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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다. 그늘이 간절해지는 절기다. 그늘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나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느티나무다. 위로 치솟아 자라기보다는 옆으로 넓게 가지를 펼치는데다가 잎 또한 무성하다.
느티나무 하면 쉴 휴(休)자가 저절로 연상된다. 사람[人]이 나무[木]그늘 아래서 쉰다는 의미의 뜻글자. 햇살이 쨍쨍한 여름날, 사람이 쉴 만한 정자목(亭子木)으로 느티나무만한 게 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한다. 오래 된 마을에 꼭 거목으로 자란 느티나무가 하나 정도씩은 늠름하게 버티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느티나무의 차양 효과에 버금가는 나무들도 많다. 전통적으로는 팽나무나 갈참나무가 그러하고, 외래종으로 따지자면 근대에 들어온 칠엽수(七葉樹)가 으뜸이다. 칠엽수는 이른 오월부터 크고 널찍한 잎들을 달기 시작하여 이내 큰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고마운 나무다.
칠엽수는 은행나무, 플라타너스, 백합목(튤립나무) 등과 함께 세계 4대 가로수로 꼽힐 만큼 인기가 있다. 최근에는 칠엽수와 더불어 마로니에도 우리나라에서 가로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마을 거리나 공원에도 가시칠엽수라는 우리말 이름을 가진 마로니에와 칠엽수가 넘쳐난다.
칠엽수라는 이름은 일곱[七] 장의 잎[葉]이 달린 손바닥 모양의 잎자루를 가진 나무[樹]라는 뜻이다. 딱 7장만 달리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감에도 5∼9장으로 표기 되어 있는 만큼 제 각각이다. 그 중에 7장짜리가 가장 많아서 칠엽수라는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칠엽수는 일본이 원산이다.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전신) 본부와 문리대 교정에 칠엽수 몇 그루를 들여다가 심은 것이 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바로 그 나무다. 다만 그 나무가 실제로는 마로니에가 아니라 일본칠엽수(이하 칠엽수라 함)란다.
마로니에는 칠엽수와는 달리 유럽이 원산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가로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한때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근거지였던 파리 몽마르트거리 가로수도 마로니에였다. 프랑스 시절, 반 고흐도 꽃이 활짝 핀 마로니에를 그렸다. 고흐가 아몬드나무 꽃만 그린 게 아니다.
진짜 유럽산 마로니에는 칠엽수보다 먼저 우리 땅에 들어왔다. 조선말기인 1913년, 고종의 회갑을 기념하여 네덜란드 공사가 선물하여 덕수궁에다가 심었다. 지금도 그 자리인 석조전 뒤편에서 잘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칠엽수와 마로니에는 전혀 다른 나무인가? 서로 먼 나라에서 성장해왔지만 생김새는 매우 흡사하다. 육안으로 두 종을 구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둘 다 5월경에 원뿔 모양의 꽃차례를 갖추는데, 꽃대 한 개에 100개 이상의 작은 꽃들이 모여 핀다. 칠엽수의 꽃잎은 우윳빛인 반면 마로니에 꽃잎은 짙은 분홍색이라는 점이 다르다.
또 탁구공보다 작고 동그란 칠엽수 열매와는 달리, 마로니에 열매 껍질에는 돌기가 가시처럼 발달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마로니에가 가시칠엽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껍질을 벗기면 둘 다 밤[栗]과 흡사한 열매가 나온다. 색깔과 모양이 밤과 매우 닮았다.
가시칠엽수의 프랑스어 마로니에의 어원 ‘marron’의 뜻이 바로 밤이다. 그러나 밤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먹었다가는 탈난다. 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식용 가능한 녹말을 얻을 수 있다.
아무튼, 서울 동숭동의 그 나무는 마로니에가 아니라 일본칠엽수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제 ‘마로니에공원’ 이름을 ‘칠엽수공원’으로 바꾸는 것이 옳을까? 실제로 그렇게 하자는 여론도 있다. 허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이 복잡다난한 세상에 이런 것 때문에 감정과 이성을 낭비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칠엽수와 마로니에(가시칠엽수)의 모습과 성장조건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즉, 내가 아는 충청도 서천 어느 마을 담뱃가게 주인아저씨(지금은 아흔이 훨씬 넘었거나 혹은 가셨거나)도 이렇게 타박할지도 모른다.
“허이구 말이 생니지. 같은 옥시기 한 자루에도 워디 똑같이 생긴 알개이가 있등가? 칠엽수가 워쩌고 마러… 뭐여? 이름 외기도 숨 차 죽겄는디, 아무리 봐도 똑 겉은 거루다가 헐일 없어 나누고 자빠졌디야!”
칠엽수와 마로니에, 어쩌면 둘 중 하나는 ‘도플갱어(doppelganger)’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도플갱어, 이젠 그저 ‘외모가 어느 특정인과 매우 유사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하찮게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도플갱어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대신, 마로니에와 칠엽수를 빙자하여 ‘야누스(Janus)’를 걸고 넘어가려 한다.
도플갱어는 닮았으나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야누스는 동일한 사람으로서 두 개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야누스는 한쪽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으면서, 다른 쪽 얼굴로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이중성이나 표리부동함을 인용할 때 우리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는 관용어를 쓴다.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상기하면 이해가 쉽다. 평소에는 지킬박사로서 후덕하고 온화하다가, 분노하면 괴물 하이드로 변해 갖은 악행을 저지르는….
하지만 이 은유는 옳지 않다. ‘야누스의 얼굴’이 변질되어 인간의 이중성과 동일시된 이유가 있다. 크게 보면 두 사람 탓이다. 첫째는 영국의 철학자 앤서니 애슐리 쿠퍼(Anthony Ashley Cooper)라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쪽 얼굴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쪽으로는 분노를 표출하는 작가들의 이런 야누스의 얼굴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다.”고 했다.
두 번째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뒤베르제(Duverger, M.)이다. 그는 투쟁과 질서라는 정치의 두 가지 양상을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다고 했다. 결국 ‘야누스 변질’이라는 수레를 쿠퍼가 끌고 뒤베르제가 밀면서 오늘날의 ‘야누스의 얼굴’이 탄생한 셈이다. 나머지는 두 사람의 말을 철떡 같이 믿고 따른 철없는 대중들이다.
아무튼, 그리스로마신화 그 중에서도 로마신화에만 나오는 야누스는 그런 신이 아니다. 정면과 뒤통수에 각각 얼굴을 가진 신으로서,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있는 신이자 안과 밖의 경계인 출입구 또는 문(門)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인들은 새해가 되면 야누스신전에 안녕을 기원하며 제물을 올렸다. 또, 새해의 첫 달을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여기어 ‘야누스(Janus-영어식 표현)의 달’이라며 특별한 의미를 두었다. 훗날 로마어 야누리우스(Ianuarius)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January(1월)가 이에 해당한다.
야누스는 로마인들은 수호신이기도 했다. 적이 침략할 때마다 신전의 문을 열고 나타나서 물리치곤 했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야누스신전의 문이 열리는 것을 지극히 경계했다. 왜일까? 역설적인 이유에서다. 신전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적의 침입이 없으며 평화롭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야누스가 정면으로 미래를, 뒤통수로 과거를 보고 있다는 메타포는 고대로마에만 국한된 가치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미래를 지향하면서도 불편하다 하여 과거를 훼손하거나 없던 것으로 해서는 발전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에 대한 고찰은 반성과 개조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적인 불평등과 차별,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환경오염과 이상기후 현상 등등의 문제는 미래만 지향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다. 야누스처럼 앞으로는 미래를 바라보되, 과거를 고찰하는 문명사적 통찰력을 갖추어야만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
첫댓글 표의글이ㅡ올라왔구나! 잘 읽고 나간다.
Thank you!
표 형님 글은 매번 정독하게 되지만
그 내용이 알차고 유익하면서도 참 가치가 있는 글이란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