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迎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의 근오지현인데 경덕왕이 임정으로 고쳤고, 고려초에 연일(延日)로 고쳐서 현때 경주에 속하게 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변천을 거치고 이웃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을 병합하여 영일군(迎日郡)으로 개칭되었다.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육부촌중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봄 유리왕으로 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받을 때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 종은(宗殷)이 신라조에서 간관(諫官)으로 직언을 하다가 인동 약목현에 유배된후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로 이거하여 호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로 시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가 실전 되고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조에 은청광록대부로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로 갈라져서 세계를 있고 있다.
각 계통별로 인맥을 살펴보면 지주사공파 습명(襲明)의 11세손 몽주(夢周)가 뛰어났다 반만년 한국사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몽주(夢周)는 1337년에 경북 영천에서 일성부원군 운관(云瓘)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름다운 난초화분을 안고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고 사흘 후에 낳았다고 하여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몽란이 아홉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깜빡 잠이들어 꿈을 꾸었는데, 금빛나는 한 마리의 용이 뜰의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 먹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깨어나 나무를 쳐다보니 몽란이 배나무 위에서 용처럼 웃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의 어머니는 몽(夢)자에다 용(龍)자를 붙여 몽룡(夢龍)이라고 고쳐 불렀다. 몽룡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아버지 운관(云瓘)의 꿈에 중국의 옛 현인 주공이 나타나 이르기를 "몽룡은 후세에까지 가문과 명성을 길이 빛내게 할 것이니 소중히 키워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주공(周公)의 주(周)자를 따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몽주는 자라면서 충(忠)과 효(孝)와 의(義)가 남달리 뛰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3일 동안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였으며 묘소 옆에다 여막을 짓고 혼자 3년 동안이나 상식을 올리며 효(孝)를 다하자 세상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했다
1360년에 연달아 삼장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몽주는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순충윤도동덕좌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익양군 충의백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성계가 개국위왕의 뜻을 품게 되자 이에 단연히 결별하여 그의 마지막 일편단충까지도 고려를 위해 바치었다.
어느날 밤 몽주는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방원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몽주의 심증을 떠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한수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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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서낭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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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주는 이 시(詩)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술잔을 보내며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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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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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몽주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안 방원(芳遠)은 그를 제거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심복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군기고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선지교 밑에 숨어 있다가 몽주가 지나갈 때 치라고 하였다. 몽주는 이 모의 사실을 변중량을 통하여 미리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각오한지 오래된 죽음을 조용히 기다렸다. 살해되던 날 아침 조상들의 신위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충효를 숭상하는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한사코 말려도 뒤를 따르는 녹사(錄事) 김경조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친구 성여완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다시 말을 타면서 수행하는 녹사 김경조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고 하자, 녹사는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하였다. 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김경조에게 말을 끌라 하면서 "부모에게 물려 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를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하며 선지교를 향하였다.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조영규를 비롯한 4-5명의 괴한이 쇠뭉치를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앞에서가던 김경조가 먼저 쓰러지고 이어 몽주가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이때 몽주의 나이는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고 하여 선지교를 <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되었다.
몽주의 시체는 죄과(罪過)로 몰았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으나 송악산 중들이 염습하여 풍덕땅에 묻었다, 통일신라에 이어 34대왕을 거치면서 475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왕조는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지만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와 새 왕조 창업을 꿈꾸던 이성계의 신흥세력이 불붙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신성인으로 의(義)를 살렸던 몽주의 충정과 일편단심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역사의 터전에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조선이 개국되고 고려의 역사와 인물들이 터무니 없이 왜곡되었어도 태종은 몽주의 묘(墓)를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몽주의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에 추증하고 회유책으로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주었다. 몽주의 묘를 이장할 때 면례(緬禮) 행열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다 이장하였다고 한다.
몽주의 아들 종성(宗誠)이 가선대부로 지중추원사를 지냈으며, 손자 보(保)가 사육신사건에 연루된 <8현 (八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일 정씨의 절맥 을 이었다. 학문이 탁월하여 세종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던 보(保)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한 말이 한명회를 통해 세조에게 알려져 친국을 받을 때 "나는 항상 성삼문과 박팽년을 성인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스스로 자백했으니 처형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세조는 수레로 쳐어 죽이라고 명하고 나서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에서 "이는 정몽주의 손자입니다."하자 급히 명하여 형벌을 그치게 하고는 "충신의 후손이니 특히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내라."고 하였다.
고려때 감무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의 인맥으로는 극유의 6세손 사도(思道)가 직제학을 역임했고, 우왕때 지문하성사와 정당문학을 지낸후 오천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진(鎭)이 조선때 공조 판서를 역임한 후 오천부원군에 추봉되어 세종 때의 명신 연(淵)과 함께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병조판서 연(淵)의 증손이 기묘 명현인 완(浣)이다. 그의 아들 숙(潚)이 절효(節孝)로 명망을 떨쳤는데, 특히 친구 성수종이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처를 평생동안 먹여 살려 우애의 본보기로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중추부사를 지냈던 순(洵)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후사가 없어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던 운명론자였다. 그의 임종에 딸들이 둘러 앉으니 "내 딸들은 모두 단정하다."고만 말할 뿐 후사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않음으로 부인이 당황하자 "운명인 것을..."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돈령부 판관을 역임했던 유침(維 )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자(滋)는 명종때 이조정랑에 있었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大尹)인 윤임의 처남이라 하여 화를 입었고, 둘째 소(沼)는 형인 [자]가 죄없이 화를 당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순천에 은거하여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었다. 유침의 셋째 아들 황(滉)은 군기사 첨정을 거쳐 김제. 안악군수를 지내고 내섬사 부정에 올라 광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시가(韓國詩歌)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던 송강 철(澈)은 유침의 막내 아들이다. 1536년에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던 송강은, 그의 맏누이가 인종의 숙의(淑儀)로 있었으며, 그의 둘째 누이는 계림군 [유]의 부인이 되었으나 을사사화에 매부인 계림군 이 연루되어 화를 당했고, 송강의 아버지 유침도 관북 정평으로 유배되었다가 송강이 16세 때 풀려났다. 석방된 송강의 아버지 유침은 가족을 데리고 송강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담양부 창평으로 내려 갔다. 송강은 을사사화의 화를 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순천으로 내려가 우거하고 있던 둘째 형인 소(沼)를 찾아가던 도중, 부호인 사촌(沙村) 김윤제에게 그의 재질을 인정받아 지곡 성산에 정주하면서 김윤제의 사위인 류강항의 딸과 혼인하고 윤제의 조카인 서하당 김성원과 동문수학 했으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송강은 그로부터 10년 동안 성산에서 글공부를 하였고,송강(松江)이라는 호(號)도 성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시내 죽계천의 다른 이름인 송강에서 딴 것이다. 일찍부터 청백하고 곧은 성품으로 <총마어사>라 불리워졌던 송강이 사헌부 지평에 올랐을 때, 명종의 사촌형인 경양군이 그의 처가의 재산을 약탈하고자 그의 처조카를 죽인 죄로 옥에 갇혀 있었다. 이에 명종은 송강에게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격이 결백하고 강직한 송강이 법을 고집하여 경양군 부자(父子)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옥사의 판결로 명종의 뜻을 거슬린 송강은 오랫동안 청선(淸選)이 막히었다가 31세 때 정랑. 직강을 거쳐 부승지에 올라 당시 격렬했던 당쟁 속에서 서인(西人)의 영수로 동인(東人)과 대결하며 예조와 형조의 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오르는 동안 파란만장한 벼슬길을 걸었다.
송강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종명(宗溟)은 인조때 강릉 부사를 지냈으며, 막내 홍명(弘溟)은 부제학과 수원 부사를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고, 종양의 아들 양(瀁)은 [어록해(語錄解)]를 간행했다.
영조때 영의정을 지내며 시문과 글씨로 명망을 떨쳤던 호(澔)는 노론의 선봉이 되어 격심한 당쟁 속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영조때 <형제정승>으로 유명했던 우량(羽良)과 휘량(絮良)이 명문의 전통을 이었고, 하연(夏彦)은 좌부승지와 병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어제(御製)의 편제와 홍화문(弘化門)의 편액을 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일정씨(迎日鄭氏)는 남한에 총 57,504가구, 237,2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