 낙향해서 있던 어느 날 밤,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가 세련된 리듬감 아닐까. 그리고 ‘내가’ 불쑥 머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반감되고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쓸데없는 중복으로 긴장미를 결여시켰다. 이러한 표현은 전문에 걸쳐 나타나고, 군말이 많아 호흡은 거칠어지고, 논리성의 간과로 방향(芳香)은 흩어지고 만다.
양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치옹이 시골의 정서에 지극히 민감하였을 터인데, 그는 초연하기만 하다. 노인이 방에서 들고 나왔던 소반의 ‘무청김치’ 한 그릇에서 깊어 가는 가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한 모내기 철 같았고, 그 흔한 섬돌 밑의 귀뚜라미와 사립문을 지키는 누렁이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밤에 젖어 있었다.”에서는 ‘푸른 하늘’과 ‘덮여’라는 표현이 다소 생경하다. 그리고 뒤 문장과도 호흡이 안 맞는다. 그냥 ‘하늘은 먼 마을에 걸려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한 자라도 덜 써 효과가 같으면 덜 쓰는 게 좋은 글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 신념은 깔끔하고 간결하게 되는 효과에 초점을 맞추었고, 운율을 막지 않아 독자에게 감흥을 고조시키는 강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시에 문장이 있고, 문장에 시가 있다[詩中有書, 書中有詩]”라는 한 문장가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시 말해 잘된 문장은 시든 산문이든 리듬을 타고 유연하게 흐른다는 것이다. 생경한 표현 무리한 짜깁기 등은 리듬을 막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즉, 문맥을 막아 문세가 약해지는 것이니 문정을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높일 뿐이다.
고개 마루턱에 방석 소나무가 하나 서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지반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중략)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있었고, 한편 들에서는 일꾼들이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에 들어가 어른들을 뵙고 수인사 겸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얼마 지체한 뒤에, 안 건넌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려는 것이다. 사랑방은 머슴이며, 일꾼들이 드나들고 어수선했으나, 건넌방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방도 말짱히 치워져 있고, 돗자리도 깔려 있었다. 아주머니는 오빠에게 나와 인사하라고 소녀를 불러냈다. 소녀는 머리 준비를 차리고 있었던 모양으로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곱게 매만져 있었다. 나도 옷고름을 다시 매만지며 대청으로 마주 나와 인사를 했다. 작년보다도 훨씬 성숙해 보였다. 반쯤 닫힌 안방 문 사이로 경대 반짇고리들이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막 건넌방에서 옮겨 간 것이 틀림없었다. 아주머니는 일꾼들을 보살피러 나가면서 오빠 점심 대접하라고 딸에게 일렀다. 조금 있다가 딸은 노파에게 상을 들려 가지고 왔다. 닭국에 만 밀국수이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는 촌이라 변변치는 못하지만 많이 들어 달라고 친숙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곱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남창으로 등을 두고 앉았던 나는 상을 받느라고 돗자리 길이대로 자리를 옮겨 앉아야 했다. 맞은편 벽 모서리에 걸린 분홍 적삼이 비로소 눈에 띄었다. 곤때가 약간 묻은 소녀의 분홍 적삼이. 나는 야릇한 호기심으로 자꾸 쳐다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밖에서 무언가 수런수런하는 기색이 들렸다. 노파의 은근한 웃음 섞인 소리도 들렸다. 괜찮다고 염려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밀국수도 촌에서는 별식이니 맛없어도 많이 먹으라느니 너스레를 놓더니, 슬쩍 적삼을 떼어 가지고 나가는 것이었다. 상을 내어 갈 때는 노파 혼자 들어오고, 으레 따라올 소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내가 올 때 아주머니는 오빠가 떠난다고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안방에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했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수줍어졌니 얘도 새롭기는” 하며 미안한 듯 머뭇머뭇 기다렸으나 이내 소녀는 나오지 아니했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
― 「소녀(少女)」 중에서
소설로 쓴 시같이 아름다운 수필이다.
보리 베던 농가의 정경과 소박한 인정이 은근하게 형상화되고, 예절을 숭상하던 조상들의 손님맞이에서의 조신함을 다시 한 번 음미할 수 있는 즐거움과 먼 친척 오누이와의 부끄러운 만남도 한 편의 시가 되어 독자를 기쁘게 하는 명품이다.
인상적인 것은 시작에서부터 독자의 흥미가 고조된다. 마을 입구에 도착한 작가의 감회가 한 그루 방석 소나무 위에 호젓하다. 소나무 밑에서 모자를 벗고 땀을 식히며 마을을 내려다보는 그가 우뚝하다.
“이 「소녀(少女)」의 서두는 약간 길어지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 그 집을 가자면 논둑 밭둑으로 상당히 오래 가게 됩니다. 그 들어가는 시작을 어디서부터 써야 옳을지 도무지 서두가 만만치 아니했습니다. 그 때 송강의 ‘재 넘어 성 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의 시조가 떠올랐습니다. 옳다, ‘재 너머로 해 버리자’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말로 이 고개의 이미지를 어떻게 살릴까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때 떠오른 것이 내가 어려서 고개 너머 글방에 다닐 때, 항상 인상적이었던 방석 소나무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첫머리를 쓸 수가 있었습니다. ‘고개 위에는 방석 소나무가 하나 서 있다. 여기까지 오면 다 온 셈이다.’ 그러고 나니 다음은 일사천리로 글이 풀렸습니다. 써 놓고 보니 16페이지던 글이 9페이지로 줄어들며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작이 좋으면 끝은 시나브로 다가선다. 그도 시작이 중요하다. 첫머리 한마디가 전편을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소녀」라는 작품에서는 서두보다 끝에서 문제가 된다. 안개같이 시작이 되었지만 끝은 안개가 아니었다. 그는 말미에서 적삼 들킨 것이 무안하고 부끄러웠기에 소녀는 집 안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다시 뒤에서 이것을 반복한다. 이런 번거로움이 여운을 잠식하고 독자의 공간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올 때 뒤를 흘낏 훔쳐본 나는 숨어서 반쯤 내다보는 소녀의 뺨이 확실히 붉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부끄러웠던 것이다.”는 아무래도 번다하다.
치옹 수필은 창작이란 모방에서 비롯하여 탈피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 그리고 정에서 출발된 문학으로 요약된다. 때문에 그의 수필을 읽다 보면 모방에서 출발한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양잠설」이다. 누에 이야기를 듣기 전에 그가 강조하였던 「연암의 문장」을 살펴본다.
“매탕(梅宕)이 추녀 끝에 늙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을 보고서, 기뻐하며 하는 말이 ‘묘재라, 느릿느릿 멈추고 있으니 생각에 잠긴 듯 휙 내갈기니 얻음이 있는 듯, 씨를 뿌리는 사람의 발꿈치인 양 지근지근 밟으며 돌더니, 거문고 타는 손가락같이 움직여 간다.’ 여기서 거문고 곡조를 얻고, 글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야연기(夏夜漣記) 속에 있는 노주지해(老蛛之解)의 일단을 간추려 본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문장론으로 본다. 이 얼마나 취미 있는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위에 열거한 모든 그의 문장론을 씻을 수 있는 최고의 문장론이다. 자연의 리듬에서 우주 창조의 질서를, 자연의 법리에서 문학을 창조한다면 진실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아닌가. ‘法於古以前之古하여 創我前無後無之文이면 不亦偉哉아[옛것 이전의 옛것으로 법을 삼아 전무후무한 문장을 내가 창작한다면 역시 위대하지 않겠는가]’. 장자(莊子)의 해우(解牛)가 곧 이것이 아닌가. 그러나 연암의 글에서 과연 이 말에 해당할 글이 몇 편이 있는가.”
장자의 「양생주(養生主)」에서의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던 포정(煊丁)의 소 잡는 동작과 이덕무의 「노주지해」에서의 추녀 끝에 늙은 거미의 거미줄 치는 모습이 흡사하다.
거미가 느릿느릿 멈추고 있는 것은 작품의 제재와 구상을 궁구하는 것이고, 휙 내갈기는 것은 영감을 얻어 작품의 윤곽을 파악한 것이 되고, 지근지근 밟으며 도는 것은 작문의 유연함을 나타낸 것이며, 거문고 타는 손가락같이 움직여 간다는 것은 천의무봉의 작품을 얻었다는 비유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양잠설」은 어정쩡한 흉내였다.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 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 이 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턴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면기(催眠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 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初蠶)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최면,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一齡) 이령(二齡) 혹은 한 잠 두 잠 잤다고 한다. 오령(五齡)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중략) “그 사람 참 꾸준한 노력이야, 대원로지, 그런데 별수 없을 것 같아” 병든 누에다. 집 못 짓는 쭈그렁밤송이다. “그 사람이야 대가지, 훌륭한 문장인데, 경지가 높지 못해” 고치를 못 지었다는 말이다. 일가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양잠가에서 문장론을 배웠다.
― 「양잠설(養蠶說)」 중에서
양잠가에서 문장론을 배웠다는 「양잠설」은 시작에서부터 날렵하지 못한 것이 끝에 가서는 무디어지기까지 하였고, 비유 또한 부실하다.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잔 적이 있었다.”라는 문장에서부터 엉긴다. 그냥 “어느 농가에서 하루 지낸 적이 있다.”라 하였어도 무난하였을 터이며, 수필 전편을 촌부에게 들은 이야기로 끌고 나가려다 보니 생동감과 상세함이 결여되었다. 다시 말해 누에방[蠶室]에 들어가서 누에의 세세한 움직임을 관찰한 흔적이 안 보이니, 뽕잎과 누에 냄새는 언감생심이다.
결론 부분에서 대원로를 병든 누에라든가, 대가를 고치를 못 지었다는 투의 속단에는 반발의 소지를 동반한다. 한마디로 오령기를 거치면서 병든 누에는 즉시 제거되는 것이 순리 아니겠는가. 노련한 양잠가는 누에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천득 「수필」에서의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라는 한마디가 간곡하면서도 시사적일 것이다.
치옹의 대표작 몇 편을 투영해 보았다. 언뜻 공연스레 흠집을 키워 보려는 저의라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이론과 실제의 어려움을 보다 극명하게 노출하고자 하였던 의도도 있었다.
5
세상이 변하여도 오직 하나 인간의 감정만은 그럴 수 없고, 모든 문학을 수용하는 미래의 장르가 바로 수필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인간의 감정은 그야말로 인지상정이지만, 작가의 문정(文情)은 고심의 모방에서 벗어나 부단하게 탈피한 고독의 소산이며, 이 고독을 전하는 수필가의 정서는 삶의 밑바닥에 흐르는 순수한 감정의 대양 같아야만 수필문학을 너른 바다 거친 파도에서도 도도하게 순항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가 추구하였던 수필의 본령이었다.
윤오영의 수필 인생은 고방(孤芳)의 가교(架橋)였다.
그는 수필을 곶감으로 비유한 한국의 수필가였다.
“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간다. …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싸인 신비로운 정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필에는 이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논리는 한갓 어설픈 변명에 지나지 않고 유치한 식견에 다름 아니다.
수필은 미래의 문학이며, 시 소설 평론 논설문 서간문 일기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의 모든 이론을 수용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이론이 드러나거나 풋내가 나면 실패한다는 그의 지적을 상기한다면, 수필 이론은 이미 소요유의 장자에서 출발하였으며, 사대부가의 내간체에서 세련에 세련을 쌓아 맥맥히 이어 온 문학사의 유산이다.
윤오영은 현대 수필문학의 전령사였다.
1959년 『현대문학』에서 시작하여 1976년 『수필문학』으로 수필을 마감한 치옹의 이력은 고적(孤寂)의 웅시(雄示)였다. 그 고독의 소산에서 잉태된 동매실의 작품과 이론은 빗장을 아무나 열던 수필계의 완고한 주인이었다. 그 고독의 공감에 다가서기 위해 그의 수필 자취를 작가관 수필론 그리고 작품론으로 조망하였다.
윤오영의 스승은 고독이었다.
옛사람이 끼쳐 준 고회(孤懷)의 입김과 손때를 한국의 박지원과 중국의 장대에서 찾았고, 그 고독의 모방을 위해선 그의 모든 문학적 가치를 희생하여도 꺼릴 것이 없다 하였다. 연암이 만명소품 작가들의 발랄한 낭만 사조를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독서성령 불구격투의 창신이 아쉬웠던 것이 한국 문학 아니 현대 산문의 불행이라 서운해 하였지만, 함축미와 유려한 맛을 살리기 위해 17년간의 고궁(孤窮)을 감내한 장대에게 윤오영은 그의 작가관과 문학 정신을 흔쾌히 기탁하였다. 그리고 치옹이라는 아호도 장대와 현실시인 두보의 문학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치옹은 함께 고독을 나눈 다감한 문우 금아가 있어 진정으로 고고(孤高)할 수 있었다.
윤오영의 수필론은 고독의 모방이었다.
그의 수필론은 72년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알베레스에 의해 골격을 갖춘다. 지성을 기반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격정과 불행과 불만과 관대가 발효되어 자연히 유로된 문학이라는 견해에 그는 수필문학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 동조하였고, 수필이 소설로 쓴 시, 시로 쓴 철학이기 위해 깨끗한 순정과 지조를 지닌 문인의 생활 모습이 작품에 묻어나야 된다는 이론은 그의 수필 결산일 것이다.
치옹의 수필론은 내용과 형식의 접근일지 몰라도, 결국 수필의 내용에 국한되었으며, 이것은 수필이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용이하게 접근되어지기를 거부하는 지고하고 난해하며 청순한 문학이라는 강조를 고독을 통해 입증한 것이다.
그의 수필론을 요약하면, 모방의 탈피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흐르는 순수한 감정의 대양이 안개처럼 와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예술적 방향이다. 그는 안개같이 와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서정수필을 모색하려 모방에서 방황하였던 수필론자였다.
윤오영의 작품은 고독의 향기였다.
그는 문학이론과 실제를 병행한 외로운 노정을 택하였다.
그의 여정은 연암에서 장대까지이다. 그리고 고초(孤瞻)에서 우러난 곱고 깨끗한 것이 부드럽게 손에 쥐어지는 수필을 사랑하였고, 거문고 줄을 퉁기면 거문고 소리가 비파 줄을 퉁기면 비파 소리가 나듯 수필 전편에 한국의 정서가 뚜렷한 작품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실패한 수필가로 자처한다.
“나는 문학가가 아닌 것을 스스로 안다.”
그의 눈은 세련된 감정사였다. 옥석을 구분하는 데 추호의 타협이 없었다. 연암을 사랑하였지만 누구보다도 연암을 거세게 질타한 사람이 그였기에, 작품 분석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그의 준열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의 용렬하였던 표현에 얼굴이 붉어지고, 영상의 깊이 있는 생명감이나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에 소홀하였던 자신을 원망한다.
그의 작품 「달밤」 「소녀」 그리고 「양잠설」을 분석하였고, 거기에 나타난 우열을 나름대로 가늠하여 보았다. 아쉽게도 결함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어쩌면 수필의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표출시킨 반어일지도 모른다.
윤오영의 수필은 정(情)의 문학이다.
정이 아니면 고독은 없고 고독에서 정은 출발한다.
수필은 재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정으로 쓰는 것이다. 정이 글을 낳지 글이 정을 낳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정으로 글을 채우면 천속한 글이 되므로 정은 항상 글 밖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으로 시작하고 정으로 끝을 내지만 정은 항상 침정불로(沈情不露)의 경지에서 아련해야 한다는 것이니, 소설이나 시의 경지를 능가하는 난공불락의 문학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슬픔과 고통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그 슬픔과 고통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 또한 예술가의 버거운 몫이다. 그의 고독은 슬픔과 고통이었다. 그 고독에는 한국의 정서가 있었고 한국과 중국의 외로운 지성의 향기가 그를 인도하였다. 치옹(癡翁)의 수필 인생은 이 고독의 반추였고, 그 고표(孤標)를 추동한 것도 그 미로에서 방황한 것도 그에게는 외로움이었고 수필이었다. 외로운 광야(曠野)에 서서 폐부 아니 사유에서 터져 나오는 휘파람을 불어 보려 하였던 고독에 우리는 흔연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독은 현대 수필문학에서 한 알의 밀알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