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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창립 450주년을 경축하며 쓰는 <열 가지 특별한 이야기>
이 동 원
조선의 서원은 퇴계 선생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설립하였지만, 존현과 양사 두 가지 서원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게 만든 것은 후임 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에 의해서이다. 바로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 받아낸 거사이었다. 서원에 경전과 토지, 노비 등을 내려주면서 운영은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그야말로 역사에 전무후무한 서원이 만들어졌다. 퇴계 선생께서 요구한 그대로 되었다. 백운동서원이 1543년에 세워지고 1549년 사액서원이 되기까지 7년간 조선의 명망 있는 학자, 선비는 물론이고 서원을 세운 주세붕조차도 사액 서원이란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아! 이런 서원이 가능하구나! 사림 전체가 깜짝 놀랐다. 퇴계는 50세이던 이때를 기점으로 사림의 종사로 추앙받기 시작하였다.
사실 주세붕이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존재하던 서원을 조선에 처음으로 설립하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이나 사림에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비판만 잔뜩 받았다. 전국 고을에 향교가 이미 있는데 왜 서원을 세우며, 안향은 이미 국학에 모셔져 해마다 석채례를 거행하고 있는데 왜 안향을 위한 사당을 세우는가 하고 반대하였다. 또한 주세붕 같은 하급 관료가 서원을 세워서 무슨 권위가 있으며, 주세붕이 서원 창설의 공을 차지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방에서 주세붕의 서원 건립을 비판하였다.(소수서원지, 62쪽) 주세붕은 역사적 공적을 남기고도 칭찬은커녕 자신이 왜 서원을 세웠는지 설명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탓에 백운동서원이 세워진 1543년부터 소수서원으로 사액된 1549년까지 7년간 조선에서는 서원 설립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서원이 필요 없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후임 풍기군수로 부임한 같은 지방관인 퇴계가 서원의 필요성과 이 서원에 대한 국가 지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반대는커녕 명종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서원 이름을 직접 짓고 편액 글씨까지 직접 써서 전폭적인 지원까지 끼워서 내려주었다. 이른바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다. 명종과 조정에서 퇴계에 대한 당시의 인식과 평가가 어떠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스토리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해주의 문헌서원(1551), 함양의 남계서원(1552), 영천의 임고서원(1553)이 줄줄이 세워지면서 서원 창설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퇴계와 그 문인들은 이때부터 서원 설립을 주도하였다. 단기간에 수십 개의 서원이 곳곳에 설립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서원 설립 운동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렇게 세워진 서원은 과거 시험 양성소로 전락한 관학인 향교를 대신하여 학문 발전과 지역 사회 인재 양성, 그리고 지역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심에 도산서원이 있다.
올해(2025년)는 도산서원이 세워진 지 450년이 되는 해이다. 도산서원에서는 창건 450주년을 맞아 2025년 9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경상북도, 안동시 등 지자체와 관계기관과 함께 기념 학술 발표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였다. 공무원이 상주하는 관리사무소가 있는 서원, 입장료가 있는 서원, 연중 이십오만여 명이 다녀간다는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가? 다른 서원과 다른 특별한 점이 무엇인가? 아래에서 열 가지 스토리로 알아보고자 한다.
1. 제향 인물 사망 후 가장 빨리 세워지고, 가장 빨리 사액 된 서원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서세 후 4년이 지난 1574년 갑술년 봄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1571년 선생의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온 고을의 제자들과 유림이 모여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서원 설립이었다. 이미 영주 이산서원에서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사액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안과 안동 지역의 유림과 문인들은 ‘이곳 도산은 선생이 도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1572년에 상덕사에 위패를 봉안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준비 과정을 거쳐 2년 뒤인 1574년 봄에 도산서당 뒤쪽 산자락 땅을 일구어 서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한 해 공사 끝에 1575년 여름에 서원을 낙성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원 낙성과 동시에 곧바로 도산서원으로 사액하였다. 비록 퇴계 선생을 모시는 1호 서원 자격은 영주 이산서원에 빼앗겼으나, 서원이 설립과 동시에 사액을 받은 것으로는 도산서원이 거의 유일한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사천리였다. 옥산서원(회재)은 1년 후, 남계서원(일두)은 5년 후, 덕천서원(남명)은 33년 후, 자운서원(율곡)은 35년 뒤, 필암서원(하서)은 69년 후, 역동서원(우탁)은 113년 후, 그리고 병산서원(서애)은 무려 250년 후에 사액 받았다. 이렇듯 보통 서원이 세워지고 빠르면 1년, 길면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이 지난 후 사액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도산서원은 여름에 낙성되고 여름에 곧바로 사액을 받았으니, 당시 임금과 조정 대신, 그리고 사림에서 퇴계에 대한 존숭의 정도와 도산서원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2.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께서 생활하던 그 자리에 세워진 서원이다.
서원이 한창 많을 때인 숙종, 영조 시대에는 전국에 천 개 전후의 서원이 세워졌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고을과 문중마다 서로 경쟁적으로 세웠기 때문이었다. 조상 자랑도 해야 하고, 타 문중이나 다른 고을에 기죽지 않으려면 서원 하나는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이었다. 얼마나 중구난방처럼 난립하였으면 영조가 수백 개 서원을 훼철하였을까. 그런데 이 많은 서원에서 모시는 제향 인물이 살아 있을 때, 서원이 세워진 그 장소와는 인연이 거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그 근처에 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도산서원은 선생께서 생활하시던 공간에 세워졌다. 도산서당, 농운정사, 천연대, 천운대 등에서 생애 마지막 10년간 학문과 집필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시를 읊고 사색과 명상을 하며 산수소요 하시던 그 자리에 세워진 서원이다. 이런 점에서 도산서원은 또 특별한 서원이다. 비슷한 서원이 겨우 하나 보인다. 퇴계 제자이었던 영천의 지산 조호익을 모신 도잠서원이 있다. 지산은 17세에 퇴계 선생께 집지한 제자로 ‘퇴문십철’에 속하는 수제자이다. 평안도 강동에서 17년간 유배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도잠서당을 세우고 후학을 길렀으며, 사후 그 자리에 세워진 서원이 도잠서원이다.
3. 도산서원 편액 글씨는 한호가 어전에서 직접 썼다.
‘도산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을 하사한 선조는 조선 최고 명필가인 한석봉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영문도 모르고 대전에 불려 가 임금 앞에 엎드린 석봉에게 선조는 지필묵을 내어주고는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라고 명하였다. 임금은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신하에게 시키지도 않고 직접 한 글자씩 불렀다. ‘집 원(院)‘ 자를 쓰라 하니 석봉이 받아 썼다. 이어서 차례로, ’글서(書)‘, ’뫼산(山)‘을 쓰게 하였다. 이때까지도 석봉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하다. 임금이 마지막 글자 ’질그릇 도(陶)‘자를 부르자 석봉은 그만 얼어붙었다. ’아! 퇴계 선생의 서원 편액 글씨가 아닌가‘ 조선 최고의 명필가 석봉이지만,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석봉은 퇴계 문인이었다. 존숭하는 스승을 모시는 서원 현판 글씨를 그것도 어전에서 받아 쓰니 감격하고 황공하여 손이 떨렸다고 한다. 그래서 일설에는 ’도(陶)‘ 자 글씨가 내려오는 획이 곧지 못하고 굽어 있고 떨린 흔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석봉이 글씨 배운 보람을 느꼈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조정에서는 서원에 사액을 내리면서, 때로는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직접 써 보내기도 하였다. 소수서원은 명종 어필이며, 필암서원은 현종의 친필이며, 율곡을 모신 자운서원은 효종이 직접 썼다. 도산서원을 사액하면서 선조는 아마도 자신은 아직 어린 나이여서 대현의 서원 편액을 직접 쓰지 않은 듯하다. 대신에 조선 최고 명필가를 어전에 불러 직접 글자를 한자 한자 불러주고 쓰게 하였다. 이렇게 임금이 직접 서원 이름을 읽어주고 신하가 받아 쓰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다른 서원에 있는지 들어보지 못하였다. 도산서원만의 스토리이다. 도산서원을 방문할 때, 한번 확인해 본다면 서원 탐방의 재미가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원 현판 왼쪽 끝에 ‘만력삼년유월일선사(萬曆三年六月 日宣賜)’라고 작은 글씨로 이 현판 글씨를 쓴 날짜를 기록해 두고 있다. 만력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의 연호(1573~1619)이다. 만력 3년(조선 선조 8년)은 1575년을 가리키며, 유월 어느 날 선사(宣賜, 임금이 사액하다)하여 썼음을 밝히고 있다. 서원 현판 원본은 당연히 보물이다. 때문에,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모각한 것이다.
4. 도산서원은 450년간 같은 이름, 같은 장소에만 있어 온 서원이다.
도산서원은 처음 사액 받았던 ‘도산서원’ 이름과 세운 장소가 450년간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는 서원이다. 사람도 개명하고, 집도 옮기는 경우처럼, 수많은 서원들이 처음 지었던 이름과 세운 장소를 이런저런 사정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최초 서원인 영주의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개명하였고, 달성 도동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건, 이건 되면서 이름도 쌍계서원에서 보로동서원으로 하였다가 다시 도동서원으로 바뀌었다. 함양의 남계서원은 1566년에 사액 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다른 곳에 지어졌다가 다시 현재 위치에 옮겨 중건되었다. 또한, 장성 필암서원은 1590년에 하서 김인후의 고향인 장성 기산리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건축되었다가 1627년 현재 자리로 이건하였다. 그리고 정읍의 무성서원(고운)은 1615년 처음 지을 때 이름은 태산서원이었다. 이렇듯 많은 서원들이 이름과 건물이 바뀌는가 하면, 처음 세웠던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세운 곳이 많았다. 그러나 도산서원은 창립 후 450년간 같은 이름으로 같은 장소에 서 있다. 화재도 없었고, 훼철도 없었다. 천년 고목에서 신기가 풍기듯 450년간 동명동처(同名同處)를 지킨 도산서원에서는 선생의 신령함이 느껴진다. 경주 옥산서원도 건립 후 서원 이름, 서원 장소가 단 한 차례도 변경됨이 없이 현재 위치를 지키고 있다.
5. 도산서원은 창건 후 450년간 향사와 향알을 빠진 적이 없는 서원이다.
모든 서원의 목적은 선현의 가르침을 통한 인재(선비) 양성에 있다. 이를 위한 주된 기능이 존현(선현 존숭)과 양사(선비 양성)이다. 존현을 위한 주요 방법 중, 하나가 사당에 올리는 제사이다. 그러나 서원 설립 초기에는 이 의례를 서원마다 잘 지켜나갔지만, 세월이 흐르고 사회 문화와 의식이 변하면서 서원 향사 의례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도산서원은 450년간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거행되고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상덕사 묘우에서 제사를 올리는 춘향(春享)과 추향(秋享), 해마다 정월 초닷새 날 사당에 세배드리는 정알(正謁) 의례를 지금까지 거행해 오고 있다. 특히 놀라운 점은 서원의 유사들이 일 년 열두 달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서원에 모여 저녁에 유학 공부를 하고, 이튿날 새벽에 사당에 분향하고 퇴계 선생께 인사를 올리는 향알(香謁) 의례를 거행하고 있다. 45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행되는 놀라운 사건이다. 임진왜란 때조차도 위패를 모시고 영주로 피란 가서 향알을 올렸다고 서원 유사가 말해주었다. 최근에는 서원의 향알 의례에 일반 대중이 참가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금년에는 1회 15명씩 5회를 하였는데, 내년(2026년)에는 1회에 10명씩 10회 계획하고 있다. 남녀노소 구분 없으며, 여성 참여가 더 많다고 한다. 퇴계 선생을 추모하고, 존숭하는 열의는 450년 이어져 왔고, 다시 450년 이어져 갈 것이다. 훌륭하신 선현 아래 훌륭한 후학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사례가 도산서원 외에 또 어느 서원에 있는지 모르겠다.
6. 도산서원에서는 양사 기능이 부활하여 활발히 숨 쉬고 있다.
존현과 양사 두 기능 가운데, 양사(선비 양성) 기능이 근세에 들어와 급격히 무너졌다. 대부분 서원에는 잡초와 먼지가 가득 쌓인 채 빈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는가 하면 서원 출입문은 무거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일반인이 드나들 수 없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도산서원에서는 향알과 기타 의례를 통하여 유생들의 공부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퇴계 선생 탄신 오백 년이 되는 2001년에 고이근필 퇴계 16대 종손의 주도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설립되고, ‘덕이 있는 곳에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고 했던가, 김병일 장관이 동참하면서 수련원은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하던 선비 양성을 25년째 해오고 있다. 고인이 되신 종손은 어떻게 글로벌 시대에 모두가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는 선비정신을 체험하는 수련원을 세울 생각을 하였을까? 터도 망도 없는 산간벽지 골짜기 마을에서 건물도, 예산도, 인력도 전무한 열악한 상태임에도 그것도 자비(自費)로 시작하는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모두가 안 된다고 반대하고, 만류하던 선비 양성 수련원 설립! 퇴계 종손이기에 할 수 있었고, 도산서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이 수련원의 화려한 성공을 바라본 다른 여러 곳, 이를테면 영주 소수서원, 영천 임고서원을 비롯하여 많은 서원에서도 선비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니, 한 선각자의 작은 시작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고 있는가. 도산서원이 왜 창건부터 지금까지 전국 서원의 수(首) 서원인지를 웅변해 주는 사례이다.
7. 도산서원에는 퇴계 선생의 친필 글씨로 만든 편액이 있다.
도산서원에는 퇴계 선생께서 직접 쓴 글씨로 만든 편액이 있다. 아주 큰 글씨를 직접 써서 만든 편액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세워진 서원인데 어떻게 선생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는가? 이 편액은 무엇인가? 도산서원을 방문할 때, 가족이나 동료들과 이 문제를 찾아서 대화를 해본다면, 서원 탐방의 맛을 더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퇴계 선생의 친필 글씨가 남아 있는 편액은 바로 ‘광명실(光明室)‘이다. 그런데 광명실이 진도문 동쪽과 서쪽에 두 개가 쌍둥이처럼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어느 것인가? 두 개 모두 선생의 글씨이지만, 하나는 친필이고 하나는 모각한 것이다. 광명실은 도산서원의 서고이다. 도산서원을 처음 창건할 때는 서고가 따로 없었다. 역대 왕이 서원에 내려보낸 내사서적과 선생께서 직접 쓰신 책인 수필본, 그리고 퇴계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 등 국보급 서적을 한존재 벽장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1819년에 진도문 동쪽에 광명실(동광명실)을 지어서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현판은 역동서원 광명실 현판을 모각하여 세웠다. 그 후, 도산서원에 들어오는 제자, 문중, 유림 등에서 발간한 일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1930년에 추가로 지은 건물이 서광명실이다. 그런데 이 서쪽 광명실 편액 글씨가 바로 퇴계 선생 친필이다. 사연은 아래와 같다.
안동의 최초 서원이 역동서원이다. 역동 우탁을 모시는 이 서원은 퇴계 선생께서 주도하여 1570년에 완공하였으며, 서원의 모든 건물의 편액 글씨를 선생께서 직접 써서 새겨 걸었다. 역동서원 서고 이름을 광명실로 짓고 이 또한 직접 써서 편액을 걸었다. 그런데, 대원군 때, 역동서원이 훼철되면서 역동서원에 있던 모든 서책과 편액들을 도산서원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1930년 서쪽에 광명실을 하나 더 지으면서 역동서원에서 옮겨다 보관하고 있던 ’광명실‘ 현판을 그대로 걸었다. 도산서원 여러 부속 건물 가운데 가장 뒤늦게 세워진 막내 건물인 서쪽 광명실이 355년 전에 퇴계 선생께서 직접 쓰신 글씨 현판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한편,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에는 모두 합하여 1,271종 4,917권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전국 서원 가운데에서 국보급의 장서와 고서 진본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8. 도산서원에는 원장실이 두 곳 있다.
도산서원은 정면 네 칸 건물이다. 강당에는 서쪽에 방이 하나 있다. 대부분 서원에서는 정면을 다섯 칸으로 하고 방을 동쪽, 서쪽에 각각 하나씩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덕천서원(남명), 병산서원(서애)이 그러하다. 두 개의 방을 만들어 동쪽 방을 서원 원장 방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서원의 원장실은 하나 뿐이다. 그런데 도산서원에는 서쪽에 방이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방이 현재 원장실이다. 그러나 도산서원에는 원장실이 두 개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장실과 보이는 원장실이다. 보이는 원장실이 전교당 서쪽 방으로 이름이 한존재이다. 보통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방을 만들어 동쪽 방을 서원 원장 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도산서원 전교당에는 서쪽에 하나밖에 없다. 왜 서원의 최고 어른인 원장의 방을 동쪽에 만들지 않고 격이 낮은 서쪽에 만들었는가? 이것이 도산서원이 특별한 이유이다. 이는 전교당 동쪽 바로 뒤편에 상덕사 묘우에 계시는 퇴계 선생께서 영원한 도산서원 원장이라는 의미 때문에 방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쪽에 방을 만들어 거처하게 되면 바로 뒤편 사당에 계시는 퇴계 선생 앞에서 후학이 잠을 자게 되는 무례함을 범하기에 이를 피하고자 동쪽 방을 만들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도산서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장실과 보이는 원장실 두 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9. 상덕사에는 중문으로 들어가고 동문으로 나와야 한다.
상덕사는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도산서원의 묘우(廟宇)이다. 상덕(尙德)이란 ‘덕을 받들어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로 퇴계 선생께서 남기신 학문과 덕행을 받들고 따르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담겨있다. 전교당 뒤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앞에는 학문하는 강당을 두고 뒤에는 퇴계 선생을 모시고 있는 전학후묘 형태이다. 이러한 배치는 뒤편 상덕사에 선생께서 계시기에 앞의 전교당에서 공부하는 후학들이 항상 근신하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구조이다. 상덕사 내부 한 가운데에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위패에는 높은 벼슬 명을 쓰지 않고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이라는 단지 다섯 자만 썼다. 이는 퇴계 선생께서 평생 실천하신 겸손과 낮춤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이 또한 다른 서원과는 차별되는 모습이다. 또한 15세부터 퇴계의 제자가 되어 가까이서 가장 오랫동안 모셨던 제자 월천의 위패도 동쪽에 모셔져 있다. 상덕사 묘우에 들어갈 때는 다른 서원과는 달리 가운데 문(중문)으로 들어가서 동쪽 문(동문)으로 나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퇴계 선생 위패가 중앙에 계시고, 제자 월천 조목이 동쪽에 있는 까닭에 만약 동쪽 문으로 들어가면 선생보다 제자를 먼저 뵙게 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10. 도산서원에서 서원 최초의 과거 시험을 실시하였다.
정조 16년인 1792년에 임금은 도산서원에서 과거 시험을 치게 하였다. 퇴계 선생 서세 222년 후이다. 이 시험이 도산별과 혹은 도산별시이다. 조선 시대 대궐 밖에서 과거를 본 사례는 이미 그 앞에 더러 있었지만, 서원에서 친 것은 도산서원이 최초이다. 평소 퇴계 선생을 크게 숭모 해오던 정조의 결단이었다. 시험 날짜는 3월 25일이었다. 본래 서원 진도문 안쪽 뜰에서 시험을 볼 계획이었으나, 예상외로 응시자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서원 앞 강 건너 동서로 길게 뻗은 솔밭에서 시험을 보았다. 이날 과장에 입장한 응시자는 7,228명이었으며, 제출된 시권(답안지)은 3,632장이었다. 그러나 이날 실제로 도산서원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일만 명을 넘었다. 경상좌도 선비들을 위한 별시이었으나, 경상우도에서도 참여한 유생이 많았으며, 그동안 나이가 많아서 혹은 형편이 안 되어 한양까지 올라가는 과거 시험을 포기했던 사람들, 그리고 경험 삼아 과거 시험 한 번 응시해 보고 싶은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과장에서는 모두가 질서정연하였고, 서로 양보하고, 정숙하였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정조는 매우 흡족해하며 영남 선비와 유생들을 칭찬하고 퇴계에 대한 추모가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응시생들의 답안지는 대궐로 실려 갔고, 정조 임금이 직접 점수를 매겼으며, 장원급제 2명을 뽑고 기타 합격자에게 각기 상을 내렸다. 정조는 도산별과의 전 과정을 기록하여 교남빈흥록이란 책으로 남겼다. 빈흥이란 중국 고대 주나라에서 인재 선발을 뜻하는 용어이므로 곧 과거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다시 4년 뒤, 1976년 조정에서는 도산별과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시험 장소였던 도산서원 앞 낙동강 건너 송림 사이에 시사단을 만들고 당시 영의정이던 채제공이 비문을 지어서 세웠다. 1975년 안동댐 조성으로 시사단이 물에 잠기게 되자 그 자리를 흙으로 약 10m 높여서 현재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안동호가 만수가 될 때, 시사단 상층부만 호수 가운데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경관이다. 도산별과 과거 시험은 오늘날에도 안동시와 도산서원에 의해 매년 5월에 도산서원 앞 광장에서 옛 상황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도산서원이 특별한 서원임을 열 번째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 이 글은 ‘진성이씨대구화수회보’(2025. 12. 31.)에 실렸던 글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