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조시마 장로는 왜 드미트리에게 절을 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통해서 물질과 정욕에 휘둘리고 있는 인간의 죄악을 고발하며 인간사가 죄악사라는 것을 고발하고 싶었을까?
이반의 <대심문관>을 통해서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옷 입고 군림하는 교황제도와 중세 가톨릭 교회를 신의 이름을 사칭한 무신론 집단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를 통해서 죄악과 빈곤으로 문드러진 인간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며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제시하는 것일까?
르네상스를 거쳐 산업혁명 이후 지하에서 올라온 무신론, 사회주의 사조에 휩쓸리고 있는 귀족들의 장원과 노예의 잠자리, 공장과 빈민굴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시대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자 하였을까?
그리고 과연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가 살아 있으면 직접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나 그러지 못하니 우리 독자들은 저마다 깊이 생각하며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메시지를 찾아내야 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저자의 메시지라고 생각할만한 감동적인 명문과 장면들이 많은데 나는 조시마 장로가 아버지 표도르와 큰 아들 드미트리가 그의 면전에서 악담을 하며 소동을 부릴 때 소리 없이 일어나 드미트리 앞에서 이마가 땅에 닿도록 큰 절을 바친 장면에서 작가의 희망을 본다.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모임은 갑작스런 것이었다. 재산 분배 문제를 둘러싼 큰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과 충돌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 아버지가 농담 삼아 조시마 장로 암자에서 다 함께 모이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 빌미가 되었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가 가족들에 의해 모욕을 당할까 내심 걱정을 하였다.
다음은 김연경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펴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대로 옮겨 적는다.
“저런 인간은 도대체 왜 살까!” 드미트리 표도르비치는 이미 거의 미칠 듯이 화가 나서 밑도 끝도 없이 으르렁거렸는데, 어째 어깨를 지나치게 추켜올린 나머지 곱사등처럼 보였다. “아니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도 저 사람이 대지를 더럽히게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한 손으로 노인을 가리키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말투는 느리고 찬찬했다.
“들리십니까, 예, 수도사님들, 들리시냐고요, 제 아비를 죽일 놈의 말을.”표도르 파블로비치는 이오시프 신부에게로 달려들었다. “자, 바로 이것이 신부님의 ‘수치스럽군’에 대한 답입니다! 뭐가 수치스럽단 말입니까? 이 ‘잡년’, 행실이 고약한 여자‘는 어쩌면 당신들보다 훨씬 더 성스럽습니다, 도를 닦고 있는 수도사 여러분! 어쩌면 어린 시절엔 환경에 짓눌려 타락했을 수도 있지만 ’사랑을 많이‘ 했고, 사랑을 많이 한 자는 그리스도도 용서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해 주신 건 그런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
온화한 이오시프 신부도 더 이상 참질 못하고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니올시다. 수도사님들, 바로 그런 사랑 때문에 용서한 겁니다! 수도사님들! 여기서 양배추나 먹으며 도를 닦는 주제에 의인들이라고 생각하시죠! 꼬치고기를, 매일 꼬치고기를 한 마리씩 드시면서 그 꼬치고기로 하느님을 살 수 있다고 생각들 하시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어!” 암자의 여기저기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추태에 까지 이른 이 장면은 가장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중단되었다. 갑자기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장로와 다른 모든 이들이 걱정되어 완전히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지만 알료샤는 그래도 제 때에 그의 팔을 부축할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완전히 그의 앞에 다다르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료샤는 잠시, 그가 힘이 빠져 쓰러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장로는 무릎을 꿇더니드미트리 표도르비치의 발을 향해, 심지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완전히, 또렷하고도 의식적으로 절을 한 것이었다. 알료샤가 너무 놀란 나머지, 장로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미처 그를 부축할 정신도 없었다. 희미한 미소가 그의 입술 주위로 아주 약간 빛나고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다들 용서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손님들 모두에게 절을 하면서 말했다.
드미트리 표도르비치는 몇 분간 충격을 받은 채로 서 있었다. 그의 발을 향해 절을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마침내 그는 갑자기 “오 맙소사!”라고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방에서 멀리 뛰어나가 버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 164쪽, 165쪽(민음사)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초반부에 나오는 이 장면에 전율하였다.
왜 조시마 장로가 드미트리에게 절을 했을까?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나의 질문이자 묵상이었다. 성자로 알려진 조시마 장로가 한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함께 다툼을 벌이며 재산 싸움을 하고 있는 탕아를 알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를 속세로 보내면서 큰 형 드미트리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다음은 드미트리에 대한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의 대화다.
“그만 일어나라, 얘야,” 장로가 알료샤에게 계속했다. “너를 한 번 더 보자꾸나. 집에 갔더냐, 형님을 보았느냐?”
알료샤는 그가 이토록 집요하게, 또 정확히 두 명 중 오직 한 명의 형에 대해서만 물어보는 것이 이상했는데 – 하지만 대체 어느 형을 묻는 것일까? 어쨌거나 바로 이 형을 위해서 어제도 오늘도 자기를 당신 곁에서 떠나보낸 것이었을 터이다.
“한 명의 형은 보았습니다.”알료샤가 대답했다.
“어제 내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던 그 사람, 큰 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형은 어제는 보았지만, 오늘은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알료사가 말했다.
“서둘러 찾아라, 내일도 다시 가서 서둘러라, 만사 제쳐 두고 서둘러야 된다. 아직은 뭐든 끔찍한 일을 막을 수 있을 게야. 나는 어제 그가 겪게 될 미래의 위대한 고통 앞에 절을 한 것이란다.”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이상한 말이었다. 어제 장로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광경을 지켜봤던 이오시프 신부가 파이시 신부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알료샤는 참을 수 없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 16쪽, 17쪽(민음사)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에게 자기가 드미트리에게 절을 한 것은 ‘그가 겪게 될 미래의 위대한 고통’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시마 장로는 그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연민, 경외감으로 그 앞에 엎드렸다. 그는 자기 앞에서 격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모독하는 불한당 같은 청년 드미트리의 순수와 정직을 읽었다. 마음의 생각을 적당히 숨길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부친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탕아로 알려진 그의 생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떠나지 못하는 그의 숨겨진 깊은 신심에서 러시아의 희망을 보았다.
드미트리는 혼란에 빠진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골수까지 악하고 부패한 표도르 파블로비치도 아니고 냉정한 무신론자 이반도 아니고 처음부터 박애주의자인 조시마 장로도, 알료사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바르지만 부패한 상황 속에서 함께 부패하며 방탕하다가 끝내는 참회하고 돌아서서 더 위대한 러시아의 아들이 될 사람이다. 그는 뜨겁고 순수한 피를 가졌으나 다혈질이고 선량하나 동정심으로 음모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영원히 악에 빠질 수 없는 양심과 신심이 핏속에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조시마 장로는 돼지에게 짓밟힌 보석 같은 청년이 장차에 당할 억울한 그러나 운명적으로 겪게 될 고통을 아파하며 큰 절로 그에게 공감하며 격려•편달하고자 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방탕한 중에도 선을 베풀 줄 알고 선을 베풀고도 그 열매를 탐하지 않고 자기감정을 기만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청년을 그는 새로운 러시아, 거듭난 러시아의 희망으로 제시하였다.
도스토옙스키가 초반부에 도입한 조시마 장로의 큰 절은 한 여인이 옥합을 깨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준 것만큼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조시마 장로처럼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절을 바치고 싶다.
2023.1.27일 밤 10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