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몇 번쯤은 인생의 커다란 갈림길에 직면한다. 그 때 달(moon)을 쫓을 것인가, 펜스를 쫓을 것인가는 심히 고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존하는데 지장이 없다면 어느 누가 달을 마다할 것인가.
내가 윗 지방에 올라온 뒤 크게 달라진 것 중의 하나는 학회 참석을 자주 한다는 점이다.
어제는 내가 역점을 주는 ‘최소 침습 척추 학회’에 참석하였다. 적은 조직 손상으로 최상의 치료 결과를 만들자는 컨셉이다. 이번에는 병원장과 간호사들 4명이 동반하였다. 모두들 좋아하였다. 훌륭한 선생님들의 강의도 듣고, 커피도 마시도, 원장님이 사주시는 맛있는 점심도 먹고....
나는 첫 세션을 마친 후,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뇌출혈 환자의 응급 수술을 위해 급히 귀원하였다. 단체 카톡방에 저마다 좋았다고 소감을 올리길래 나도 한마디 했다.
“학교 다닐때 읽었던 《달과 6펜스》란 소설이 있었는데요...일만 하는 것은 6펜스를 위해 사는 것이고 이렇게 학회에 와서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은 달(moon)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ㅎ”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꽉 짜여진 의과대학 생활을 보내면서 졸업을 앞두고 지겨움이 극에 다했다. 함께 교제하며 지냈던 네비게이토 기독 학생반 동아리도 그렇고, 교회 청년부 모임도 그렇고 ‘자유로운 영혼’에게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때 여러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혼자서 탈출구를 찾던 중 모엄(Somerset Maugham)의 《달과 6펜스》를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은 안정된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러 떠난다. 중간에 등장하는 비윤리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작가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다시말해 달을 찾아, 인생의 행복을 찾아 떠나는 모습을 주인공 고갱의 삶을 모델로 엮어간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 ‘행복’이란 암시는 있어도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행복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비슷한 류(類)의 소설로서 《그리스인 조르바》도 마찬 가지다. 무엇에도 누구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삶, 달(moon)을 쫓도록 격려하지만, 일견 현실에 묶여서는 그것을 추구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그리스인 조르바》 서평을 쓰다가 행복을 찾아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일본으로 그림 공부를 하러 떠난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 이야기)
《신명기》는 인간이 누릴 행복의 길을,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일” 로 규정한다. 근대 지성계에서 지워진 하나님과 성경이란 이름을 근대 소설에 갖다대는 것이 어색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근저에 깔린 윤리성까지 무시해버리기에는 뭔가 께름직하다.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그리스인 조르바에게는 행복한 삶이 부각되는 만큼 인간이 지켜야할 윤리성은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DNA에 깔린 윤리성을 무시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과연 오래 행복할 수 있을까?
좀 심하게 지적하자면 두 책들에서 나타나는 바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 현실을 박차고 나와 비윤리적이 되어야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그것이 진실이라면 작가의 현실과 성경과의 괴리를 고민해볼 수 밖에 없는 결론이다. 더구나 현대는 각종 미디어에서 남이 원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삶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 그것이 진실이 되어가는 시대다.
내 경우는 이와는 좀 다르다. 결론적으로 말해 현실 속으로 더 파고든 것이다. 나 또한 안전과 안정이 보장되는 온실같은 환경에서 몇 푼어치 밖에 안되는 6펜스만을 위해 살다가, 어느 날 내가 정말로 이래도 되는가 의문이 들었을 때, 많은 고민 후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왔다. 그러나 그 자리는 현실 바깥이 아니라 더 엄혹한 현실 속으로였다.
선배 의사들을 비롯해서 여러 명이 같이 근무하는 도시의 병원에서 몇가지 작고 익숙한 수술만 하면 되는 안정된 환경으로부터 나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하는만 하는 시골 병원으로 옮긴 것이다. 나 혼자 이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움과 의심이 들었을 때, 결정적으로 내게 도움을 준 책은 투르니에(Paul Tournie)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었다. 그 책은 나의 내부의 두려움을 회피하지 말고 똑바로 응시하도록 도왔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위험 가득한 현실의 더 깊은 내부로 모험하도록 격려하였다.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와 같은 시골 병원으로 가서, 그곳에서 3년 반을 보내고 난 뒤, 나는 비로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기능하는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나의 역량이 커졌고 내가 치료할 수 있는 환자들의 폭이 넓어졌다. 그 당시의 선택은 정말로 옳은 결정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선택은 6펜스를 뒤로하고 달을 쫓은 것이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땅의 경계(地境)를 넓혀 주실 것이라 약속한다.(신 12: 20) 당시의 고대 사회는 축복의 형태가 지경을 넓히는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임에는 틀림없다.
오늘날의 지경은 역량(potential)으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외과 의사임에도 내가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이 적거나 별로 없어서 내게 도움을 요청한 환자들을 눈앞에서 보내고, 치료의 시기를 놓쳐서 mortality(사망)와 mobidity(병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보고서 과연 내가 행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모든 의사가 나 같아야하고 나와 동일한 생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오히려 가끔은 내 손으로 병을 더 악화시키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지독한 심적 고통을 겪고난 뒤, 다음 환자에게는 좀 더 안전하고 완전한 치료를 시행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나와 가족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안락한 현실을 박차고 현실로부터 먼 곳의 달을 좇는 것은 가족을 궁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모두의 생존을 위해 더 깊은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했고 그 속에 뜻밖에 달이 존재하였다. 그 달이란, 나의 역량(potential)이 넓어져 나를 찾아온 환자에게 좀 더 양질의 의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환자들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보고 나는 희열을 느낀다. 나의 행복이 거기에 있다.
근대(modernity)를 넘어 post modernism 시대에 오히려 하나님과 신앙을 말하는 것이 쉬울 수 있다. 다원주의 시대란 말 자체는 모든 신앙과 종교를 용납한다는 의미이기에 그렇다. 해서 나는 당당히 신명기의 길을 택하고 또 증언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따르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래 행복을 영위하게 하는 길이고, 그 길은 내게 특별히 나의 지경인, 역량이 넓어지게 하였음을 고백한다.
이제 반백(半百)의 나이를 넘어 나의 머리도 반백(半白)이 넘었으나 이 행복을 한번 경험한 자는 쉽게 포기하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다시 또 경험하고 더 경험하고 싶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주께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길 그래서 지금도 계속 기도하고 있다. 그 기도는 신명기가 말한 여호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 길을 갈수록 현실을 더 직시하도록 만들고 그 현실의 내부에 아직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달(moon)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지금도 나는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